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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10/29 08:28:06
Name unip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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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23~25편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23편

원문 최초 게시일: 2005. 8. 29.


I'm back at my cliff
Still throwing things off
I listen to the sounds they make
On their way down
I follow him with my eyes 'till they crash
Imagine what my body would sound like
Slamming against those rocks

When it lands
Will my eyes
Be closed or open?

-Bjork "Hyper ballad"중에서


#1
성준이 계속 조용히 엎드려 있기만 하자 내내 그의 곁에 앉아 있던 강민은 결국 자기 잔에 자기가 술을 붓기 시작했다. 마침 선기자도 계산을 마치고 자리를 뜬 뒤였다.

보다못한 진호가 그를 불러 옆에 앉히고 고갯짓으로 성준을 가리키며 물었다. 쟤 무슨 안좋은 일 있어? 안색이 왜 저 모양이야?

성준이가 우울해하는 거니까 내버려 두라는 말만 반복하는 강민. 그러나 진호의 눈에는 오히려 민이가 더 우울해 보일 따름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답을 듣지 못했다. 민이는 아직도 잡지 표지 얘기만 하고 있는 지훈과 태민을 멍한 눈빛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피식 웃었다.

"지훈이면 몰라도 태민이가 잡지 표지로 그렇게 할 말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푸핫."

일격을 당한 태민이 사진마다 느끼는 주제에 놀리기냐고 쏘아붙여 웃음바다를 만들었지만, 웃음을 짓는 그를 보고 진호는 적잖이 안심했다. 진호는 친해지기 전의 그를 모른다. 하지만 저 사람좋은 웃음이 없는 그를 상상할 수가 없다.

늦은 나이에 데뷔하기까지 단지 게임을 하는 데만도 힘에 부쳤다지만 그때도 이렇게 웃지 않았을까? 가끔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다가도 또 씩 웃지 않았을까.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 끝을 또 순하게 누그러뜨리며. 어떤 패배 끝에도 다시 조용히 일어서면서-


진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태민은 마지막 사과 조각을 찍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뼈만 남은 사람을 그렇게 단추 풀어서 어쩌겠다는 거냐구, 그런 포즈는 근육 좀 적당한 사람이 해야 간지가 난다구."

"그러게. 성제가 해도 은근히 멋있을 거 같은데."

사과를 깨물던 태민은 성제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뭔가 기억났다는 듯이 멈칫하더니 갑자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것은 너덜너덜해진 쪽지 한 장이었다.

"뭐냐 이 걸레 조각은?"

"이래뵈도 물 건너온 거야. 요환이형이 말레이시아에서 잠깐 쓰러져서 입원했을 때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걸 받아 적은 거래. 그런 걸 받아적기까지 하고 참 대단하다니까. 오늘 진호형 만나면 주라고 했는데 내가 깜빡하고 있었어."


별 생각 없이 건네받은 쪽지에는 단 세 줄만이 씌어 있었다. 그러나 내용은 충분히 받아적을만 한 것이었다. 마지막에 볼펜으로 뚫린 흔적을 보니 받아쓰는 성제가 얼마나 놀랐을지를 짐작할 만했다.

진호는 숨을 삼키고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옆에서 강민이 넘겨다보며 쪽지 내용을 읽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대체 뭐가 써 있냐고 내쳐 묻는 태민의 목소리조차 이제 들리지 않았다.


<진호야, 왜 아직도 몰라? 연성이가 아니란 말야. 그 사람이랑 그 사람들이야. 니가 찾아줘, 난 못해 진호야, 니가 찾아주라고 그랬던 거야.

연성아, 안돼, 너 이렇게 되면 난 이제 살 수가 없어, 내가 어떻게 살아.

그 사람이 진호까지 해치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쪽지를 구겨 버렸다. 내용도 의미도 알지 못하는 다른 게이머들의 궁금한 눈빛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무시해 버리고- 진호는 턱을 조금 낮추고 쏘아보듯 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이건 아무 일도 아니야."



#2
쪽지의 마지막 줄이 밤새 진호를 괴롭혔다. 위의 두 줄은 아예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었다.

난 지금까지 남들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노심초사해 왔는데, 누군가가 나를 위협하고 있다는 암시만큼은 도저히 풀어낼 수가 없구나.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그 한 줄이 무서우리만큼 나를 옭아매고 있어.

