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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9/03/05 23:35:21
Name 신불해
Subject '이미지 구축' 과 '스토리텔링' 의 역사에 대한 반발 - 영국의 역사

- 본문 글에서 언급되는 세세한 영국 역사학계의 동향 같은 부분은 영국사를 공부하시는 charger8607님의 좋은 글을 참조하고 허락을 구하고 인용했습니다.







역사라는 주제, 역사학이라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록 서술이 시작된 이래부터 유래가 깊은 작업이었고, 여기에는 '역사를 통해 배우자' 는 목적이 들어있었습니다. 즉, 과거의 역사를 통해 반추해보고 그걸 통해 현대에 있는 자신이 꺠달음을 얻거나... 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역사는 "써먹기 위해 배운다." 는 것이고, 이 말인 즉슨 "써먹을 수 없으면 역사 배우는게 무슨 소용이냐." 는 말도 될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역사를 통해 배우자, 는 것이 된다면 역사를 보는 시선에 어떤 이미지와 나름의 스토리텔링이 생기게 됩니다. 



즉, 어떤 인물이 무능하였기에 이것이 자연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판단으로 이걸 이렇게 했으니, 당연히 뒤에 있는 어떠어떠한 사건으로 가는건 필연적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왔기에, 그 과정에 있었던 일들은 이런 목적이 있었다.... 는 식입니다. 




이런 역사서술의 옛 전통, 역사연구의 흐름을 한 마디로 나타낼 수 있는 말이 한국말로 하면 대서사, 거대서사 이런 말이 될 'grand narrative' 입니다. 결국 무언가로 귀결되는 거대한 흐름....





그러나 현대의 역사연구는 이와 정반대로 진행 됩니다. 현대의 학계에서는 이런 결정론적인 시각을 최대한 피하고, 단순하게 도식화된 흐름을 최대한 샅샅이 분산해서 풀어보며, 한두마디로 사건이나 인물을 뭉뚱그려 정의하기보다는 하나하나 씩 풀어 개별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 봅니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거시사적인 흐름을 도외시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있는 내용이 소설책처럼 매끄러운게 아니라 온갖 혼돈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 하였기에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이었다' 라는 식의, 결정적이고 동시에 교훈적인, 그런 내용은 최대한 배제 됩니다. 더 나아가면 "역사를 연구하는건 당연히 써먹기 위한 것" 이라는 '당연한 것' 처럼 여겨지는 목적에서도 멀어지게 되구요. 써먹으려고 역사를 연구하는것 자체가 이미 어느정도 결정론적 시각으로 역사를 보는게 되니까요. 



즉, 역사는 무슨 도덕도 (교훈을 얻는다는 의미에서의)철학도 아니고, 수학공식 같은 학문 중의 하나로 접해야 한다는거죠. 당신이 그러한 역사를 보면서 따로 교훈을 얻거나 배움을 얻는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목적으로 수단이 되어버리면 이미 거기서 변질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역사서술, 즉 'grand narrative' 에서 이러한 '이미지' 와 '스토리텔링' 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학계가 전환된 좋은 예가 바로 영국의 휘그 사관(Whig history)에 대한 모습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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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영국의 역사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켈트족이 있던 시대부터 중세시대, 대영제국 시대까지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영국의 역사에 대한 이미지야 가지각색이겠지만, 가장 크게 뭉뚱그려 본다면 바로 명예혁명 등으로 인한 '입헌군주제' 와 '의회민주주의', 다른 나라들보다도 좀 더 적극적으로 빠르게 인간과 개인의 권리를 법적으로 규정했다는 이미지 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이미지는 굉장히 멋있고, 가슴 벅차게 만드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영국인들 본인들로서는 말할것도 없는 일이구요.




휘그 사관은 한마디로 말해서 영국의 역사는 점진적으로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와 여러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나아간 진보의 길이었다는 사관 입니다. 이러한 '최종목표물' 은 영국의 역사가 '옳케'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도달 할 수 밖에 없는' 스타크래프트에서 저그가 멀쩡하게 잘 성장하면 해처리가 나중에 하이브가 되는 것과 진배없는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결정론적' 이죠.





