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본 반도체 왕국 쇠망사'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혹시 도배성 글로 느껴져 불편하셨을 분들이 계시다면 미리 사과 말씀 드립니다.
*일본 반도체 왕국 쇠망사 1편 :
https://pgr21.com./freedom/88059
*일본 반도체 왕국 쇠망사 2편 :
https://pgr21.com./freedom/88063
*일본 반도체 왕국 쇠망사 3편 :
https://pgr21.com./freedom/88065
*일본 반도체 왕국 쇠망사 4편 :
https://pgr21.com./freedom/88066
*일본 반도체 왕국 쇠망사 5편 :
https://pgr21.com./freedom/88067
*일본 반도체 왕국 쇠망사 6편 :
https://pgr21.com./freedom/88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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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보호인가, 국가의 간섭인가?]
일본 반도체 왕국의 쇠망을 재촉한 세번째 요인은 다른 아닌 일본 정부의 과도한 개입 혹은 보호주의였습니다. 애초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후발 주자의 신세를 생각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정부, 즉, 구 경산성이 주도한 '초LSI기술협의회'라는 관민단체의 조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조직을 통해, 일본의 업체들은 노하우를 공유하고, 중복 기술 투자를 줄이면서, 정부가 주도하는 반도체 업계 생태계가 자국 안에서 자생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특유의 장인정신을 독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생각보다 빨리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일본 정부의 관여가 지속되면서 안정적으로 세계 시장에서의 점유율 장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를 알아채린 미국 정부가 1985년부터 일본 정부의 관여를 반덤핑 제소 등의 방법으로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미-일 반도체 협정'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일본 정부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관여는 지속되었고, 90년대 들어 한국의 삼성전자 같은 후발 주자들이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일본의 업체들과 경쟁을 시작하면서부터 일본 정부의 국가주의는 일본의 업체들에게 약이 아닌 독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반도체 업계가 97년 동아시아 발 금융 위기를 거쳐 2000년대 들어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반도체 업계에 닥친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일본 정부는 과거의 관행을 답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반도체 산업의 중흥을 이끌고 밀어주는 프로젝트를 난립시킨 것이죠. 200억엔 규모의 아스카프로젝트, 80억엔 규모의 HALCA 프로젝트, 315억엔 규모의 첨단 SoC 기반기술개발 (ASPLA) 같은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프로젝트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굉장히 애매한 규모의 프로젝트입니다. 아예 대형 프로젝트였다면 기업들에게 조금이나마, 특히 선행 원천 기술 개발에 있어서 다소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웬만한 대기업 1분기 매출액도 안 되는 규모의 연구개발 프로젝트는 기업들 입장에서는 번거롭기만한 프로젝트로 다가 왔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본 정부는 자국 산업에 대한 보호 열망이 너무 심했던 나머지, 경영 전략으로서 행해졌던 사업 분리나 정리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엘피다 등의 업체가 공정 채산성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며, 결국 칩의 생산 자체를 대만의 파운드리 업체인 SPC나 TSMC에 위탁하려 하자, 일본 경산성은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 그리고 자국 반도체 산업의 위축을 걱정한 나머지, 국가가 주도하여 이를 대신할 사업을 추진하려고도 하였습니다. 일본 경산성이 계획했던 것은 국가 주도의 파운드리 업체를 하나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갑자기 없던 파운드리 업체를 만들 수는 없으므로, 업계의 강자였던 히타치제작소, NEC, 후지쯔, 마쓰시타 전기, 미쯔비시 전기, 도시바 등이 같이 참여하여 공동으로 이 신규 파운드리 업체를 출범시키는 것을 골자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각 회사의 비즈니스 방향과 주력 품목이 다양해진 상황에서, 파운드리 업체의 출범은 모든 기업에게 만족할만한 성과를 주는 아이템은 아니었습니다. 엘피다에게는 좋은 옵션이었을지 모르지만, 이후 출범한 르네사스 같은 시스템 반도체, 비메모리 반도체 업체에게는 별로 좋은 옵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들 예상 참여 기업의 관계자들은 파운드리 공정에 누가 더 많이 참여할 것인가, 누가 더 책임질 것인가, 비용 분담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 했고, 결국 경산성이 주도한 파운드리 신설 프로젝트는 행정적인 비용과 각 회사의 불신만 남긴 채 흐지부지되어버렸습다. 오히려 2005년 후지쯔는 국가 파운드리 구상이 무색하게, 독자적으로 첨단 공정이 적용된 공장을 건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정부의 입김이 점점 자국의 반도체 업계에게 먹히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합니다.
