2005년 10월 21일 So1배 스타리그 A조 테란 임요환 대 프로토스 박지호 경기
프롤로그 가장 훌륭했던 스타리그 에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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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트 815,.. "근성“
2세트 네오포르테... “해법”
3세트 라이드오브발키리 “무리수”
4세트 알포인트 “타이밍”
5세트 다시 815 “무아지경”
3세트 라이드오브발키리 “무리수”
임요환 테란 7시 VS 박지호 프로토스 4시
임요환 승
엄재경 “아비터랑 같이 갔으면 압승을 할 수 있었는데, 왜 불리한 지형에서 승부를 했죠?”
스타크래프트에도 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마 바둑에서의 알파고와 비슷할 것이다. 상대방을 압도하든, 간발의 차이로 이기든 같은 1승이다. 즉, 감정없이 계산뿐인 승부기계는 반격의 여지를 남기면서까지 상대방을 극한으로 밀어붙일 이유가 없다. 미세한 우위라도 한 번 차지한 뒤로는 실수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좌절시킬 것이다. 완벽하다는 것은 압도적인 격차를 낸다는 것이 아니라, 격차를 좁혀주지 않도록 철저하게 정수만 밟는 철두철미다. 이때 아무런 감정도 분노도 없는 신을 꾀어낼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신은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에 한없이 무심하다. 내가 할 것만 제대로 하면 이긴다는 철저한 자기 확신으로 무장한 채 그저 나가야 할 타이밍을 재고 있으리라. 격차에 대한 확신이 서면 기세좋게 밀고 나온다. 이를 당해낼 자는 없다. 관건은 두 가지다. 최적화의 공식을 따르되 절대 실수하지 않는 것.
임요환의 초반 센터 투 배럭은 승부수였다. 상대가 기습 플레이까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고 예단했지만, 박지호의 짐작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박지호가 경기 전 3:0 승리를 예상했다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임요환의 심리까지도 꿰뚫고 있었다. 초반 전략이 간파당하자, 임요환은 부랴부랴 문을 걸어잠근다. 이후 임요환이 게임 내내 한 건 단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실수하지 않는 것. 반대로 박지호는 한 번 벌어놓은 격차를 지켜내지 못했다. 임요환이 신이 적어준 공식을 따를 때, 박지호는 충동에 이끌리는 인간의 길을 간다.
그때 박지호의 머릿속을 지배한 이미지는 결승전 무대였다. 그동안 자신의 선택에 좌절하며, 염려를 놓지 못하던 어머니를 결승 무대에 초대하겠다는 마음이 이어서 스쳤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판세에 대한 판단도 희뿌옇게 흐려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박지호는 지금 임요환 외에도 또 다른 상대와도 싸워야 한다. 바로 자신의 과거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그리고 죄책감을 씻어내야 한다는 마음 한켠의 부채의식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그를 휘감는다. 스타일리스트들이 흔히 무리수를 두는 것은 이런 순간이다. 판세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본능적인 감각에 붙들리는 때다. 공격에 고삐를 쥔 박지호의 호흡은 더 가팔라진다. 칼은 상대를 제대로 겨냥하지 못한 채 한없이 거칠다. 상처를 입는 것은 오히려 그 자신이다.
초반수가 먹히지 않았음에도 임요환은 금세 차분해졌다. 박지호가 달라져서다. 지금 박지호는 때를 알고 물러서며 배를 불릴 줄 알던 이전 게임의 절대강자가 아니다. 프로토스 병력은 지금 다급하게 온몸으로 가시밭으로 들어오다가 상하고 깨졌다. 아하, 지금 상대는 게임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구나. 그토록 조급하구나. 과연 임요환은 눈치의 달인이다. 부러 승부의 결단을 미루고, 속도를 늦춘다.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공식화된 수비 진영을 갖추고 정수만을 차근차근 밟아나간다. 신의 노트에 적힌 그대로다.
적군은 지금 턱없는 공세에 나서고 있다. 임요환은 착실히 득점을 해낸다. 박지호의 병력은 갖춰진 수비진형을 돌진하다가 박살난다. 박지호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이길 줄 알았던 병력 규모라고 했다. 멀찍이 훈수를 두는 이들에겐 이해가 가지 않는 판단이다. 임요환이 세 번 정도 공세를 막아내자 둘의 격차는 어느새 사라진다.
