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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6/17 12:38:21
Name 王天君
File #1 the_piano_teacher.jpg (464.4 KB), Download : 58
Subject [일반] [스포] 피아니스트 보고 왔습니다.


- 에리카가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퇴근한지 한참이나 됐는데 왜 이제야 집에 돌아오냐고 닥달한다. 어머니는 에리카를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가방을 빼앗아 검사한다. 에리카는 중년의 여성이지만 아이 취급을 받는다. 급기야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쌍욕을 퍼붓으며 저항한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엉킨다. 두 사람은 이내 화해한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서도 어머니는 에리카의 음악과 피아노 교사로서의 역할에 계속 간섭한다.

- 영화가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은 에리카가 억압당하는 환경이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보통의 성인을 대하는 식으로 자식을 존중하지 않는다. 에리카는 뭔가를 지키라고 강요받고 금기를 주입당한다. 어머니는 딱히 합리적인 이유를 대진 않는다. 보고 있으면 매우 답답해진다. 에리카는 어머니를 외면하지도 못한다. 계속 싸우지만 어미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어머니는 에리카를 구속하려든다. 학생이 더 잘 할 것 같으면 그 애를 너무 잘 가르치면 안된다는 소리에서는 그의 애정이 얼마나 삐뚤어지며 자기중심적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이는 프롤로그에 해당되며 뒤이어 타이틀이 뜬다. 피아니스트, 피아노 선생으로서의 에리카의 삶이 나온다.

- 에리카는 음대의 피아노 교수다. 영화는 에리카의 지위를 전복시킨다. 학교에서 에리카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다. 그는 학생들에게 냉랭하고 가시돋힌 소리를 자주 한다. 영화는 피아노 건반과 학생들의 다리를 위에서 짧게 보여주고 차례차례 넘겨버린다. 프레임 안의 세계는 피아노 건반과 그 위를 움직이는 손가락들, 이를 조련하는 에리카의 목소리 뿐이다. 이 프레임 속 에리카의 세계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정확한 피아노 연주와 이를 위한 통제 뿐이다. 에리카는 연주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면 열린 창 밖을 통해 바깥 세상을 보고 있다. 그는 연주를 지도할 때도 늘 창가에 있다. 영화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에리카를 보여준다. 음악은 그를 구속하는 족쇄에 가깝다.

- 에리카는 어머니와 함께 소규모 연주회를 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려는 찰나 한 어린 남자가 같이 타려고 한다. 에리카는 냉담하게 서있고 문이 닫힌 채로 엘리베이터는 올라간다. 그 남자는 엘리베이터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올라가고 조금 더 일찍 도착해서는 에리카와 어머니를 반갑게 맞는다. 그의 이름은 월터고 연주회 주최자의 친인척이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에리카는, 월터의 안내로 타인의 안에 들어가게 된다. 영화는 공간으로 둘의 관계를 암시한다.

- 월터는 넋을 잃고 에리카의 연주를 듣는다. 연주가 끝나자 남들이 신경쓸 정도로 브라보를 외치며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인터벌 때 월터는 에리카에게 다가가 감명받았다고 이야기를 건네고 에리카는 그를 다른 학생들처럼 취급한다. 월터는 기죽지 않고 존경 섞인 저자세로 에리카의 흥미를 끈다. 어머니가 다른 이의 이야기에 붙들려 있는 동안 이 둘은 슈베르트와 슈만에 관해 이야기한다. 에리카는 정신을 잃기 직전에도 작곡에 매달려있던 슈만에 대해 이야기한다. 에리카는 자신이 파괴되기 직전까지도 무언가에 매달려있던 이를 이야기하고 월터는 이야기 속 슈만이 에리카 자신인것처럼 듣는다. 후에 에리카는 슈만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된다. 영화는 둘의 정면을 나란히 보여주지 않는다. 어느 한 쪽의 얼굴과 다른 쪽의 뒤통수를 보여주며 관객에게 이 둘의 이야기가 쌍방향의 소통이 될 수 없음을 그려낸다.