근현대 이전에 쓰인 영국의 역사에 관한 저술들은 당연하고, 이런 역사저술에 대한 최신번역이 처참한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나온지도 반백년 전이 되어가는 많은 20세기 중반 무렵까지 나온 영국 역사에 관련된 저서들은, 모두 이 휘그 사관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좀 더 우리나라 사람들 입장에서 와닿게 비유하면 역사의 최종 목적은 '근대화' 고, 역사적 과정은 모두 '근대화를 위한 전진들' 이며, 당시 상황이 어찌되었던 간에 여기에 역행하는것처럼 보이는 모든 행위는 '근대화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 로 보는 것입니다.




근대화까지는 너무 광범위한 주제라 그냥 비유로 든것이지만, 여하간 휘그 사관 역시  '입헌군주제' '의회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를 영국의 역사가 도달해야 했던 최종과제로 잡고, 영국의 역사는 전부 그걸 위한 흐름이었으며, 무언가 보기에 여기에 역행하는것처럼 보이는 일들은 '역사의 반동' 이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가톨릭 교회, 가톨릭 군주, 스튜어트 왕가 등등... 그에 반대적인 '프로테스탄트적' 인것은 근대화를 위한 기를 닦은것처럼 보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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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엘튼 경(Sir Geoffrey Elton 1921-1994)



이런 휘그 사관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도전은 20세기 중반 즈음에 있었고, 그런 여러 학자들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바로 제프리 엘튼이었습니다. 엘튼은 지금 기준에서 보면 정치사 연구 위주의 아주 전통적인 스타일의 옛 학자였지만, 그런 엘튼도 휘그 사관의 큰 전제에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드시 일어나도록 정해진 길' 이라는 게 있다는 게 말입니다.





엘튼은 17세기의 영국 내전을 분석하여 이 일이 결코 '역사가 진보하려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일' 이었다는 것에 의문을 표시했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처럼 보인 의회의 역할을 축소하고 대신 강력한 중앙 행정부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기존의 휘그 사관에서는 왕과 행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의회정치를 찬양하며, 국왕의 절대권에 맞서는 개인의 양심을 강조하였다보니 국왕의 힘으로 강력한 독재 권력을 휘두른 '크롬웰' 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그는 크롬웰이야말로 근대적인 관료제적 행정부의 창시자라고 찬양하며 그를 재평가 했습니다. 




그는 크롬웰이 강력한 정부를 바탕으로 혼란과 무질서를 방지하고 효율적인 통치를 했기에 종교개혁을 했다고 봤습니다. 전통적인 영국 역사 해석에서 종교 개혁은 '교회와 국가' 라는 필수적인 구조가 파괴되어 영국을 근대국가로 나아가게 만든 거대한 사건이었는데, 기존에 이것을 무슨 큰 역사의 흐름과 개인의 양심으로 이루어진 일로 보았다면 엘튼은 이를 크롬웰과 강력한 행정부가 이를 해낸 것으로 보았으니 그를 고평가 할만도 했습니다.(현대에 있어선 이 종교개혁이 정말로 그렇게 큰 의미가 있었느냐 자체에 아예 문제제기가 들어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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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엘튼과 동시대에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도 있었습니다. 크리스토퍼 힐과 브라이언 매닝 등의 학자들은 16-17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계급 형성을 영국사의 급변의 원인으로 보며, 이 시기에 등장한 각종 급진파 세력에 비중을 두어서 저교회파 개신교가 급진적인 세력들의 핵심이었으며, 이들이 참여한 의회파가 국왕파에 대비된 진보의 세력의 세력으로서 주역이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기존 사관에 대한 비판이 나왔지만.... 그러나 결국 이런 사관들 역시 크게 보면 결정론적이고 결과주의적인 사관을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그저 휘그 수정주의(Revisionist Whiggism) 정도로 남았습니다. 




하나의 당연한 전제, 즉 종교개혁은 영국사의 진행에 있어서 '긍정적인'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강력해진 국가 내지는 정부도 '긍정적이며' 왜냐하면 이는 '근대화' 에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엘튼이나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이나 그 거대한 흐름, 'grand narrative' 에 있어서 '크롬웰이 했다' '개신교가 했다' 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발전했다는 것은 크게 보면 다를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거치며 학자들은 이 '당연한 전제' 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대체 왜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역사를 당연하게 이어지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귀결에서 한걸음 벗어나서 살펴보자, 이 큰 흐름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모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엘튼에 대한 반박도 이어집니다. 크롬웰에 대해 엘튼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것은 정리하면 이런 이유 떄문이었습니다.




