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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12/01 12:20:49
Name cheme
Subject [일반] [서평]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作
호주의 SF작가 그렉 이건은 상대적으로 한국에서는 덜 알려진 SF작가입니다. 그래서 그가 1990년대-2000년대 사이에 쓴 11편의 중단편을 모아 편집한 책이 작년에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되었을 때 반갑기도 했습니다. 그렉 이건은 ‘SF작가들의 작가’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 즉, 뇌과학, 수학, 컴퓨터 과학, 천문학, 물리학, 유전공학 등의 분야를 넘나들며 ‘이런 것도 SF의 소재가 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지적인 모험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은 휴고상, 로커스상, 아시모프상 등 SF 분야에서는 유명한 상을 많이 받았고, 평단에서는 물론 독자들 사이에서도 좋은 평을 얻고 있습니다.

그렉 이건은 테드 창 만큼 한국에 잘 알려진 SF작가는 아닙니다. 아마도 그의 책들, 특히 커리어 초창기에 지은 작품들이 주로 SF 중에서도 하드 SF라 불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SF를 즐기시는 분들은 이러한 분류에 익숙하시겠지만, 사실 하드 SF는 소프트 SF에 비해 이야기로 엮어내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들 합니다. 기본적인 소설의 핍진성을 확보할 수 있는 플롯을 이어가는 것도 어렵거니와, 그 플롯 속에 현재 인류에게 알려진 과학적 사실은 물론, 그에 기반하여 ‘외삽’이 가능한 플롯을 엮어야 하는 어려움이 이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수론을 이용하여 스릴러 소설을 쓰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예를 들어 골드바흐 추측을 증명한 어떤 수학자에 대한 살인 이야기 등), 정수론을 근간으로 SF 소설을 쓰는 것 (예를 들어 골드바흐 추측의 일부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외계 수학자와의 접촉)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쓰여진 하드 SF 소설은 그것만이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상이 있습니다. 단순히 과학적 상상력의 확대를 넘어, 일종의 경이감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이감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현상을 체험할 때 느껴지는 종류의 경이감과는 종류가 다릅니다. SF가 줄 수 있는 경이감은 상상력의 최전선이 한 단계 더 넓어지는 것, 그 과정에 독자가 한 사람의 기여자로서 같이 참여할 수 있는 느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렉 이건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과학적 경이감의 확장에 독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SF 소설들, 특히 하드 SF 소설들은 실제로 상상력 뿐만 아니라, 연구과제의 기획이나 로드맵 작성, 미래 시나리오의 스펙트럼 확장 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 작가가 참여하는 SciFi 시리즈는 일종의 델파이 신탁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하며, 학자 출신의 작가 한 사람이 써 내려가는 시리즈는 일종의 자기 현시적인 과학기술 로드맵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렉 이건의 SF도 이런 기능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뇌과학, 유전공학, 수학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상당히 있을법한 근미래의 발전된 과학기술을 다루고 있으며, 그것의 디테일을 설정하는 단계 역시 상당히 공들인 흔적이 역력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배경이 수학과 컴퓨터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그가 다루는 수학 혹은 컴퓨터 기반의 SF 소설 역시 현 시점에서 보아도 90년대에 쓰여진 소설이라고는 잘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현실성 있으며, 아직 구현되지 않은 기술들 역시 근미래에 구현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 책의 첫번째 작품은 ‘적절한 사랑’입니다. 충격적인 설정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몸은 거의 죽었지만, 뇌는 살아 있는 사람의 뇌를 살리는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작가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에 참여하게 하는 장치는 뇌만 살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그 뇌를 다른 사람의 신체에 혹은 클론에 이식한 이후, 과연 그 존재는 누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단순히 뇌를 다른 클론의 신체에 이식하는 방식이 통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뇌만 이식하는 것은 의식의 온전한 전이를 보장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뇌는 중추 신경계가 모든 신호를 보내는 종착지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동시에 신호를 몸의 각지로 보내며 제어하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또한 뇌 안에서만 신체의 모든 신호 처리가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일부 신호는 이미 몸의 다른 신경계에서 미리 처리된, 그래서 처리된 (혹은 가공된) 신호가 뇌로 보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뇌만 살려서 클론의 몸에 이식하면 기존의 몸 내부, 즉, 신경세포 곳곳에 남겨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 혹은 의식의 편린들은 온전히 이식하지 못 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빈 공간이 생긴 뇌는 과연 온전한 자신의 뇌라고 볼 수 있을까요? 작품에서는 뇌-신경계 사이를 컴퓨터가 제어하는 인터페이스 (Interface)로 이어준다는 설정이 나와있지만, 이 설정만으로 이 작품이 제대로 된 하드 SF라 보기에는 첫번째 단편은 다소 모자란 부분도 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백미는 뇌과학 혹은 클론에 대한 하드 SF의 과학 문법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있지 않습니다. 마치 대리모처럼 남편의 뇌를 2년 동안 ‘임신’하고 있어야만 했던 어떤 여성이 ‘임신’과 ‘출산’, 그리고 그 뇌의 성장과 성체가 된 뇌 (가 이식된 클론)와의 사랑을 나누는 모든 과정에 겪는 인간성의 붕괴 과정에 대한 묘사가 진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교적 짧은 작품이기 때문에 이 붕괴 과정이 묘사된 것은 불과 몇 페이지 밖에 걸쳐 있지 않습니다만, 그 길이와는 상관 없이, 숨가쁘게, 때로는 냉혈한처럼 담담하게 기술된 작중 화자 (즉, 아내)의 심리는 ‘복잡함’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과정, 즉, 한 여성의 자아가 왜 붕괴되기 직전으로까지 이르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뇌 이식’이라는 지금 보면 좀 흔해 보이는 SF 클리쉐를 차용했지만, 동시에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여러 층위에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단지 뇌를 클론에게 이식하는 방식의 다시 태어남이었다면 ‘클론에 이식된 이후의 내가 과연 이식 이전의 나와 같은 지’ 같은 류의 철학적 주제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클리쉐를 파괴합니다. 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자궁이라는 상징적인 기관 속에서 장시간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그리고 ‘출산’ 이후 성체가 된 클론의 빈 머리 공간에 이식되는 방식의 다시 태어남이 그려짐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클리쉐를 비트는 신선함도 이로부터 발생합니다. 그런데 한 단계 더 나아간 다시 태어남도 놓치면 안 될 부분입니다. 그 방식은 이렇습니다. 작중 화자가 전형적인 와이프 역할을 벗어나, 일종의 대리모로, 어머니로, 보호자로, 그리고 다시 와이프로 순환하며 다시 태어나는 구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남편의 다시 태어남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물, 즉, 작중 화자이자 와이프 역시 이 과정에서 다시 태어남을 겪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두번째 작품인 ‘백광년의 일기’는 굉장히 재미있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즉, 우주가 계속 가속 팽창하는 상황이라면), 우리와 100광년 떨어진 은하에서 오는 빛은 이론적으로는 100년 전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즉, 이미 100년 전에 그 은하계가 멸망했다고 해도, 앞으로 100년 동안은 그 은하계의 정보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죠. 여기서는 그 정보는 전자기파 형태로 전달되는 과거의 정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작가는 이를 교묘하게 비틉니다. 작품의 첫 부분에서 짧게 언급했기 때문에 놓치기 쉽습니다만, 작가는 우주가 ‘수축기’에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이 반대가 되어 미래의 정보를 보내는 은하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 설정에는 몇 가지 허점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미래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장면에서는 관측기의 이미지 센서 (CCD)가 은하로부터 오는 빛을 감지하여 전자 신호로 바꾸는 것을 마치 테이프를 거꾸로 돌리는 방식처럼 묘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테이프를 거꾸로 돌린다면 이번에는 CCD에서 방출된 광자가 은하를 향해 출발하여 신호가 역재생되는 방식이 가능하다고 작가는 설정합니다. 그렇지만 정보는 광자를 전자, 혹은 전자를 광자로 전환함으로써 그 방향이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CCD에서 방출된 광자는 사실 너무 약하기 때문에 100광년은 커녕, 1광초도 안 되는 거리를 진행하면서 사라지지 않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기술적으로 사실 달성하기 불가능에 가까운 설정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오류를 잠깐 제치고 다시 작품으로 돌아오면 흥미로운 설정은 많이 있습니다. 이미 미래를 ‘점지’해 준 은하로부터 오는 정보를 대부분의 사람은 하루 100단어 정도의 분량으로 받고 있습니다. 마치 미래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매일 100단어짜리 짧은 트윗을 날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미래로부터의 자신에게 정보를 받은 현재의 자신은 마치 현재의 자유의지는 모두 미래에게 반납한 것처럼 미래에서 정해준 내용 그대로 현실을 살게 됩니다. 여기서 해석의 모호함이 생깁니다. 누구가 의문을 품을 수 있듯, 미래의 정보를 따르지 않고 내 의지대로 삶의 방향을 바꾸면 어떻게 되느냐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작품에서는 이러한 모순될 수 있는 설정을 현재의 자신이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이미 미래에 정해진 방식이 그대로 실시간 투영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실시간 행동하는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거 중세시대 신학의 예정론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허용한다고 해도, 하루 100단어 수준의 정보가 아닌, 정부나 대기업에서 통제하는 엄청난 대역폭의 미래 정보 (예를 들어 수백 페이지 분량의 정보 등)는 그 존재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는 앞으로 수십, 수백 년 동안의 모든 이벤트를 다 알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는 경기 결과가 다 정해져 있고, 학자들은 자신이 어떤 연구를 할지, 어떤 논문을 쓸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도 알고 있습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물론 투자자의 자유의지 마저도 이미 예정된 이벤트 트랙의 일부라면 이른바 선물/옵션의 개념이 성립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결과가 정해진 미래라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생활의 주체들에게는 미래에 모든 것이 종속된 상황에서, 그저 찰라를 계속 억지로 이어 붙여가며 살게 만드는 느낌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예정된 미래라는 설정은 SF소설에서 그래서 더더욱 커버하기 벅찬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장치의 솔루션으로서 타임루프물로 자주 빠지기도 합니다. 물론 예정된 미래를 비틀어 그 순간부터 평행우주를 만들어내는 장치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이 작품에서는 적어도 그러한 분기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급되면 좋았을만한 부분은 ‘지극히 국지적인 영역에서 생기는 불확실성이 증폭되어 결국 예정된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라는 논증을 차용한 장치였습니다. 작품의 말미에서는 주인공이 이러한 시도를 ‘인위적으로’ 하는 것처럼 묘사가 됩니다만, 현실은 좀 다를 것입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결국 시간과 에너지, 혹은 위치와 운동량의 불확실성은 상호 의존적이라, 어느 하나가 확실히 정해지면 다른 하나는 무한히 불확실해지게 됩니다. 에너지와 시간의 조합을 예로 든다면, 예를 들어 미래의 어떤 사건에 필요한 에너지 스케일이 정해질 경우, 오히려 그 사건이 벌어지는 시점을 특정하지 못 하게 됩니다. 이는 미리 정해진 타이밍과 이벤트라는 조합이 애초에 불가능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대부분의 우리 주변의 이벤트는 에너지와 시간이 관여된 것들이기 때문에, 양자역학, 특히 불확실성의 원리가 확실히 변하지 않는 한, 예정된 미래에 의한 하나의 우주, 혹은 하나의 우주를 만들기 위해 미래의 자유의지에 현재의 자유의지가 복속되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설적 장치만 놓고 본다면 이러한 발상은 흥미로운 생각 거리를 줍니다.

