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스펙남의 유쾌발랄한 인생사 -1-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62407&page=2
쓰레기 스펙남의 유쾌발랄한 인생사 -2-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62433
쓰레기 스펙남의 유쾌발랄 인생사 -3- ( 이건 하단을 보시면 바로 있습니다. )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62452
원래는 5에서 마지막을 할려 했는데 퍼스를 언급하는 건 거의 최근이라 여기서 마무리하면 괜찮을 것 같아서 이 단원을 마지막으로 했습니다.
좀 일찍 작성했어야 했는데 집밥 백선생 못 챙겨본 걸 본다고...흐흐. 맘 같아선 추천게시판에 이 글이 올라왔으면 좋겠지만.. 제 부족한 필력으론
그건 욕심이겠죠? 하하.
이번이 마지막인 만큼 글을 좀 많이 적을 생각입니다. 마지막인 만큼 작정하고 해봐야죠. ( 감기는 눈은 어떡하니.. )
그리고 글을 다 적고 나선 제가 언급 못 했던 부분. PGR러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들도 적을 생각입니다.
아무쪼록 부족한 글이지만 마음 편하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퍼스를 출발하기 전, 마침 형수 친구분이 일이 있어서 한국에 왔다. 연락을 해서 만나는 날을 잡고 같이 호주로 가기로 했다. 애도 같이 있더라.
이름은 다니엘이었나? ( 이 애 덕분에 공항에서 지옥을 맛본 건 함정. ) 귀여웠다. 형수 친구분도 인상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인천공항에서 만나
발리를 경유하고 퍼스로 갔다. 발리까지 5시간, 경유 2시간, 퍼스까지 7시간 걸렸다. ( 7시간이었나? 기억이... )
공항에 도착하니 남편 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일하게 될 곳의 사장이었다. 나이가 38이었는데 나이에 비해 얼굴이 젊어 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고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불안감이 다가왔다. ( 이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 그렇게 차를 타고 사장의 집으로 갔다.
호주의 길은 한국에 비해 확 트였고.. 조명이 어둑어둑하게 스쳐지나가서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 아참! 이때 제가 공항에 가방을 깜빡하는 바람에 다시 공항가서 찾고 왔는데 이게 나중에 지옥의 입구를 여는 불씨가 됩니다. )
그렇게 집에 도착했고 사장이 사는 집은 쉐어 형태로 운영하는 집이었다. 사장부부네 외에도 쉐어생들이 4명이 더 있었다. 늦은 밤이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짐을 꾸렸다. 일하기 전에 동네를 한번 돌아봐라 해서 돌아봤다. 건물들이 한국과는 확실히 구조가 틀렸다. 영국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원룸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도시가 이쁘다는 느낌을 생전 처음 느꼈다.
5일 정도? 그렇게 쉬다가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한식당이었다. 냉면이 주력상품이었고 탕종류와 고기반찬류
( 불고기/제육/닭볶음/오징어볶음 등 ), 돌솥비빔밥도 취급했다. 첫 날인데도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3일째부터 지옥이 펼쳐졌다.
쉴라 하면 오는 손님, 끝이 없는 재료준비, 설거지 기계가 없어서 모두 손으로 다 해야 했다. 브레이크 타임도 따로 없어서 틈틈히 쉬어야 했고
한식당의 특성상 재료를 준비할 게 너무 많았다. 당연히 일을 잘 하지 못했다. 앞전에 언급했던 가방 때문에 이미 사장한테 찍혀있었다 ( 사실
이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 사장의 잔소리가 쉴틈없이 몰아쳤다.
피부가 약했던 이 손으로.. 쉴틈없이 설거지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손으로 잡고, 갖은 일처리를 다 했다. 그러나 일은 늘지 않았다. 똑같은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걸 사장이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쉴새없이 잔소리하고 욕했다. 하지만 꾹꾹 참아냈다. 이 일도 조금도 못하고
귀국한다면 형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나. 그렇게 참으면서 일했다. 1시간씩 일찍 출근하며 12~13시간씩 일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일한 지 3개월이 가까워졌다. 일은 여전히 늘지 않았다. 결국 사건이 터졌다. 일하고 잠깐 쉬고 있는데 형에게 전화가 온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형이 왜 일을 똑바로 안하냐고 엄청 뭐라했다. 황당했다. 그 예기를 어디서 들은 건지? 자초지종을 들으니 사장이 나를
짜를려고 고민 중이었다고 했다. 그 전에 자기 마누라한테 내 뒷담화를 엄청 했는데 그 사람이 내 형수랑 통화를 자주 했는데 얼떨결에
내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내 형이랑 형수가 크게 싸웠다고 했다.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면서 그 인생이 눈물이 많았던 나를 변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눈물이 나왔다. 서러웠다.