크롬웰은 매우 효과적이고 강력한 행정부를 만들어 사회혼란을 방지했다. 프로파간다를 통해 헨리8세의 정책에 동의하는 이들을 끌어모았고, 이들로부터 얻는 정보 및 고발을 통해 가톨릭과 불순세력을 색출하여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루어냈다. 이는 근대화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눈을 잘 비비고 살펴본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와 비슷한 것을 찾아내게 됩니다. 바로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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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건 완전히 나치 독일 같은 소리 아닌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막히게도 엘튼은 유대계로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귀화했으며 전쟁 중에 영국군으로 복무까지 한 인물이었습니다. 나치즘에 가장 적대적일 인물이 연구하면서 무엇을 주장하다보니 결국 내용을 살펴보니 그것과 비슷해졌다는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기존의 휘그 사관은 영국의 개신교화를 중요한 가치로 삼고 그것이 헌정주의와 개인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의 '긍정적인 가치'를 일구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낸 헨리 8세 시대의 정부도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개신교화를 위해서 펼쳐진 '억압과 통제' 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게 과연 옳은것인가? 뭔가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상하다 느끼고 16-17세기 해석 전반을 살펴보니 정말 이상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과거에는 영국의 개신교화를 근대화의 필수조건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당대 강경파 개신교도들에 대한 분석을 세밀하게 하자, 그들이 보인 정신나간 수준의 히스테리컬한 반가톨릭주의는 무얼 어떻게 봐도 도저히 '근대적이다' 라고 할 수 없는 야만의 극치에 가까웠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선 휘그 사관은 당연히 X자가 그어지고, 휘그 사관이라는 말은 학계에서는 '결정론적 역사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표현' 까지 되었으며, 이를 수정한 엘튼 등의 수정주의도 X자가 그어지고, 거기에 대한 수정주의에서도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발전하는 와중에 역사학자들이 공감한 제시된 하나의 결론은 무엇인가?



바로 '한 시대의 역사적 경험은 각 개개인의 상황과 가치에 따라 대단히 다양했으며, 어느 하나의 가치를 들어 해석하기 어렵다' 는 것이고, 당시 상황의 복잡성과 다양성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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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학계에서나 그렇다는 것이고, 대중적인 영역에서는 학계에선 이미 한참전에 사장된 사관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 합니다. 특히 대중들에게 있어서는 '상황의 복잡성과 다양성' 보다는 '잘 짜여진 이미지와 깔끔한 내러티브' 가 훨씬 잘 먹히기 마련이고,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간 사관이 다시 대중들에게 주입 되게 됩니다.




바로 '튜더스' 와 함께 큰 헨리 8세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끈 드라마 울프 홀에서도 토머스 크롬웰을 주인공으로 삼고, 토머스 모어를 메인 악역으로 삼는 등 제프리 엘튼 경 식 사관의 영향력이 짙게 나왔고, 이 드라마가 성공해지면서 대중들에게 이런 이미지가 굳어지다보니 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전문서적에서 대놓고 드라마를 비판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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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와 학계 바깥의 이런 차이는 여러곳에서 비일비재 합니다. 우리나라 이야기로 되돌아오면, 여말선초 시대에 있어서 새 시대의 신진사대부와 구시대의 권문세족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교과서에서부터 나오기에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 구도 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존 B 던컨 교수가 조선 왕조의 기원이라는 책을 내면서 이 구도에 의문을 표시했고, 그런 도식화된 정리에 반대하고 오히려 고려와 조선의 지배계층은 연속적인 과정에 있었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여말선초 관련 사극이 한참 유행함에 따라서 던컨 교수의 연구가 여러 기사를 통해 갑자기 다시 나오면서 굉장히 최신 주장인것처럼 소개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던컨 교수의 조선 왕조의 기원이라는 책은 거기에 실린 관련 논문이 1980년대 후반에 나온 논문들로, 이미 학계에서는 수십년동안 지지고 볶고 수용도 되고 비판도 되고 하면서 이미 한참 동안 다루어진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들어와서 여말선초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 돌아가보면, 결국 그 인물들의 성향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면 따로 권문세족이니 신진사대부니, 혹은 뭉뚱그려 지배층이니 같은 도식보다도, 그냥 따로 그 개인의 교우관계나 문집, 행보를 통해 살펴보라는 식으로 되고 있습니다. 정도전은 가계에 노비가 섞여 있었고 조준은 친원파 거대 가문 출신이고 정도전은 불교에 비판적이었지만 조준은 딱히 크게 그런적도 없는 등등.... 그런걸 다 하나에 묶어버리면 뭔가 폭력적인 느낌이 들죠.







