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초하면 흔히 삼별초가 떠오르실겁니다.
별초라하면 본래 고려시대 특별히 뽑은 정예병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무신정권 시기 경대승이 자기 보호를 위해 도방을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정권보호를 위하여 본래 고려 정규군으로 갔어야할 정예장졸들을 모두 자기 사병으로 만들어버리면서 뜻이 변질되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이 별초가 정규군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고려 정규군은 사실상 유명무실화됩니다. 본래대로라면 정규군으로 가야할 인원을 모두 개인의 사병으로 돌려버렸으니 정규군이란게 있을 수가 없었고 이는 당연하게도 실제 전쟁이 터지자 고려가 제대로 된 대응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최씨 정권 입장에서 자기 정권수호를 위한 병력을 몽골과의 전쟁에서 소모할리가 없었거든요. (강화도에 틀어박힌 이유도 이거였고요)
무신정권이 끝난 뒤 고려는 원나라의 내정간섭이 이어졌고 당연히 정규군의 부활은 꿈도 못 꾸게 됩니다. 결국 어찌저찌 공민왕 시절에 와서 군제개편을 다시 해보지만 고려 초기처럼 정규군을 통해 전면전을 치룰 정도로 개편을 해내질 못합니다. 사실상 이때도 말만 군제개편이지 사실상 호족(가문)들의 사병을 모아서 전쟁을 치루는 형태였습니다. 간단하게 삼국지의 오나라를 생각하면 (완전히 들어맞는거 아니지만) 대충 이해가 가실겁니다.
고려 후기에 가면 별초가 이젠 가별초라 불리웁니다. 별초는 위에 썻듯이 정예병력을 의미하는 데 여기에 [가]가 붙었으니 가문의 정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별초가 고려군에서 뽑은 최정예 병사들을 의미했다가 무신집권자들을 보호하는 집권자들의 사병이었다가 이제 개개인, 가문의 정예 사병이 된겁니다. 당연히 힘 좀 있고 돈 좀 있다는 가문들은 전부 사병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냐?
앞서 말한대로 무신정변 이후 고려 정규군이란건 없었고 각 지역의 호족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스스로 사병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원간섭기를 넘어 공민왕 시기를 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심지어 조선초 태종이 사병혁파를 하기전까지 계속 이렇습니다..(..)
가별초가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바로 토지와 관련되어있습니다. 길게 쓰기엔 제 지식이 짧아서 대충대충 쓰자면 결국 저 사병이란건 평소에 돈먹는 하마인데 도대체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걸까요?네 당연히 대규모 농장에서 나옵니다. 무신정변 이후 고려는 제대로 된 나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나라였습니다. 당연히 일반백성들에겐 지옥같은 곳이었죠. 반면 대규모 토지를 갖고 농장을 갖춘 이들은 당연히 그에 걸맞는 노비들이나 사병들이 있었습니다. 비상시에는 사병이었던 것들이 평상시엔 대규모 농장을 운용하는데 쓰이는 인력이었던거죠. 이 문제는 고려말 이성계와 조준에 의한 토지개혁으로 일단 박살내고 태종의 사병혁파로 마무리 짓습니다. (물론 이후 공신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이 가별초중에서 당대 가장 유명한 가별초가 바로 이성계가 이끄는 동북면의 가별초입니다.
본래 가별초라는 게 막 엄청 대규모일 거 같긴하지만 인력도 물자도 어느정도 한계가 있기때문에 아무리 많아봐야 특정숫자를 넘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동북면 일대 전체를 자기 지역으로 부리고 있는 이성계 휘하에 무장 병력이 최소 2000명이 존재했습니다. 단순히 보병만 있는게 아니라 기병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다고 봐야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고려 정규군이란 게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는 상황에서 한 개인이 한 가문의 사병이 (기병 포함) 2000이라는 건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인임이 괜히 이성계를 경계하고 최영에게 이간질을 시켰던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이인임이 그토록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간질에 그치고 아무런 조치조차 취할 수 없었던것도 이성계가 갖고 있는 무력이 당대 고려내에서 그 누구보다 강하고 많았기때문이죠.
