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 도착했습니다. 이제 업(鄴) 성입니다."
마부는 요란하게 소리쳤다. 서문표(西門豹)는 잠에서 깨어 눈을 깜빡거렸다. 저 멀리서 커다란 성문이 보이고 있었다.
멀고도 먼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 이른바 전국 칠웅이라고 하는 일곱 개의 나라가 있었으니 각각 가르켜 연(燕), 조(趙), 제(齊), 위(魏), 한(韓), 초(楚), 진(秦)이라고 불렀다. 칠국은 자기들끼리 싸우고 협력하고 반목하고 동맹하기를 반복하였으며 소국을 합병시켜 국력을 키워 서로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이런 싸움이 장장 200년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지치고 힘들어 했으며 고대의 예절과 법도는 사라지고 사기와 폐악이 판을 치게 되었다.
자, 서문표는 바로 그런 시대의 인물이었다. 서문표가 누구인가 하면, 그의 스승은 자하(子夏)라는 사람이었고 이 자하는 그 유명한 공자(孔子)의 제자다. 위나라의 현명한 군주인 문후(文侯)는 자하를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구했는데 그는 제자인 서문표를 추천하여 나라일을 돌보게 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한다. 서문표 역시 현명하기가 공자와 자하 못지않아 문후는 금방 그를 마음에 들어하였다.
업 땅은 조나라, 한나라와 이웃한 땅으로 위나라에게도 몹시 중요한 요지였다. 문후는 서문표를 업의 현령으로 부임시켰다. 이곳의 관리를 맡겼다는것은 그만큼 서문표를 신뢰한다는 이야기도 되었다. 새삼스러이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서문표는 마차에서 내렸다.
수많은 관리들이 이 새로운 현령을 보기 위해 성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
"현령님. 부임을 축하드립니다."
"무슨 말인가. 오히려 내가 이 땅의 일에 밝은 그대들에게 잘 부탁한다네."
서문표는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눴다. 이윽고 그는 집무실로 향하기전 수행원들을 데리고 업성의 시내로 나섰다. 사람들이 어찌 사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때는 아침이었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공기를 태양은 천천히 떠오르며 부드럽게 녹이고 있었다. 멀리서 가축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만연한 봄내음이 하북(河北)의 대지에 퍼져나갔다. 아름다운 도시였다. 서문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적 없는 대로를 걷다가 갑자기 궁금해진 서문표는 수행원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말인가. 어째서 사람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 겐가? 혹시 새로운 현령이 부임한다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조용히 따라 걷고 있던 수행원은 그 말을 듣더니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건 아닙니다."
"그러하다면 벌써 아침인데 어째서 거리에 사람들이 없을꼬?"
"그러니까……뭐라고 말해야 할지……."
수행원은 안절부절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본 서문표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업성이 작은 도시도 아닌데 어찌 인적 한명 없으며 이 자는 왜 이리 당황하는가? 이는 괴이한 일이다.'
의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져갔다.
성의 중심가에 가도 사람들은 거의 찾아 볼수가 없었으며 문을 열고 있는 상회나 가게를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이제와서 살펴보니 거리에 있는 대다수의 집들이 문을 굳게 걸어 잠군 채 열려는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입을 딱 벌리고 그 모습들을 살펴본 서문표는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부임 절차등을 전부 생략하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엉겁결에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현령의 집무실에 몰려든 관리들은 쭈삣거리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서문표는 모른척하고 질문했다.
"새로 부임하게 된 현령인 서문 아무개라고 한다네. 혹시 근자에 한나라나 조의 대군이 이곳을 공격하려던 낌새가 있었는가?"
관리들이 눈치만 보며 대답하려고 하지를 않자 어쩔 수 없다는듯 나이 많아 보이는 아전이 대답하였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한나라는 왕족들끼리 싸워 내부가 혼란스럽고, 조나라는 서쪽의 진나라와 격전을 치루는 중이라 이곳으로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근이나 수해로 큰 타격을 입은 일이 근자에 있었는가?"
"매년 수해가 업성의 골치거리이긴 하지만 올 해는 아직까진 변고는 없었습니다."
"역병과 괴질(怪疾)등은 어떠한가?"
"요 몇 년간 이 근방에서 돌림병이 퍼진적은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아무런 곡절도 없거늘 성안의 분위기가 이토록 흉흉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필시 그대들이 무엇인가 고약한 일을 숨긴다는 뜻이렸다."