일본 정부의 엘리트 관료들이 회사 관계자들을 모아 놓고 ‘다이와’를 외치며 국가의 자존심을 외치는 시대가 지나버린지 한참인데, 일본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시도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시바의 쇠망사에서도 살펴보았지만, 플래시메모리 세계 시장을 놓칠 수 없었던 일본 정부는 악회되는 수익률에도 불구하고 도시바의 지분을 정부 주도로 인수하여 정부의 재무 건전성을 약화시켰고, 르네사스가 출범하던 2010년대 초반에도 정부 주도의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를 앞세워 출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2012년말 파산 위기를 맞았던 르네사스의 최후의 버팀목이 된 것은 이러한 일본 정부의 펀드이기도 했지만, 이는 장기적으로는 차라리 일찍 청산되어 비용을 절약할 수도 있었던 회사에 대해, 정부가 억지로 산소 호흡기를 씌워 강제로 연명 치료를 하는 격이 되어 가는 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20년 하반기가 된 시점에서도, 일본 정부는 자국 반도체 산업 부활에 대한 희망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는 모양새로 보입니다. 2020년 7월, 일본 정부는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을 대폭 수정할 방침임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기존에 메모리 반도체나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 정부 주도로 3개 이상의 일본 기업들이 합병하는 등의 연대 방식을 탈피하고, 대신 반도체 생산 경쟁력이 뛰어난 외국 업체와 일본이 강점을 가진 소재/부품/장치 업체 간 선택과 집중을 통해 국제 연대 조직을 만들어 이에 대한 지원을 집중하는 방식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죠. 일본은 그 첫 대상으로서 전 세계 파운드리 수위 업체 TSMC (2019년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51.2%)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미 TSMC는 도쿄대와 수년 전부터 공동으로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고, 미-중 간 반도체 전쟁과 무역 갈등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일본은 TSMC의 생산 거점 확대를 중국이 아닌 미국과 일본으로 유치하는 전략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TSMC가 일본에 공장을 지을 경우 정부 자금을 지원할 계획이며, TSMC가 일본의 반도체 기업과 합작을 할 경우, 수 년 간 1,000억 엔을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TSMC 뿐만 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일본 경제산업성은 삼성전자나 미국, 유럽의 반도체 회사와도 국제 연대를 할 수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2019년 8월 이후, 일본 정부가 규제를 풀지 않고 있는 대 한국 반도체 주요 소재 수출 규제가 지속되는 국면에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한국의 반도체 상위 업체들의 일본 시장 진출이나 일본과의 합작 회사 설립은 당분간은 현실성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의 반도체 업계는 반도체 시장의 수익 변동성에 대처하기 위해, 그간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일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품목 공급망을 다양화하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그간 한국의 반도체 대기업과 공급망을 형성하던 일본의 관련 업체들의 수익성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즉, 일본으로 한국의 반도체 업체가 진출하기는커녕, 대 한국 수출 시장이 막힌 일본의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장비 회사의 한국 진출이 더 가속화되는 현실인 것입니다. 수출 규제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이미 2019년에는 칸토덴카 (関東電化) 공업이 한국 공장에서 생산을 개시했으며, 타이요(太陽) 홀딩스 같은 회사는 2020년 5월, 한국에 신규로 400만㎡ 규모의 프린트 배선판(PWB)와 반도체 패키지 기판 용 드라이필름형 솔더레지스트 공장 건설을 위해, 자회사 '타이요 어드밴스드 머티리얼' 설립을 할 것임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타이요는 솔더레지스트 분야에서는 전 세계 80-90%의 점유율을 보이는 세계적인 업체인데, 이러한 소재는 반도체 초미세 패터닝 공정의 핵심 소재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소재와 부품은 비단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업체는 물론, 향후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의 차세대 자율주행자동차 용 컴퓨터나 IoT 등의 업종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에, 타이요 입장에서는 종합적인 포석을 고려하여 한국에 생산 기지를 두는 것을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도 일본산 소재/부품/장비의 수출 제약이 걸려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일본 기업들이 생산 기지를 한국으로 이전하는 것을 적극 검토할 전망입니다. 일본 업체들뿐만 아니라, 다른 해외 업체들도 반도체 소재/부품 관련 공장을 한국에 신설하는 중입니다. 엠이엠씨 (MEMC) 코리아 (모회사 글로벌웨이퍼스)는 2019년 11월, 5,400억원을 투자하여 한국의 천안시에 반도체용 실리콘 웨이퍼를 생산하는 신규 2공장을 준공했다. 이로써 이전까지 일본에서 절반 이상 수입해 오던 실리콘 웨이퍼에 대해, 9%의 대체 효과가 발생하였습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애써 키워 온 자국의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차례대로 무너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겠지만, 정부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산업의 생태계는 왜곡을 겪게 되고, 특히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반도체 업체들은 국가의 도움이 어느 순간 관여와 간섭으로 변질되어 신속한 경영 판단과 사업 철수를 결정짓지 못 하는 폐단을 겪게 됩니다. 국민 생활에 필수적인 사회기반시설은 정부가 직접 챙기거나, 적어도 정부가 대부분의 지분을 소유한 공기업이 사업에 진출하여, 적자를 감수해서라도 국민 생활 안정을 꾀하는 것에 대해 정당성이 부여되지만, 반도체 산업은 국민 생활에 직접적으로 필수적인 산업으로 와 닿지 않는 데다가, 자국내에서만 경쟁을 하는 산업이 아닌 특징이 있기 때문에, 정부의 보호주의, 정부의 무리한 리더쉽 발휘는 정상적인 기업 생리를 방해한 격이 된 셈입니다.
이는 마치 과도한 보호로 인해 정상적인 성인으로 자라나지 못 한 어른을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어린 아이가 자랄 때 부모는 당연히 의무적으로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하고, 사회 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인 생활 방식과 지혜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과도하면 아이는 자립할 기반을 잃어버리고, 의존과 더불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추지 못 하게 됩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생각을 부모에게 맡기고, 생활을 부모의 지도에만 따르는 순종적인 아이로만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는 아이를 망치는 지름길이죠.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어린아이에 비유하기는 무리이지만,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벌여 온 각종 사업과 보호주의, 펀드 조성, 강제적인 구조조정, 정부 주도의 사업 제안 같은 조치는 원리적으로는 아이를 계속 성인이 될 때까지 품에 안고 놓아주지 못 하는 부모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