세번째 작품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내가 행복한 이유’로서 이른바 의뇌에 대한 것입니다. 이 작품의 주요 테마는 손이 없는 사람이 의수를 장착하여 자신의 손처럼 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뇌질환 환자가 뇌의 일부를 인공 뇌로 바꿔서 사용할 수 있는가, 그 인공 뇌가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의 뇌에서 조합된 것이라면 그 뇌의 주인은 여전히 자신인가 등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대한 것입니다. 다른 SF에서도 인공 뇌 혹은 아예 인공신경망 기반의 뇌 등에 대한 테마는 빈번하게 다뤄집니다. 특히 의식을 담고 있는 기관으로서, 뇌가 자신인지, 자신이 뇌인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과학에서는 충분히 답을 얻지 못 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시에 여전히 매력적인 SF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작품이 쓰여진 시점이 지금보다 수십 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꽤 현대 뇌과학 혹은 인공지능 기술에 비견될 수 있는 장치를 생각해 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4천 명의 샘플 뇌 정보를 조합하여 환자의 뇌 일부를 만들고, 그것을 컴퓨터 인터페이스로 연결한다는 발상이 그렇습니다. 앞서 살펴본 적절한 사랑 같은 작품에서도 이러한 개념이 조금 언급되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에서 보다 본격적인 수준에서 논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인공 뇌를 만들게 될 경우, 마치 최근의 생성형 인공지능이 수많은 학습을 거친 알고리듬에 의해 프롬프트를 인풋으로 받아 세상에 없던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과 무엇이 다른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아무리 생성형이라고는 해도, 출발은 거대한 학습 데이터입니다. 4천 명의 뇌에 담긴 정보는 이러한 학습 데이터 역할을 할 것이고, 복잡한 비선형 다변수 함수에 의해 조합된 인공 뇌는 어느 측면에서든 이 학습 데이터에서 내려 받은 특질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다만 가중치가 제각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뇌가 자의식을 담고 있다면, 다시 말해 4천 명의 자의식 일부, 예를 들어 음악이나 음식에 대한 취향 까지도 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좁게 말하자면 4천 명의 ‘욕망을 욕망하는 뇌’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작중 주인공이 ‘내게는 모든 미술품이, 모든 음악이 지고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어떤 음식도 맛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완벽하게 이상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라고 독백하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물론 기존에 남아 있던 환자의 뇌가 이 인공 뇌에 완벽하게 통합됨으로써,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충분히 기존의 자의식이 인공 뇌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것이 잘 안 될 경우, 혹은 그것이 되었다고 착각하게 될 경우가 바로 비극의 시작이 되는 셈입니다. ‘나는 자아의 재료에 해당하는 것들을 제공받았고, 이것들 모두를 시험해 보고, 이것들 모두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지난 열흘 동안 내가 느낀 즐거움은 무의미했다. 나는 타인이라는 태양의 빛을 쬐며 바람에 날리는 겨에 불과했다.’라고 작중 주인공이 독백하는 부분이 바로 그러합니다. 작중에서 설정한 의뇌의 특성상, 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통해 4천 명의 뇌 정보에 대한 가중치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문제는 그 가중치를 누가 조절할 것이냐는 점입니다. 외부에서 조절한다면 나의 뇌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외부에서 설계하고 설정한 파라미터 집합으로 구성된 생체 컴퓨터가 될 뿐이죠. 반면 내가 주도적으로 그 파라미터를 조절한다고 해도, 이는 나의 욕망을 구현해줄 생체 컴퓨터의 알고리듬의 일부를 내가 미세 조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방식을 택한다고 해도 타인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자체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나의 뇌만으로 나의 의지를 구현할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의뇌가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현대인들은 다양한 미디어와 SNS 등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접하며 그 정보의 가공마저도 타인의 필터를 거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타인이 SNS에 올린 멋진 관광지 사진을 보며 그 관광지에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타인이 그 관광지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며 대리만족 후 그 관광지에 다녀왔다고 스스로 암시를 걸거나 착각을 하는 것부터는 인위적인 경험이 될 수 있는 셈입니다. 인터넷 강의를 수동적으로 듣는 학생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사의 멋진 강의를 그저 관객으로서 감상만 한 후, 그 강의의 지식을 마치 자신의 지식인 양 착각하는 것과 그것을 철저히 다시 리뷰하며 스스로 공부하고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엄연히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뇌가 있고 타인의 뇌를 거친 정보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이미 많은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타인의 뇌에서 판단한 의사결정이나 욕망의 방향, 타인이 받아들인 세상의 정보가 필터링된 결과물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일부는 너무나 강한 영향, 즉, 소설대로라면 파라미터가 쏠려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인공 뇌가 없지만, 버츄얼 인공 뇌를 이식 받은 것처럼 살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에게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주기도 합니다.

인공 뇌도 그렇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뇌 역시 일종의 비가역적인 화학 반응을 통해 신경망이 계속 변합니다. 자주 쓰는 기능에 대해서라면 더 많은 신경세포가 생기고 연결되는데 반해, 자주 쓰지 않는 기능은 그만큼 연결도가 떨어지고 퇴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자주 쓰는 기능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가 뇌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게 될 상황이 생깁니다. 작품 속에서는 ‘스위치’라는 개념으로 혹은 중개 소프트웨어라는 개념으로 이 상황이 묘사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취향 혹은 선택이라는 방법으로 이 상황이 연결될 것입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취향이나 선택이라는 것 역시 과연 얼마나 자유의지를 통해 내 뇌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가일 것입니다. 이미 비가역적으로 변하고 있는 내 뇌 속에서, 그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100% 나의 의지만에 의한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종교적 철학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강력한 조언일 수도 있으며, 미디어나 SNS에서 보고 들은 정보들의 총합일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판단 외주화에 의해 내 뇌의 비가역적 변화의 방향이 결정되고, 그 방향에 의해 다음 판단의 외주가 일어난다고 본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내 뇌의 주인, 더 나아가 내 삶의 주인이 온전히 나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작중에서도 주인공은 의뇌 이식 후 스스로 자신의 뇌를 통제하고 싶어하지만, 무리한 시도를 할 때마다 의뇌가 마치 자기 방어라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미 의뇌와 자신의 원래 남아 있던 뇌가 하나의 뇌처럼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비가역적인 통합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죠.