- 월터는 자신만만하고 초롱초롱한 학생이다. 그런 그가 에리카와의 대화를 언급하며 슈베르트의 곡을 연주한다. 월터는 연주하기 전 에리카를 바라본다. 에리카는 일부러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카메라는 이 전의 피아노 연주자들처럼 건반과 손가락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금새 월터의 측면으로 시선은 이동한다. 뒤이어 월터를 응시하고 있는 에리카를 보여준다. 내내 돌처럼 딱딱하던 에리카의 얼굴이 조금씩 움찔거린다.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에리카가 음악 너머의 사람을 인식하는 장면이다.

- 다음 날 에리카는 슈베르트의 3중주를 연주하기 위해 연습실에 도착하고 거기서도 어머니의 간섭에 시달린다. 연주가 시작된다. 에리카는 첼리스트에게 다시 한번 연주해보자고 지적을 받는다. 늘 냉정하고 완벽을 구사하던 에리카가 월터를 만난 이후의 씬에서부터 점점 틀리기 시작한다. 음악이 이어지고 화면은 어딘가를 이동하는 에리카를 따라간다. 에리카가 간 곳은 AV를 판매하는 곳이다. 거기서 다른 남자들은 에리카를 힐끔거린다. 에리카는 무표정하게 대기하다가 방이 비자 안으로 들어가서 포르노를 본다. 동전을 넣자 계속 이어지던 슈베르트 3중주가 끊기고 영화의 사운드는 포르노 속 신음소리로 가득찬다. 에리카는 휴지통에서 남성이 처리했을 법한 휴지를 들고 냄새를 맡는다. 신음소리는 에리카가 지도하는 학생의 연주 소리와 섞이기 시작한다. 음악이 끊기는 장면에서 영화는 에리카에게 성적 존재의 함의만을 부여한다. 홀로 있는 공간에서 에리카는 음악과 격리되고 자신의 성을 해방한다.

- 다음날 학생이 원하는 대로 성악가와 팀을 짜주었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다. 피아노를 지도하던 중 월터가 불쑥 끼어든다. 에리카는 평소의 퉁명을 가장하며 월터를 쫓아낸다. 월터는 입학 시험을 치르고 다른 심사위원들은 모두 감탄하며 그의 입학을 허가한다. 에리카는 혼자 불만을 표시하며 그를 가르치기 싫어한다. 여기서도 에리카의 명백한 거짓말이 드러난다. 월터의 연주는 에리카의 연주와는 대조적이다. 엄청나게 격정적이다. 에리카는 월터의 연주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이제는 미소를 억누르지 못할 정도로 입꼬리가 계속 올라간다. 영화는 계속해서 월터의 침입을 강조한다. 에리카는 오로지 음악만을 곁에 두거나 아니면 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자신이 히스테리컬하게 지배하는 공간에 월터가 자꾸 들어오려 한다.

- 에리카의 반대에도 월터는 합격한다. 다음 시퀀스는 에리카네 집 화장실을 비춘다. 일과가 끝나고 에리카는 면도날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간다. 그는 욕조에 걸터앉아 거울로 자신의 음부를 비춰본다. 그리고 그는 면도날을 음부쪽으로 가져가고 욕조 안에는 피가 흐른다. 개인적으로는 <트라이브>의 낙태 씬만큼이나 끔찍했는데, 차가운 현실을 위악적으로 그리는 그 작품에 비해 이 작품은 오히려 그런 여지도 없이 건조한 느낌이라 해당 씬이 더 잔학하게 다가왔다. 자해를 하면서 에리카는 그 어떤 감정도 나타내지 않는다. 피가 흐르고, 어머니의 재촉 이후 뒤처리를 열심히 할 뿐이다. 영화는 이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 후에 나오는 에리카의 성적취향과 연관지어본다면 매저키즘을 극단적으로 발현시킨 자위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매저키스트로서 월터라는 구애대상을 발견한 후 스스로가 촉발한 파괴적 생리혈일 수도 있다. 히스테릭한 여성성의 표출이다. 에리카는 늘 자기파괴의 충동을 간직하고 있다.