결국 요약하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식과 현대 사학의 차이, 전통사학과 현대사학의 차이를 가장 명료하게 표현하면 바로 거대서사의 부정, 수많은 상황과 변수에 대한 다양성의 인정, 어느 하나의 가치로 인한 재단을 피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확고한 이미지, 잘 짜여진 내러티브, 정교하게 다듬어진 스토리텔링, 여기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돌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현대 역사 연구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8-21 09:53)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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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30세(무직)
19/03/05 23:47
수정 아이콘
그래서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 역사학도 알면 알수록 말하기가 조심스러워 지는 것 이긴 한데....

그 빈자리를 머리가 빈 스피커들이 가장 많이 채우는 분야기도 하지요. 양자역학을 가지고 헛소리 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역사학은 헛소리가 제대로 된 소리의 열배가 넘는 특이한 분야지요. 그럴 수 밖에 없는 분야고. 철학이 인문학의 뿌리라지만 역사학은 인문학의 피와 살이지 않나 싶습니다. 안걸치는 분야가 없어요. 모든 영역에서. 그래서 그게 더 심할 수 밖에요.
19/03/06 00:07
수정 아이콘
사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건과 사건을 이어서 하나의 목적성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는것 같아요. 큰 흐름에 동조되지 않는 무의미한 사건들을 견딜 수 없어하는 느낌이랄까.. 어떻게보면 본능적으로 무리를 짓는것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문문문무
19/03/07 07:37
수정 아이콘
인간의 고도의 추상적 이성이 아주 뿌리깊이 내려져 있기 때문 아닌가 싶네요
그린우드
19/03/06 00:12
수정 아이콘
아직도 인터넷에선 기독교가 유럽문명을 망하게 했다느니 같은 19세기 시절에나 통할 헛소리들을 당당하게 말하는지라
-안군-
19/03/06 00:19
수정 아이콘
뭔가... 전반적인 인문학계, 예술계의 흐름 자체가 해체주의, 포스트모던쪽으로 가는게 요즘의 추세인듯도 합니다.
정치, 철학, 언어학, 사학, 종교학 등등이 그러하고, 미술, 음악, 무용 등등도 그렇게 되어가는 모양새고요.
어쩌면, 무슨 학문이건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렸고, 결국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하는게 옳다...라는 결론인듯도 한데, 그렇게 따지면 과학쪽도 그러한 풍조인듯도 합니다.
19/03/06 00:36
수정 아이콘
뉴턴에서 바로 양자역학으로 넘어간 느낌이네요
어느새아재
19/03/06 00:51
수정 아이콘
보고서나 기획안을 쓸 땐 하나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위한 절차를 밟아 나갑니다. 그래서 그 목적이 달성되면 성공이고 달성되지 않으면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응용학문은 구체적 목적이 존재한다고 보지만 역사학 같은 학문은 분명한 목적을 설정하기 힘들어서 성공!!이란 평가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항상 그래서? 어떻다는거야?라는 질문이 쏟아지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목적을 정한다는 느낌입니다. 환단고기도 그렇고 민족사관도 그렇지 않을까요? 가치평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TheLasid
19/03/06 01:46
수정 아이콘
새벽에 정말 좋은 글을 봤네요. 안목이 넓어진 기분입니다.
Jedi Woon
19/03/06 05:41
수정 아이콘
어릴적 역사를 배우면서, 역사 이야기를 듣고, 읽으면서, 뭔가 거대한 흐름과 법칙이 있고 거기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점점 나이를 먹고 더 많은 이야기를 읽고, 몰랐던 내용들을 접하면서 역사에 과연 법칙이 있고 거대한 흐름만으로 흐르는 거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어릴적 소련이 해체되는 뉴스를 보면서 이제 뉴스에는 뭐가 나올까, 과연 새로운 이야기 거리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 보면 앞으로의 미래가 캄캄해 보입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지나온 역사의 과정속에 나도 작은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 흐름에 휩쓸리기도 했다는걸 생각하면, 역사라는 주제는 쉽게 얘기할 수 있는게 아닌것 같습니다.
Bemanner
19/03/06 12:28
수정 아이콘
음.. 예를 들어 국회의원 300명이 다 각자의 사정과 각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제각각의 선택을 해서 표결을 하는 거지만, 그렇다고 해도 법안의 가부가 결정되는건 전체적인 상황에 따른 필연에 의해 진행되는 것도 있지 않을까요. 가까이서 볼 수록 지멋대로 움직이는 거 같지만 멀리서 보면 그래도 어쨋거나 이 방향으로 움직이는 거고.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이 이뤄졌다 이런 식의 서술에는 부정적입니다만
무엇에 의해~ 이런 일이 이뤄졌다는 건 큰 틀에서는 맞을 수도 있는 얘기라고 봅니다.
제노스브리드
19/03/06 23:31
수정 아이콘
항상 신불해님 글은 인상 깊게 보고 있습니다.
고려 무신란 전공이신 저희 과 교수님이 생각나시네요.
학계에 이단아 같은 주장들을 많이 하셨는데, 시간이 지나 다른 학자들도 연구를 하다 보니 꽤 설득력 있다고 들었습니다.
주요 주장은 고려 귀족사회설, 여말선초 신진사대부-권문세족 구분 불가, 조선 초, 중기 훈구-사림의 도덕적 구분 불가 등..
일단 절대적인 선악구도를 가장 싫어하셨던 분이라 이 글을 보니 바로 떠오르네요.
신의와배신
19/03/07 05:49
수정 아이콘
대학을 다니던 시절 '고고한 역사의 법칙에 따르면', '역사의 흐름이 증명하듯이' 등등의 소리를 선배들로 부터 수없이 들었습니다. 역사가 좋아서 역사를 파고 이과생이면서도 역사서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들어 읽어온 저에게는 그런 소리가 바보들의 합창처럼 들렸습니다. 덕분에 따돌림을 당했죠 ^^