......내가 파헤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난 후에도 나는 계속 눈을 뜨고 살아 있을까?


넘어가지 않는 아침밥을 간신히 넘기고 나오는 진호를 민규가 따라왔다. 그리고 이젠 제발 사양하고 싶은 민규의 센스가 또 이어졌다.

"이번엔 작년말에서 올해 초까지 연성이형 경기를 모아 놨거든요. 보실래요?"

"저번에 잘한 경기만 돌려봤는데도 눈이 다 아프던데 뭘 또? 더 이상 연성이 생각 안할란다. 안그래도 어젯밤에 태민이한테 한소리 들었단 말이다."

"에이, 형, 그래도 제가 애써서 다 받아 놨는데요."

쟤 또 입술 나오려고 하는군, 음식 소화될때까지만이라도 봐 줘야지 이거 부담스러워서 원.



#3
멀리서 정감독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모니터 앞에 앉은 진호에겐 그의 말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양치도 다 하지 못한 채 한 손에 핸드폰을 끼고 나온 정감독은 막 폴더를 닫더니 마침 지나가는 용호에게 투덜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진호랑 깡만도 어제 성준이랑 같이 놀았던 거 맞냐?"

"그랬다는데요? 누구 전환데 그렇게 급하게 나가세요?"

"아니 걔네는 성준이한테 대체 뭘 먹였길래 애가 실려가게 만들었대?"



#4
진호는 결국 모니터 앞을 떠나지 못했다.

전문가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위조지폐. 명화의 복제품. 그리고 지금 보는 경기들 또한 진호가 마치 무언가를 찾아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위작이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내려달라고 하지 않을까. 내가 걸려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나는 진짜가 아닙니다-그 짧은 기간에 연성이 한 경기들이 바로 그렇게 진호에게 외치고 있었다.



#5
"지금까지 연성이 게임을 다시 봤어. 형이 곤란해할 만한 건 웬만하면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 꼭 물어봐야 하는 게 있어."

우물쭈물하다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그것도 연성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듣고 요환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형, 사실 연성이가 말레이시아 가기 전에 만났었어. 그때 들은 얘기가 있는데, 연성이 말로는 아무래도 누가 맵을......"


"미안 진호야, 지금 배터리가 떨어져서. 내가 다시 전화할께."


연성이가 진호에게 무슨 눈치를 줬나 보구나. 진호가 뭔가 알아냈어- 요환은 바로 전화를 끊고 재빨리 아무 종이나 뜯어서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6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몸서리를 치며 서성인다.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 요환은 결국 누군가의 손을 빌릴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다른 팀원들을 찾더니 마음속으로 이것저것 따지는 듯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나쳐보냈다. 얼마 후 특유의 묘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는 상욱 앞에서 그는 마음을 정했다.

요환은 상욱을 조용히 부른 후 방금 쓴 종이를 몰래 쥐어 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지금 바로 네 핸드폰 가지고 진호한테 전화해서 여기 써 있는 걸 읽어줘.

대신 절대로 숙소 안에서 하지 마, 알았지? 주변에 듣는 사람 없나 잘 보면서 현관 밖에 나가서 전화해. 끝나면 아무데나 버리지 말고 나한테 도로 가져오고."


상욱은 접혀진 종이를 차곡차곡 펴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뭔가 불안해진 요환은 다른 후배를 시킬까 하고 잠깐 동안 생각했지만, 이미 보여준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24편

원문 최초 게시일: 2005. 9. 2.


But you yourselves wrong and defraud, and that even your own brethren.

-1 Corinthians 6:8


#1
[연성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짐작할 것 같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아무 얘기도 해줄 수가 없으니 다시는 물어보지 마.

비밀을 지키면서 너 혼자서 알아내는 게 힘들겠지만, 미행, 도청, CCTV, 모든 게 있을 수 있으니까 몸 조심해라. 너희 팀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특히 강민.]