사실 누군가의 뇌 정보를 바탕으로 만든 의뇌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만큼의 자아가 새로 생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4천 명의 데이터로 만들었다면, 이론적으로는, 그리고 좀 과하게 표현한다면 4천 명의 다중인격이 생기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애초에 의뇌를 만들 때 누군가의 뇌 정보를 다운로드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고, 0부터 시작하여 온전히 인공 뇌로 시작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과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공 뇌 조직에 있는 수천 조 개의 신경들의 연결 방식 (즉, 수천 조*수천 조)을 하나씩 다 테스트해볼 수는 없기 떄문입니다.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들의 뇌를 스캔하고 연결도를 파악하여 그것을 뼈대삼아 인공 뇌 구축을 시작하는 것이 제일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뇌가 가진 연결도만 참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결된 뇌세포가 관여한 그 사람의 취향과 욕망, 정보 처리 방식까지도 모두 일일이 참고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먼 미래에 정말 그럴듯한 인공 뇌를 만들 수 있는 과학기술이 성립하게 된다면, 그 시작은 바로 이러한 기존의 정보나 취향, 욕망들을 어떻게 ‘리셋’하면서도 신경세포들의 연결도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작가가 그리고 있는 인공 뇌의 이식은 마치 뇌의 비가역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메타포처럼 느껴집니다. 주인공은 뇌 기능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손에 넣었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은 결국 4천 명의 자아의 비선형 조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래서 자신을 로봇이라든지 괴물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여전히 그 장치를 잃고 싶지 않아 합니다. 즉, 주인공의 뇌는 이미 인공 뇌와 하나가 된 것이고, 그 상태는 비가역적인 변화가 된 것입니다. ‘”이제 완벽하게 나았으니까 소프트웨어를 제거해 줘, 더 이상 선택하는 능력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더라도,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이 어디서 왔는지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주인공이 독백하는 장면은 바로 그러한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해줍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는 모종의 비가역적 변화 장치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내서 행복해지는 것이 조절된다면 그것은 내 의지대로 행복해진 것인가, 아닌가, 그 행복은 진짜 행복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행복인가, 그 판단을 내리는 주체는 진짜 나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은 결국 끊임없이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은 의뇌라는, 그리고 의뇌가 가동할 수 있는 근미래의 시점을 그리고 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대입한다고 해도 별로 위화감이 없을 것입니다. 작품 속에서 그려진 이 비가역적 뇌의 변화에 대한 고찰은 모두에게 지적 자극과 동시에 철학적인 의문 부호를 끊임없이 생성하게 할 것입니다.

네번째 작품 ‘무한한 암살자’는 영화 인셉션이나 서던리치:소멸의 땅을 연상케하는 작품속 장치들이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이 작품은 본격적인 하드 SF로 나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소용돌이의 생성 과정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비유적 장치로 쓰이기는 했지만, 유체역학의 와류 혹은 난류 생성 메커니즘을 많이 차용하고 있으며, 특히 임계점을 넘어 생기는 와류는 임계점을 넘은 ‘S중독자’들의 역류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임계점 근처에서 생기는 일들은 통계물리에서 많이 다루는 이른바 임계 현상 (critical phenomena)의 이론을 차용하고 있으며, 그 이전에 임계점으로 나아가는 장면은 물리학의 자발적 대칭 깨짐 (spontaneous symmetry breaking) 개념을 차용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소용돌이의 생성은 유체역학에서는 주로 국기적 상태 (localized state)로 묘사합니다. 즉, 바다 일부분에 소용돌이가 생겼다고 해도 바다 전체가 소용돌이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소용돌이 역시 원래는 국지적 상태이지만, 이것이 간혹 경계를 뚫고 퍼져나갈 수 있다고 설정하는데, 작품 속 주인공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하는 특수요원으로 설정됩니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소용돌이는 서로 다른 평행세계의 접점에 해당합니다. 유체역학에서도 소용돌이 내부와 외부는 유체의 각운동량이 다르기 때문에 영역이 구분됩니다. 내부는 일종의 회전유체 (rotational flow)라면 외부는 층류 (laminar flow)일 수도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소용돌이는 경계를 기준으로 내부와 외부의 세계가 다른데, 주인공이 맞닥뜨린 소용돌이는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작품은 수학적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칸토어 집합 (Cantor set) 혹은 프랙탈 (fractal) 이론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되어 있다면 즐길거리를 한 층 더 깊이 그리고 많이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수학을 배경으로 한 SF는 간혹 있긴 합니다만, 칸토어 집합, 해석학, 프랙탈 이론 등을 배경으로 전개하는 하드 SF는 찾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추상적 개념을 제대로 다루는 것도 어려우려니와, 이에 소설적 장치를 덧입히는 것은 더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그렉 이건은 자신이 학문적으로 훈련받은 수학적 지식과 개념을 제대로 활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그가 목도하고 있는 소용돌이 세계의 개수가 유한한, 즉, 해석학 용어를 빌리자면 ‘측도 (measure)’가 0인 집합의 일부일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는 마치 0 과 1 사이의 유리수에 순서를 매길 수 있기 때문에, 유리수의 개수는 무한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측도는 0이라고 이야기하는 해석학 이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리수와 마찬가지로 유리수 역시 무한 개이지만, 무리수는 순서를 매길 수 없는 체계이므로 측도가 1입니다. 그렇지만 유리수는 순서를 매길 수 있으므로 측도가 0이 되는 셈이죠. 이런 관점에서는 유리수의 무한이 무리수의 무한보다 작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작품 속 특수요원 주인공은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모든 세계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는 적 (일명 ‘꿈꾸는자’)을 찾아내는 것에는 성공하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폭탄으로든 총탄으로든), 그 적을 죽이는 것에 실패합니다. 곧이어 그는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꿈꾸는자’가 주인공이 존재할 수 있는 세계를 ‘무한하지만 유한한’ 칸토어 집합에 가둬두었기 (작중에서는 칸토어 집합에 매핑한다고 표현)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견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장 간단한 칸토어 집합으로서 0과 1 사이의 실수를 1/3토막씩 없애는 프랙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처음에는 1/3과 2/3 사이의 숫자를 없애 버리는 것이죠. 그러면 0과 1/3, 2/3와 1사이의 두 토막만 남습니다. 그러나 이 두 토막에 있는 숫자들은 원래 0과 1사이에 있었던 모든 실수를 1/3씩 취한 값과 똑같습니다. (더 정확히는 첫번째 토막은 1/3을 곱한 것, 두번째 토막은 1/3을 곱하고 다시 2/3를 더한 것.) 즉, 수의 ‘밀도’는 원래와 똑 같은 것이죠. 다시 이 두 토막 각각의 중심에서 1/3 토막을 없애 버립니다. 이 작업을 반복하면 각각의 토막에 있는 수의 밀도는 보존되지만 수 자체가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점점 0으로 수렴합니다 (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수학적으로는 정상적으로 성립합니다.).

작가는 이러한 칸토어 집합 프랙탈을 평행세계에서 꿈꾸는자를 암살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갖는 측도를 0으로 만드는 작업으로 묘사합니다. 꿈꾸는자는 암살자를 피하기 위해 암살자가 있는 위치를 골라 다른 위치를 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암살자가 있는 공간을 축소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꿈꾸는자는 암살자를 매핑된 먼지 같은 칸토어 집합에 가둬둡니다. 이론적으로는 칸토어 집합 프랙탈이 반복되면 암살자가 매핑된 공간의 크기는 0으로 수렴합니다. 따라서 꿈꾸는자는 0과 1 사이에서 아무 값이나 취해도 암살자와 절대 만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이 때문에 암살자 (즉, 주인공)이 시도하는 모든 암살은 실패로 귀결되는 셈이죠. 하드 SF 소설에서 이렇게 흥미롭게 칸토어 집합이나 해석학의 측도의 개념을 이용하는 것은 드문데, 그렉 이건은 이 장치를 창의적으로 잘 활용한 것 같습니다.

다섯번째 작품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는 풍자적인 작품이자, 공들여 설정한 과학적 장치들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재미있습니다. 쇼크로스는 ‘Show + Cross’처럼 읽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가까운 종교적 신념을 가진 쇼크로스 박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연구 분야, 즉, 분자생물학+생화학+바이러스학을 일종의 생물 무기를 만드는 전문 도구로 활용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이미 아버지가 케이블 TV를 통해 기독교 종교 사업을 벌이는 (즉, Show + Cross) 목적부터 시작된 가업의 확장판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미디어로, 아들은 생물학을 무기로 삼았다는 것만 차이가 납니다. 그렇지만 아들 쇼크로스 박사가 불순한 동기에서 바이러스 무기를 만드는 과정에 묘사된 과학은 흥미롭습니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를 감안한다면 작가는 마치 21세기의 분자생물학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미리 예견이나 한 것처럼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십 만 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생체 분자의 특징 (예를 들어 생체 활성화 등)을 계산하기 위해 슈뢰딩거 방정식 (Schrodinger equation)을 푸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작가가 묘사한 것처럼 이를 정확하게 푸는 것은 지독하게 복잡한 과정 (예를 들어 엄청난 크기의 행렬의 고유값을 계산하는 것)을 수반하지만, 최근에는 이보다 훨씬 더 빠르고 확실하게 푸는 방법들 (예를 들어 variational quantum eigensolver나 신경망 기반 reservoir computing 등)이 잘 알려져 있고, 이는 실제로 3차원 단백질 접힘 (3D protein folding)이나 효소 (enzyme)의 활성도를 추정하는 분자 동역학 계산에 응용됩니다.

