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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5/16 17:14:57
Name 王天君
File #1 Moon_River_Audrey_Hepburn.jpg (188.2 KB), Download : 56
Subject [일반] [스포] 티파니에서 아침을 보고 왔습니다.


이른 아침 티파니의 진열대 위 보석을 쳐다보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쇼윈도 너머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여자는 관리인이 깨건 말건 자기 집으로 돌아가죠. 그 여자의 아랫집에 어떤 남자가 이사를 옵니다. 얼떨결에 통성명을 한 이 둘은 점점 가까워지죠. 이 여자의 행동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깍쟁이처럼 구는가하면 천연덕스럽게 창을 넘어와 남자의 품에서 잠을 청하기도 해요. 파티광에다 돈 많은 남자를 노골적으로 밝히고 마피아 보스를 면회다니는 이 여자를 남들은 속물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창틀에 기대어 부르는 그의 moon river는 애틋하기 그지 없습니다. 남자는 여자와 더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후세의 사람으로서 고전을 보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 수록 화면 속의 젊음과 에너지는 점점 불멸에 가까워지는 역설을 체감할 수 있으니까요. 영화를 채우는 게 배우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노래, 미쟝센, 테크닉 등 영화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은 늙지 않아도 되지만 배우들은 어쩔 수 없이 변하기 마련이죠.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은 정말로 싱그럽고 반짝입니다. <동방불패>의 임청하 이후 이렇게 최면에 가까운 매력을 발산하는 배우는 오랜만에 만나보네요. 영화의 배역, 배우의 생김새, 연기가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더없는 설득력을 지닐 때가 가끔 있는데 이 영화의 오드리 헵번이 딱 그렇습니다. 폴 바잭 역의 조지 페퍼드도 말쑥하고 요령 좋은 신사 역으로서 영화의 균형을 잘 잡아주고 있지요.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에 필요한 매혹을 두 주연배우가 성공적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오드리 헵번의 관상용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 자체로도 충분히 발랄하고 귀여운 작품이지요. 오드리 헵번이 분하고 있는 홀리 고라이틀리는 꽤 재미있는 캐릭터입니다. 그는 덜렁거리고, 무모하고, 제 멋대로입니다. 그가 추구하는 건 오로지 돈 많은 남자 만나서 여생을 헤프고 편안하게 보내는 것 뿐이죠. 그와 동시에 홀리는 잔정이 많고, 외로움도 잘 타고, 자유분방합니다. 그는 무책임하지만 비정할 정도로 이기적인 인간은 되지 못합니다. 멋모르고 자기 원칙을 밀고 나가는 고집쟁이일 뿐이죠. 이런 캐릭터가 오드리 헵번의 육신을 빌리니 사랑스럽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고양이 같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고양이 인간의 소소한 욕망을 이리저리 튀기면서 여러 사람들의 생활을 적당히 어지럽혀놓습니다. 천연덕스럽게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한 여자, 한 커플의 소동극이기도 하죠. 이 영화의 파티씬은 그런 재미를 응축해놓은 혼란의 정수입니다. 느끼한 미소와 허세의 틈바구니에서 씰룩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헤쳐나가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약삭빠르고 유연하기 그지 없죠. 지금 봐도 산만하고 화려하지만 모든 게 합을 맞춰 돌아갑니다.

조금만 더 잘난 척을 했다면 이 영화는 재수없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될 뻔 했습니다. 그건 남자의 유복한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을 일깨워주고 남자가 여자를 구원한다는 엔딩은 가소로워지기 십상이죠. 그러나 영화는 여러가지 면책요소를 깔고 갑니다. 폴 바잭은 딱히 자기 가난을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관찰자에 더 가까운 위치에 머무르죠. 사실 그도 어디가서 누구를 깨우칠 입장은 아닙니다. 유한부인의 애인 노릇을 하면서 용돈이나 타먹는 한량이니까요. 그에 반해 홀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바라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다만 원대한 야심에 비해 철두철미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죠.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영화의 균형이 조금 삐끗하긴 하지만 그래도 뻣뻣한 교훈극의 함정에 빠지진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기만의 함정에서 벗어나려 하지요. 이는 우리 함께 진실되게 살아가지 않을래? 라는 위선자들 사이의 프로포즈로 봐 줄 용의가 충분합니다. 폴의 설득이 좀 고압적이긴 하지만 고양이를 찾아 헤매는 마지막 장면은 정성스럽습니다. 연민과 진실을 향한 영화의 주제가 훈계에서 끝나지 않고 잃어버린 것, 버려선 안될 것을 찾으려 하면서 귀결되니까요.

이 영화가 흥미로운 부분은 초중반의 위선과 진실에 관한 부분입니다. Real Phony가 어떻게 반쪽짜리 phony 사이에서 살고 있는지 그 관찰기가 더 유쾌하고 명랑해요. 그렇다고 로맨스 부분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홀리와 폴이 서로의 허영과 타락에 서로 발을 담그며 친해지는 과정도 아기자기하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두 사람이 같이 남긴 발자국이 있다면 이야기 끝에 가서는 맺어져야죠. 그럼에도 결국 이 영화는 사랑하는 여자, 사랑받는 여자, 이쁜 여자를 넘어서 오드리 헵번이 빚어놓은 "사랑스러운 여자"의 원형이 제일 빛납니다. 도도하면서 외롭고, 교활하면서 순진한 사람이 한 배우의 피와 살을 빌려 나타났을 때의 감동이 대단한 영화에요. 앞으로 다른 로맨스 영화를 볼 때마다 오드리 헵번의 흔적을 저도 모르게 찾으려 할 것 같네요.

@ 제가 좋아하는 많은 부분은 원작 소설에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읽어보고 싶네요. 그런데 생각보다 차가운 이야기라고 하니 영화의 산뜻한 이미지를 계속 남겨놓고 싶은 마음에 망설여지기도 해요.

@ 마지막 키스씬에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는 고양이가 좀 애처롭긴 하더군요. 고양이를 놔주고 키스하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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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16/05/16 17:34
수정 아이콘
전 개인적으로 오드리 햅번하면 "하오의연정"이 생각나는군요.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영화중에 가장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게 나왔다고 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 기차역 장면에서의 표정은 '누가 감히 그녀의 사랑을 거절할 수 있을까'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리니시아
16/05/16 18:29
수정 아이콘
딱 저 사진. 저기서 기타치며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를 듣고 깜짝 놀랬습니다.
영화 내내 귀엽고 밝기만 한 느낌에 철없이 보이기도 하는데, 목소리와 노래는 완전 반대되는 느낌이더군요..
괜시리 설레이며 봤던 기억이 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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