난 도데체 어떻게 해야하나.. 귀국 준비를 해야하나..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허나.. 신은 아직 날 버리지 않았는지 같이 일하는 형이 사장을
설득해서 날 짜르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해달라고 했다.
같이 일하는 형도 부산 사람이었다. 엄청 외향적이고 잘 노는 형이었는데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다가 나보다 몇일 일찍 지인의 소개로 이 식당에 왔다. 이 형은 머리가 좋고 손도 빨라서 일을 엄청 잘했다. 나랑은 완전히 정 반대의 스타일인 사람이었다. 그 덕에 사장의 신임이 돈독한 사람이었는데.. 그 형이 날 좋게 생각했는 갑드라. 더불어 나와의 호홉도 어느 정도 맞춰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 형 입장에서도 내가 일한지 얼마 안 됬는데 짤리고 귀국한다는게 안타까웠는갑드라. 그래서 다행히 짤리는 건 보류됬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난 후 난 일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간간히 실수는 나왔지만 큰 실수는 아니라 사장이 크게 뭐라하지 않았다. 잔소리도
줄어들었다. 거기다 다른 지역에 분점을 오픈해서 아침 빼곤 거의 사장이 없었다. 우리 하고 싶은대로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는
형이 요리를 담당하고 난 홀서빙 & 주방보조로 했다. 사장이 돈을 억척스레 아끼다 보니 홀 알바를 파트타임으로 구하고 사람 없다 싶으면
바로 퇴근시켜 버리는 바람에 거의 우리 2명이서 일을 다 해야 했다. ( 사장이 그 형한테 거의 매니저급의 권한을 줬다. 그 형은 기본적인
영어회화도 다 됬으니 더 믿음직스러웠겠지.. )
최악의 경우는.. 내가 일했던 식당의 테이블이 13개였는데 13테이블이 다 차있는데 일하는 사람은 꼴랑 그 형 한명이랑 나, 이렇게 2명인 적도
있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멘탈이 나간다는 게 이런 경우였다. 결국 그 형이랑 싸웠다. 서로 신경이 예민하다 보니 우발적으로 말다툼을 하게
됬다. 결국 그 형이 사과를 했지만... 그 떄를 생각하면.. 이건 좀 사장이 지나친게 아니였나 싶다.
그렇게 정신없게 퍼스생활에 적응했다. 일도 재미있었다. 사장이 거의 없으니 밥도 우리가 먹고 싶은 대로 다 해먹었다. 이 때 요식업을 진지하게 고민해본 시기가 아닌가 싶다. 생활도 재미있어졌다. 사장이 운영하는 쉐어방이 2군데였는데 난 사장이 있는 14호 방을 벗어나 바로 옆에 있는 16호 방으로 옳겼다. 형수 친구의 권유이기도 했지만.. ( 사장이랑 일적으로 계속 부딪히는데 쉴 때까지 사장을 보는 건 좀 아니였으니까.. )
전부 내 또래였다. 2명이 쓰는 방 2군데 / 3명이 쓰는 방 1군데(마스터룸) 이렇게 있었는데 룸메이트 빼곤 나머지가 다 여자였다. 솔직히 부담
스러웠다. 거기다 이미 그 사람들끼리 너무 깊게 친해져 있어서 내가 들어올 건덕지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죽은 듯이 지냈다.
그렇게 1달 정도 지나고 차례차례 사람들이 떠나갔다. 그렇게 전부 물갈이가 됬다.
같이 일하는 형의 친했던 동생이 들어왔고 영주권자 형과 그 형의 여자친구가 왔다
( 이 형이 나중에 우리 사장이랑 동업 형태로 일을 같이 하게 된다. )
룸메도 새로 들어왔다. 고려대를 편입했고 영어강사까지 하다 온 동갑내기였다. 영어를 정말 잘했다.