작가는 이러한 디테일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1인 실험실에서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한 분자생물학 설계와 해석 작업이 가능할 수 있음을 설정합니다. 이는 아마도 작가가 생물학 배경 지식은 별로 많지 않지만 그가 컴퓨터 과학자이자 수학자라는 것, 그리고 그가 근무한 직장이 병원 부속 연구소였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강력한 컴퓨팅 하드웨어와 충분히 큰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면 바이러스를 분자 수준에서부터 ‘설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쇼크로스는 합성생물학 기법을 이용하여 (예를 들어 신체의 면역 시스템에 걸리지 않는 단백질 껍질을 갖는 바이러스 등), 특수한 환경 (예를 들어 정액, 질 분비물, 혈액)에서만 생존 가능한 바이러스 최종판 전 단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 바이러스는 최종적으로는 T세포에 재감염된 이후 획득한 유전 정보와 증식 후 얻은 유전 정보를 비교하여 최종판 바이러스로의 진화를 ‘결정’합니다. 놀라운 상상력이죠. 작가는 이 설정을 통해, 쇼크로스 박사가 설계한 바이러스가 자동적으로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 최종 심판을 내릴 수 있는 기능을 획득하게 만듭니다. 일종의 ‘정절’ 혹은 ‘도덕’을 바이러스의 분자 레벨에 각인시키는 셈입니다.

작가는 이러한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의 사회적 혼란에 대해서 자기 방어적으로 다양한 솔루션을 만들어 냅니다. 수혈이나 장기 이식, 의료 현장에서 일하는 의료인력, 강간 등의 범죄에 대해 그가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바이러스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꽤 세세하게 설명합니다. 이는 소설의 핍진성을 보강하는 재료가 되기도 하지만, 몇 가지 허점은 존재합니다. 핍진성을 살리다 보니, 한계가 명확한 과학적 설정이 점점 누더기가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이러한 누더기를 만드는 장본인으로 주인공을 낙점하여 그에게 멍에를 씌우고 있습니다만, 소설 자체로만 본다면 허술함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허술함은 아마도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쇼크로스 박사가 완성한 바이러스는 그가 어딘가에서 만난 매춘부가 쏘아붙인 ‘혹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네 편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믿었어? 하지만 네가 실제로 증명한 건 네 자신의 불안감이었을 뿐이야.’라는 말속에서 보이듯, 쇼크로스 박사 자체의 불완전함, 닫혀 있음, 그리고 종교적으로 왜곡된 믿음으로 내부 붕괴된 인물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치가 되고 있을 뿐입니다. 쇼크로스 박사는 마치 종교적 광신주의자처럼 확신에 차서 이러한 생물 무기를 만든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스스로는 자신의 선택에 전혀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 그저 하나님을 하나의 디펜스 장치로 빌려오는, 그래서 자신의 바이러스가 그 하나님이 승인한 도구가 된다는 내적 확신을 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일 뿐입니다.

누더기가 된 과학적 설정은 끝을 향하여 치닫습니다. 도덕적 생활을 하는 일부일처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바로 그 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한 생명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이를 깨달은 쇼크로스 박사가 정신 붕괴하기 바로 직전 단계에서 멈춥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결합니다. 인간이 생물 무기를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하고 만든다고 해도 생명체 본연이 갖는 복잡성과 불예측성을 정복하기는 어렵고, 그래서 항상 예상하지 못한 허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쇼크로스 박사처럼 여전히 일부 국가나 테러 단체에서는 바이러스 기반 생물 무기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고, 정말 인류는 이러한 무분별한 생물 무기로 인해 절멸 위기에 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특히 요즘처럼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전쟁의 위험이 나날이 높아지는 세태 속에서는 어떤 불순한 목적을 가진 기관이나 단체의 손에 이러한 생물 무기가 들어가게 될 경우 이 작품에서 그려진 일과 비슷한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오로지 성적으로 타락하거나 문란한 사람들만 타깃 삼아 설계된 바이러스라는 설정이 나오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특정 인종, 성별, 직업군, 종교, 민족 등을 타깃으로 삼는 (즉, 유전자 각인이 될 수 있는) 무기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정도로 어리석고 분별을 못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우려가 되는 점은 그렉 이건이 이 작품을 썼던 당시보다도 현재의 분자생물학, 합성생물학, 생명정보학 관련 과학기술은 너무도 발달한 상황이고, 특히 컴퓨팅 하드웨어의 발전이 눈부실 정도라서 이제 국가 단위가 아닌, 기관이나 회사, 심지어 돈이 좀 있는 개인이라면 충분히 비슷한 상상을 현실로 옮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작품 속에서 결말이 불행하게 이어지게 되는 것처럼, 결국 무기화된 바이러스, 혹은 합성생물학은 그 무기를 만든 사람이나 단체를 종국적으로는 공격하는 칼날이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은 코로나 판데믹을 오랜 기간 거쳐 온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도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기원이 무엇이든, 인류는 앞으로 주기적으로 이러한 판데믹에 버금가는 미지의 바이러스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종류의 박쥐로부터,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에서 잠자고 있던 수만 년 전의 바이러스로부터, 빙붕이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는 남극 대륙 어딘가 혹은 태평향 심해 바닥에서 자원을 채굴하다가 우연히 채취된 샘플에 잠자고 있던 고대의 균류로부터 등, 여러 경로로 인류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 했던 생명체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일부는 인류를 절멸 위기로까지 몰고갈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분자생물학이나 생명정보학, mRNA 기반 신약이나 백신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또 효과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신약이나 백신 개발과 생물 무기 개발은 정말 한끝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순한 마음을 먹은 개인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지만, 미필적 고의에 의해서 우연히 이러한 백신이나 치료제가 부작용을 일으켜 미지의 바이러스를 더 치명적으로 바뀌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섬뜩한 일이지만 앞으로도 바이러스와 공생을 하며 살아야 할 인류 입장에서는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로 상정하여 대비책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여섯번째 작품 ‘행동 공리’ 역시 작가가 즐겨 탐닉하는 설정, 즉, 뇌과학 혹은 뇌의 인공적인 조작에 대한 시리즈 중 하나로 읽힙니다. 이 작품의 주요 테마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임플란트’입니다. 말만 임플란트지, 그저 코로 흡입하면 알아서 뇌 속에서 작동하는 신경 나노머신일 뿐입니다. 아내를 은행강도에 의해 잃은 주인공은 평소 사형제에 반대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고, 범죄자를 사적으로 죽이는 방식의 복수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러한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의 의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윤리적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임플란트를 구입합니다. 마치 맨정신에서는 범죄를 저지를 수 없으니, 술이나 약을 잔뜩 마시거나 취해서 충동적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흡사합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술은 잠깐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용도이지만, 임플란트는 신경세포를 직접 통제하여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 지속 시간 역시 정밀한 제어 프로그램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이러한 임플란트가 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될까요? 예를 들어 평상시에 놀이기구 타는 것이 겁이 나서 한 번도 못 타봤지만 마음 속으로는 타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뇌에서 공포심을 자아내는 신경을 잠깐 마비시키는 용도로 사용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케일은 훨씬 커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범죄의 욕망을 가진, 그렇지만 행동으로 옮길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이 임플란트에 의존하여 얼마든지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이 임플란트 때문이었다고 (예를 들어 누가 강제로 주입한)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술해 취해 폭행을 했지만 그것은 술 때문이었다 핑계를 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임플란트가 대중화된다면 그것은 필히 중독 증세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점도 문제입니다. 현재 생활이 너무나 따분하고 괴로운 사람들이라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해 주는 임플란트를 주기적으로 찾을 것이고, 업무 성과를 내야 하는 사람이라면 잠을 자지 않고 집중해도 피곤함을 못 느끼게 하는 임플란트를 구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쯤되면 임플란트는 사실 마약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입니다. 특히 임플란트 제조사는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일텐데, 사실상 전 세계 모든 소비 시장을 지배하는 집단이 될 것임도 확실합니다.