뭐 이런 이상한 걸 시키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아니면 첩보영화를 연상시키는 살벌한 내용에 흥미를 갖고 무슨 뜻이냐고 캐물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런 반응이 정상이겠건만 상욱은 둘 다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관심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점에서 요환은 비밀 전령을 제대로 골랐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패는, 상욱이 진호에게 그대로 읽어주지 않고 고작 세 문장으로 요약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2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얘기할 수 없으니 나한테 묻지 말고 알아서 해라. 몸 조심하고, 너희 팀과 강민을 믿지 마라. 끝."

"뭐? 뭐라고?"

"자세한 건 요환이형한테 물어봐. 형, 미안해, 태민이형이 밥먹으러 들어오래."


전화는 끊겼다.

진호는 수많은 물음표 속에 홀로 남겨졌다. 왜, 이런 알쏭달쏭한 얘기를 직접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전달해야만 했을까, 왜 형은 얘기할 수 없다고 했을까? 그리고 몸 조심하라니......?



#3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라, 너희 팀원도 믿지 말아라, 이런 식으로 밑도 끝도 없이 얘기한다면 누구라도 흘려 듣게 된다. 진호도 그랬다.

특히 팀원들도 믿지 말라는 말을 진호가 귀담아 들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식탁머리에 앉아서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연성이가 출국 전에 나한테 연습때랑 실제 경기가 자꾸 다르다고, 맵까지 탄다고, 이상하다고 했었거든. 그 말이 지금 너무 마음에 걸리는거야. 연성이가 뭘 의심하고 있었는지 그때 좀 자세히 물어볼 걸 하고 후회도 들고."

멸치볶음을 뒤적이던 강민이 그 말을 듣고 바로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나 정석은 진호의 말을 간단히 일축해 버렸다.

"머큐리정도면 모를까 프로선수는 맵 탓하면 안된다."

"아니야. 내가 경기를 돌려 봤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게 있어.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경기들 말야. 상대 선수들이 너무 잘 해."

"뭐라꼬? 그런 게 어딨나. 나도 레이드 어썰트 탓하지 않았다."

진호는 말문이 막혔다. 이제 다들 고등어에 정신이 팔려 있을 뿐 누구도 그 화제에 관심이 없었다. 수저를 가만히 내려놓고 진호를 주시하고 있는 민이를 제외하고.

한참을 주저하던 진호는 마치 자기 편을 들어줄 사람을 구하듯 천천히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패러독스, 머큐리, 라그나로크, 이런 거랑은 전혀 성격이 다른 얘기야. 요환형한테 물어봤더니 진실을 알고 있지만 형은 아무것도 알려줄 수가 없다는 거야. 그런데 직접 대답하지도 않고 상욱이를 시켜서 그러는 게 영...... 뜬금없이 몸조심하란 소리나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바라보고 있던 강민이 조금씩 의자를 옮기면서 진호 쪽으로 다가앉았다. 진호는 그것도 모른 채 밥숟가락을 입에 넣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혹시 연성이가 한 말대로 정말 맵......욱!"


강민이 자신의 왼쪽에 앉은 진호의 발을 사정없이 밟아버렸다.
일격을 당한 그는 너무 아파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강민은 딴청을 피우며 뭘 떨어뜨린 척 몸을 숙이더니 다시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진호가 고개를 숙이고 강민에게 왜 그러냐는 듯이 쏘아보자 비로소 민이가 둘째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댔다.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진호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왜! 아파 죽겠다구!"

"아무 말도 꺼내지 마. 절대로."


그는 미심쩍었지만 민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진호는 몸을 일으키고 헛기침을 몇번 하고서 적당히 둘러댔다.

"......맵다. 에휴. 멸치는 좀 달착지근하게 볶는 게 좋지, 고추장으로 범벅을 했네."

"흠, 흠, 맞아. 이리 매워서야 어디 먹겠어?"

민이가 맞장구를 치고 나서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내쉰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구도 진호의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것 같다. 성공이다.



#4
식사를 마치고 양치하러 들어가려던 정석이 소스라치게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민이형이 진호형의 손을 붙들고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다니, 앞에 내가 멀쩡히 서 있는데 어쩜 신경도 안 쓰고 저게 무슨 해괴한 행동이란 말인가?


"아까 왜 발을 밟고 얘기도 못 하게 했는지 말해 보라니까. 아니 그걸 꼭 화장실에서 말해야 되냐? 응?"