-  다음날 에리카는 도색잡지를 보던 자신의 제자를 발견한다. 그는 책방에서 제자에게 아는 척을 하고 눈치를 준다. 수업시간 그 학생은 내내 긴장해서 제대로 연주를 하지 못한다. 에리카는 그에게 "내면의 소리를 너무 크게 내지 마라", "네 머릿속에 새겨진 이미지가 소리를 망친다" 라면서 계속 트집을 잡는다. 이 대사들은 학생이 아닌 에리카 자신에게 더 강하게 향한다. 에리카는 자유롭게 성을 즐기는 학생에게 질투하는 것일 수도, 혹은 디나이얼을 그런 식의 혐오로 분출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는 학생에게 계속 모호한 소리로 쏘아붙인다. 학생은 기가 죽어서 우물거리며 사과하고 교실을 떠난다.

- 월터가 또 다시 교실을 침입한다. 쉬는 시간, 에리카는 창밖을 보며 혼자서 점심을 해결하려 했지만 월터가 이를 방해한다. 월터는 뾰족하게 구는 에리카에게 능구렁이처럼 넘어간다. 그는 얼마나 자신이 에리카에게 수업을 받고 싶었는지 꾸밈없이 말한다. 에리카는 이를 "거짓"이라며 부정한다. 월터는 마음을 열고 에리카에게 호감을 표시하지만 에리카는 계속 쏘아붙인다. 아무 연주도 없이 해당 씬은 다음 씬으로 넘어간다. 월터는 씩씩거리며 건물을 박차고 나간다. 에리카는 그를 조심스레 따라간다. 월터는 아이스하키를 하고 있고 다른 여자들한테도 친절해서 인기가 좋다.

- 다음 씬에서 에리카는 리허설이 있다고 둘러댄 후 집을 나선다. 그는 심지어 동료에게 거짓말을 짜맞춰주기를 부탁한다. 그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죽인다. 그리고 자동차 극장으로 가서 차들 사이를 조용히 걸어다닌다. 그러던 중 차 안에서 뜨겁게 섹스하는 한 커플을 발견한다. 그는 그 차로 다가가 그 커플을 응시한다. 그러다가 차 옆에서 주저앉아 소변을 본다. 이러한 에리카의 성도착적인 면은 월터와 무관하지 않다. 월터가 그의 공간에 침입하고, 그를 염탐하는 날이면 에리카는 어떻게든 욕망을 분출하려 한다.

- 담당 학생의 리허설 연주가 있는 날, 연주회장의 카메라는 에리카를 응시하는 월터를 계속 비춘다. 너무 티가 나서 뒤에 앉은 여자들이 킥킥댈 정도지만 월터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담당 학생이 너무 긴장하자 에리카는 나름 덜 까칠하게 그 학생을 위로한다. 그리고 무대를 준비하던 중 이를 돕던 월터가 그 학생을 달래며 긴장을 풀어준다. 그 학생은 웃기 시작하고 에리카는 이를 조용히 바라본다. 월터는 연주 도중 그 학생의 옆에 아예 의자를 하나 가져다놓고 앉아있는다. 에리카는 회장에서 뛰쳐나와 사람들의 옷이 걸려있는 곳으로 간다. 그는 유리컵을 하나 깨고 그 조각들을 가르치는 학생의 옷 호주머니 안에 쏟아넣는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질투하고 이를 최악의 형태로 드러낸다. 관객이 보는 건 애정을 받을지도, 그것을 정상적으로 꺼내놓을지도 모르는 한 중년 여자의 일그러지고 간곡한 결핍 상태다. 그에게는 사제지간의 정이나 욕망의 자제보다는, 그저 참을 수 없는 순간의 질투가 훨씬 더 크다. 이는 결과적으로 영화 맨 처음 에리카의 어머니의 충고가 실현된 것이기도 하다.

