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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15 11:27:20
Name aura
Subject [일반] [단편] 새벽녀 - 5
지난 4편에 댓글이 4개나 달렸더군요.
더 힘내서 써보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몇 초간 우리는 하얗고, 빨간 얼굴로 서로를 마주 바라봤다.
아픈 탓인지 심장과 목의 고동이 둥둥 울렸다. 유체이탈을 한 것만 같은 붕뜬 기분이 들었다.
거울은 볼 수 없지만, 아마 지금 나는 억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머쓱한 소리를 했단 자각이 들었다.


반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하윤이의 표정에 많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놀라움, 고마움, 씁쓸함, 외로움, 아쉬움... 그러다 다시 장난끼 넘치고, 은근한 미소가 걸려있던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저씨..."
"응?"
"못 본 사이 능글 맞아졌네요?"
"그런가...? ..."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생각해보니 하윤이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순순히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생각해도 그렇죠? 처음 봤을 땐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처음부터 느꼈지만, 아저씨 완전 고슴도치 같아요! 쿡쿡."


사람보고 고슴도치 같다니, 약간 억울했지만 하윤이가 즐겁게 쿡쿡 웃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피식 웃었다. 곧이어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걸을래요?"
"응."


오랜만의 조우였지만, 전혀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립고, 따뜻한 느낌이 들어 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만나면 하고 싶고, 묻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질 않았다.
우리는 그저 말없이 함께 걸을 뿐이었다. 고작 걷는 것 뿐이었지만, 슥 곁눈질로 나란히 걷고 있는 하윤이를 볼 때면,
마음 속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10분 쯤 걸었을까? 하윤이가 정적을 깼다.


"오래... 기다렸어요?"
"응."


안 그래도 열이 올라 발갛게 열꽃이 올랐을 내 얼굴이 더욱 화륵 낯 뜨거워졌다.
하윤이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대놓고 인정하기가 다소 쑥쓰럽고, 부끄러웠지만 솔직해지고 싶은 시간이었다.


"진짜네요. 헤헤."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진실의 수정구슬처럼 하윤이의 두 눈이 반짝였다.
마치 사람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저씨, 왜요? 왜 기다렸어요?"


하윤이의 얼굴엔 어느새 짖궂은 장난끼가 걸려있었다.


"그냥?"
"땡, 완전 거짓말."
"자랑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나 다음 주에는 면접보러간다? 운 좋게 서류합격을 두 군데나 했어. 하하..."


살짝 민망함이 밀려와 머쓱함에 볼을 긁적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축하해요. 거 봐요, 착한 사람은 역시 먼 길을 잠시 돌아갈 뿐이라고 했잖아요. 아마 분명 잘 될거에요."


하윤이가 그렇다고 하니,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떙! 반은 거짓말."


하윤이의 반응에 나는 두 눈을 꿈뻑거렸다.
반은 거짓말이라니... 하윤이를 기다렸던 날들은 곰곰이 되새겼다.
하윤이의 말이 틀린 것이 없음을 스스로 깨닫는다.
어쩌면 이 아이는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독심술이라도 배운 건가?
기왕 솔직해지기로 한 것, 더욱 솔직해지자. 내 스스로에게도.


"거, 걱정..."
"뭐라구요? 잘 안 들리는 걸요?"


하지만, 때로는 솔직해지는 것이 무척 힘든 법이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달하려고 하니 나도 모르게 손발이 오그라들어
목구멍 밖으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하윤이는 재밌다는 듯이 양 손을 귀에 가져다 대고 나를 재촉했다.


"걱정돼서, 지난 번에 네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갔잖아. 그 때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걱정됐어. 그래서... 기다렸어."


거울이 있다면, 내 얼굴을 지금 당장 보고 싶었다.
물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당연히 홍당무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올라 있겠지.