임플란트의 작동 방식에 대한 설정은 신경 나노머신의 타깃 추적 및 제어입니다. 정확히 이 방식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작가는 작품에서 설명을 자세히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앞으로 수십-수백 년 안에 가능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간의 뇌가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주요 의사 결정이 내려지는 통로에 대한 파악은 가능할 것이고, 그 통로를 지나는 전기적 신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나노머신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독립된 전원이 없더라도, 생체 에너지만으로도 (즉, 화학에너지) 작동할 수 있는 저전력 프로세서를 갖추고 있을 것이고, 신경세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신경 세포 안팎의 이온 농도를 역전시킬 화학포텐셜 (chemical potential) 조절 장치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타깃으로 삼는 지점 역시 다양한 바이오 지표 (biomarker)나 인지 요소를 프로그래밍하여 맞춤형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뇌 속에서의 작동 시간이나 영향 범위 역시 프로그래밍을 통해 조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이러한 기술이 가능할지 여부보다는, 실제로 중요한 문제는 대중화될 수 있을지 여부가 될 것입니다. 대중화된다면 앞서 언급한 중독 문제가 불거질 것이고, 대중화되지 않더라도 불순한 의도를 가진 단체로 넘어간다면 수많은 테러리스트들이 더 많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전쟁 중에 활용된다면 인간성이 말살된 군인 집단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며, 스포츠 경기에서는 스포츠 도박 세력들이 악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적절한 사랑’, ‘내가 행복한 이유’)에서도 논의된 부분이지만, 이렇게 자신의 뇌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영향에 의해 통제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윤리적 고민과 현실적 문제를 동시에 수반하는 장치가 됩니다. 이는 단순히 소설속의 주요 장치뿐만 아니라, 앞으로 짧게는 수십 년 이내로 현실화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임플란트는 이미 일론 머스크가 창업한 뉴럴링크 같은 회사의 주요 품목과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머스크는 뇌에 심을 수 있는 일종의 신경 프로세서를 개발하여 뇌 기능의 개선을 돕고, 더 나아가 인간 자체를 더 스마트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지금은 이 삽입이 꽤 복잡한 프로세서와 생체-컴퓨터 인터페이스 (human-computer interface)의 개발, 그리고 복잡한 뇌수술 과정을 동반할 것이지만, 앞으로 이 장치의 크기가 작아지고 비용도 저렴해지면서 설치 과정마저도 간편해진다면 더 많은 사람들은 이 장치 삽입에 거부감을 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는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몇 가지 재미난 의문 혹은 추가 생각도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임플란트를 만드는 회사가 조금씩 플라시보를 섞어 팔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고객이 플라시보 임플란트를 구입하여 삽입한 후 행동을 바꿨다면, 그 고객은 임플란트와는 상관없이 그저 임플란트를 삽입했다는 자각만으로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고객은 임플란트 같은 외적 요소의 도움에 의해 의지를 바꾸려 했지만, 그 도움 없이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의 결정을 바꾸게 된 셈이죠. 플라시보를 구입한 고객이 성능을 체감하지 못 해 항의한다면, 회사는 간혹 생기는 불량품이라며 환불해주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 일반 의약품에서도 플라시보 효과가 관측되는 것처럼, 임플란트에서도 플라시보 효과는 있을텐데, 과연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라는 것, 그것을 관장하는 뇌라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가 우리의 의지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두번째 생각은 임플란트 유효 기간이 지난 후, 임플란트가 영향을 미친 모든 흔적이 가역적인 상태로 다시 원상복구 될 수 있을 것이냐는 점입니다. 작품 속 주인공의 독백에서도 보였지만, 작품 속에 언급된 임플란트가 주는 영향 중 일부 흔적은 비가역적으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다면 임플란트는 사실 일시적인 영향이 아닌, 영구적인 영향을 주는 장치가 되는 셈입니다. 실제로도 만약 이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임플란트가 현실 세계에도 있다면 그로 인해 뇌 신경세포의 연결 혹은 화학적 결합 등이 반영구적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임플란트 전후의 나는 이론적으로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 뉴럴링크를 설치한 사람이 만약 다시 그것을 떼어낸다고 해도 원래대로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불확실해 보이는데, 이 작품은 마치 이러한 현실과 우려를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것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도 일독의 가치가 있습니다. 소설적 작풍만 놓고 보면, 이 작품은 90년대 영미권 스릴러에서 자주 보이는 독신 남성의 연적 제거를 위한 과정과 장치를 묘사하는 플롯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플롯에 익숙한 독자라면 반갑게 읽을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일곱번째 작품, ‘내가 되는 법 배우기’ 역시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연장선 상에 있는 단편입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시대, 그리고 사회에는 태어날 때 삽입된 것으로 보이는 ‘보석’ 이라 부르는 인공 뇌가 장착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원래의 뇌는 그저 회백질의 덩어리일 뿐이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노화를 피할 수 없고 따라서 질병이나 퇴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일종의 복제 뇌로서 보석을 장착시키고, 원래 뇌로부터 복제 뇌로의 정보 전이를 체크하는 ‘교사’라는 인터페이스가 추가됩니다. 이 장치들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원래 뇌의 주인이 인지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인공 뇌에 그대로 백업하는 셈입니다. 그러고 나서 일정 시점 (대략 30세 전후)가 되면 ‘전환’을 합니다. 즉, 원래의 생물학적 뇌는 폐기하고 ‘보석’으로 전이된 인공 뇌만으로 모든 기능을 대체한다는 설정이죠. 원래의 뇌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이 비어 있으면 안 되므로 최소한의 기능만 하는 새로운 뇌를 닮은 회백질 덩어리를 집어넣기는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포함한 모든 의사결정 신호 제어 장치는 결국 인공 뇌가 감당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다른 SF에서도 많이 보이는 설정이며, 이 작가 역시 자신의 다른 작품에서 많이 다룬 설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클리쉐가 가득해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장치 속에 사실 새로운 상상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특히 이런 것이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예를 들어 ‘전환’을 하기 전에 저절로 전환된다면? 그런데 이렇게 될 경우, 원래의 뇌가 폐기되기도 전에 보석으로 의식이 전이되고, 원래의 뇌에도 의식이 남아 있게 되므로, 머리속에는 두 명의 내가 공존하게 됩니다. 물론 평화롭게 공존할 수도 있지만, 종국에는 하나의 뇌만 남기게 만들기 위해 (혹은 그렇게 정해진 운명을 인지하며) 경쟁하고 치열하게 전투하겠죠.