- 연주가 끝나고 휴식시간에 비명이 울려퍼진다. 에리카의 학생은 피투성이 손을 들고 울며 어쩔 줄 모른다. 에리카는 학생을 월터에게 맡기고 그 자리를 뜬다. 카메라는 뭔가 깨달은 듯한 월터를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에리카는 화장실로 달려가 소변을 본다. 이는 자동차 극장에서 감정을 해소하는 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월터는 에리카를 찾아 여자 화장실로 들어온다. 여기서 그는 에리카를 부르고 화장실의 문을 닫는다. 입구를 폐쇄하고 에리카가 성을 분출하던 다른 공간과 비슷한 조건으로 만든 셈이다. (에리카가 성기를 자해한 공간이 화장실이라는 것도 연결된다) 월터는 에리카가 들어앉아있던 칸의 문 위로 뛰어서 그를 확인하고 문을 연다. 에리카가 밖으로 나오고 월터는 그를 끌어안고서 열렬하게 키스한다. 월터는 누가 왜 그렇게 무서운 짓을 했는지 단번에 이해했던 것이다. 그는 에리카가 음악 교수로서의 권위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사실 상대를 향한 욕망에는 매우 취약한 사람이란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질투를 확인하고서 월터는 에리카와 자신의 욕망이 서로 통한다고 믿는다. 영화는 어떻게 월터가 이를 눈치챘는지 논리적으로 풀어내진 않는다. 폭력과 욕망의 관계에서 영화는 매저키즘의 논리를 스토리에 그대로 옮겨놓는다.

- 두 사람은 키스를 하고 서로 치마춤과 바지춤을 헝클어트리며 관계를 가지려고 한다. 끌어안고 쓰다듬던 에리카는 계속 멈추라고 한다. 욕망의 비등점에서도 에리카는 계속 둘의 감정을 멈추려한다. 에리카는 월터의 성기를 꺼내 자위해준다. 월터가 에리카를 끌어안고 입맞추려 하면 에리카는 다시 위협하면서 이를 중지시킨다. 그러나 에리카는 자신을 향한 월터의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손으로 해주다가 이제는 입으로 그의 성기를 애무한다. 어떻게든 사정을 시키려고만 하고 월터가 자신을 안으려 하는 것을 계속 저지한다. 에리카는 지배 - 피지배의 관계를 둘 사이에도 적용시키려 한다. 그는 어머니에게 통제당하든가, 아니면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통제하는 식으로밖에 관계를 맺지 못해왔다. 월터에게도 상을 줄테니까 어쨋든 내 말을 들어라 - 라는 지배자로서의 우위를 차지하려 한다. 에리카는 계속 해라, 하지 마라의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완전히 사정을 시켜주지도 않는다. 그는 절정 직전의 순간에 멈춰버리고 월터는 괴로워한다.

- 에리카는 월터가 자위해서 사정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보진 않겠다면서 월터가 괴로운 상태에 놓여있기를 강요한다. 월터가 애원하자 에리카는 그가 자위해서 사정하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자신을 보고 있으라고 한다. 에리카는 두 사람 사이의 욕망의 철저한 주체로서 월터를 객체로 격하시키려 한다. 여기서 영화는 이 둘의 파국을 암시한다. 사정한 이후, 월터는 흥분한 채로 혼자 뛰어다니면서 에리카의 뺨을 툭툭 치고 놀린다. 누군가를 통제하려는 에리카의 의도가 조롱당한다. 그리고 이를 완전히 억제하지도 못하고 그 욕망을 더 날뛰게 만들었다.

- 유리조각에 손이 난자당한 학생의 어머니가 에리카를 찾아와 하소연하지만 그는 데면데면하게 듣고 돌려보낸다. 다음 월터의 수업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둘은 여전히 지배 - 피지배의 관계를 정착시키려 하고 탈피하려 하면서 싸운다. 에리카는 월터의 연주에서 통제를 강조한다. 피아노, 피아노, 피아니시모라고 적혀있으니까 더 약하게 쳐라. 그리고 슈베르트의 외모를 언급하면서 잘 생긴 월터에게 아무 걱정이 없었을 거라 힐난한다. 이는 월터를 향한 공격보다는 자기 자신을 슈베르트에 대입한 에리카의 불안과 열등감의 반영에 더 가깝다. 월터는 계속 자신의 욕망을 고백한다. 쳐다보기만 해도 목에 키스를 하려는 충동을 누르지 못하겠다고. 이 말을 듣고 에리카는 기침하기 시작한다. 에리카는 월터의 욕망에 계속 신체적으로 반응한다. 에리카는 편지를 건네주지만 월터의 데이트 신청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 둘의 관계가 이어져야 한다는 고집을 부린다. (에리카는 점점 파스텔톤의 옷을 입는다. 점점 핏빛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 수업이 모두 끝나고 에리카는 집으로 돌아간다. 월터가 그를 쫓아오고 문 앞에서 돌아가지 않는다. 에리카는 어쩔 수 없이 둘러대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들여보낸다. 공간의 침입은 화장실에서 이제 에리카의 집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에리카는 자신의 방에 월터와 들어간 후 방문 앞에 아예 옷장을 밀어놓고 어머니가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폐쇄된 공간,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에리카가 월터를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걸 이야기한다. 에리카는 강의실이나 화장실에서와는 완전히 다르게 팔을 늘어뜨리고 월터의 키스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편지를 읽어주길 계속 부탁한다. 이번에는 "제발"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공손하게 말한다. 에리카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온화하다.

