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4/05/24 23:47
(잡담3) 에 대해서는 1970 년대부터 이미 신경 과학자들은 많이들 알고 있던 얘기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위세가 너무 강해서 널리 퍼지질 못했고, 40년이 지나오면서 증거가 점차 많아짐에 따라 적어도 철학자들은 이젠 받아들이는 쪽이 대세로 알고 있습니다.
(4b) 에 대해서, 데닛의 감각질에 대한 반론을 생각해보면, '내가 맥주를 처음 마셨을 때 나는 그것을 하수구에서 흘러나온 폐수 같다고 느꼈다. 지금은 맥주를 아주 좋아하지. 감각질이 변한 것인가 맥주 맛이 변한 것인가?' 라는, 마찬가지로 직관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경험적인 감각질' 즉 'raw sensation' 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호소합니다. 한참 키배를 벌이다가 문득 키보드 위에 놓인 개미를 인식하는 것도 좋은 예지요. 분명히 한참 전부터 시신경에 그 개미 이미지는 잡히고 있었으나 우리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즉 감각질 이라는 것 역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이차 가공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14/05/25 00:15
감각질을 굳이 단일하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데닛의 반론은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컨디션에 따라 같은 맥주도 다른 맛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맥주가 A맛이었다가 B맛으로 느껴진다고 해서 A맛과 B맛이라는 감각질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무관하게 도저히 물리적으로 해명되진 않을 것 같다는 직관 정도만 받아들여지면 되는 것 같습니다.
책에 나온 내용도 아니고 저 자신도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컴퓨터에서 모니터나 스캐너 등을 사용할 때에 정작 컴퓨터는 '색상'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과 유사할지 모른다는 반론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에게 확실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요.
14/05/25 12:28
사실 감각질 개념이 워낙 심하게 직관적인지라 부정하기 힘들긴 합니다. 근데 환원주의쪽 말고는 딱하니 의식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찾을 수 없고, 환원주의에서는 감각질을 허용하지 않으니.... 일단은 머리로는 부정, 감성적으로는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남겨둬야하지 싶습니다.
14/05/25 13:36
더 관심이 있으실까 싶어서 씁니다. 관련 논의를 더 추적해보니 비환원적 물리주의에서는 감각질을 이용한 반론을 심화시켜 일반화 논변이라는 반론을 제시한 모양입니다. 환원적 물리주의자들도 그 반론을 어떻게 디펜스하긴 한 것 같은데 그 이후에 대해선 알 수가 없네요. 벌써 10년전 논의인데 말이죠. 첫번째 링크의 2번에 일반화 논변이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링크는 서평이지만 심리철학적 논의의 흐름을 개관할 수 있는 것 같아서 덧붙입니다. (두번째 링크에서 나오는 기능적 환원이 (4a)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http://www.analyticphilosophy.kr/attach/p/11_DHBaek.pdf http://www.analyticphilosophy.kr/attach/p/11_BaekDH.pdf
14/05/25 22:16
감사합니다. 서평은 지금 방금 읽었는데 과연 좋은 개관이네요. 김재권 선생님의 고민도 일정 부분 이해가 되었습니다. 반론 링크는 20페이지의 압박 때문에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글로 뵙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14/05/25 22:41
일반화 논변 글의 앞 절반만 읽었고 잠시 뒤에 나가봐야 해서 일단 읽은데까지만 감상을 적어둡니다. 뭐랄까.... '심신 환원을 주장하려면 다른 것도 다 환원된다고 해야해. 너 그럼 이런 저런 환원도 인정할 거야?' 라는 이야기인데, 이건 마치 '사형을 반대한다고? 니 엄마가 강간 살해당해도 살인자 옹호할 거냐?' 라는 수준의, 좀 치졸한 반론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환원주의자들이 나머지 환원에 반대한다고 하는 것도 아닌 데 그렇게 대단한 반론도 아닌 것 같고, 각 주제별 환원은 해당 주제의 철학자/과학자/사회학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심리 철학자들이 다 코 들이밀 일도 아니겠지요.
개인적으로 창발 현상과 환원 불가능성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지라 (적어도 물리화학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고요), 교묘하게 문맥을 전환한다는 느낌도 조금 들었습니다.
14/05/26 04:12
환원적 물리주의자들이 일반화 논변을 어떻게 방어했는진 모르겠지만 OrBef님의 말씀처럼 심신문제에 대해서만 환원을 주장할 뿐이라며 정색해버리면 끝날 문제인 것 같긴 합니다. 크크.