보석으로의 전이가 무사히 일어났다고 해도 (즉, 원래의 뇌는 폐기), 과연 모든 의식이 제대로 보석으로 전이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통계적, 수학적 확률에 의한 에러는 있을 것이므로, 100% 완벽한 전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허용 가능한 오류는 어느 수준일까요? 99.9% 정도면 합격선일까요? 90% 정도면 충분히 전이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인간의 핵심을 뇌로만 한정 짓는다면, 작품 속에서도 언급되었듯, 이 보석이라는 장치는 반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인간의 수명은 무한대로 연장됩니다. 필요하다면 몸을 클론하여 뇌 공간에 다시 보석을 장착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계속 몸을 옮겨 다니며 이식을 반복한다고 한다면, 과연 겉으로 보기에 이 ‘인간’은 몇 년을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보석에는 그 인간이 지나쳐온 삶의 기록도 내재될 수 있겠지만, 얼마든지 외부의 기억과 대량의 데이터를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것도 결국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석으로 대체된 뇌를 갖는 클론 몸을 가진 생명체(?)는 과연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보석과 진짜 뇌는 공존이 가능할까요? 아직 전환을 안 한 인간이 자신은 전환했다고 주장하면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 역도 가능할까요? 즉, 전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산(?)이라고 주장하며 속이는 것이 가능할까요? 임플란트든, 보석이든, 뇌의 일부 치환이든, 의뇌 장착이든, 뉴럴링크든, 어떤 방식이든, 자연적으로 생성된 뇌를 보강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대체하는 수준까지 기술이 발전하게 될 것임은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이미 들어오고 있습니다. 관건은 이렇게 보강되고 대체된 뇌를 갖게 된 사람들과 그렇지 못 한 사람들이 한 사회 속에서 결국 어울릴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이 작품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존재론적 성찰에만 머문 기존의 비슷한 작품과는 달리,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화자)의 시점이 갑자기 바뀌는 지점은 이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신기한 부분입니다. 유기 뇌의 주인공이 화자였다가, 어느 순간 주인공은 보석으로 전이된 화자의 시점으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전이된 뇌는 이전의 유기 뇌를 ‘그’라고 칭하기 시작합니다. 즉, 전이가 시작된 이후, 보석 뇌와 유기 뇌가 공존하게 될 경우, 두 뇌는 같은 몸 속에서도 서로 다른 자아가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그리고 두 뇌는 서로를 인지할 수 있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보석의 시점을 보여주지 않는 전반부에서는 유기 뇌가 공포심을 느끼는 것 (즉, 언젠가 전환되는 대상이 되어 폐기될 것이라는 공포)은 잘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전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전환된 이후, 보석 뇌의 시점에서는 유기 뇌가 겪는 공포심이 드러납니다. 사실 이러한 장치가 가능한 이유는, 원래대로라면 보석 뇌의 자아가 유기 뇌가 폐기된 이후에만 (즉, ‘교사’가 멈춘 이후에만) 작동을 시작하기 때문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모종의 이유로 보석 뇌가 먼저 자아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석 뇌는 유기 뇌의 공포심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렉 이건은 뇌와 관련된 자아에 대한 성찰 문제를 때로는 하드 SF의 관점에서, 때로는 소프트 SF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습니다만, 그 결말은 대부분 대동소이합니다. 존재론적 고민이 거듭되지만, 결국 자아를 담을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새로운 뇌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것이 옳은 방향인지는 논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뇌만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뇌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몸이 있다면 이론적으로 영생을 하는 것도 가능한데, 과연 이러한 사회에서 새로운 인간이 잉태되어 탄생하고 성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는 충분히 논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기술이 상용화된 사회에서는 영생 자체가 하나의 관습이 되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의 탄생 및 세대 교체, 현업 은퇴라는 개념도 필요 없어지게 됩니다. 관건은 얼마나 영생을 유지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 것이고, 그 비용을 어떻게 각 개체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점, 그리고 의뇌나 보석 같은 인공 뇌로의 의식 전이에 대한 기술적 불확실성에 비해, 인공지능으로 도배된 로봇 뇌가 뛰어날 경우, 인공 뇌를 굳이 장착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점 등이 주요 논점이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다양한 관점에서 일부 혹은 전체가 의뇌로 대체되는 상황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같이 들여다보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작가 스스로에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작가가 충분히 그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덟번째 작품 ‘바람에 날리는 겨’ 역시 뇌 신경학에 대한 내용이 주종을 이룹니다. 유전자 조작된 식물들로 가득한 남미의 정글 어딘가, 과거 미국 정부 기관에서 일했던 유전학자가 마약 카르텔과 협력하며 숨어 있습니다. CIA 요원인 주인공은 이 유전학자가 더 위험한 일을 벌이기 전, 처단하기 위해 밀림에 잠입하지만 결국 카르텔에 붙잡히고 맙니다. 유전학자가 개발한 것은 인공적인 뇌 신경물질로, 뇌의 구조를 사실상 리셋해 버리는 약물입니다. 그가 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주인공은 그를 왜 막을 수 없는지가 이 작품의 주요 플롯입니다. 앞선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짧은 스파이 소설을 표방하고 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실제로 이 인공 뇌 신경물질 (일명 ‘회색기사’)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불분명하게 그려집니다. 자아에 대한 성찰이나, 이 신경물질이 가져다주는 기이감도 찾기 어렵습니다. 다만, 비슷한 장치들이 다른 소설에 쓰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는 있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 속에서 언급된 다양한 장치들이 마약 카르텔이나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경우의 파급력에 대해 추정해 볼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아홉번째 작품 ‘루미너스’는 작가의 수학적 학문 배경이 가장 잘 반영된 중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두 가지 테마를 다룹니다. 첫번째 테마는 우리가 구축한 수학적 이론 (수론 포함)이 과연 이 우주에서 유일한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즉, 인류가 충분히 탐색하지 않은 수학적 이론이 있다면, 그리고 그 이론에서의 수학철학적 논리 체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논리 체계와 배치된다면 (즉, 공리 A가 참일 수도 있는 세계과 거짓일 수도 있는 세계가 나뉘는 것),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경계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는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묘사하는데, 사실 이를 판별할 수 있는 장치로 언급되는 것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루미너스’라는 컴퓨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수학 이론은 물리적 구현 (예를 들어 물리 이론이나 컴퓨터 등)이 없더라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수학 이론, 나아가 수학철학들 사이의 전쟁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물리적 검증 체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작가는 컴퓨터 과학에도 많은 조예를 가지고 있는데, 그 방편 중 하나로 작품에서 언급된 것이 바로 이 루미너스라는 컴퓨터를 ‘광컴퓨터 (optical computer)’로 묘사한 것입니다.

광컴퓨터는 현재의 전자식 컴퓨터 뒤를 이을 차세대 컴퓨팅 하드웨어의 기반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전자식 컴퓨터 (electronic computer)는 말그대로 전자의 흐름과 저장을 이진화된 신호로 변환한 후 제어함으로써 디지털 신호를 처리합니다. 그렇지만 전자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자가 아주 작긴 하지만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전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자가 돌아다니는 매체가 금이나 은 같은 전도체라고 하더라도, 전자 입장에서는 끊임없는 저항을 겪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로 인해 물질 안 에서의 전자의 이동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훨씬 느려지게 되는 문제 (대략 수백 분의 1 수준까지 느려지는 문제)와 저항으로 인해 열 발생의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됩니다. 또한 전자는 양자역학적으로 입자이자 동시에 파동이기도 한데, 이로 인해 아주 작은 물리적 나노 스케일 패턴을 만들어 그것으로 트랜지스터를 만든다고 할 때, 축소할 수 있는 물리적 크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평면 상에서 트랜지스터 집적 밀도 상한선을 만드는 주 원인이 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주 언급되는 것이 바로 광컴퓨터입니다. 광컴퓨터에서는 전자 대신 광자 (photon)을 사용합니다. 광자는 전자와는 달리 정지 상태에서는 질량이 없으며, 전하가 없습니다. 말그대로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고, 저항에 의한 열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에너지 효율이 극단적으로 높아질 수 있으며, 회절 (diffraction), 분배 (split) 등의 특징을 이용하면 병렬화하기도 좋습니다. 문제는 빛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광자의 파장을 충분히 작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400-700 nm 파장 범위의 가시광 대역의 레이저 등에 기반한 빛을 광자의 원천으로 이용할 경우, 광자 개개가 갖는 파장이 수백 nm에 달하기 때문에, 빛을 일정한 물리적 공간에 가둬 두기 위해서는 그에 비례하는 크기의 패턴 (예를 들어 폭이 200 nm 정도 되는 광도파로 (waveguide))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재의 전자 기반 트랜지스터 물리적 사이즈보다 10배 이상 더 큰 길이를 요구하고, 따라서 트랜지스터 집적도는 수백 분의 1 이하로 줄어들게 됩니다. 이는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계속 높이려는 현재의 컴퓨팅 하드웨어 기술 발전 추세에 반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물리적 공간에 더 잘 구속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파장을 지금보다 1/10, 1/100까지도 줄여야 할 것인데, 이렇게 되면 극자외선 (EUV), 혹은 X선 수준까지 광자의 파장이 짧아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파장이 짧아진 광자는 공간에 가둬 두는 것이 역설적으로 더 어려워집니다. 파장이 짧아졌으니 더 작은 크기의 광도파로만 있으면 되니까 파동역학 논리만 놓고 본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사실 짧은 파장 대역의 전자기파에 대해 대부분의 물질은 충분히 유전율 (dielectric constant)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 대부분 투과시켜버리는 특징이 생깁니다. 이는 공간의 물리적 크기를 줄인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광컴퓨터를 충분한 계산 성능을 갖춘 수준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물리적/기술적 한계가 명확합니다. 작 중 언급되는 광컴퓨터 루미너스는 일단 전반적인 크기가 상당해 보입니다. 아마도 가시광 대역의 레이저를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크기와 상관없이 전반적인 성능은 굉장히 혁신적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일단 고정된 회로가 없고, 그 안에서 즉시 주어진 문제에 맞게 구성되는 광 회로가 있다는 것이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이는 루미너스가 광컴퓨터의 궁극적인 형태, 즉, 완전광컴퓨터 (all optical computer)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현재 쓰이는 광컴퓨터의 기초적인 모습은 일부 계산을 광자로 하고, 처리된 신호는 여전히 실리콘 전자 소자로 하는 실리콘 포토닉스 (silicon photonics) 기술입니다.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광을 저장하고 멈추는 역할을 해야 할 메모리 소자에서의 CMOS 소자나 커패시터 (capacitor) 등의 소자를 모두 광컴퓨터 전용으로 만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소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만약 소재의 문제가 해결되고, 충분히 광컴퓨터가 될 수 있는 소자들도 구성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광도파로, 분배기, 커플러 등), 이제는 모든 소자를 빛 만으로 작동하게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컴퓨터는 겉에서 볼 때는 투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내부에서 무수히 많은 빛의 다발들이 초속 30만 km의 속도로 움직이지만 우리 눈에는 간혹 반짝 거리는 파란색, 붉은색, 초록색 빛들의 명멸만이 관측될 것입니다.