"화장실까지 감시하는 미친 작자들은 없을 테니까. 모르지, 혹시 뭘 달았는지도. 그래도 대충 보니 없는 것 같다."

"감시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요환이형이 상욱이를 시켜서 뭐라고 했는지 말해 봐. 그러면 나도 말해주지."

강민은 따지는 진호의 말을 싹 무시하고 한참을 두리번거리더니 문까지 잠갔다. 진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몇번 흔들고 나서 결국 먼저 털어놓았다.

"진실을 알고 있는데 형은 얘기해줄 수가 없으니 묻지 말고 알아서 하래. 그리고 나한테, 팀원도 너도 믿지 말라고 했어. 그냥 장난으로 한 말 같으니 맘에 두지 말......"

"요환이형이 안다고? 정말이지?"

"그래. 그치만 어차피 얘기해주지도 않을 거라는데 어쩌라구?"

"안다고? 요환이형이 안다고?"

"그렇다니까. 이제 왜 말도 못꺼내게 했는지, 감시는 또 무슨 얘긴지 말해 봐."

정작 민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탈하게 웃었다.

진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지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그래, 저건 아무때나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에이스 결정전, 포르테에서 박태민과, 한시간 내내 경기하면서도 1분 1초도 집중을 잃지 않던 그 무서운 모습!


"맵 조작같은 건 없어. 누구를 밀어주거나 떨어뜨리려고 공작하기엔 스타판은 너무 크고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두 번 다시 의심하지도 말고 얘기할 생각도 마."

"조작같은 건 없다면서 말하지 말라는 건 또 뭔데? 감시는 또 무슨 얘기야?"

"나가자. 정석이가 밖에서 기다린다."

"뭔가 있지? 그렇지? 너랑 요환이형은 알고 있지? 빨리 말해봐!"

안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 정석이 화장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그러나 민은 사정없이 문을 쾅 때리는 것으로 응답했다. 밖에서 정석이 움찔할 모습이 안 보여도 뻔했다. 진호 역시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 판에 지금까지 들어간 돈이 몇백억에, 방송국이 둘에, 스타크래프트로 먹고 사는 관계자들이 줄줄이 몇 명인지 생각하면, 이 판이 깨질 만한 일이 밝혀지면 사람까지 죽이려드는 것도 절대 꿈같은 일이 아냐."


쉬운 상대에게도 특이한 전략으로 나오다가 어이없이 지는 강민, 사람좋고 다정한 강민. 그러나 저그성향 맵 포르테에서 캐리어까지 모두 잃은 그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무섭다고 했다.
그 때의 그 강민이 지금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있었다.


"잘 들어 홍진호, 두 사람이 폭로하려다가 죽었어. 너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입을 나불대도 좋아."


진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점점 뒤로 물러섰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 등이 화장실 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문 손잡이를 더듬었다.


"연성이를 누가 배신했나 했어, 이제 알겠어. 진호야, 이제 너 자신과 나 외에 아무도 믿지 마. 요환이형을 믿지 마."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25편

원문 최초 게시일: 2005. 9. 5.


No matter what I do I can't convince you
To just believe this is real

-Linkin Park "Faint" 중에서

#1
"그, 그러면, 정말 맵 조작이 있었던 거야? 동수형이랑 연성이는 그걸 폭로하려다가......?"

"말했잖아. 맵 조작 따위 없어. 없다고 믿자. 그래야 네가 계속 게임할 수 있다."

"그걸 알고서 게임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장담하지만 올해 초 이후로 조작은 완전히 중단됐어. 에버2005와 우주 모두 전혀 조작이 없었어. 그게 동수형이 위험을 각오하고 덤벼든 댓가야. 그걸 망치지 말고 조용히 게임해."

"그만두고 덮어둔다고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돼? 양심이 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 나라도 폭로하......"


"난들 그러고 싶지 않은 줄 알아?"


진호는 2005년 6월 8일 포르테, 그 때의 강민, 그 눈빛을 보았다.


"그래도 형이라고, 그래도 나보다 한살이라도 어린 애니까 내가 말려주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 연성이 팔 붙잡았을 때, 연성이도 지금 너랑 똑같이 열을 내고 있었어!"