그렇게 말하는 서문표의 목소리엔 살짝 노기가 섞혀 있었다. 그러자 아전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아전이 말하였다.
"대인께서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황하의 수신(水神)인 하백(河伯)을 장가보내는 일이 가장 고통스러워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신을 장가보낸다니, 무슨 황당한 말이오?"
아전은 대답 대신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젊은 관리 한명이 분기탱천하여 대답하였다.
"업성에는 강이 하나가 있는데, 몇 년 전부터 걸핏하면 물난리가 났습니다. 우리 현에서는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 보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지요. 일년 동안 열심히 일한 농작물들이 홍수로 쓸려가면서 백성들이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교화를 담당하는 관리인 삼로(三老)와 세금징수를 담당하는 세리(稅吏)들은 해마다 수백만전의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자신들이 나누어 가집니다."
"허어, 무엄한지고!"
"그 행패가 하도 고약하여 전임 현령들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들은 무한정의 사치를 누리고 윗선에 뇌물을 바칩니다. 벌써 이 자리에도 삼로와 세리는 없지 않습니까? 바로 자기의 집에서 일하며 출근조차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사에 철저하고 청렴한 서문표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일단 입이 트여진 관리들의 성토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삼로와 세리가 어디서인지 무당을 하나 데리고 와 사흘이나 굿을 했는데, 우리가 하백에게 제대로 제사를 올리지 않아 하백이 노하신것이라고 했습니다. 매년 색시를 한 명씩 바쳐야 하백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요."
'흠, 그런 식으로 백성을 속인 것이구나!'
서문표는 금세 눈치를 챘다. 그는 가슴속에 차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하백에게 색시는 어찌 바친단 말인가?"
"매년 무당이 집집마다 찾아가 소녀를 찼는데, 예쁜 아이를 보면 '이 처녀야말로 하백의 부인으로 알맞다' 하고는 데려갑니다. 그러면 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목욕제계를 시키고 예쁜 옷을 입히고는 강가에는 '신방'을 짓고 붉은 천을 단 후에 커다란 침상까지 마련합니다. 그곳에서 열흘 남짓 먹이고 재운 뒤 아름답게 화장을 시키고 시집갈 때 앉는 상석에 앉히고는 하수에 뛰웁니다. 결국 처녀는 둥둥 떠나가다 물속에서 빠져 죽고 말지요."
여기까지 듣자 서문표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불쌍한 백성들……. 이 나쁜 놈들이…….'
관리들은 서문표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늙은 아전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 대인, 대인께선 저희에게 부모와 같은 관리이시니, 저희의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하백에게 제를 올리는 것은 마땅하나, 하백에게 색시를 내주는것은……. 멀쩡한 아가씨를 이렇게 보내다니, 대가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예쁜 딸을 둔 집안에서는 두려움에 떨며 하백을 장가 보내는 철만 되면 다른 지방으로 도망을 치기 일쑤입니다. 당연히 고을의 백성 수는 줄고 남은 사람들이 그만큼의 세금을 감당해야 하니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하고 있고 인심도 흉흉해졌습니다. 잘 살아보겠다는 의욕도 사라졌고 말입니다."
서문표는 눈을 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전은 이젠 흐느끼면서 머리를 땅바닥에 쾅쾅 찍어댔다.
"반대로 무당과 삼로, 세리는 반대로 엄청난 세금을 걷고 백만이 넘는 재물을 가져갔습니다. 정작 혼례에는 2,3만 정도만 쓰고 남은것은 모두 자기들 뱃속을 채운 것이지요. 만약 대인께서 나서주시지 않는다면 그자들이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가로채는 일도, 하백에게 색시를 바치는 일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전의 이마에선 피가 흘러내렸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노인의 말을 다 들은 서문표는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늙은 아전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하백에게 색시를 바치는 날이 언제인가?"
"다음 달입니다. 그때문에 모두가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혼례가 있는 날 소식을 나에게도 알려주게. 나도 신부를 배웅할 터이니. 그대들은 일단 돌아가게나."
새로 온 현령이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관리들은 궁금하고 속이 쓰렸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서문표는 혼자 남아 죽편들을 살펴보면서 업성의 상황을 조사했다.