그 게임에 관해서라면 임요환은 초반 전략수의 실패 이후론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 최연성이라면 딱 그리했을 운영이다. 한 방 병력이 쌓인 뒤로는 지체없이 나가서 라인을 긋는다. 가장 요충지나 다름없는 라이드오브발키리의 가장 꼭대기 언덕에 탱크들이 줄지어서 포신을 겨눈다.
그러나 승부는 더 지켜봐야 한다. 박지호에겐 전투의 본능과 감각이 남아 있으므로. 그는 적진의 빈틈을 치고들어가 적장에게 철퇴를 내려칠 수 있는 선수다. 아직 승패 향방을 모른다. 더구나 박지호의 병력을 구원하러 저 멀리서 아비터가 소환되고 있었다. 테란이 대프로토스전에 최적화된 전략을 들고나와서 상성을 뒤집어버릴 때, 그 선봉에 섰던 신예 중 한명인 이병민을 박지호는 지난 8강전에서 물리쳤다. 그때 이병민의 단단함을 뚫어버린 것은 바로 아비터였다. 뜻밖이었던 아비터의 출현에 테란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바로 그 아비터가 저 먼 시공간을 뚫고 절반 이상 소환을 마친 뒤였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됐을 거라고, 아비터와 함께 싸웠다면 백전백승이었을 거라고, 마지막 전투를 지켜본 엄재경은 말했다. 프로토스는 적의 포격을 한 방이라도 덜 맞은 채로 인파이팅을 할 수 있었을 테고, 백척간두의 일합 전투에서 더 번거로운 쪽은 테란이 될 터였다.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프로토스의 병력은 지체없이 불을 뿜는 적의 포화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너무나도 돌연한 진격이었다. 프로토스의 비장한 전투였으나, 결과적으론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전투가 그렇게 허망했다. 전투가 끝난 뒤에야 아비터는 전장에 당도했다.
아비터를 왜 기다리지 못했는가. 박지호는 그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다. 간신히 헤아리건대, 그때 박지호는 자신의 본능적인 감각에 의존했던 것이리라.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들이쳐서 상대를 부숴버리는 꿈. 지옥의 아귀로 상대를 집어삼키는 강렬한 충동이야말로 박지호를 여기까지 이끌었던 동력이었다. 그를 이 자리까지 치켜올려준 힘이었다. 그는 몰입할 때마다 종종 자신 안에서의 본능과 감각, 충동, 꿈같은 것들을 그대로 놓아주었다. 그런 때 종종 강렬한 에너지가 적을 다 태워버렸다.
본능적인 착수에서 시작한 병력의 움직임이 적진을 붉게 물들일 때, 바로 그 승부의 불꽃을 망연하게 바라보게 되는 그런 순간이 있기 마련이라고. 그것이 바로 스타일리스트의 쾌감이다. 지나간 것들의 환영 속에서 결국 눈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을 때, 그가 바로 그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본능을 의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승부로 확실해졌다. 한 명의 소년을 스타일리스트로 불릴 수 있게 한 그 강렬한 충동과 에너지, 방향성의 파도만으론 신의 노트에 적힌 최적화된 공식을 깨부술 순 없다는 것.
스타리그 역사를 통틀어도 그토록 허망한 일합 승부를 꼽기란 쉽지 않다. 적어도 에버2004가 끝난 이래로 선수들은 최적화의 공식 속에서만 싸웠다. 박지호의 게임은 그 밖으로 돌연히 튀어나갔다. 때때로 그 외의성은 맞수에게 당혹감을 안기기도 했지만, 그것은 냉철하게 판세를 분석한 뒤의 계획된 것이었다면, 어느새 박지호는 자신안의 충동을 그대로 놓여주는 쪽을 택했다.