성격도 좋았고 철학에 관심이 많은 애였다.
(이후 이 멤버들이랑은 단톡방을 만들어서 지금까지도 꾸준히 연락하고 있다. ) 나머지는 동생 남자애가 한명 왔고. 이 때 난 호주에서 천국을
본격적으로 맛보기 시작한다.
서로 시간이 맞으면 안주를 양껏 만들고 맥주도 2~3박스씩 사서 파티를 했다. 영주권자 형의 차를 타고 카지노에도 갔다. 호주에서는 운전석
이 4개면 딱 4사람이 앉아야 한다. 그 이상 껴서 앉으면 안된다. 그래서 서로 가위바위보를 해서 1명은 트렁크에 타기로 했다. 내가 걸렸다.
(...) 트렁크에서 20분을 버텼는데... 영화에서나 보던 인질이 된 기분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카지노에서 최종 승자는 나였다. 50불을 들고 가서 블랙잭으로 250불을 땃다. 두뇌도 못굴리는 내가 이렇게 딸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머지 멤버는 다 손해를 봤다. 적당히 따고 카지노 내에 있는 바에서 맥주를 한잔 주문해서 마셨다. 꿀맛이었다. 이것이 바로 돈 맛이구나..
왜 사람들이 카지노에 빠지면 벗어나질 못하는지 이해가 됬다.
그리고 호주 식당에서 일하며 학교를 병행하던 동생이 있었는데 요리를 참 잘했다. 난 그녀석한테 삼시 세끼를 다 얻어먹은 적도 있다.
특히 그 녀석이 자주 해주는 리코타 치즈와 어린잎, 고구마 메쉬를 곁들인 샐러드는 일품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일하는 식당에서 수시로 빵을 가져오는데.. 정말 쫄깃하고 고소해서 맥주 안주로는 딱인 빵이었다. 지금도 그 빵은 정말 먹고 싶다.
그 이외에도 룸메가 인맥이 엄청 넓어서 생일파티를 하는데 2~30명씩 와서 논 것 ( 그때 난 퇴근하자마자 왔는데 오자마자 고기 셔틀을... )
거실에서 다 모여서 영화를 보며 치킨을 뜯고 안주를 만들어서 먹고.. 정말 행복 그 자체였다. 내가 처음 느껴보는 행복.. ( 이때 난 공동체
생활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된다. ) 내가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말이다.
거기다 참 다양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난 조금 변하게 된다. 마음의 상처가 깔끔히 치유가 됬다. 한인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영어는 뭣도 늘진 않았지만.. 그 댓가는 감수할 수 있을 만큼 난 너무 행복했다. 이 시간이 계속 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하지만 신이 행복의
시간을 무한정 주진 않았다.
내가 일하는 본점/분점이 장사가 전체적으로 안 되다 보니 사장이 예민해졌다. 재료도 아끼란다. 해산물 믹스가 풍부하게 들어갔던 순두부
찌개도 오징어 2조각 / 홍합 1개로 줄였다. 비빔밥에 넣는 참기름도 식용유 반/참기름 반으로 섞어쓰라 했다. 맛이 좋을 리가 없었다. 우리가
먹어도 맛이 확 차이가 나는데 손님 입장에선 어떻겠는가..
거기다 주방에서 홀을 최소한의 인원으로 우리가 계속 왔다갔다 해야 되니깐 서비스도 좋을 리가 없었다. 사장이랑 트러블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거기다 룸메가 여러 가지 이유로 사장에게 찍히는 바람에 퇴거를 당했다. 결국 나에게도 그 폭풍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는 형도 그 기운을 느꼈는지 나랑 종종 예기를 했다. 그만둘 때 같이 그만두자고. 그 계기가 온 사건이 왔다.
내가 근처 마트에서 오이를 샀는데 전날에 샀던 오이를 미처 못 봤다. 그걸 사장이 봤다. 사장이 내 쪽으로 오이를 집어던지면서 야이 개XX야!