- 편지에는 에리카의 메저키즘에 대한 고백이 구구절절히 적혀있다. 월터는 이를 읽으며 경악한다. 묶고 때려줘, 목을 졸라줘, 등등의 부탁을 읽으면서 월터와 에리카의 표정은 엇갈린다. 월터는 에리카의 표정을, 에리카는 월터의 표정을 하고 있다. 한 쪽은 지고지순한 얼굴로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여주기를, 한 쪽은 경멸이 실린 눈빛으로 가끔씩 상대를 흘겨본다. 화장실에서 나눴던 성애와 그 사이에 세워졌던 통제의 관계는 완전히 뒤집힌다. 에리카는 침대 아래 각종 본디지 기구를 꺼내 보여주고 자신의 편지가 진심이라는 걸 어필한다. 월터는 이제 대꾸도 하지 않는다. 에리카는 자신에게 화났냐고 계속 물으며, 더 강조한다. 너는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너가 원하는 대로 입겠다, 이제부터 너가 명령해라.

- 에리카는 간절하다. 월터의 고백에도 꿈쩍하지 않으며 자신을 지키려하던 이가 이제는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나는 너를 기다려왔고, 이 욕망을 수십년동안 참아왔다고. 이런 점에서 그 때 화장실에서의 그 심술은 욕망의 애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에리카는 애정을 거래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못한다. 내가 이 만큼 절대적으로 굴고 너에게 너가 원하는 걸 주지 않으니까, 이를 잘 알고 받고 싶으면 내 말을 잘 들어라. 너가 이 욕망이 해소되지 못하는 고통을 알았으니 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나를 채워주려 할 수 있을 것이다. 너가 나에게 받고 싶다면, 너도 내가 받고 싶은 것을 채워줘야 한다. 권력의 추구는 약함의 방증이다. 에리카는 약하다. 그러니까 통제라는 사슬을 채워놓고 타인을 부릴 수 있어야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고 욕망이 채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구속하는 자는 구속하지 않으면 떠날까봐 불안해한다. 그리고 에리카는 월터에게 실토했다.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바란다. 월터는 에리카를 정신병자 취급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둘의 감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상대를 원하고 바라는 표현이 다를 뿐이다. 처음부터 에리카가 월터의 사랑에 천천히 응하고 자신도 천천히 고백했더라면. 월터는 에리카를 멸시한 후 방을 떠나고 에리카는 그날 침실에서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며 과격한 키스를 퍼붓는다. 허한 마음을 엉뚱한 상대에게 퍼붓어보지만 에리카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 다음 날 에리카는 월터가 운동하는 아이스하키장으로 찾아간다. 둘은 창고로 가고 에리카는 사과하며 다시 한번 사랑을 고백한다. 이 둘의 권력관계에서 더욱 더 월터에게 추가 쏠린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실패했다는 것을 에리카는 깨닫지 못한다. 에리카는 더 애원하며 자신을 마음대로 사랑하라고 드러눕는다. 월터는 경멸할 뿐이다. 에리카는 싫다는 월터를 붙잡고 오럴을 하려 한다. 싫다는 월터와 티격태격하다가 에리카는 마침내 그의 허락을 받는다. 사정이 끝나고 에리카는 바닥에 토사물을 쏟는다. 그는 월터를 향한 욕망을 따라가지만 몸은 그의 복종을 따라가지 못한다. 월터는 다시 모욕받았다며 에리카를 남겨두고 떠난다. 에리카는 모욕만 받고 비틀거리다가 아이스링크를 떠난다. 그가 발걸음을 옮기는 곳은 차갑게 얼어붙은 얼음 위다.