"전통사학과 현대사학의 차이를 가장 명료하게 표현하면 바로 거대서사의 부정, 수많은 상황과 변수에 대한 다양성의 인정, 어느 하나의 가치로 인한 재단을 피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불해님의 말씀이 제 마음을 뻥 뚫어놓네요.
LOLULOLU
19/08/31 12:51
수정 아이콘
역사학계라는 것도 전체 사회과학 또는 인문과학이 20세기 중후반과 21세기 초반에 걸어온 길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현대 사학의 흐름이 말씀하셨듯이 거대 서사의 파괴, 다양한 변수 등의 인정, 특정 가치로 상황을 재단하지 않는 것이 되어왔습니다. 전체 학계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이런 경향은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목받지 않았기 때문에 또는 주목받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권력의 불평등을 잘 드러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학계의 경향은 더 넓은 사회와 세계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지요. 전후 서구 세계에 의해 진행되어 왔던 다극화, 다양성의 존중과 같은 현실 세계의 변화가 학계에 영향을 미쳐온 것일테지요(그리고 상호작용이기도 하구요). 이런 점에서 21세기 중반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현재 현실 세계와 학계의 상호작용이 어떤식으로 흘러갈지 궁금하면서도 대단히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에 상당히 익숙한 학자들은 현실 세계를 잘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문문문무
19/09/06 09:19
수정 아이콘
궁금해서 그런데 역사를 조직이나 공동체 내에서 개인들이 각자위치나 상황에 따라 보여온 일정한패턴(조직심리학...? 이겠죠?)을 중심으로 비춰보려는 사관이 있을까요?

결국 본문 글 읽으면서 느낀점은 인간의 행동예측에대한 데이터과학의 관점으로 철저히 접근해야겠다 생각이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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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2 고려 원종은 쿠빌라이 칸을 만나서 '쇼부' 를 걸었을까? [42] 신불해18744 18/08/29 18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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