14/05/26 04:40
음 저는 그런 의미보다는 '엉 환원 다 됨. 근데 디테일은 걔들한테 물어보도록.' 이런 느낌으로 반박하면 그만 아닐까 싶었습니다 흐흐;;;;
14/05/24 23:54
도식 2 가 당연히 맞는 것이긴 한데, 도식 1 은 틀리다기 보다는 간략 버전 아닌가 싶은데요? 비가 내려서 꽃이 피었다 라는 말은 사실 응결된 H2O 가 땅 속으로 침투했다가 근처 식물의 뿌리로 삼투현상 등을 통해서 들어간 뒤 그 식물이 잎파리에서 빨아들인 CO2 와 만나서 광합성을 통해 단백질로 변화한 뒤 생식 기관쪽으로 추가되는는 거지요. 그 중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을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할만한 '비' 와 '꽃' 으로 이야기하는 것일 테고요.
도식 1 을 이해를 위한 간략 버전이 아니라 진정한 인과관계로 보기 시작하면 M -> P* 라는 하향적 인과관계같은 개념이 생겨나나보군요. 저 부분이 고전적인 자유의지 개념이라고 보이는데, 인간에게 직관적일 뿐, 진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저는 확실히 환원주의자군요.
14/05/24 23:59
환원적 물리주의자의 입장에선 도식1은 도식2로 가기 위한 논리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라면 도식2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도식1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리주의에 동의한다면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순 없어보이고요. 도식1에서 멈출 수 밖에 없으니 OrBef님의 두번째 문단에서의 말씀이 맞습니다. 자유의지의 예 또한 맞다고 생각됩니다. 감각질과 마찬가지로 논리와 직관 사이의 딜레마죠.
14/05/25 00:10
그 부분이 사실 명확히 이해가 가질 않는데, 수반은 받아들이지만 환원은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 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어려워서 잘 모르는 게 아니라, 해당 문장이 실제로 의미하는 게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좀 들어요.
14/05/25 00:27
저도 이 부분 때문에 고민하면서 미루고 미루느라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비환원론자의 입장이라는 게 너무 말이 안되니까요. 크크. 제 나름의 결론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들의 주장 말고 [입장]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리주의에 동의하는데 환원적 물리주의는 거부할 수 있겠죠. 이를 그냥 비환원적 물리주의라 통칭하는 것이겠고요. 그냥 비판만 하는 [입장]이라면 비환원적 물리주의는 실체가 없고, 따라서 비판할 수 없습니다. 환원적 물리주의에 입장에선 방어만 할 수 있겠죠.
책에는 비환원적 물리주의에 속하는 몇몇 주장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별 의미가 없어보였습니다. 어쨌든 환원적 물리주의의 입장에서 무의미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비환원적 물리주의일 수 밖에 없는] 주장을 만들어서 비판을 해야겠죠. 도식1에서 멈출 수 밖에 없는 비환원적 물리주의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속성들이 그것들의 인과력에 의해 구분-개별화된다는 전제 또한 그런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 같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허수아비를 치는 건 아닐테죠. 결론적으로 이 논증에서 환원적 물리주의자들은 물리주의는 받아들이지만 환원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환원적 물리주의가 말하는 것은 모순이고 실체가 없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생각하신 바가 맞습니다. 물론 그 뒤에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반론을 제시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책에 소개되진 않았습니다. 다음에 배울 기회가 있으면 이곳에도 소개해보고 싶네요. 논증의 내용을 곱씹어보는 것도 재밌지만 논리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수반과 환원 사이에 자리잡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개념을 분석해서 사실 그런 공간이 존재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고나 할까요.
14/05/25 22:05
신의 본질은 simple함을 전제합니다 composite하면 해체되므로. God is love, God is righteous....God is A,B...and 해서 composite하니까 이러한 지속적 속성을 본질로 보지 않고 신의 실재의 work으로 봅니다 본질은 X로서 단 하나 존재하고 그게 뭔지는 모르죠. 그러나 속성으로 실재를 역으로 구성할 수 만 있으면 즉 환원하면 신은 즉시 해체되죠 환원주의는 이 롱기누스창을 포기하기 싫은거고 실재와 거기에 수반되는 실재의 work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환원주의의 비난을 감수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환원주의가 실재 없이 본질만 있는 것 즉 유니콘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거에요 구분하자는거겠죠.
14/05/26 01:49
음 본문의 대전제는 물리주의 즉 유물론인데 예로 신을 드시는 것은 좀 논점이탈같습니다. 물리주의자들은 형이상학 자체를 의미없는 설정놀음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 지라.
14/05/26 04:09
쓰시는 단어가 익숙치 않아서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부분은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환원적 물리주의를 고수하는 이유에 대해 비평하신 것 같고(롱기누스의 창이라는 비유가 참 좋네요), 뒷부분은 [어떤 물리주의자가 환원적 물리주의를 비판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을 모두 "비환원적 물리주의"라는 입장에 가둬놓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며 입을 틀어막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물리주의자가 환원적 물리주의를 비판하는 지점은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 좋은 지적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간에 계속 공박해야 논리적으로 다듬어지기도 하겠고, (더 이상은 논리로만 커버할 수 없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아니라고 결론이 날 수도 있겠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