고대의 풍습에 순장(殉葬)이란 것이 있다. 왕이나 높은 벼슬을 가진 관리가 죽었을때, 그의 하인들이나 혹은 부인을 같이 묻는 악습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 모양의 커다란 인형을 만들어 집어넣는 일도 있었다. 공자는 그 인형들이 같이 묻히는 모습만 봐도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사상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바로 인(仁)이었고, 이(利)를 보고 의(義)를 생각하며, 위태한 것을 보고 목숨을 내어 주는것이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산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느냐(未能事人 焉能事鬼 未知生, 焉知死)?"
서문표는 그런 학풍을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시간이란 기다릴수록 느리게 흘러가고 오지 않았으면 하고 기다리지 않을 수록 빠르게 다가오는 법. 한 달은 순식간에 흘러가고 드디어 하백에게 색시를 바치는 날이 왔다.
서문표는 일찍부터 하수가에 나와있었다. 과연 '신방'이 지어져 있었고 아름다운 신부가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고 나왔다. 하지만 얼굴은 두려움이 가득했다. 삼로를 비롯한 고을 관리와 장로들이 모두 나왔고, 구경꾼만 해도 삼천명은 넘어보였다.
징그럽게 생긴 늙은 무당은 잘 먹었는지 살이 통통하고 허리가 물통처럼 굵었다. 뒤에는 여러명의 여제자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인파는 한참 동안이나 웅성거리며 그렇게 서 있었다. 정오가 되자 무당이 큰 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되었다. 신부를 보내거라."
사람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신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서문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잠깐 멈추시오! 나는 얼마 전에 이 고을에 부임한 현령이오. 하백에게 아내를 보내려면 예쁜 사람을 보내야 할 것이니, 신부를 데려와 보시오. 내 예쁜지 안 예쁜지 확인해야 하겠소이다."
무당이 듣고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녀가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울고 있는 신부를 데리고 서문표에게 다가왔다. 서문표는 한참 동안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고 있다가, 살짝 앞으로 나서 신부에게만 보이게 웃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구해주겠다."
그러고는 그는 무당에게 말했다.
"이 아가씨는 전혀 아름답지 않잖소. 하백께 이런 처녀를 바쳐보았자 노여움만 더 할 뿐이오. 오늘의 혼례는 아무래도 미뤄야 할것 같으니, 하백께서 괜히 기다리시다가 애가 타지 않도록 무당께서 말 좀 전해 주시구려. 내 하루속히 곱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찾아 모래까진 보내드리겠다 말이오."
그리고 서문표가 손짓을 하자 갑자기 서너명의 사내들이 나타나서 늙은 무당을 잡아 들어올려 강물에 집어던졌다. 무당은 강물속에서 비명을 지르면서 몇 번 허우적거리더니 결국 빠져 죽고 말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고에 모든 사람들은 한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하였다. 무당의 제자들과 삼로, 세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그러나 서문표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자약했다. 잠시 기다리던 그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흠, 무당이 어찌 이리 늦을까? 혹여 이미 너무 늙어버린탓에 걸음걸이가 말을 안 듣는 것일까? 그렇다면 젊은 제자를 보내 재촉해야겠구나."
그러자 사내들은 옆에 있던 무당의 제자를 잡아다 곧바로 강물에 내던졌다. 주위에 둘러서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야'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손치양을 하고 지켜보던 서문표는 '아니야, 아니야' 라고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수제자가 어찌 이리 늦는단 말인가? 둘째 제자가 사부와 사제에게 어서 오라는 말을 전해주게. 우리가 기다리고 있노라고……."
남자들은 또 다른 수제자를 붙잡아올렸다. 제자는 공포에 질려 찢어지는듯한 비명을 질러댔지만 여러 사내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도 강물에 빠져 바둥거리다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미 세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서문표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서문표는 강가에서 붓을 머리에 꼽고 허리에 굽히더니, 공손히 기다리는 자세를 취했다. 이 모든 난리가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는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서문표는 손바닥을 탁 치고 소리쳤다.
"아! 드디어 알겠구나. 무당과 두 제자는 모두 여자라 그런 것 같소. 본래 계집들은 말을 잘 못하지 않습니까? 이보게! 삼로는 평소에 백성들의 교화를 맡아 입심이 좋을테니, 하백께 가서 말을 전해 줘야겠네."