자신의 감각에 의존해 이미 정해진 공식들에 반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되는가. 어째서 그런 미욱한 일을 하고야 마는가. 그럼에도 3세트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박지호는 어떤 의문을 떨쳐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전히 어딘가에 마음이 붙들려 있다. 그 복잡한 생각들이 어딘가에 닿고 닿아서 이르는 결론은 이렇다. 가장 나다운 해법으로 이 겹겹의 난마를 돌파하겠다는 것. 그릇된 패착이었으나 그것은 낭만시대의 스타일리스트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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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포츠 전문 미디어 파이터포럼에서 발간하던 주간지 esFORCE에 실렸던 박지호 인터뷰를 기억한다. 박지호가 막 신예로 부상했을 무렵이었으니 2005년 중후반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거기엔 부산 출신 청년의 성장기가 실려 있었다. 그가 어렵기만 한 집안 상황을 밝혔다. 그 무렵 박지호는 게임을 할 때마다 늘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느끼는 부담감과 책임감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일부나마 배경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에겐 차마 게임을 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어머니를 속였다. 그는 절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겠다고 말하고 PC방에 가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게임에 붙들려 있었다. 그점이 그에게 죄책감도 안겼다.
어머니는 튀김을 파는 행상이었다. 아버지는 청소 등 공공근로 일자리로 근근이 가정을 함께 꾸려나갔다고. 아버지는 몸을 다치기도 해서 몸져누워 있는 시기도 꽤 길었다. 누나도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편했다고. 박지호가 기억하는 어려웠던 집안의 상황이었다. 박지호는 게이머가 된 이후로도 오랫동안 어떤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부산 전포동 놀이터 앞에서 튀김을 파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2007년 3월 중 발간된 esFORCE에서 박지호가 조정웅 화승 감독을 만나 술잔을 함께 기울이며 예전을 회고하는 기사가 게재됐다. 그는 이때도 비슷하게 어려웠던 가정 환경을 언급한다. 박지호는 2005년 자신이 프로생활을 시작했던 조 감독의 PLUS팀(훗날 화승)을 불화 끝에 탈퇴했는데, 당시를 이렇게 떠올린다.
“감독님도 아시다시피 가정이 정말 어렵거든요. 어머니는 행상을 하시고, 아버지는 환경미화원 일을 하세요. 이번에 창단되면서 어렵사리 부모님 앞으로 집을 마련하는데 제가 적은 돈이나마 드릴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그 기쁨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게임을 시작할 무렵의 박지호에겐 무거운 부채 의식까지도 짊어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학업으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당부였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어린 아들의 학원비를 꼬박꼬박 마련해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부담감과 책임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게임으로 쏠려버리는 집착과 경향성을 외면하기란 어려웠다. 더구나 게임 쪽으론 천부적이라고 할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덧 알게 돼버린 후였다.
그때만 해도 재야 고수들이 부산에 몰려있었던 때다. 그럼에도 PC방 대회를 평정하면서 존재감을 차츰 드러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를 한쪽에 몰아넣고 스쿼시를 치듯 상대를 손쉽게 압도하는 선수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의 아이디는 자신의 지역에서 최강자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이디 Pusan. 그는 고향이자 자신의 뿌리에 묘한 자긍심을 내비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이디에서 보여지듯 그는 철저하게 나다운 것을 드러내며,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처음부터 스타일리스트의 숙명과도 같은 이름을 아이디로 받아들인 셈이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욕심이 강했던 그에게 게임은 구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재능을 느끼는 영역이 무엇인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것도 쉽진 않은 일이었다.
그는 결국 지역내 대학에 진학하면서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듯했다. 그러나 끝내 떨쳐내지 못하는 의문이 있었다. 마음 한켠에선 자신이 최강자라는 자부심과 프로들과 겨뤄볼 때 이길 수 있을지 궁금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속했던 클랜의 운영자가 박지호에게 도전해볼 것을 부추겼다. 수없이 많은 게임을 봐왔지만, 이런 실력은 부산에서만 머물기엔 아깝다며. 수없이 많은 게임을 봐온 운영자의 눈으로도 박지호의 운영은 남다른 것이었다.
박지호도 최고수들과 겨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점차 뚜렷해지는 걸 느꼈다. 프로게임단에 입단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프로게이머가 되는지 알지 못했다. 어떤 팀이 있는지도 몰랐다. 프로게임단 홈페이지들을 뒤지다가, 연락처라며 이메일 주소가 적혀있는 팀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는 덜컥 메일을 보냈다. 그러니까 그저 이메일 주소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팀이었던 셈이다. 그게 바로 비스폰서로 열악하게 운영되던 PLUS팀이었다.