- 월터는 늦은 밤 에리카의 집을 찾아온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에리카를 모욕하며 화를 낸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고고한 에리카가 변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 너가 원하는 대로 너를 지배하고 학대해주마. 월터는 에리카의 어머니를 다른 방에 가두고 에리카를 강간하려한다. 월터는 멈춰달라고 애원하는 에리카의 얼굴을 걷어찬다. 에리카는 피를 흘리며 신음한다. 그는 두려워서 떨고 월터는 그의 곁에서 나를 더 다정하게 대해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싫다는 에리카의 위에 올라타 그를 강간한다. 월터는 키스하려 하지만 에리카는 그의 키스를 받지 못한다. 이런 것은 에리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피투성이 잠옷을 걸쳐입은 에리카를 남겨두고 월터는 떠난다.

- 다음날 손이 다친 학생을 대신해 에리카는 연주를 하기로 되어있다. 연주회장에 가기전 보채는 어머니 몰래 에리카는 식칼을 챙긴다. 그는 회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와중에도 계속 누군가를 찾아 힐끔거린다. 피아노 연주 시간이 가까워져도 그는 계속 입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월터와 그의 일행이 온다. 이들은 에리카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월터는 그 사이에서 연주를 너무 듣고 싶다며 해맑게 한 마디를 건네고 잽싸게 뛰어간다. 에리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떠나보낸다. 에리카는 고요와 함께 입구에서 홀로 남는다. 에리카는 참을 수 없어서 일그러진 얼굴로 식칼을 꺼내 왼쪽 가슴팍을 찌른다. 원래 그 식칼은 누구를 위해 가져왔던 것일까. 에리카는 혐오와 원망의 칼을 꽂을 다른 누구를 찾지 못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다. 용서할 수 없는 이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 열렬히 사랑하고자 한 이가 있었다. 열렬히 사랑받고자 하는 이가 있었다. 한 쪽은 사랑하는 법을 이제 막 깨우쳤다. 한 쪽은 사랑하는 법을 평생 배우지 못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사랑한다 말하고 사랑하려 했다. 통하지 않았다. 지배가 익숙한 한 쪽은 사랑마저도 그 아래에서 다루려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사랑받지 못할 것 같았고, 늘 그렇게 사랑을 받거나 줘왔기 때문에.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자가 다 부숴버렸다. 조금 더 정확하게 해석해서, 그의 음악이 뭘 말하고자 했는지를 느껴야 한다고 늘 가르쳤던 이가 그 어느 쪽의 언어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늘 차갑게 굳어있던 에리카의 가면이, 그 가면을 벗고 마침내 찰랑거리며 말하던 가면 안쪽의 얼굴이, 다시 쓴 가면이 차마 감추지 못하는 흉터가 사랑의 결과로 남았다. 피가 번지는 가슴을 감추며 나가버린 에리카는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들어왔고, 들어가지 못하고, 멋대로 들어오고, 결국은 자기 자신이 나가버리는 이 공간의 이야기에서 그나마 희망을 찾고 싶다. <피아니스트>는 극단적이지만 모든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한다 말하고, 사랑해줘라 말하는 우리는 제대로 듣지 못한다. 이 파국을 그려낸 이자벨 위페르의 일그러진 마지막 얼굴을 어서 잊어버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 슈베르트의 음악이 나오는 영화는 왜 이렇게 지독할까. 다른 온전한 영화도 봐야 이 편견이 사라질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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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미더머니
16/06/17 13:23
수정 아이콘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이 나오는 '온전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추천합니다. 농담이고요. 위페르의 라스트 표정이 압권이죠. 자기 가슴에 칼 찌르기 직전, 담근(?) 상태, 칼을 뺀 후.. 다 다르죠. 저는 오히려 깊이 찌르지도 못하고, 그런데 피는 나고, 칼을 뺀 상태에서 주위 눈치 보다가 허겁지겁 로비를 빠져 나가던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네요. 어쨌든 위페르의 일그러진 그 얼굴을 잊고 싶으시다면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 다시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이건 농담아니고 진짜에요. 참이슬 병나발 부는 장면 보면 뭔가 기분이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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