풍덩! 하는 소리가 났다. 수행원들이 삼로를 강물에 집어던진 것이다. 그러자 관리와 아전들은 몹시 두려워했는데, 서문표는 강물을 지켜보다가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무당도, 제자들도, 삼로도 나오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겠소? 이번엔 그대들이 한번 들어가 보시구려."
강가에 있던 세리를 비롯해 평소 무당, 삼로와 결탁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굴던 부호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몸을 부들 부들 떨며 서문표의 앞으로 나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쾅쾅 찧어댔다. 두려워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것이다. 서문표는 엄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세리와 부자들의 머리는 깨져 피가 흘러내렸다. 이쯤 되면 그들이 놀라 더 이상 나쁜 짓을 못할 것이라고 여긴 서문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하백께서 손님들을 오래 붙잡아둘 모양이구려. 오늘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으니, 여러분들도 모두 해산하는것이 좋을 듯 하오."
그러자 부호들과 세리는 대사면을 받은 사람들처럼 한숨을 내쉬며 땅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 모습을보고 살짝 웃음을 지은 서문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어있는 신부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집에 돌아가 보거라. 부모님이 기다리실 것이다."
그때부터 누구도 감히 하백에게 색시를 바쳐야 한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일은 이렇게 해결되었지만, 서문표는 홍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러한 일이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가장 시급히 필요한 일은 치수(治水)를 완벽하게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는 업성 사람들을 이끌고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한 수로를 파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그런 뜻을 헤아리지 못한 백성들은 힘들고 어렵다며 일을 피하려고만 들었다. 그러나 서문표는 아랑 곧 하지 않고 작업을 독려하며 말했다
"수로를 만드는 것은 여러분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자손 후대에게도 유익한 일이오. 지금은 고생이 되겠지만 앞으로는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외다."
2년이 지났다. 열 두 개의 물길이 뚫여 보(洑)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수의 물이 끌어들어져 논밭에 닿자 현 안의 논 중 물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관개가 편리해져 농작물이 많아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크게 부유해지고 개선되었다. 또한 업성의 물난리 역시 훨씬 줄어들었다. 도망갔던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고,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서문표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올리고 존경하였다.
칠백년을 이뤄온 대전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함으로서 사라졌다. 허나 그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하고, 세상은 고조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로 넘어갔다. 종묘가 사라지고, 왕조가 바뀌고, 숟한 영웅과 기인(奇人), 이사(異士)들이 저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다 사라지는 와중에 이미 서문표는 땅 속에서 싶은 잠을 자고 있었다.
한 왕조는 수리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관리를 업성으로 파견하였다. 서문표가 12개의 보를 만든지 수백 년, 이미 오래된 시설이니 지금의 농업 생산에는 잘 맞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관리들은 수로를 합치자고 건의하고 실행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완강한 저지에 부딫혔다. 백성들이 모두 나서서 격렬하게 반대한것이다.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말했다.
"이 수로는 서문표께서 백성들을 이끌고 만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그 분이 계십니다. 현군이 만든 방식을 함부로 바꿀수는 없습니다."
결국 수로를 합치는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 사기 서문표 열전
위(魏) 문후(文侯) 때 서문표(西門豹)가 업(鄴)의 현령이 되었다. 서문표가 업에 부임해서는 장로(長老)를 모아 백성들이 힘든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장로가 “하백(河伯)에게 처자를 바치는 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가난하기도 합니다”라고 했다. 서문표가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업의 삼로(三老)와 아전이 해마다 백성에게 돈을 수백만 전 거두어갑니다. 그 중에서 20~30만 전을 써서 하백에게 처자를 바치게 하고는 그 나머지 돈은 무당과 함께 나누어 가지고 돌아갑니다. 그 시기가 되면 무당이 다니면서 어려운 집안의 딸 중에서 아름다운 처자를 보면 ‘이 처자가 하백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 하고는 곧 폐백을 주고 데려갑니다. 먼저 씻기고 새로 비단옷들을 지어주어서 홀로 있게 합니다. 재궁(齋宮)을 물가에 만들고 붉은 장막을 둘러서 여자를 그 안에 둡니다. 쇠고기와 술과 밥을 갖추어 먹이고, 10여 일을 보냅니다. 그날이 되면 화장을 시키고 시집가는 여자의 상석(床席)처럼 만들어, 여자를 그 위에 앉힌 뒤 물에 띄워 보냅니다.