그는 온라인 테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팀 선수들을 상대로 전승을 거뒀다. 아마츄어가 프로들을 압도했다. 그제야 박지호는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당장 중앙무대에서 견줄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재능과 실력을 이미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자기확신을 미뤄왔던 그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PLUS 게임단 입단을 허락받았다. 2003년이었다. 합숙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는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숙소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숙소는 신대방에 있었다. 찾아간 PLUS팀 숙소 겸 연습장은 화려한 프로게이머 생활을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암울하기만 했다. 일반 가정집을 얻어서 쓰는 곳이었다. 반지하의 음습한 분위기가 어둡게 깔려 있었다. 개인리그 우승자 출신 성학승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그다지 실력도 인상적일 게 없는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그의 마음은 어느새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PLUS 팀을 이끌던 성학승이 2004년 7월 업계최고의 팀인 SK텔레콤T1으로 이적한 것도 한 계기였다. 그는 성학승으로부터 T1 팀의 선수 대우 등을 전해 듣게 된다. T1은 연습생에게도 연봉을 줄 정도로 체계가 갖춰진 팀이었다. 반면 제대로 된 기업 스폰서가 없는 PLUS는 제대로 된 급여를 주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밥솥엔 곰팡이가 피어나 있었고, 더위에도 선풍기를 3대로 버텨내고 있었다. 그도 지쳐가고 있었다.
박지호는 처음부터 고된 길이라는 걸 알았던 만큼 열악하고도 무참한 상황을 1년 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릴 지치게 한 것은 현재 보다는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성취를 얻어도 더 형편이 나아질리 없다는 막막함과 자신 보다 실력 면에서 못한 이가 처음에 어떤 팀을 골랐느냐에 따라서 더 나은 대우를 받는 형평성 문제는 한 번 의문을 품은 이상, 떨쳐내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이 무렵 늘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 이는 꽤 복합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박지호가 살아온 궤적을 보면 더욱이나 그렇다. 이는 오랫동안 자신을 붙들고 있던 불우함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실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자긍심이 관련된 감정이었다. 이미 진학했던 대학을 버리고 게이머라는 길을 택하기로 한 그였다. 그에겐 모든 것을 걸어버린 자리였다. 한 순간의 지나는 젊은 열병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는 이듬해 군대를 가야하는 상황이었으나, 그는 이미 여기에 많은 것을 걸어버린 뒤였다.
그럼에도 아무리 실력이 정점을 향해가더라도 정당한 보상을 받을 길이 없다는 막막한 느낌은 그를 점차 옥죄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대우 문제 이상의 문제였다. 그의 마음 속에선 어딘가 불합리하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SK텔레콤 T1이라는 팀과의 비교를 통해서 구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그는 2005년 4월 1일 한국e스포츠협회 공시를 통해 이고시스POS 팀으로의 이적을 확정짓는다. PLUS 팀과의 불화 끝에 사실상 이적을 요구해 관철시킨 것이다. 그는 T1 등으로의 이적을 내심 희망했다고. 그럼에도 박지호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로선 PLUS 팀의 조 감독이 이적을 허락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의 스타판은 프로스포츠로서의 외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만큼, 감독들끼리 거부하기로 한 선수들을 임의로 게임판에서 퇴출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마음 한켠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박지호에겐 대기업 스폰서십을 가진 T1이나 KTF 팀이 가진 의미가 간절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자신을 증명하는 플레이를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꿈을 꾸면서도 동시에 이를 통해 돈에 대한 강박, 열패감, 굴레를 벗고 싶었던 박지호에게 T1과 같은 팀은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팀으로 받아들여졌을 법하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된 FA제도도 없고, 그래서 실력이 아니라 감독들간의 협상에 따라 당시 시스템에서 이룰 수 없는 망연한 꿈이었다.
