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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7 15:45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선 일본에 거주할적 벌써 이십여년전이지만
궁금해서 관련서적을 여럿 뒤지고 사서도 봤습니다만 일단 결론적으로 제가 본 일본측 저서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이었고 부정적인 제일근거로 임나일본부 자체가 실질적으로 백제왕의 절대적 통제하에 있었다는게 일본측 저서들에 자주 보이던 사유였습니다. 일본이 지배목적으로 세운 정치기구인데 왜 백제왕의 통제하에 있었나를 설명할수가 없다였고 개중 정치목적의 기구나 집단이 아닌 상업적 교류가 주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민간인 집단거주이 변질되 기술된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고 그냥 후대에 만들어진 설이다 라고 하는 양반 그나마 좀 일본 우익들이 솔깃할만한 설로는 일본내 특히 규슈일대에서 세력잡고 있던 실체는 해적에 가까운 세력들이 당시 호족들 발호에 골치아파하던 백제와 일종의 고용관계로 들어왔다 여기 주인없네 하고 자리잡고 주인행세한거다 라는 개인적으론 좀 웃겼던 류의 설도 있었네요
22/07/17 15:48
사소한 얘긴데 , 백제 자체가 유독 내부 단도리에 애먹은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
중앙집권이 녹록치 않았던 고대 국가들 중에서도 유독 튈 정도로요 . 말씀하신 바 처럼 왜가 그런 틈바구니를 파고 들었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
22/07/17 15:57
전부 민족주의적 사고관에서 나오던 얘기들이네요.
민족주의가 극으로 치우치고 긍정적인 효과보다 사회적 부작용이 훨씬 더 커지는게 보이는 시점인데 앞으로는 탈 내셔널리즘이 더욱더 트렌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2/07/17 15:59
학계에선 충분히 탈 내셔널리즘이 자리잡았다고 봅니다만 , 일반에 있어선 솔직히 마냥 긍정적으로 예측하질 못하겠네요 .
역으로의 부채질이 워낙 심하고 잘 먹히는 사회라... 그나마 예전에 비하면 그런 일련의 움직임을 ' 국뽕 ' 이라 지적할 수 있게된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라 보긴 합니다 .
22/07/17 15:58
4.a 같은 경우는 좀 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건 맞는 말 같은데, 꼭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친일 세력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성제대는 커녕 아예 일본 본국의 대학에서 수학하고 오시고도 대한독립에 힘쓴 윤동주 같은 분도 계시잖아요.
다만 한국 사학계와 역사 교육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영향을 받았으므로 오염된 사관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이건 어느정도 프로파간다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2/07/17 16:03
음... 제가 글을 좀 이상하게 쓴 탓이겠지만 , 저 역시 ' 어쩔수 없는 친일 ' 이라는 라벨링을 박아놓고 얘기를 이어나간 게 아닙니다.
그런 라벨링을 붙이는 행위 자체가 난센스라 보는 입장이구요 . 학문적 조류와 풍토에 관한 판단을 저같은 문외한이 왈가왈부 하는 게 참 어줍잖케 느껴집니다만 , 아무리 늦게 잡아도 90년대 이전에 이미 극복한 걸고 알고 있습니다 . 분명 그 그늘이 있었고 벗어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 뒤따른 건 사실이구요 .
22/07/18 08:59
해방 이후 사학계를 대표했던 이병도 교수가 식민사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연구 결과들이 추앙받지도 않았습니다. 당장 제자였던 이기백 교수부터가 비판적으로 접근하기도 했고요. 학계는 오히려 이병도 교수가 내놓았던 연구결과들을 반박하며 성장했죠. 한국 사학계=식민사관이라는 주장은 어느정도 프로파간다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백프로 프로파간다입니다.
22/07/17 16:46
역사 관련 교양들으면서 놀랐던게
독립군의 규모는 막연한 인식보다 작았다: 예를들어 청산리 전투의 경우 청산리 대첩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서 그런지 꽤 큰 인원이 동원된 전투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밖에도 대부분의 독립군 규모가 몇십명 내지 몇백명대였단 사실에 놀랐습니다 어쩐지 교과서에서 항일무장단체 이름이며 조직이 5년단위로 바뀐다했었더니 이게 조직이 다들 소규모였더라구요. 그 조직들도 사상의 차이로 대립 반목하기도하고 자유시 참변에서 크게 소멸되기도하고… 대한광복군 진공작전도 300명 가량의 인원이 동원될 작전이었단 사실도 대학가서 알았습니다. 진공작전이라기에 어느정도 규모가 되는줄알았거든요… 김구의 탄식도 유명했어서
22/07/17 17:12
뭐 , 그 공동체에의 헌신과 의연함을 기리는 것 자체야 보훈의 연장선상에서 충분히 수긍합니다만 , 그걸 감안해도 뻥튀기가 좀 너무했죠 .