작중에서 묘사된 루미너스가 바로 이러한 궁극적인 형태의 완전광컴퓨터라면, 제가 알기로 SF에서 광컴퓨터의 제대로 된 구현을 묘사한 최초의 작품이 됩니다. 광컴퓨터가 실제로 구현되었을 경우, 그리고 크기에 제한이 없을 경우, 광컴퓨터는 전자 컴퓨터에 비해 에너지 소모량은 최소 1/1000에서, 수백, 수천만 분의 1까지도 줄어들 수 있게 됩니다. 거의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받아 전자 컴퓨터에 비해 최소 수백 배 이상 빠른, 그리고 집적도에 제한이 없다면, 무한정 크기를 늘리는 것도 가능하며, 병렬화에 최적인 구조를 만들 수 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슈퍼컴퓨터보다도 성능이 혁명적으로 개선된 컴퓨팅 하드웨어를 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작중에 묘사된 루미너스가 정말 이정도 수준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계산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렉 이건은 바로 그 작업으로서 앞서 언급한 서로 모순되는 공리 체계를 가진 수학 이론 체계를 언급합니다. 루미너스가 계산하고 있는 영역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수학 이론 체계는 마치 마지노선을 사이에 둔 연합군과 독일군처럼 전투를 거듭합니다. 다만 이 마지노선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을 뿐입니다. 루미너스에서는 이 두 진영 사이의 수학 이론 전투가 3차원 격자 상에 펼쳐진 수도 없이 많은 수학적 명제들의 명멸과 진보와 후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통계물리학을 배운 분들이라면 이 장면에서 3차원 격자 위에 펼쳐진 업 스핀 (up spin)과 다운 스핀 (down spin)이 서로 이웃해 있을 경우 끊임없이 자기 포텐셜 (magnetic potential)을 매개로 상호작용하면서 스핀 뒤집기를 하고 있는 이징 모형 (Ising model)을 연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징 모형 같은 통계물리 모형은 결국 통계물리에서 이야기하는 임계현상 (critical phenomena)를 시뮬레이션하기 위한 모형이고, 그래서 온도나 압력이 주어져 있을 때, 시스템 전체의 열역학적 자유 에너지 (free energy)를 최소화하는 경로를 따라 평형 상태로 가게 된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 우주 안에서 양립할 수 없는 예컨대 ‘업 수론’과 ‘다운 수론’이 있다면, 그리고 우주의 주어진 상태 (예를 들어 우주 배경 복사 온도 3K 같은 조건)가 있다면, 결국 두 수론 사이의 전쟁은 어느 평형 지점으로 귀결될까요? 우주가 닫힌 계이고, 그래서 자유 에너지를 정의할 수 있다면 우주에서의 열역학도 지구에서의 열역학과 다를 바 없으므로, 결국 모종의 평형 상태로 수렴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 우주가 닫힌 우주라는 가정, 그리고 우리 우주의 수론 사이의 경쟁에 대해 자유 에너지를 정의할 수 있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현재의 온도 (배경 복사 온도 3K)가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야 하는데, 사실 이 가정은 무리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는 빅뱅 이후 지극히 뜨거운 상태에서 138억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지금의 차가운 온도로 지속적으로 식어왔기 때문입니다. 만약 빅뱅 초기부터 수학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수학이 변하지 않았다면 두 수론 사이의 경쟁은 끊임없이 변하는 온도 조건에 영향을 받았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이 가정이 이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작품에서 언급하는 흥미로운 가정은 또 있습니다. 애초에 이러한 수학 체계는 물리적 현시 혹은 구현과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었느냐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수학자가 컴퓨터나 종이, 연필 같은 물리적 도구를 사용하여 이론을 전개하기도 전에, 이미 그 명제는 원래부터 빅뱅 이후 (심지어는 이전?) 존재하고 있었느냐는 것이죠. 다시 말해 수학자나 컴퓨터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수학 명제 혹은 이론을 재발견한 것에 불과한 것이냐에 대한 것인데, 작가는 이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독자들과 공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루미너스를 전에 미묘한 균형 상태에 있던 두 경쟁 수학 체계가 루미너스의 계산에 의해 물리적 구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균형이 불안정했던 균형점이 깨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한 쪽의 체계가 지배적인 체계가 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장면도 있습니다. 아마도 루미너스 같은 광컴퓨터 역시 물리적 구현의 도구이므로, 이를 통해 원래 준-평형 상태에 있던 수학 이론들의 균형이 물리적 구현에 의해 확장되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소설의 장치로 활용한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수학은 물리적 구현과 상관없이 원래 우리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오늘날에도 많은 물리학자들, 수학자들, 그리고 과학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논쟁하고 있습니다. 수학의 아름다움은 가장 자연의 진리에 가까운 것이므로, 물리학의 이론에서도 수학을 하나의 장치로서의 활용을 넘어, 이론의 정합성을 증명하는 심미적 장치 혹은 준거로 활용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MIT의 맥스 테그마크 같은 물리학자들은 아예 우주의 문법은 수학이며, 인간은 그 문법을 물리학의 연구를 통해 하나씩 탐색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자연을 구성하는 물리적 현상의 이면에 수학이 하나의 문법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물리적 현상을 거슬러 올라가 수학을 발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뜻입니다. 물론 물리적 연구는 여기서는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러한 극단적 시각은 물리학계에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수학에서는 물리학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성립되는 수학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물론 질량간극가설 같이 물리학에서 비롯된 문제가 수학의 소재가 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공학 시스템에서 발견된 편미분방정식이 결국 수학의 난제가 되는 경우 (예를 들어 네이비어-스토크스 방정식 (Navier-Stokes equation)의 해의 유일성 여부)도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즉, 물리적 구현은 수학을 찾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수학의 감춰진 하나의 측면은 물리적 탐색에서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을 동시에 인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작가의 수학적 학문 배경을 고려해 봤을 때, 그리고 그가 프로그래머로 오랜 기간 현업에서 실무 데이터를 다루면서 커리어를 쌓았음을 고려해 보았을 때, 작가는 이 두 가지 시각을 동시에 고려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양립할 수 없는 수학 이론, 그리고 그에 속한 하위 명제들의 집합들 사이의 복잡한 전투 양상으로 묘사한 것은 이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탁월한 상상력이라 생각합니다. 두 수학 이론 사이의 전선은 너무나 복잡하여 그야말로 프랙탈로 묘사되는 형태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며, 이 프랙탈 성질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바로 수학 이론들 사이의 전쟁 양상을 묘사하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작가는 칸토어 집합과 프랙탈에서 영감을 받은 아이디어를 이 작품 곳곳에서도 활용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장면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앞서 살펴 본 작품인 ‘무한의 암살자’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작중에서 수학 이론들 사이의 전투의 틈에 기생하는 빌런으로 묘사되는 기업체 인더스트리얼 알제브라 (Industrial Algebra (IA)) 입장에서는 이러한 두 수론 사이의 전투, 그리고 그 사이에 비어 있는 결점은 아주 좋은 비즈니스 모델이 됩니다. 예컨대 자신들의 금융수학 모델에 맞춰 이 결점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IA 입장에서는 주인공과 루미너스가 하는 계산을 통해 두 수론 사이의 전투가 점점 종말로 치닫고, 두 수론 사이의 전선이 단순해지면서 결점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은 안 좋은 방향일 것입니다. 물론 IA는 작중에서는 생각보다 별로 영향력이 없는 빌런이고, 진짜 빌런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궁금증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만약 정말 양립할 수 없는 두 수학 체계가 우리 우주 안에 존재한다면, 그리고 어떤 문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다른 수론 기반으로 문명을 건설했다면, 우리 문명과 그 문명은 이 우주 안에서 양립할 수 있을까? 만약 두 문명이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물리 법칙은 수학 이론에 의해서만 지배를 받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우주 안에 있었던 물리 법칙을 성립하게 하기 위해, 더 나아가 물리법칙들로 구성된 우주가 성립하게 하기 위해 수학 체계는 마치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컴퓨터 언어가 필요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유도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여러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만약 정말 물리 체계가 일단 수학이 정립된 이후에 성립되는 것이라면, 예를 들어, 물리 법칙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결국 수학이 필요하게 되는 셈이므로, 수학이 성립된 다음에야 물리 법칙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면, 다른 쪽 수학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측에서는 다른 물리 법칙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우주에서 통용되는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은 우주의 다른 쪽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술되거나 아예 양자역학 혹은 상대성이론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다른 쪽에서는 빛의 속도에 제한이 생긴다는 맥스웰방정식 (Maxwell equation)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없을 수도 있고, 힘은 가속도에 비례한다는 뉴턴역학 (Newtonian dynamics)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물리학의 분기를 현재로서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작가는 이러한 상상을 기묘할 정도로 루미너스라는 엄청난 계산 체계 안에서 잘 묘사합니다.