이고시스POS 또한 약팀이었고,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여전히 급여라고 말하기 힘든 용돈 수준을 받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연습 환경이 나아진 것만으로도 마음을 잡히는 걸 느꼈다. 어쨌든 적게나마 수입을 얻음으로써 생활인이자, 프로라는 떳떳함을 가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박지호로선 어머니를 떠올리면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비로소 떳떳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 생활인이 됐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도 연봉을 통해서 비로소 어엿한 선수로서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받았고 보다 안정적인 실력발휘가 가능해졌다.
물론 그 무렵 비스폰서 팀에서도 발군의 실력과 두각을 드러낸 선수는 적지 않다. 다만 박지호는 그런 선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가난에 대한 사무친 감정을 가진 그로선 불운하다는 감정을 조금씩 떨쳐내면서 경기력을 끌어올렸다는 사실도 틀림없다.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실제로 성과로 이어졌던 만큼 옳은 결정이었다.
동시에 박지호는 실력으론 자신이 최강의 프로토스라는 인식이 확고했고, 더 나은 대우를 받는 선수들과 실력면에선 차이가 없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했다. 그점에서 T1을 바라보는 감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어렵사리 이적을 이뤄냈고, 추가 이적을 꿈꿀 수 없는 상황에선 당초 이상적인 팀으로 여겨졌던 T1을 보는 감정도 조금은 달라졌으리라. 이제 약팀에서 그저그런 대우를 받는 선수라는 박지호의 당시 상황을 대조적으로 드러내며, 자신의 낮은 대우가 실력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마음속에서 자극하는 팀이었다.
T1처럼 지원 좋은 강팀에 가지 못하는 건 실력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운이 그렇게 작용했을 뿐이라고, 그게 나의 실력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나는 T1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선수라고, 그러한 믿음을 붙들어야만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실제로 T1 선수를 주요한 무대에서 여봐란 듯이 넘어서는 것이었다.
즉, 그에게 T1은 여러 의미에서 박지호로 하여금 열패감과 불우함을 떠올리게 하는 팀이었다. 그러므로 T1을 넘어설 때 그를 오랫동안 짓눌렀던 열패감도 걷어내게 될 터였다. 선수로서 넘어서든, 아니면 팀으로서든 말이다. 자신이 실력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건 그저 불합리한 제도와 구조가 만든 얼개일 뿐이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비주류 팀을 옮겨 다니게 된 것은 그의 실력과 가치에 따라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그는 게임을 통해서 항변하는 마음이었다. 그점에 있어서 박지호가 물러설 수 없는 무대에서 당시 최고의 대우를 받던 SK텔레콤 T1의 수장을 맞닥뜨린 것은 어쩌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T1은 임요환을 위해 만들어진 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타크래프트 개인리그 초창기엔 선수 개개인별로 스폰서십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99프로게이머 코리아오픈’에서도 선수들이 스포츠조선 등 개인 스폰서십을 달고 나왔다. 첫 방송에선 선수들이 어떤 스폰서십에 속했는지를 부각했다. 그러나 스타리그가 온게임넷으로 이관되고 개인 스폰서 노출을 제약하는 조건 등이 강화되면서 팀 단위 구성이 성장하기엔 어려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후 자연스럽게 선수들끼리 서로 연습하기 위해 만든 클랜 혹은 길드가 활발히 구성됐고 이벤트 전 형태의 경쟁전은 오히려 활발해졌고, 서로 연습상대를 구하기 위해 구성한 팀에, PC방 사장 등 자영업자 후원에 의해서 운영되는 형태로까지 발전한다. 그리고 이들은 각종 경기 우승 등을 통해서 계속 자금 수혈하는 형태로 운영을 이어나가가 된다.
서로 연습을 해주기 위해서 만들었던 팀을 하나의 참가 단위로 받아들이는 이벤트 대회나 리그전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2003년 들어선 게임리그를 중계하던 온게임넷과 MBC게임이 팀 단위 리그를 창설하면서 확고해진다. 팀단위 리그가 개인 리그와는 별개의 구성이 이뤄진 것이다. 영세한 팀일수록 이러한 리그에서 확실히 두각을 드러내서 스폰서십을 따내거나, 운영비를 확보하겠다는 목표가 확고했다.