그냥 여러모로 비빌언덕 없이 컴플렉스만 만땅으로 차있었던 시대의 한계려니 합니다 .
22/07/17 21:26
당연히 현 대한민국과 같은 징병시스템은 꿈도 못꾸고 국외에서 애국심에 호소해서 병력을 모아야 했으니깐요. 중요한건 독립군 개별 부대의 규모가 아니고 국권침탈 이후 해방 때까지 끊기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투쟁이 이어졌다는 것이죠. 군이라 부르기 민망하다고 말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22/07/17 16:56
근데 광개토왕은 생애를 보면 백제-왜랑 가장 열심히 싸운 양반이라, 그게 아마 자기 나름대로는 짧은 생애동안 한반도 방면에 전력을 다한 결과였을겁니다.
오히려 광개토왕비 보면 후연이랑 싸운게 비중이 적죠. 정미년 기사의 대상이 후연이 아니라면 아예 한건도 안나오는셈... 한반도의 일본식 고분같은 경우는 제가 공부할때는 백제에 종사하던 왜계관료설을 주로 배웠던거같은데, 외국에서는 어떻게 보나 궁금하긴 하네요 크크
22/07/17 17:15
아 , 맞아요. 그런 얘길 접한 기억이 나네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한반도 내부 패권확립에 진짜 전력을 다했다고 .
써놓고보니 본문이랑 완천 상충되네요. 크크 헌데 고분은 일개 관료의 것이라기엔 엄청 규모가 크지 않나요? 전방후원분인지 뭐시긴지 원래 지네 땅에서도 당시엔 엄청 크게 만들긴 했지만서두...
22/07/17 20:08
전방후원분 같은 경우에는 왜가 해당 지역에 지속적으로 영유권을 행사하고 있었다기엔 그 수가 너무 적고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에 세워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일본 왕들이 데려온 왜계 관료, 무사집단의 무덤이 아닐까 싶습니다.
22/07/17 17:19
근대 일본 흐름도 사실 복잡한게...아시아의 덜떨어진 친구들 틈에서 벗어나 서구와 대등해지자는 탈아론이랑, 아시아의 이웃들이 서로 힘을 합쳐 서구의 위협에 맞서자는 아시아주의라는 두개의 상반된 세계관이 서로 길항하면서 나아갑니다.
다만 우리 입장에선 탈아론이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해주는 악일것 같은데, 실상 상황에 따라 아시아주의가 더 큰 사고를 치기도 한다는게 재밌는 부분이죠 (대표적으로 2차대전때 일본의 세계관이 극단적으로 비대해진 아시아주의의 귀결)
22/07/17 17:27
아시아주의의 기원이 꽤 이르게 나왔던 거군요?
그냥 대전 후반기로 접어들어 제 논에 물대기 격으로 나온 주장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 ...라고 쓰고보니 일본을 동아시아의 선구자로 인정한 안중근과 쑨원이 생각나네요 .
22/07/17 20:28
우리는 아시아랑은 다르다!!! 서양도 이겼다!
서양! 우리는 친구지??? 서양 : 뭐래 크크크크 부들부들 아시아! 아시아주의로 간다! 아시아는 모두 하나다 (모두 내꺼다. 내가 대빵이다)
22/07/18 13:41
나름 그 당시만 해도 영국 프랑스 이런애들이 어디 먹을거 없나 두리번거리는 상황에서 열강들이랑 비벼볼 수 있는(무려 러시아도 이겼던..!) 체급을 가진 유일한 아시아 국가긴 했죠….
근데 유럽 애들을 몰아내고 우리가 해먹겠다 로 가니까 이게 크크크
22/07/17 18:55
1.