#2
성준이 강민에게 함께 폭로하자고 설득했을 때 그는 증거가 없다는 말로 거절했었다. 그때 성준은 동수로부터 모든 자료를 받아 본 후였지만, 비밀로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 장도 그의 앞에 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성은 달랐다.


<"형 말대로 처음에는 증거가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있어. 통화를 녹음했어, 자기들이 직접 하는 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지만 강민은 놀라지 않았다. 성준의 간절한 호소를 이미 몇 차례 들은 후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직접 접근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아무도 성준에게 접근하거나 회유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리플 공개 신청했을 때만 해도 아무 생각 없었는데, 막상 입 다물라는 전화 받고 나선 놀라서 기절할 뻔했어. 대체 왜 그랬냐고 했더니 말 안해주더라. 나 말고 또 누구 경기할 때 맵에 손을 댔냐고 캐물었는데 그것도 대답이 없었어. 하지만 대충 짐작은 가. 내가 계속 이기는 게 싫었겠지. 게임마다 물량으로 미는 게 재미없다, 최연성이 등장한 후로 스타판은 더 보여줄 게 없게 됐다......">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할 건 아니잖아. 그리고 조작된 맵에서 네가 매번 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길 때가 더 많지 않았어?">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로 그렇게 차근차근 따지고 들면 내가 미치는 거 알아? 지금 형은 내가 피해자라서 이 일을 참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야. 밥먹고 스타만 하는 사람이 왜 몰라, 스타는 고수끼리 붙으면 유닛 능력치를 조정한다고 해서 쉽게 이기거나 지게 만들 수가 없는 게임이야. 놈들도 조작 한다고 한 건데 뜻대로 안 됐잖아. 이봐, 조금만 더 지켜보자. 이젠 조작한다고 해서 맘대로 떨어뜨릴 수가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 다신 그런 짓 하려 들지 않겠지.">

<"나 하나 꾹 참고 없던 일로 해주라고? 나만 억울한 게 아냐, 그런 맵에서 경기를 한 다른 애들도 피해자야. 전에 성준이가 형 앞에서 얘기했잖아. 차라리 지는 게 낫지 병 신 같이 된 유닛 밀어봤자 뭐 하냐고!">

<"연성아, 게임 말로 다른 일로 돈 벌어본 적 있어?">

<"......?">

<"게임 말고 하루 종일 다른 일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면서, 눈을 뜨더라도 더 좋은 내일이 올 거란 기대는 아예 할 수도 없이 그렇게 살아본 적 있냐고.">

<"민이형,">

<"내가 몇 살에 데뷔했는지 알지? 그러고도 뜨는 데 젠장맞게 오래 걸렸고, PC방까지 떨어지는 건 또 순식간, 하지만 한번도 내가 끝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아무렇지 않아, 난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어. 나에게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최후의 상황이란 한가지 뿐이야. 더 이상 게임을 할 수 없게 되는 것 뿐이야.">


눈동자가 크고 새까만 강민이었다. 그런 그가 웃지도 않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때는 그 눈동자가 마치 구슬 구르듯 움직인다.
맞은편 경기석에 앉은 상대에게는 소름끼치는 일전의 예고이자,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말에 집중해 달라는 신호였다.


<"잘못을 고쳐서 앞으로 이 바닥이 앞으로 더 좋아지고 한 점 티끌 없이 꾸려나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으면, 우리가 다 터뜨리고 엎어버리는 것보다는 좀더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다. 게임마다 맵에 손댄 것도, 그동안 계속 조작해온 것도 아니라며. 워크3 때는 장재영 한 사람만 물러나면 됐었지, 지금은 그걸로 끝날 것 같냐? 아니야. 차라리 지는 게 낫다는 말도 못할 때가 와.">

<"묻자고? 이 일을 그냥 묻자고? 절대 안 돼. 게이머들을 우롱했고 수 많은 시청자들을 바보로 만들었어!">

<"그러다가 게이머는 게임을 못 하게 되고 시청자들은 다시는 게임을 안 보게 되는 수가 있어.">


차라리 민이형이 평소처럼 웃어 주면 좋겠어- 몰아치듯이 분개하던 연성도 숨을 멈추었다. 왜 이럴 때는 삑사리도 안 내? 그런 눈썹모양 하고 화 내면 안 어울리는 거 알어?