스타가 속한 유명 팀 혹은 개인 스폰서십을 받던 스타 선수들 입장에선 팀의 필요성이 조금 더 남달랐다. 주요 선수들은 자신의 스타성과 상품성을 이어가는 것도 역시 중요했다. 여전히 개인간 전술에 대한 교류 등이 활발하지 않았으므로 전략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팀내 좋은 선수들과 연습을 하면서, 전략을 개발하거나, 실력을 다지면서 자신의 실력 우위를 나가겠다는 인식 또한 분명했다.
임요환은 롱런에 대한 욕심이 누구보다도 컸던 선수였다. 그는 선수 개인에 대한 스폰서십을 팀 단위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면서 스폰서십의 크기를 키워냈는데 이는 여러모로 영리한 판단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도하던 팀 중심으로 지원을 확대했고, 좋은 선수들이 모인 팀을 구성했다. 결과적으로 좋은 연습상대를 상시적으로 둘 수 있었고, 머리를 맞대고 더 좋은 전략을 연구하는 환경을 갖추게 됐다. 최고의 스타였던 임요환이 결국 대기업인 SK텔레콤 후원을 이끌어 내면서 스스로도 꾸준한 성적을 낼 수 있는 조건을 다진 것이다.
후원과 좋은 팀 구성이 다른 선수들과의 격차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중요한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좋은 테란 라인업이 갖춰져 있던 T1은 최연성을 필두로 테란 전략 패러다임을 주도했다. 전략 패러다임을 개인의 발상에 좌우되는 시대를 지나 팀 단위로 사고하게 되는 시대에, T1은 어느 팀보다도 좋은 구성을 갖추고 새로운 전략 경향을 주도했다.
특히 그 시기에 그러한 팀 단위의 전략 사고 기능이 중요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초창기 걸출한 개인이 내놓는 전략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시대를 지나, 한 사람과 개인 발상에 의존하지 않고 가장 최적화된 형태와 전략은 무엇인지 집단으로 연구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어떤 선수의 아이디어가 팀 단위의 검증을 통해서 공식으로 구체화되는 수순을 거쳤다.
대표적으로 T1 테란은 대저그전에선 원배럭더블 최적화를 이뤄냈고, 프로토스전에선 FD를 가다듬었다. 비록 2005년 열린 So1에선 이러한 최적화가 완벽하다고 볼 순 없으나, 이를 가다듬은 2006년 들어서자마자 최연성은 박성준을 신한은행배 OSL 결승전에서 3:0으로 압살했다. 전상욱은 FD와 원배럭더블을 오가며 허를 찌른 덕분에 2005~2006년 프로토스 상대로 46전 31승. 승률 68.9%를 자랑할 정도였다.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최적화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쌓인 뒤로는 기존 전략의 변주와 충실한 운용이 더 중요해지게 됐지만, 2000년대 초중반엔 전략 개발과 고도화가 더 큰 과제였고, 이에 대한 테란의 연구와 해법은 그 시대 T1에서 대부분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1 소속 선수들(임요환, 최연성, 고인규, 전상욱)은 그렇게 테란 전략을 고도화해나갔다. 좋은 팀에 있다는 건 그러한 전략 패러다임을 가장 빠르게 이해하고 흡수해왔다는 의미다. 임요환이 드랍십의 달인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올라운더에 가깝게 진화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다.
스폰서십 팀에 이점을 이야기할 때, 좋은 연습 환경과 상대를 구하기 용이하다는 점도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2003년부터 전성기를 지났다는 평가를 받던 임요환이 비교적 오랫동안 개인리그서 활약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세 종족 모두 균형감있게 구성된 T1이라는 좋은 팀에서 연습의 질을 높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으리라고 본다. 좋은 스폰서십을 가진다는 것은 이러한 구성이 용이해진다는 데서 이점이 있다. 물론 임요환이 개인 차원에서의 일과 시간 대부분을 할애하며 연습량을 유지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개인 스폰서십을 팀 단위로 전환할 것을 요구해온 임요환의 판단과 선택은 한발 앞선 것이었다. 과연 시대의 변화에 맞춰 올라운더로 진화의 방향성을 튼 면모나, 테란 최적화에 대한 이해도 비교적 동시대 중에서도 빨랐던 점 등은 팀 효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좋은 팀이 개인 성적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을 그가 일찍이 깨달았던 게 아닐까. 여러모로 그는 탁월한 선수임에 틀림없다. 스타일리스트의 시대에 그가 보여줬던 전광석화 같은 찌르기를 넘어, 자신이 오랫동안 강자로 남을 수 있는 기반과 구조에도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 무렵 팀 스폰서십과 그에 속한 선수들의 실력 간 상관관계를 생각할 때, 딱히 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례로 들법한 팀이 각각 한때 박지호와 박성준이 속한 비주류팀 이고시스POS였다. 반면 뚜렷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사례로 들법한 팀이 바로 임요환과 최연성이 속한 SK텔레콤 T1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연습의 질이라는 측면과 전략 개발 용이성 등을 따질 때 좋은 스폰서십이 있는 팀의 이점은 분명했다.