그렇다고 이게 오합지졸이거나 단결력이 부족하거나 그러면 모르겠는데 저 사병이란게 이성계 혼자 만든게 아니라 5대에 걸쳐 만든 집단이라는 게 정말 무서운 점입니다.
전주에서 고을 현감과 현피떠서 삼척으로 삼척에서 다시 동북면으로 쫓겨나듯 빤스런한 이안사는 이미 전주에서 떠났을떄부터 200호에 가까운 인원들을 데리고 빤스런을 할 수 있었을정도로 수완이 좋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바로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손자이자 이성계에겐 5대조가 되는 사람으로 이때 원나라에게 항복하고 이 곳에서 자리잡은 뒤에 세력이 커졌고 이후 이자춘-이성계 부자가 다시 공민왕에게 귀부하면서 이때에 이르렀죠
그렇다고 이들이 실전경험이라도 없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미 이성계 나이 20대에 함흥평야 회전에서 가별초 기병을 이끌고가서 나하추를 우주대관광 안드로메다 특급열차로 보내버린 건 물론이고 1차 요동정벌에도 참가했음은 물론이고 개경으로 쳐들어온 20만의 홍건적을 개경에서 몰아내고 온갖 반란군들을 다 씹어먹은 뒤 준동하는 여진족들 다시 한번 더 떄려잡아주고 왜구가 쳐들어왔고 심지어 최영이 위기에 빠졌다니깐 가서 최영 구해주고 왜구 개박살내더니 황산에서는 아예 온 동네를 왜놈들 피로 물들여버리는 등 요동에서 한반도 남쪽까지 온갖곳을 다 누비면서 싸우는 족족 상대를 우주관광 보내버렸습니다.
과장좀 보태면 당시 이성계가 이끄는 가별초는 당대 동북아 최강의 [사병]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몇몇 오해가 있기도 했지만) 괜히 홍무제가 정도전과 이성계에게 심술부리며 발광을 떤게 아닙니다.
(물론 오해하면 안되는게 그렇다고 해서 진짜 천하무적에 명나라까지 조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정도의 병력이 관군도 아니고 개인,가문의 사병인데다 100년이 넘는 기간 한 가문에 충성한 집단이랍니다. 믿겨지십니까? 과연 여러분이 고려의 왕 혹은 조정의 실권자라 생각해보세요 이성계에 대한 경계심이 들까요 안들까요. 공민왕이야 당장의 반원정책 + 영토 회복과 함께 여러모로 힘이 되어준 존재니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후 집권하는 이인임이나 우왕이나 이성계는 정말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설사 최영이 요동정벌을 감행하지 않고 위화도 회군이 없었다고 해도 과연 이 이성계의 가별초를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 있었을까요? 이미 이때 최영은 당시 기준으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습니다. 회군이 아니더라도 결국 이성계의 야심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없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미 이때도 전쟁영웅으로 정도전 조준등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던 판인데요. (심지어 회군하던 그 시기와 공양왕을 세울떄까지는 정몽주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ps. 나라에서 통제가 불가능하거나 정말 어려운 수준의 무력을 한 개인이 보유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역사의 답은 항상 한결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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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위화도 회군 전 이성계와 조민수가 회군을 허락해달라고 조정에 주청을 올렸을 때부터 쿠데타가 예고되었고, 학계에서도 이성계가 자신의 근거지인 동북면으로 떠나려 한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린 게 이성계 일파라고 보고 있죠. 이성계는 당시 수문하시중에 올라 중앙 정계에 진출한 상태였으나 여전히 이방인으로 인식되던 인물이었고, 그런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떠난다 = 고려를 버린다와 같게 봐도 무방해서 소문이 떠돌자 당시 원정군 특히 조민수의 심기가 요동쳤던 것이고요.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팔도도통사였던 최영이 함께 출진을 했다면 그 당시에는 감히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나 그나마도 우왕이 최영을 가지 못하도록 만류하여 결국 사변이 벌어졌죠. 뭐 말씀처럼 최영이 죽은 뒤엔 결국 이성계를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