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2/03/09 11:18:11
Name XellOsisM
Subject 새벽 5시

새벽 5시.
어제 마신 술에 깨질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다.
어제는 언제 잠들었지? 기억을 더듬으며 화장실로 향한다.
초록색 칫솔 하나. 분홍색 칫솔 하나.
'아.. 아직 칫솔이 있었네. 어떻게 하지.. 버릴까 말까?'
그러다 문득, 깨자마자 네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자조섞인 웃음이 나온다.




9시.
어느덧 겨울이 지나간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봄냄새가 나는 것 같다.
따스한 햇빛과 시원한 바람에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으며 하루를 보낸다.
'그래, 힘내자.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자'
지난주에 지지난주에도 다짐했던 그 말을 다시 반복하면서 역시 변함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보낸다.




6시.
'집에 가서 뭐하지...'
귓속 이어폰에서 끝임없이 이별 노래가 흘러 나온다.
모든 이별 얘기가 내 얘기 같고, 그들이 노래하는 이별이 사랑이 그리움이 미안함이 미련이 집착이 후회가 내 마음을 뒤흔든다.
'전부 다 맞는 말인데.. 그래서 나 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결국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내 왼손에는 콜라 페트병, 오른손에는 보드카 한병이 들려 있다.
내가 그렇지 뭐..




현관문을 연다.
이제는 현관문에 걸리는, 네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구두가 없다.
오직 지독한 담배냄새와 아직 버리지 못해서 쌓아 놓은 술병들만이 나를 반긴다.

냉장고 문을 연다.
팅 비어 있는 그속에는 네가 해준 밑반찬도 없고
네게 해주려고 사놓은 각종 재료들만 유통기한을 넘기고 썩어가고 있다.
이틀에 한 페트병씩 탄산음료를 마시는 내게, 하루에 하나만 마시라면서 매일 가져 오던 캔도 이제는 없다.
어제 안주로 먹다 남은 오뎅국을 다시 데운다
이 오뎅국 네가 참 좋아 했는데...

짝을 먼저 볼까, 라디오스타를 먼저 볼까 하면서 벌이던 작은 실랑이도 없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저녁밥 좀 만들어 달라고 떼쓰던 너도 없고
부엌에서 저녁밥을 만드는 내 등뒤에서 들리던 배고프다고 맛있게 만들라고 애교부리던 너도 없다.
난 또 이렇게 네 생각을 하게 된다.




7시 30분.
'뭐하지.. 아직 초저녁인데.. 뭐하지..'
결국 저녁밥은 포기하고 방금 사온 보드카를 콜라와 함께 섞는다.
내 마음처럼 팅빈 뱃속으로 한잔을 흘려보낸다.
어제 밤에 했던 라디오 스타를 보면서 1시간을 보낸다.
두잔째, 세잔째, 그리고 담배와 함께 시간을 흘려보낸다.




8시 30분.
'아... 할게 없네.. 뭐하지..'
빈속을 채우고, 복잡한 머릿속을 몽롱하게 만드는 술기운이 달아나기 시작한다.
다시 술을 따른다. 술이 반병밖에 안남았네.. 조금 더 취하기 위해 줄담배를 피운다.
그런데도 아직 9시 밖에 안 되었다.

하루가 너무 짧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이리도 하루가 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긴 한숨 쉬면서 집안을 둘러본다.
네가 누워있던 쇼파도 있고, 너와 커플로 맞춘 신발도 있고, 네가 사준 옷도 있고, 네가 쓰던 샴푸도 남아 있다.
이 공간안 어디를 둘러봐도 네가 머무르지 않은 장소, 거쳐가지 않은 물건이 없다.
차라리 다 버리면 잊혀질까? 하지만 그러면 나 자신마저도 버려야 할지 모르겠다.




11시.
집에 오고 나서부터 몇 시간동안 너를 기억하고, 추억하고,
네게 복수하겠다는 몹쓸 생각을 하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미안해서 용서를 구하고,
보고싶어서 전화를 걸까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정말..이제 뭐가 뭔지,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것도 할수가 없다.
그렇게도 네가 원망스러워서 미안해서 사랑해서 보고싶어서 슬퍼서 외로워서 견딜수가 없다.

그래.. 마시자, 정신을 잃을때까지 마시고 내일부터는 다시 시작하자.
하지만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는 않고, 야속하게도 네 생각만 하다보니 시간이 빨리도 흘러간다.
슬프다. 이렇게 또... 또 하루종일 네 생각만 하고 말았다.




12시.
전화기를 든다. 신호음이 흐른다.
'친구야~ 뭐해~'
시커먼 남자놈과 1시간을 통화한다. 내가 지금 뭔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입에서 흘러나오는데로 말하고 또 말한다.
아무 도움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힘내라고 말해주는 친구녀석 마음씀씀이가 너무 고맙지만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할수 없게 골아 떨어지고 싶다.
너를 내 품에 안고 누워있으면 금방 잠들 수 있을텐데..

잠이 오질 않는다.
방 안을 맴도는 이 적막함을 견딜수가 없다.
머릿속에 네가 또 떠오른다. 미칠것만 같다.
아무리 떼어내도 떨어지지 않고 온몸에 스며들어서 도저히 어떻게 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저 혼자 계속 되뇌인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안되겠다. 아직 술은 남아있으니 더 마시자. 그냥 죽자..




눈을 뜬다.
'잠이 들었나..언제 잤더라.. 어제 뭐했지..'
아무래도 또 정신줄을 놓았나보다.
설마 하는 생각에 핸드폰을 찾는다.
혹시 내가 간밤에 네게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네가 나한테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이런 불안과 기대에 확인해본다.
휴...
다행이도 실수는 하지 않았구나.
하지만, 아직 동도 트지 않는 이른 아침.
새벽 5시를 알려주는 숫자만이 내 눈에 들어온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3-1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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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리노
12/03/09 11:37
수정 아이콘
후, 저도 얼마 전에 그랬었어요...
무엇보다 나와 가까운 곳에서 연상되는 것들이 많을 때 참 힘들더군요.
그래도 그것 또한 역시 지나 갈거에요...
피렌체
12/03/09 11:43
수정 아이콘
전 1년째네요,
아무렇지 않게 되었는데 아무렇지 않지가 않네요
건전지만 넣어주면 매일 똑같이 똑딱 거리는 시계처럼
머리속에 그 이름 하나만 넣어주면 똑같은 생각이 떠오르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든 상관없이 이별하던 그 날로 돌아가는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힘내세요
지우려고 하지말고 새기세요
원래 내것처럼. 그럼 조금 견딜만 해집니다.
Vantastic
12/03/09 11:53
수정 아이콘
휴... 어쩜 저랑 이렇게 비슷한 상황이신지..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내일 이사를 나갑니다. 추억이 너무 가득한 이 동네를 벗어가면 좀 괜찮아질까요..
이사 나가면서 버릴 수 있는것들은 죄다 버리고 나가야겠습니다.
12/03/09 14:32
수정 아이콘
짠한 글이네요. 힘내시길 바래요..
sad_tears
12/03/20 05:19
수정 아이콘
29년째네요. 1년째가 될 수도 있었지만 어쨋든 29년 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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