요서경략설은 코리아타운 느낌으로 이해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신라방의 사례도 있고요. 물론 이렇게 처리하면 무역하기에는 요서보다 산동이 훨씬 편한 점, 백제 수군이 고구려보다도 약한 점, 무역을 했다는 기록이 가야보다도 적은 점, 그리고 동성왕 시대에 북위와 전쟁했다는 기록이 붕 뜨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만... 상관 설치가 군사 주둔지로 이어진 적이 있었다고 칠 수는 있겠죠. 2. 임나일본부설의 경우, 당시 왜국이 바다 건너에 행정기구를 두어 지배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다만 백제가 왜인들을 용병으로 자주 끌어다 썼던 것은 맞고, 왜국 귀족들 중 상당수가 도래인(특히 백제계 도래인)이며, 심지어 덴노의 가문까지 백제와 연관이 깊다는 설이 있는 만큼(일단 무령왕 후손론은 인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죠) 왜국계 용병대장이 백제왕의 신하로서 한반도 남단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백제와 왜의 사이가 형제자매 수준이었을 경우). 좀 먼 이야기이지만 흑치상지의 사위가 일본인이었다는 추측도 있고 말이죠. 3. 만주에 힘의 공백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생각해 보면 그때만 힘의 공백이 있었나 싶고, 통일중국 같은 1극이 없었다 뿐이지 당시 고구려의 전력을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보았을 경우' 숙신 외에는 만만한 세력도 없었죠. 비유하자면 만반도의 one of them이었던 고구려가 one and only로 바뀐 게 광개토대왕 덕분인데, 그때는 뼈대만 늘려놓은 시점이니 나제동맹에 밀리는 것도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 공갈빵의 속을 채우는 과정이 평양천도, 추군과 세군의 난 정도가 되겠고... 그때까지 어떻게든 주력을 보존한 결과 평원왕~영양왕 치세부터는 뼈에 살이 오르고 근육이 붙어서 광개토대왕 시기와는 동원력 자체가 달라지죠. 문제는 그때가 되면 통일중국이 주적이라 한반도에 정예군을 투사할 수 없었을 뿐. 4. 자본주의 맹아론을 열심히 주장했던 게 한국 사학계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식민사관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봅니다. 일제강점기 사학의 주장을 한국 사학계에서 계속 비판적으로 검증해오기도 했고, 일제강점기 역사 자체에 대한 연구도 한국 사학계에서 했는데 그때는 정작 민족주의 사관이 강해서 아직까지 교과서에 반영되어 있기도 하죠.
22/07/17 21:14
국내 교과서도 좀 문제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뻔히 몇세기에 한반도의 청동기가 시작되었는지 잘 적어두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기원전 2333년전 부터 시작한다 라고 자기 말은 안하면서 인용하는 식으로 뻥튀기들이 들어가죠. 이제 안그래도 될 거 같은데.
22/07/17 21:23
조심스럽게 태클걸자면 기원전 2333년은 삼국사기가 아니라 삼국유사입니다. 아시다시피 삼국사기는 정사고 삼국유사는 야사라 삼국유사에는 신이한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있고 몇몇 내용은 참고만 할뿐 정사로 취급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있는 이차돈 순교의 흰 피 같은 내용들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입니다.
22/07/17 21:38
2333년은 통국통감이 맞습니다. 제가 실수했네요. 삼국사기를 윗 댓글에서 언급하셔서 급하게 쓰다보니 삼국유사에서는 경인년이랑 정사년을 언급했는데 혼동해서 2333년이라고 써버렸네요.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2/07/17 22:16
뭐 위만 이전을 싹 날릴거 아니면 그런식으로 몇자 쓰는거 외엔...아직 뭐라 정설로 써먹을것도 잘 없어서...크크
어쨌든 유교적 사상을 기반으로 요임금 즉위에 플러스마이너스로 아다리를 맞춘거라하더라도 굳이 언급 안할 이유는 없....(사실...그런 사서들도 연대가 대충 기원전 2300년대~2200년대까지 와리가리쳐서...)
22/07/18 08:58
주말에 임나일본부설 관련, 고대 일본어족(한반도 남부) - 고대 한국어족(발해+한반도 북부) 의 갈등설을 얘기한 글을 봤었네요
꽤 그럴듯해 보였는데 크크
22/07/18 10:26
초록불님 블로그 같은 곳 자주 다니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그 때는 이글루스에서 역덕들 블로그 즐찾해놓고 읽는게 취미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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