사실 루미너스 자체도 현재의 수론 체계에 기반을 두고 성립된 기술, 예를 들어 반도체 기술이나 광학 등에서 유도된 시스템이므로, 이 시스템에서 이질적인 수론 체계에 기반을 둔 물리 법칙을 테스트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단순히 양립 가능한가만 테스트하는 것이라면 가능할 법도 하지만, 여전히 테스트하는 경기가 벌어지는 홈 구장 자체는 우리 수학 이론 체계라는 것은 다소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경쟁 관계의 두 수학 이론과 상관 없이 이들의 양립 가능성을 테스트할 수 있으려면 어떤 계산 체계가 필요할까요? 여전히 루미너스 같은 광컴퓨터를 비교 작업을 가능케 하는 플랫폼으로 활용하고 싶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적어도 빛에 대한 물리학은 수학 이론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우주를 일종의 게임으로 치부할 수 있다면, 바로 이 빛이라는 것은 게임 내내 변하지 않는 일종의 기준점이 되는 셈이죠. 그렇다면 루미너스 같은 광컴퓨터에서는 이러한 수론 비교가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 이더라도 가능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러한 개념이 작중에서 언급되고 있지는 않으므로 작가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극적으로 반전된 수론 사이의 전투 끝에 컴퓨터를 담당하는 과학자가 한 대사 속에 이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광속의 불변성은 결국 깨지지 않았어. 그걸 필요로 하는 모든 논리도 모두 멀쩡하게 남아 있네.’ 이로부터 흥미로운 추론이 가능한데, 그것은 바로 이 우주에서 지구와 반대쪽에 다른 수학 이론을 쓰는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이 지구 안에 그 주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쪽에서 하나의 수학 이론으로 공격을 가하는 정보의 흐름 속도는 여전히 광속을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상력만 따진다면 아마 이 작품이 이 단편집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할 것입니다. 수학 체계 혹은 수학 논리 자체가 경쟁하는 구도, 그리고 그에 의해 모든 물리법칙이 바뀔 수도 있다는 상상력은 전율마저 일으키기도 합니다. 사실 현재 인류의 천문학은 몇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주가 가속 팽창하고 있지만, 그 가속 팽창을 일으키는 동력이 무엇인지 (그것을 암흑에너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그 정체는 모릅니다.), 아니면 아예 우리가 알고 있는 중력 법칙이나 상대성 이론이 우주 어딘가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인지 (예를 들어 MOND (modified Newtonian dynamics)) 등이 바로 그렇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물리법칙의 성립이 오로지 수학 이론의 정립 이후에만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 우주 어딘가에는 전혀 다른 수학 체계와 물리 법칙으로 돌아가는 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여전히 SF 수준에 머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아마도 SF, 그 중에서도 하드 SF가 가져다 줄 수 있는 효용은 바로 이러한 상상력의 근거를 찾게 만들어주는 것, 나아가 상상력을 가능케 하는 과학적 경이감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열번째 작품 ‘실버파이어’는 불가사의 같아 보이는 일종의 전염병에 대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SF와는 달리, 작가는 이 실버파이러라는 바이러스를 마치 아미쉬 마을의 현재 버전 같은 컬트 집단의 무의식과 결부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작중 주인공은 이 불가사의해 보이는 바이러스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해 미국 동남부의 작은 마을 (일종의 마이크로 빌리지)를 순회하며 열심히 돌아다니지만, 결국 마주한 것은 이 바이러스를 일종의 진리로 가기 위한 영적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컬트 집단들뿐이었습니다. 애초에 끔찍한 예후를 보이는 이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가 어떻게 해서 컬트 집단의 숭배 대상이 된, 혹은 그렇게 되게 만드는 강력한 동인을 가진 질병이 되었는지는 작품에서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작가는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걱정을 스쳐가듯 드러냅니다. 지금의 부모 세대 혹은 그 이전의 세대가 열심히 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사고 방식, 그리고 합리적인 근거로 의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세대는 대부분의 지식을 책이 아닌 유튜브나 쇼츠 등으로 배우고 있고, 최신 지식에 대한 갈구보다는, 또래 사이에서 통용되는 meme이 더 중요해지는 트렌드를 보입니다. 물론 한 세대, 두 세대 전에도 항상 청소년들은 부모 세대에 대한 저항이 있었고, 구체제에서 강요되는 지식의 전파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의 학습이 항상 요구되었죠. 그렇지만 최근의 상황은 좀 다릅니다. 이제 부모 세대가 배운 지식은 옛 지식이 되어 가고 있고, 동시에 과학적 사고 방식은 잠식되고 있습니다. 이 틈을 비집고 컬트가 다시 부활할 수 있고, 바이러스를 일종의 유사과학화 된 meme처럼 소비하는 것도 이제 가능성이 생깁니다. 마치 바이러스가 빨리 전파되는 것처럼, 이제 이러한 meme들은 인터넷과 SNS을 타고 급속도로 퍼질 수 있으며, 이것을 즐기는 것은 쿨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작가 입장에서 볼 때 실버파이어는 단순히 미스터리한 바이러스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비과학적 사고 방식, 그리고 그것을 쿨한 것으로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더 심각한 전염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작품이 너무 급하게 마무리된 감이 없지 않지만, 결국 작품의 말미에 컬트 집단 청년이 말하는 대사 속에 작가의 문제 의식이 정리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아직도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여인의 모습뿐이지만, 우리 모두는 그 이상의 것들을 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능력을, 잃어버린 힘을 다시 획득할 때가 온 겁니다. 신성한 환영과 악마와 천사를 볼 수 있는 힘. 바람과 비의 정령을 볼 수 있는 힘. <기쁨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힘을.” 바로 이 기쁨의 길은 과학의 길과 정반대에 있는 길이며, 그것이 바이러스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작중 화자를 빌려 전달함으로써 이야기를 맺는 것은 책을 덮고 나서도 잔상을 남게 합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체르노빌의 성모’라는 작품입니다. 앞선 열 편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번 작품은 다소 SF로서의 성격은 희미해 보이고, 오히려 종교 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으로 느껴집니다.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짧은 현대판 같은 느낌도 듭니다. 실종된 성화의 행방을 찾아 유럽 각지를 종횡무진하며 활약하는 사립 탑정 주인공의 추리와 잠입, 협상과 격투는 전형적인 탐정 스릴러 소설에서 많이 보던 장치들입니다. 번역자 김상훈씨는 이 마지막 이야기를 일종의 종교 SF라고 칭하고 있습니다만, 애초에 종교와 SF가 같은 이야기에서 연결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좀 있어 보입니다. 그렉 이건은 SF작가로 유명하지만, 작가 커리어 초창기에는 스릴러 혹은 호러 소설도 꽤 쓴 작가인데, 이 작품 역시 그런 커리어 초기인 1994년에 나온 작품이기 때문에 SF로 분류하기 보다는 전형적인 스릴러 단편으로 보는 것이 합당해 보입니다. 분류는 잠깐 뒤로 미루고, 이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종교적 광신 혹은 미신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탐정이 추적하는 성화는 1987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때 현장에 있던 노동자가 방사능에 노출되어 죽어가면서 개인적으로 성모의 현현을 체험하여 방사능 물질을 섞어 만든 물감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이 나온 시점이 1994년이었음을 생각하면, 사고 거의 직후에 쓴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데 체르노빌에서 성화가 그려졌고, 그것이 모종의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은 인간 군상들 사이에서 탐욕의 중심에 놓이게 되는 과정을 그린 것에는 다분히 작가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열 한 편의 중단편에 대한 감상을 각각 나누어 보았습니다. 몇몇 작품들은 전형적인 하드 SF로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데, 아마도 이들은 그 자체로도 나중에 SF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꽤 좋은 소재가 되어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다른 SF스타 작가인 테드 창이 언급한 것처럼, 그렉 이건의 작품은 테드 창이 좋아할만한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기도 하고, 또 테드 창의 작품과 연동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도 많이 있습니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테드 창은 조금 더 소프트하면서도 조금 더 철학적인 의문으로 다가가고 있다면, 그렉 이건은 조금 더 하드하면서도 조금 더 현실적인 의문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드 SF든 소프트 SF든, 결국 SF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이들은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며 인간의 상상력을 다양한 층위와 다양한 방향에서 이끌어내는 좋은 도구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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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드로븀
23/12/01 12:46
수정 아이콘
(수정됨) 교수님 눈에서 피가 나요... abstract 이 필요합니다...? 크크

<중·단편집 『Axiomatic』(1995), 『Luminous』(1998), 『Oceanic』(2009)을 엮음>
[내가 행복한 이유] - 그랙 이건 (김상훈 역 | 허블)
적절한 사랑
100광년 일기
내가 행복한 이유
무한한 암살자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
행동 공리
내가 되는 법 배우기
바람에 날리는 겨
루미너스
실버파이어
체르노빌의 성모

일단 목차만 찾아봤습니다. 선추천후감상!
드러나다
23/12/01 13:01
수정 아이콘
그렉 이건을 설명해주시려면 일단 쿼런틴부터 언급해주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크크.
23/12/01 13:04
수정 아이콘
그렉 이건이 책을 제법 낸 편인데 한국에는 쿼런틴밖에 안 나왔었죠.
비명 지르다가 일본어로 출간된 '행복의 이유'를 끙끙거리며 읽었었는데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한국어로 정발되어서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23/12/01 13:28
수정 아이콘
으워...
가란드
23/12/02 06:26
수정 아이콘
쿼런틴 새판본과 같이 사놓고 잊고 있었네요. 읽어야하는데
에이치블루
23/12/02 20:28
수정 아이콘
너무너무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PGR 오는 이유인 보석같은 글을 발견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SF를 한 때 정말 좋아했는데 그렉 이건은 못 읽어 봤었어요. 읽으면서 테드 창의 소설과 슬몃 비슷한 면이 보인다 생각했는데 순서를 생각하면 그가 영향을 받았겠군요. 비록 감상이지만 감상을 너무 잘 써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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