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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3/09/15 10:50:54
Name Hewddink
Subject [잡담] 연

한 때, 김원일의 소설에 빠진 적이 있었다. 김원일의 문체나 소설의 향기에 취해 그런 일을 당했다기보다는 지극히 사소한 개인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이었다. 김원일의 고향은 경남 진영인데, 진영은 나의 외가에서 가까운 곳이며, 이미 고인이 된 외조부님께서 사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영은 다른 곳에 비해 물산이 풍부해 5일장의 규모가 커, 마산 진해 사람들까지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흡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은 어머니의 유년이 서린 곳이기도 했다.

어느 핸가, TV 문학관은 나를 화면 앞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김원일의 "연"을 극화한 것이었다. 전무송의 텁수룩한 모습, 그리고 초점 잃은 눈동자, 입 언저리로 새는 듯한 대사.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무대가 바로 진영이었던 것이다. 주인공이 연을 만들어 낚시꾼에게 팔고 있는 장소가 바로 진영의 주남저수지였던 것이다. 철새 때문에 몇 년 전에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별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소설을 다시 뒤져 보았다.
"나는 엄동 석달만이 아니고 봄가실에도 연을 날리며 연매쿠로 멀리멀리 떠 댕기는 아부지를 그리며 컸어. 연이 작은 새가 돼서 아주 멀리멀리로 날아가모 나도 연이 돼서 그렇게 하늘 꼭대기로 떠돌아댕겼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변명삼아 들려준 말이다.

나는 그 해 초가을, 외조모님을 뵙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진영에 갔을 때 주남저수지를 찾아갔다. 물론 머리 속에 그 장면과 대사를 잔뜩 집어넣고. 그러나 그 때는 완전히 실패였다. 나의 감상을 충족시켜주기에는 가을의 삽상한 바람이 모자랐다. 섣부른 그 기행은 더위로 인해 씁쓸한 뒷맛만 남았고, 난 나의 어설픈 감상을 힐난하였다.

지난 주 토요일이었다. 7살짜리 외사촌 동생이 외삼촌께 연을 사달라고 조른다. 그 녀석은 친구라고 해야 이웃의 사내아이들 뿐이다. 이러다보니 노는 것이 완전히 사내아이다. 딱지를 다 잃고 와서 씩씩거리는가 하면, 물총이나 작은 원반투사기 등을 가지고 논다. 그런데, 그 날 한 녀석이 연을 가지고 애를 태웠던 모양이다. 이 녀석은 아예 가격까지 정확히 꿰고 와서는 비싼 건 2천 원인데, 싼 건 천 원이니 싼걸 사달라고 흥정한다. 딴에는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비싼 걸 사달라고 하지 않을테니, 연을 사달라는 것이다. 이쯤되면 외삼촌은 거의 거절하지 못한다. 녀석의 얄팍한 노림수란 걸 알지만 번번이 당한다. 그런데, 천 원을 주고 사온 연이 자새(얼레)까지 달려있다. 실도 제법 감겨있는 가오리연이다. 비록 비닐로 만들어진 것이나 독수리가 그려져 있고 살대는 진짜 대나무다. 그러나 이 연을 날릴 수 있는 곳이 없다. 온통 쓰러진 축사와 전봇대요, 아수라장이다. 그래도 녀석은 연을 들고 나가지 못해 안달이다.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자새도 다루지 못하는 녀석이 연을 들고 나가봐야 결과는 뻔하다.

아버지께서 마침 웅천(부산에서 진해 가는 길에 있는 동네)에 도자기를 보러 가자신다. 나는 연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을 설득했다. 친구들 앞에서 자랑을 잔뜩 하고 싶었던 녀석은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결국은 설득 당한다. 아버지께서 용무가 있어서 웅천으로 가는 길에 부산 하단에 잠깐 들리는 바람에 낙동강을 두 번 건너야 했다. 낙동강은 하류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낙동강의 물이 스며드는 습지 곳곳에는 갈대가 자란다. 갈대는 억새와는 달리 흡사 수선스런 참새 같은 솜털을 매달고 있다. 이것도 낙동강을 자주 오가면서 보는 작은 행복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웅천이라고 "매미"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부서진 비닐하우스 뜯어내네, 논밭에서 물을 빼네, 땅바닥에 떨어진 기왓장 치우네 하며 동네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니 도자기 보기는 다 글렀다. 진영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나는 그들 무리에 섞여 복구 작업을 거들었다. 마을이 어느 정도 제 모습을 되찾았다. 이제 연을 날려볼 차례다. 그런데 바람이 산 쪽으로 분다. 차를 몰고 돌아 나온다. 서 낙동강 줄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강을 매립한 곳이 나타난다. 차를 멈추고 연을 들고 내렸다. 바람이 세차다. 나는 서서히 연줄을 풀어 올렸다. 바람의 기세를 실은 연줄이 팽팽한 힘을 싣는다. 축만 잘 잡고 자새를 해방시킨다. 자새는 신명나게 돌아간다. 바람은 연을 거의 나의 머리 위까지 끌어올린다. 어릴 때 연이 이렇게 되는 걸 "연이 섰다"라고 말했다. 난 잃어버렸던 말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난 무의식적으로 "연이 섰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간혹 질정없이 방향을 바꾸는 바람 탓에 연이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힘없이 가라앉았다가 솟구치기도 한다. 외사촌 동생이 자새를 넘겨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그 녀석은 자새질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잔뜩 힘을 실은 연줄은 어린애가 감당하기에는 무리인 것이다. 그 녀석과 자새를 잡고 몇 번 씨름을 한다. 같이 온 그 녀석의 누나도 한 번 자새를 잡아본다. 자새질 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도 손에 익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연을 날리는 하늘에 벌써 어둑살이 찾아들고 바람이 한기를 머금고 있다. 이제 가야 한다.

다시 김원일의 "연"에 나오는 대사를 떠올린다.
"사람은 꼭 어데 갈 목적이 없어도 누구나 다 연맨쿠로 그냥 날아 댕기고 싶은 기라."
팔리지도 않는 연을 왜 만드느냐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지향점을 상실한 눈동자로 답한다. 아버지도 자신의 방황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연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을 뿐이다.

연을 날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어쩌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그리움, 혹은 이데아를 향한 인간의 바람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TV 문학관을 보고, 김원일의 소설을 보고 괜스레 주남저수지를 찾아갔던 것도 어쩌면 비슷한 심리적 충동에서 기인한 것일 게다. 그리고 외사촌 동생의 투정 끝에 따라나온 연을 낙동강의 바람에 날리는 일도......




p.s.(1) 지난 토요일에 연을 날려본 경험을 여러분께 알려 드리고 싶다는 순간적 충동 하나로 글을 쓰다 보니
본의 아니게 반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_ _);;

p.s.(2) 지난 주에 한반도 남부를 강타한 태풍 "매미" 때문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은 인명 피해, 재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재난을 당한 분들께 삼가 위로 말씀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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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울프
03/09/15 11:07
수정 아이콘
연이라.......
문득 끊어진 연실처럼 맥이 탁 놓이는 아침이다...
세이시로
03/09/15 12:0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많지 않은 나이인데도 어느덧 연을 날려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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