"... 딩~ 동댕. 진짜네요. 걱정되어서 기다렸다는 거."
"맞아."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역시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웃고 있는 하윤이의 얼굴을 마주하자니 어쩐지 몸 속 어딘가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그리고,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서로 보폭을 맞춰 걷던 걸음이 멈춰섰다.
슬픈... 표정이겠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딱히 미안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의아했다.
기약도 없던 만남이었다. 단지 나 혼자 기다렸을 뿐인데 그리 미안해 할 건 필요까지도 없었다.


"뭐야, 그게. 나 혼자 제멋대로 기다렸을 뿐인데. 미안해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


오히려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면 이 쪽이 더 미안해진다.
툭 고개를 늘어뜨린 하윤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요."


하윤이가 혀를 뺴꼼 내밀며 베시시 웃었다. 하지만, 보통 때와는 다르게 그 미소가 슬프게 느껴졌다.


"그치만 아픈 것 맞죠? 아프지 마요."


하윤이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손이 포근하게 내 이마를 덮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이 가라앉는다.


"너는? 너는 괜찮은 거야?"


오히려 그런 걱정은 내가 하고 싶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마에 얹어진 하윤이의 손을 붙잡아 내리며 물었다.


"저는... 저는 괜찮아요."
"혹시 어디가 많이 아픈 건 아니지?"
"... 아픈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저씨,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고 걱정하지 마요."
"땡... 거짓말."
"네...?"


나에게 하윤이처럼 속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지금 하윤이의 말이 어렴풋이 진실이 아니란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그거 내 건데."
"어쨌든 거짓말 이잖아."
"진짜에요. 아픈 건.. 아픈 건 아니에요."


그렇게 하얗게 질린, 창백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누가 그 말을 믿겠어.
반박하고 싶었지만, 믿어달라는 듯한 하윤이의 표정에 애써 꿀꺽 말을 삼켰다.
순간, 하윤이의 표정이 고통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어? 처음으로 보는 찡그린 그녀의 표정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음... 우리가 혹시 언제 만난 적이 있었나? 낯이 익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뭐에요. 그게? 우리 벌써 이번에 네 번째 보는 걸요? 나 재밌으라고 하는 소리에요? 쿡쿡."


하윤이가 한 손으로 입을 거리며 키득거렸다.
하윤이의 말대로 바보같은 질문인 건 할 떄부터 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벌써 여러차례 만났으니까.
가끔씩 이런 쓸데 없는 데자뷰가 느껴질 때가 있다니까.
나는 애써 기묘한 기시감을 떨쳐냈다.


그리고 그 순간, 뜨거운 뺨에 차가운 알갱이가 달라 붙었다.


"아저씨! 눈 와요!"


자그마한 눈깨비가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펑펑 내리는 함박 눈도 아니건만, 하윤이는 즐거운 지 한결 훨씬 나아진 얼굴로 손을 뻗쳐 떨어지는 눈깨비를 잡고 있었다.
묘한 구석이 있지만, 이런 걸 보면 애는 애네.


"그러게. 첫 눈 인가?"


올 겨울 첫 눈이 맞는 것 같다.
낮에 하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정확할 진 모르겠지만, 내가 첫 눈이라고 생각하면 어쨌거나 그게 첫 눈인 법이었다.


"하하하. 어쨌거나, 조금만 더 같이 걸어요."


눈꺠비 몇 알이 머리에 걸린 채 하윤이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겠어?"
"정말 아픈 거 아니래도요. 아마 아저씨보단 제가 튼튼할 걸요?"


다시 하윤이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같이가!"


잽싸게 나도 하윤이를 뒤따랐다.
눈 덕분일까? 하윤이의 얼굴이 훨씬 괜찮아 보였다.
때 맞춰 눈을 떨궈준 구름이 고마웠다.


하윤이는 잔뜩 기분이 좋아져 걷는 내내 재잘재잘 떠들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혹시 꿈이 있어요?"
"글쎄, 딱히 생각해 본적 없는데."
"뭐에요, 그게. 완전 퍽퍽하네. 어릴 때 꿨던 꿈도 없어요?"
"음... 정말 없는 걸 어떡해?"
"정말요?"
"굳이 따지면, 그냥 내 한 몸 잘 건사하면서 잘 사는 거?"
"흐음."
"부모님께도 잘하고, 뭐... 어... 또, 좋은 여자를 만나서 가정도 꾸리고 그런 거지."