박지호 자신도 팀 이적을 통해서 실력이 한 단계 더 나아진 것을 느꼈다. 훗날 ‘이론 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스템 이해도가 높았던 그는 전형적인 천재형 선수였다. 그런 그는 연습을 통해선 실력이 그다지 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무척이나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마치 어딘가 알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 것처럼 말이다. 2005년 이고시스POS 이적후 탁월한 조력자를 만나면서 실력이 급성장한다. 바로 박용운 코치다. 한 발 빠른 확장과 생산 시스템을 갖춰서 병력 중심의 힘싸움을 벌이던 박지호는 그러한 스타일을 이어가면서도, 이러한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비터를 섞는 플레이 등을 함께 고안해낸다.
“처음 박용운 코치는 프로게이머를 하겠다고 들어왔던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나이도 좀 있었고, 실력도 최고가 되기엔 어려웠을지 몰라요. 그 대신 게임은 정말 기가 막히게 봤죠. 코치님이 짜준 전략들도 정확하게 들어맞았고요.”
선수의 성향을 이해하고 있던 탁월한 코치의 조언은 박지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한때 프로게이머를 꿈꾸며 늦깎이로 POS에 입단한 박 코치는 선수로선 대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의 전략적 심오함을 이해했고, 단순히 선수들의 기강을 잡는 정도에 그쳤던 코치의 역할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게임 전략을 고안하는 책사 역할을 했다. 임요환과 T1에서 본격화한 전략전술에 대한 집단적인 논의가 선수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POS에선 코치와 선수의 공동 창작 형태였던 셈이다. 그 무렵 박 코치는 하루에 50게임씩 치르면서 전략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코치의 조력을 받는 동안 박지호의 강점은 더욱 두드러졌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에 적절한 전략적 방향성이 제시된 덕분이었다. 누구든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환경이란 아마도 그런 것이리라.
그런 박지호 스타일과 플레이의 독특한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트렌드에 앞단에 섰지만, 동시에 자기 개성을 드러내려는 쇼맨십도 강한 선수였다는 점을 말이다. 프로토스라는 종족이 가진 전략적 패러다임을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자기색을 민감하게 인식했다. So1배 16강 조별리그에서 저그 강자 조용호(1년에 프로토스전을 한 두번 진다는 평가를 받을 때였다)를 반섬맵 815에서 격파한 뒤 응한 언론 인터뷰에서 스피릿 스타일이 나오지 않았다는 질문에 지형 탓에 제대로 스피릿이 나오지 않았다며, 다음 경기에선 스피릿을 제대로 보여주겠디고 다짐했다. 자신의 스타일을 강하게 의식하며 자신의 본능과 충동에 충실한 플레이를 하겠다고 다짐하는 편이었다. 자신의 스타일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공식이 점차 도출되는 시대엔 점차 낡은 것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그는 자신다운 것의 유효성에 집착하고 그것을 믿었다.
경기장에 들어설 때부터 긴장으로 얼어버리는 어리숙한 청년이었지만, 정수를 좇는 신의 게임이 되어가는 것에 맞서 좌충우돌 의외성으로 맞불을 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실력자인 동시에 스타일리스트였다. 미세한 우위를 지키는 것보다 비록 실수할 가능성은 높아지더라도 더 큰 득점을 따내려고 힘껏 밀어붙이는 처절한 승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