를 시전했다. (쓸데없는 데 돈을 썻다고.. ) 그때가 내가 일한 지 반 년차였다. 미련이 없었다. (그냥.. 왠지..) 결국 그 형과 같이 사장 집으로 가서
그만둔다고 했다. 사장이 우리 면전에다 대놓고 이랬다.
넌 가고, 지훈이(같이 일하는 형)넌 잠시 남아라. 뭐 난...쿨하게 짤린 거였다. 이미 난 찍혀있던 상황이라..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만..
사장은 그게 아니였나 보다. 그렇게 난 허무하게 짤렸고 같이 일하는 형에겐 연봉협상을 제시했단다.. 그래서 그 형은 더 일하기로 한다. 나만 낙동강 오리알이 된 거지 뭐...
근데 그 시기에 사장의 뒷 소문이 엄청나게 들려왔다. 같은 한인들에게 소문이 안 좋다고. 그 때는 그냥 저런 사람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일단 이 부분은 뒤로 좀 미루기로 하고.. 그렇게 난 2개월을 호주에서 백수로 지내게 된다. 원없이 푹 쉬고 일을 다시 구해볼라 했지만..
호주의 현실은 냉엄했다. 영어의 영자도 모르는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하루는 청소업체에 면접을 보러갔다. 난 네x버를 뒤져서 예상 멘트들을 연습하고 갔다. 현지인 사장이랑 면접을 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데 한국에서 듣는 영어보다 3배는 빨랐다. 머리가 하예졌다. 수첩을 재빨리 꺼낼려 했는데 내 손을 지긋이 눌렀다. 수첩을 보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수첩을 안 보면 말을 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다시 수첩을 꺼냈지만 다시 제지당했다. 결국 나가란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우주도 도와주질 않았다. 난 여기까지라는 느낌이 왔다.
난 호주에서 맨땅으로 버텨낼 수 있을 만큼 정신이 강하지 않았다. 성실하기만 할 뿐 나약하고 게을렀다. 떠날 때라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이
내 선택을 많이 아쉬워했지만 내 선택을 존중해줬다. 슬펐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이런 행복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 드니..
더욱 안타까웠다.
출국을 2주정도 남겨두고 퍼스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프리맨틀이란 도시를 홀로 돌아다녔다. 관광지여서 그런지 사람이 참 많고 경치가
좋았다. 커다란 요트들이 3층 높이로 쌓여서 줄서있는 관경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 때 피쉬앤칩스도 처음 먹어봤다, 소스를 3가지를 줬는데
나쁘지 않았다. 목이 좀 막혔지만.. 이후 교도소도 가봤다.. 무슨 무전기를 하나 줬는데.. 뭐 영어가 안되는 내겐 쓸 일도 없었다.
뭐... 교도소는 별 다를 게 없었지만... 관광지를 본다는 느낌으로 별 생각 없이 돌아다녔다. 오히려 프리맨틀의 건물양식들을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개성이 살아있는 나라가 됬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들면서 말이다.
그렇게 호주에서의 내 생활은 끝이 났다. 공항을 가는 차를 잡고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나왔다. 마침 같이 사는 동생이 출근하기 전이었는데..
너무 아쉽다고 했다...내가 가질 수 없는 순수한 눈망울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담배를 같이 피자길래 한 가치 같이 펴줬다.
한국가서 꼭 보자고 약속하고 그 동생을 뒤로 한채 공항에 가는 차에 올랐다.
그렇게 조용히 가고 있는데 보이스톡으로 룸메에게 전화가 왔다. 아쉬워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30분 가까이 통화를 했다. 슬프면서
기뻣다.. 내 28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람의 정이었다. 나도 사람이라는 것을 가장 크게 느끼게 해줬던 호주생활이었다. 나의 어두운
모습이 아닌 내 본 모습을 처음으로 봐준 사람들이었다. 순수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즐겁게 놀 수 있었다. 이 행복..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공항으로 가면서 호주에서의 일들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며 호주에서 지냇던 8개월의 여정을 마무리
했다.
----------------------------------------------------------------------------------------------------------------------------------------------------->>>
추신 : 사장이 여자 문제 때문예 말이 많았고 다른 사람을 많이 등쳐먹었다 했다. 다행인 건 우리 월급은 2~3일 늦긴 했지만 꼬박꼬박 줬다.
