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04/13 15:41:17
Name Jormungand
Subject [일반] [단편] 아무 것도 모르는 밤
대청마루에 앉아있었다. 더위가 한풀 꺾여 밤하늘 수놓은 별이 더욱 반짝였던 밤. 풀벌레 찌르르 울음소리가 나무바닥을 윤이 나게 문지르고 있었다. 어린 나는 대롱거리는 발을 흔들며,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대청마루 끝에 앉아 밤 소리를 듣고 했었다. 언제나처럼 하루 일과가 반복되었던 그 어떤 날 밤에, 여느 때처럼 모기향을 갈고 서늘한 기둥에 기대 밤을 지우고 있었다.

‘삐걱삐걱’

“안자고 뭐하니?“

낡은 마룻바닥을 밟고 막내숙모가 나왔다. 숙모는 더운 여름에도 긴 카디건을 입곤 했다. 파리한 얼굴로 바짝 마른 입술을 훔치며 내 어깨를 만졌다.

“그냥. 잠이 안와서요. 숙모는 안자요?”

“항상 밤에 여기에 앉아있지?”

“네. 혼자서, 밤에, 대청에”

그녀는 내 옆에 앉아서 조용히 밤 별을 바라봤다. 구름 뒤편에서 달이 반짝 나왔고, 그 빛이 얼굴에 닿자 푸르게 물들었다. 카디건 소매로 턱을 가리자, 나는 타인의 비밀을 엿본 듯 부끄런 마음이 들었다.

“모른 척 할게요.”

“그게.. 무슨 말이니?”

“모른 척 할거라고요. 이건 숙모가 생선살을 발라주거나, 받아쓰기를 도와줘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냥 모른 척 할거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나는 천진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숙모의 눈은 흐릿했다가, 촉촉해졌다가, 이윽고 강한 빛을 쏘았다. 처음 그녀가 우리 집에 왔을 때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다. 숙모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부엌에서 큰 가방을 들고 나왔다. 살금거리는 발 소리가 내 뒤에서 멈췄다. 돌아보고 싶었는데, 돌아보지 않았다. 어린 나는 대청마루 끝에서 발을 대롱대롱 흔들었다. 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가 더 커지자, 나는 발을 더 세차게 흔들었다. 찌르르 짜르르 풀벌레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마룻바닥을 때리고, 대청 기둥을 두드렸다.

“지형아! 지형아! 너 여기서 잔거야? 숙모 어디갔냐? 밤에 못 봤어?”

나도 모르는 새, 대청마루에서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막내삼촌이 거세게 어깨를 잡고 흔드는 통에 잠이 깼다. 뒤편에 웅성웅성 어른들 소리가 들린다. 삼촌 입이 코 앞에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검은 입이 동굴처럼 시커멓게 울린다.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데, 촤르르 숙모의 카디건이 흘러내렸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제랄드
18/04/13 21:02
수정 아이콘
글이 예술이네요. 와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6632 [일반] 김경수와 드루킹, 그리고 조선일보가 지금 시끌시끌하네요 [196] Darwin22814 18/04/14 22814 5
76630 [일반] 럼프형이 시리아 타격하기로 승인했습니다. [36] 키토15431 18/04/14 15431 3
76629 [일반] 4/11 돌아온 100분토론 주요장면 발췌 [224] 껀후이18405 18/04/14 18405 30
76626 [일반] 걱정이 많네요. [11] 시드9177 18/04/14 9177 4
76625 [일반] 세월호 선조위, 세월호 침몰원인으로 외부충격요인 가능성 제기 및 정식조사 [121] 염력 천만16294 18/04/13 16294 4
76624 [일반] 문케어 말고, 의사일 조금 하다보니 알게된 현상에 대하여 [165] 지하생활자19240 18/04/13 19240 22
76623 [일반] 2018년 3월 국내자동차 판매량 [55] G7010226 18/04/13 10226 0
76622 [일반] 세월호 추적 다큐 영화 [그날, 바다]가 화제군요. [64] aRashi13080 18/04/13 13080 23
76621 [일반] 드렁큰 타이거 (Drunken Tiger) - YET (정규 10집 신곡) [28] BloodDarkFire14012 18/04/13 14012 4
76620 [일반] 패스트푸드에 대한 기억 [32] 사슴왕 말로른7606 18/04/13 7606 1
76619 [일반] [단편] 아무 것도 모르는 밤 [1] Jormungand4564 18/04/13 4564 16
76618 [일반] <셰이프 오브 워터> - 물의 형태 : 사랑의 심상 [18] 마스터충달12809 18/04/13 12809 13
76617 [일반] 댓글 조작 잡고보니 민주당원? [120] 수타군15259 18/04/13 15259 6
76616 [일반] 롯데시네마 19일부터 관람료 1천원 인상 [31] 손금불산입8316 18/04/13 8316 0
76615 [일반] 그냥 잡담들 - 기부활동 / 장르소설 / 이상한 사람 [26] 글곰5878 18/04/13 5878 2
76614 [일반] [뉴스 모음] 문준용씨 관련 허위사실 유포 및 대선조작 의원 민사소송 외 [29] The xian12997 18/04/13 12997 29
76613 [일반] SF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앤 레키를 보라 [22] 글곰8517 18/04/13 8517 17
76611 [일반]  통일되면 가장 큰 골치가 북한각계각층 주민들에 대한 의식개선 이라고 봅니다. [65] Agni10787 18/04/13 10787 0
76610 [일반] 김기식 사태 이후 오늘자 갤럽 문대통령 지지율 [117] Darwin15847 18/04/13 15847 21
76608 [일반] 소심한 비겁자 학생과 훌륭한 스승님 [15] VrynsProgidy6987 18/04/13 6987 12
76607 [일반] 인피니티 워와 IMAX 신기 [74] 치열하게11868 18/04/13 11868 0
76606 [일반] 초보 유부의 결혼 준비를 위한 전자기기 지름 결산 [36] 양웬리10900 18/04/13 10900 3
76605 [일반] (뉴스) 과거의 자신과 싸우는 김기식 외 [318] 초코에몽17419 18/04/12 17419 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