처음에는 수십 리를 떠가지만 이네 물에 잠깁니다. 예쁜 처자가 있는 집들로 무당이 하백을 위해 처자를 데려갈까 두려워 처자를 데리고 도망가는 집이 많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성 안이 더욱 비게 되어 사람도 없고 더 가난해진 것입니다. 이는 이미 오래 된 일입니다. 그리고는 ‘하백에게 처자를 바치지 않으면 물어 넘쳐 백성들을 빠져 죽게 할 것이다’는 말을 퍼뜨립니다.”
서문표는 “하백을 위해 처자를 바친다는데 삼로와 무당 그리고 부로(父老)들이 처자를 물에 띄우려 하거든 내게 알리기 바란다. 나도 처자를 보내러 갈 것이다”라고 하자 모두 알겠다고 했다.
드디어 그때가 되어 서문표는 물가로 가서 이들을 만났다. 삼로와 아전, 유지들과 마을의 부로가 모두 모이고 이를 구경하러 온 백성들이 모두 2천~3천 명이었다. 무당은 늙은 여자로서 나이가 이미 일흔이었다. 여제자 10여 명이 그 여자를 따르는데, 모두 비단으로 만든 예복을 입고 큰 무당의 뒤에 섰다. 서문표가 “하백의 아내가 될 처자를 불러오라. 내가 예쁜지 못났는지를 살피겠다”라 했다. 처자가 장막을 나와서 서문표 앞에 이르렀다. 서문표가 이를 보더니 삼로와 무당 그리고 부로를 돌아보며 “이 처자는 예쁘지가 않다. 수고스럽겠지만 큰 무당 할멈이 가서 하백에게 알려라. 다시 예쁜 처자를 구해 뒷날 보내겠노라”라 하고는 아전과 군사를 시켜 큰 무덤 할멈을 물에 던졌다. 조금 뒤 “무당 할멈이 어째서 이렇게 오래 있단 말인가”라 하고는 제자 하나를 물에 던졌다. 또 조금 있다가 “제자도 이렇게 오래 있다니! 다시 하나를 더 보내 재촉하게 하라”며 또 제자 하나를 물에 던졌다. 이렇게 모두 제자 세 명을 던졌다.
서문표는 “무당과 그 제자들이 모두 여자라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삼로들이 수고스럽지만 들어가 하백에게 알려라”라 하고는 삼로를 물에 처넣었다. 서문표는 털 비녀를 관에 꽂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물을 향해 한참을 기다렸다.
장로와 아전들, 그리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겁을 먹었다. 서문표는 이들을 돌아보면서 “ 무당과 삼로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이를 어찌 한다는 말인가”라 하고는 다시 아전과 고을 유지에게 한 사람씩 들어가서 재촉하라고 했다. 그러자 모두 이마가 깨지도록 머리를 조아리는데 피가 땅위에 흐르고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서문표는 “좋다. 잠깐 멈추어 기다려보거라”라 하고는 잠시 뒤 “아전들은 일어나라. 하백이 손님들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것 같다. 너희들은 돌아가도록 하라”라고 했다.
업의 아전과 백성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며 이후 감히 다시는 하백을 위해 처자를 바쳐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서문표는 곧 백성을 동원해 12개의 도랑을 파서 강의 물을 끌어서 백성들의 논에 대니 이로써 논에 모두 물이 대어졌다. 당시 백성들은 도랑을 만드는 것이 번거롭고 힘들다고 여겨서 하려 들지 않았다. 서문표는 “백성들이란 이루어지고나면 즐거워하지 함께 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이제 부로와 자제들이 나를 원망하지만 100세 뒤에는 부로와 자손들이 틀림없이 내가 한 말을 생각할 것이다”라 했다.
지금까지도 이 수리(水利) 덕분에 백성들이 풍족하다. 12개의 도랑이 천자의 치도(馳道)를 가로지르고 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지방의 수장과 관리들은 12개 도랑의 다리가 천자의 행차하는 길을 끊으며, 또한 그것이 서로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도랑의 물을 합치되 치도 부근의 세 도랑을 합쳐 하나의 다리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자 업의 부로들이 이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서문표가 해 놓은 일이니 어진 사람의 방식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여긴 것이다. 관리들도 결국 이 말을 받아들여 그대로 두었다.
그리하여 서문표는 업의 현령으로 이름을 천하에 날리고, 그 은택은 후대에까지 흘러 끊어진 적이 없었으니 어찌 어진 대부라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