허나 내가 귀국하고 나서 문제가 생겼던 게... 영주권자 형이랑 같이 동업했는데.. 서로 트러블이 생겨서 영주권자 형이 그만뒀다.
그 형은 오랜 호주생활에 염증을 느껴서 전 세계를 여행할려고 계획했는데 그 전에 한국에 간다고 했다..
그렇게 밀린 임금을 받기로 약속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겨우 이틀 남겨두고 별 핑계를 대면서 못 주겠단다.
결국 그 형이 변호사까지 부를 준비를 하니 그떄써야 사장이 꼬리를 내리고 200만원을 줬다.
하지만 나머지 200은 결국 받지 못했다. ( 그 외의 소문도 많지만.. 나머진 그 사장 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될 것 같아.. 이정도만
하겠습니다. )
그리고 위에 글들 중에 빼먹은 게 참 많은데.. 그 중에 하나만 언급하면 클럽을 자주 간 것, 그리고 게이 클럽에서 호주 게이한테 기습
뽀뽀도 당한 것.. 참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걸 겪었다. 여러분도 꼭 호주가 아닌 다른 나라라도 좋으니 기회가 되면 꼭 여행을
가시길 추천한다. ( 추신 : 한인 사장 밑에선 일하지 마라.. 10명에 1~2명이 제대로 된 사람일까 말까니... )
----------------------------------------------------------------------------------------------------------------------------------------------------->>>
뭐.. 그 뒤의 내용은 별거 없습니다. 처음 1편에서 썻던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구요.. 귀국하고 3개월 정도 있다가 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2편과 호주 생활에서 언급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드문드문 나는 기억과 글솜씨의 부족으로 많은 걸 언급하지 못했네요. 제 손가락에게 애도를..
그래도 제가 최대한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은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사실 뒤돌아보면 식당일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도 식당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중이구요. 그리고 사장이 문제가
많았지만 저한테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일을 빨리 적응하지 못한 것, 손이 느렸던 것, 일을 잘 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 제
스스로가 좀 안이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점에 대해선 사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구요.
하지만 식당일을 하며 제 많은 단점들이 보완됬습니다. 일을 할 떄 필요한 마음가짐, 정치력, 그리고 민첩한 동작까지. 뭐.. 직접 설거지를
하다보니 전체적으로 손 상태가 엉망이었죠. ( 귀국하고 나서도 한동안 안 나아지다가 2개월 정도 되서 깔끔하게 나았습니다. )
어떤 일을 해도 나아지지 않던 내 단점이 이 일을 하면서 많이 좋아진 것이죠. 그래서 지금 물류일을 하면서도 식당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참 구제불능이죠? 뭐 하나도 이떄까지 제대로 한 적이 없으면서.. 흐흐.
어쨋든 이렇게 글을 대충 마무리 할려고 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글이었지만 재미있게 봐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제 인생에 대해 글을 적어보니 힘들지만 재미있네요.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좋은 글로 찾아뵙고 싶습니다.
아참... 앞전에도 언급했지만 저처럼 이렇게 막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스펙 좋은 pgr러 여러분은 저런 인간이 왜
사냐 싶겠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봐도 전 구제불능 막장입니다. 자본주의에 전혀 어울리는 인간이 아닙니다. 쓰레기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살고 싶더라구요. 어떤 형태로든. 제 끝이 과연 어디일까 궁금하기도 하구요. 그 결과가 파멸일지 그나마 보통 사람으로라도 살아갈 수 있을지.. 말입니다. 그리고 쓰레기도 재활용이 가능하잖습니까? 어떻게 보면 28의 나이 .. ( 빠른 년생이라 29이 될 수도.. ) 에 너무 늦어버린 시작이지만...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가 되기 위해.. 이 헬조선에서 또 하루를 살아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제 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마지막으로 pgr에 유부남 분들이 많이 계신 걸로 압니다. 그 분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추후 여러분의 자식들이 어떠한 이유로든 왕따를 당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한다면 어떤 이유로라도 추궁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못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자식을 꼭 껴안아 주며 한 마디 해주십시오. " 네 잘못이 아니야.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라고 말입니다.
부디.. 한 순간의 잘못된 행동으로 저 같은 상처입은 괴물을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고개숙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