<"그냥 묻자는 얘기가 아니라구. 또 맵에 손을 댄다면 그땐 내가 니 손을 잡고 명동 한복판에 나가서 그 사기같은 놈들 때려죽이라고 소리라도 치겠어. 하지만 지금은 아냐.">

<"그렇게 내 눈 똑바로 보고 얘기하지 마. 형 말 일리있는 거 안다구. 민이형도 나처럼 화난다, 그래도 참아보자, 알겠어. 그런데 내가 무슨 말까지 들었는지 알면 형도 나 더는 못 말릴 거야. 이런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

<"입 닥쳐 주면 내 연봉만큼 주겠대. 그런 취급 받은 게 쪽팔려서 요환이형한테도 말 못했어.">

<"뭐, 뭐라구?">


<"차라리 스폰 없는 팀 가서 상금 다 이웃돕기에 내고 게임하지 난 그렇게는 못해. 져 달라는 거면 지구를 살 만큼 준대도 받지 않아.
그게 나 최연성이야. 기계처럼 게임할 수는 있지만 난 게임하는 기계가 아니야.">


꽉 붙들고 있었던 연성의 팔을 힘없이 놓아버렸다.


<"형. 이긴 댓가로 받는 연봉은 부끄럽지 않아. 내 실력 노력 인정받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내 마음대로 이길 수 없다면, 차라리 익산에서 평범하게 살던 때로 돌아가겠어.">


#3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 팔을 놓아버린 후로 연성이를 다시는 볼 수 없었던 민이의 회한을......


"그때 내가 연성일 주저앉혔으면 죽는 일은 없었겠지. 그러니 넌 반드시 내가 말리겠어. 너도 폭로할 작정이면 그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날 쓰러뜨린 다음에 밟고 나가. 양심 때문에 사라지는 사람은 연성이 하나로 족해."


고개를 끄덕이는 진호의 눈에서 살기가 사라졌다.

문 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의 왼손이 스르르 풀렸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무력함.


하지만 살인까지 한 놈들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한참의 침묵 끝에 진호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강민은 비웃음으로 받아넘겼다.

"나도 당장 복수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거든? 그런데 증거라고는 하나도 없어. 배후만 알지 범인은 몰라."

"일단 지금 우리가 아는 사실만이라도 경찰에다 말하자, 응?"

"누가 동참했는지 알면 네가 과연 경찰에 가서 말할 수 있을까? 가서 임요환부터 잡아오라고 말할 테냐?"


여간해서는 짓지 않던 저 비웃음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단 말인가? 진호의 숨이 멎는다. 그는 둘 중 하나의 말만 믿느니 차라리 둘 다 믿지 않을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강민은 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멀쩡히 돌아다니면서 게임만 잘 하지? 그건 형이 놈들과 타협했다는 뜻이야."

"너도 멀쩡하잖아!"

"누구겠어? 동수형을 얼마든지 방심상태로 만들어 등 돌려대게 할 만한 사람은? 경찰 앞에 거짓 증언하기 쉬운 유일한 신고자는? 가장 쉽게 연성이 방에 들어가서 살충제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은? 떴다 하면 팬들이 몰린다고 놈들이 앞다투어 조작해 줄 만한 대스타는?"

"말도 안되는 추측으로 계속 형을 의심한다면 난 당장 나가버리겠어."

"안됐지만 방금 한 말은 사실이야. 동수형이 맵 풀어놓은 메일함 내가 열었다. 그뿐 아니라 요환이형이 그간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증거야. 그 한 키를 꽂으면서 수수께끼가 풀리고 있어. 이제부터 다 말해 주지."


#4
[보관된 편지 096
형이 전화 안 받아서 혼자 가는 중이야. 나 사건 하나 터뜨릴거야. 성준이가 맵이 이상하다고 하길래 자료를 요청했더
8/7  5:05 p
머슴]


[보관된 편지 095
니 연봉 두배로 올려준다고 입막으려 들더라 썩은 놈들. 문자 보는대로 전화줘 자세히 얘기해줄께 일루 와주면 더 좋구
8/7  5:06 p
머슴]


[보관된 편지 094
형. 전화 왜 꺼놨어? 나 다 얘기하고 왔어. 속이 후련한데 좀 걱정되네. 리조트 가면 나아지겠지?
8/7  8:17 p
머슴]


후배들과 함께 모여 쉬고 있던 요환에게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멀쩡하게 숙소를 걸어 나갔던 박성준이 혼수상태가 되어 실려갔다니? 상욱이 전화를 받고 나서 그 자리의 팀원들에게 알렸을 땐 다들 믿지 않았지만, 곧 기막히게도 사실임이 밝혀졌다. 요환은 휴대폰부터 꺼내 연성의 마지막 문자들을 얼른 다시 확인해보았다.