내가 말해놓고도 살짝 어이없었다. 이런 걸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의아하기도 했다.


"알았다! 아저씨 꿈은 평범하게 사는 거에요."
"내 꿈이 평범하게 사는 거...?"
"누구나 다 평범한 삶을 원하잖아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그리고 다시 나만의 화목한 과정을 만들고. 어떤 죄책감 없이 떳떳하게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거요."
"그런 걸 꿈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럼요! 꿈은 단순히 직업적이나 사회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게 아니니까요. 사실 진짜 꿈은 내가 무엇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가 아닐까요? 뭣보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 생각보다 찾기 어렵잖아요. 어찌보면 이루기 쉽지 않은 꿈이에요. 좋은 꿈이죠."


단순한 말이었지만, 그 뜻이 심오하게 다가왔다.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쿵 얻어맞은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방황하고 있지만, 사실 그 방황조차 평범한 삶이라는 내 꿈에 다가가기 위한 준비단계일 지 모른다.


"맞아, 나는 좋은 꿈을 갖고 있었네. 하하."
"맞아요."
"그리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고."
"맞아요. 칭찬."


하윤이가 살짝 까치발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울컥한 기분이 들었지만, 스스로 나는 아저씨라며 울컥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이 든 아저씨는 어린 여자 앞에서 울지 않는 법이다.


"정말, 부러워요."


순간 하윤이의 표정이 무척이나 쓸쓸해보였다.


"하윤이 네 꿈은?"
"..."


하지 말았어야하는 말이 해버린 걸까. 하윤이의 표정이 더욱 슬퍼졌다.


"저는... 제 꿈은..."


고요한 새벽, 집중하지 않아도 또렷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모양에 집중했다.


"없어요. 하하."
"뭐야 그게. 퍽퍽하게."


하윤이가 베시시 웃어보였다. 더 캐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멋쩍은 상황에 먼저 슥 앞서 걸어나갔다.


'저는 꿈을 꾸면 안 되는..., 어쩌면 이 상황 조차...'


뒤늦게 따라오던 하윤이가 중얼거렸다. 워낙 작은 혼잣말이었기에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아뇨, 아무것도."


우리는 다시 나란히 그렇게 10분을 더 걸었다.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분위기에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


오늘은 내가 먼저 물었다.
하윤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마치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이죠. 아저씨."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또 볼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언제든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늦지 않을 게요. 고마워요."


하윤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몸이 아프고, 첫 눈이 내리고, 솔직한 밤이었다.
평소와 유달리 달랐던 그 날은 내가 먼저 몸을 돌려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




6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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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둣돌
20/12/15 11:47
수정 아이콘
점점 더 불안감이 증폭되는군요.
왠진 결말이 슬플 것 같아요.

"누구나 다 평범한 삶을 원하잖아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그리고 다시 나만의 화목한 과정을 만들고. 어떤 죄책감 없이 떳떳하게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거요."

'화목한 가정' 오타인가?
'과정'도 나쁘지 않은 단어선택 같네요.
묘한 라임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20/12/15 11:49
수정 아이콘
오타 아닙니다. :)
오늘도 감사합니다 노둣돌님.
20/12/15 14:24
수정 아이콘
뭐 잘 읽고 있습니다.
20/12/15 14:3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술 한잔 해요
20/12/15 14:30
수정 아이콘
재밌어서 매일 기다리고 있습니다 ~
20/12/15 14:3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답이머얌
20/12/15 16:05
수정 아이콘
한편의 로맨스 소설이군요.

사실은 불치병~ 이렇게 흘러가면 재미없어지는데...

여초카페에 올리면 여기보다 더 반응이 좋을것 같은데요?
20/12/15 16:37
수정 아이콘
댓글 감사합니다 :) 어디에 연재하면 좋을 지 몰라 일단은 피쟐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혜정은준아빠
20/12/15 23:00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20/12/16 08:3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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