폴더를 닫았다. 폰과 함께 왼손을 주머니에 넣은 그는 쓰러지듯 벽에 기댔다. 턱을 치켜올리고 머리를 완전히 벽에 붙여버린 채로 갈색 머리카락을 한참 부볐다. 자신에 대한 원망이 사라질 때까지 미친듯이...... 왜 그땐 이 문자 속의 성준이라는 이름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왜 신은 나쁜 소식이 들리기 전에 미리 깨닫는 행운을 끝내 인간들에게 주지 않는가?

성준이까지! 몇 번이나 오른손으로 벽을 쳐 보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성준 역시 연성과 마찬가지로 '썩은 놈들'의 제물이 된 것이다. 다행히도 아직 살아 있지만, 깨어날 때까지는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을 따름이다.


'난 바로 알겠어. 누군가 고의로 저지른 일이야. 연성이에게 살충제를 썼듯이 누가 성준이에게 뭘 타 먹인 거야. 지오애들을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가......'


"상욱아, 어젯밤에 누구누구가 성준이 옆에 앉았는지 기억나?"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냐는 듯 두 눈을 껌뻑거리던 상욱이 금방 기억해내고 대답했다.

"민이형하고 중모형 사이에 앉았는데, 중모형은 금방 계산하고 갔어. 그 다음에는 태민이형이 앉아있었어."

"강민이라구?"


성학승부터 윤종민까지, 그 자리에 있던 후배들이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은 요환이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떠는 것을 보았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그들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고 그를 주시했다. 애써 감정을 누르며 숨을 고르던 그는 눈을 질끈 감더니 갈색 머리를 한번에 쓸어넘겨 버렸다.


"민이한테 전화해서 듀얼 끝나고 나 좀 보자고 전해. 당장."


후배들이 그와 눈을 맞출 때는 보통 까르르 웃는 상황이다. 그러나 가끔은 지금처럼, 그의 눈을 보지 않으면 모든 시간이 멈춰 버릴 듯이 압도적일 때도 있다. 그런 사람이 임요환이다.




링크: 1~9편 10~13편 14~17편 18~2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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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29 11:13
수정 아이콘
다음화는 언제 올라 오나요?^^
흥미진진해서 언제 올라올지 기대되네요.
얼른 다음화도 올려주세요~~^^
kiss the tears
05/10/29 11:48
수정 아이콘
전 어제 여기서 이 글 읽고 비타넷 가서 뒷 이야기 읽고

결국 디씨 스겔까지 가서 34편까지 다 읽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세시간이 훌쩍 지난 듯...
Answer쫑
05/10/29 12:25
수정 아이콘
정말 최고입니다^^
홍승식
05/10/29 13:43
수정 아이콘
덜덜덜입니다.
마술사
05/10/29 14:59
수정 아이콘
음; 아무래도 범인은 선기자님 같은데.....
unipolar
05/10/29 15:13
수정 아이콘
홍승식//아무래도 추리소설이다 보니까..^^ 앞으로도 더 기대해 주세요.
마술사//앗?!~ 범인,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__^
unipolar
05/10/29 16:38
수정 아이콘
누트//오늘 밤 자정 가까이에 35편(아마도?)까지 줄줄이 올릴 생각입니다. 몇시간 안 남았네요.

kiss the tears//앗, 곧 다음편들이 줄줄이 올라올 텐데... 워낙 길어서 읽는데 좀 오래 걸리긴 하죠. 하지만 교정을 다 보고 올리는 PGR판이 나을 것 같은데.^^; 현재 34편까지 나온 것이 맞습니다. 곧 PGR에 35편까지 다 올릴 생각입니다.

Answer쫑//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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