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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8 18:06
전 궁궐병이나 폐모살제는 겉으로 내새우는 핑계고 인조반정의 주요 원인은 불필요한 옥사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신권 견제 싸움에서 패배한 왕이 아니었을지.. 현대에야 역사적으로 평가가 완료된 선조의 쪼잔함과 인조의 무능함과 비교되다보니 재평가가 이뤄졌던 거지만 당대에 체감하기엔 부왕 선조의 압도적이었던 정치력과 비교가 많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22/05/09 11:42
광해는 너무 정치적으로 가시밭길을 걷고 집권해서 그런진 몰라도 적과 아군의 이분법적 인식이 강했던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다른 온갖 정파들을 전부 쳐낸 끝에 여당(?)격인 대북의 파워가 본인에게도 부담스러울만큼 강해져버렸는데, 만약 반정이라는 야권연대의 반격이 없었다면 언젠가 숙종같은 환국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22/05/08 18:06
이런 식이면 웬만한 폭군짓도 다 옹호가 될 듯하네요. 논문은 안 봤지만 이미 광해군이 궁궐공사에 빠지기 전에 창덕궁 창경궁인 동궐이 공사중이거나 완료된 시점이었죠. 그런데 거기에 인경궁과 경희궁을 또 만든다? 그걸 새로 또 만든다고 새로운 기술 발전이랄 게 얼마나 될까 싶긴 하네요. 게다가 그 새로운 기술 발전이란 게 기와를 청기와로 만든다거나 하는 화려함에 집중된 거였죠.
이런 식이면 차라리 고종의 사치가 더 옹호받을 구석이 많죠. 자동차 수집은 자동차라는 새로운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보급에 힘썼으며(왕이 차를 안 타는데 일반 신하나 백성이 타는 건 불가능할테니) 그로인한 도심 도로 개선과 정비 기술의 발달 등이 있었다! 라는 것과 뭐가다를지 크크
22/05/08 18:20
그런 면이 있었다는 게 신기했던 거지, 폭군은 맞죠. 멀쩡한 궁궐 납두고 풍수에 빠져서 여기 저기에 새로 만드는 사람이 제정신일리가요.
22/05/08 18:59
광해군 재평가는 그다음 임금인 인조의 전설적인 무능함에 대비해서 평가가 올라간거죠.
아니 런도 제대로 못해서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기도 하고 말이죠.
22/05/08 19:18
근데 요즘은 호란 포함 인조가 당했던 굴욕의 원인 중 상당부분이 광해군의 똥을 그대로 뒤집어쓴 걸로 결론나는 분위기라 광해군이 인조에 비해 그렇게 평가가 높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집권 후기에는 잦은 외침으로 쑥대밭이 된 나라를 어느정도 수습해서 후임 왕들에게 넘겨줬던, 그럭저럭 평타는 쳤던 왕 정도 평가는 받습니다. 호란이야 자기 지분도 크지만 자기가 싼 것도 제대로 못 치우고 쫓겨난 왕보다 그래도 자기가 싼 똥은 치우고 간 왕이 더 낫다는 사람들도 있고요.
22/05/08 19:43
인조가 런을 못한게 임팩트가 있어서 그렇지
광해군이 한짓에 비하면 뭐.. 당장 선조때 있는 인재풀 혼자서 다날려먹은게 광해군인데요
22/05/09 09:36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선조가 광해군에게 넘겨준 명재상 라인만 해도 면면이 엄청나죠.
광해군 즉위 당시 이원익이 61세, 이항복이 52세, 이덕형이 47세로 든든하게 광해군을 떠받쳐줄 수 있는 명신 라인이었는데 이원익과 이항복은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이덕형은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보냈고, 이항복과 이덕형은 이 결과 목숨까지 잃어버렸으니.
22/05/10 02:06
아니오. 인조야말로 재평가의 가능성이 있는 왕입니다. 특히 각종 제도의 시행, 민생행보 등 전란의 시기가 아니었으면 적어도 평타는 할 왕이었을 공산이 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지금처럼 능양군 능양군 소리들을 정도는 아니다라는거지 사실은 명군이었다라는 극단적인 반전은 아니긴 합니다. 왕잘못이 아닌걸 왕잘못으로 몰아다 붙인 것들도 많기도 하고요.
저는 이해할 구석이 많은 왕으로 생각합니다. 그 선조도 하는 런도 제대로 못했네 하는데 런은 어려운 겁니다. 제왕의 면모같은 것보다 필부가 왕이 됐을 때를 잘보여주는 인물이긴 합니다만... 적어도 왕권을 강화하겠다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그런 심성의 암군은 아니었습니다.
22/05/08 23:24
중립외교니 뭐니 하는데 인조의 외교나 광해군의 외교나 큰 틀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친명배금 정책이니 하는것도 사실 내수용에 가깝고 인조도 후금과의 갈등을 최대한 피하려고 했었죠. 그뿐만 아니라 둘 다 중요한 개혁(예를들어 대동법)에서는 머뭇거렸고, 공론을 위하는 척 하다가 결국 소수 친위세력들에게 권력이 귀결되었으며(대북세력/김자점 등), 의심이 많아 옥사와 반역사건이 이어졌고(광해군대옥사 /이괄의 난이라든지) 왕권 강화라는 명목으로 소모적인 갈등을 야기했다는 면(궁궐 증축/원종 추숭)에서 거울과 같다 해야할까요.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무자비했네요..
22/05/08 19:25
2000년대 초반 광해군의 고평가는 이른바 '자주외교'라는 환상에 빠졌던 진보성향 지식인층과 그런 환상을 갈구했던 한국인들, 그리고 그 당시 대외 상황들과 맞물려서 벌어진 대환장의 파티죠. 실질적으로 까보면 외침 이후에 폐허가 된 나라를 제대로 돌볼 생각도 안 하고 궁궐 지으면서 국가 재정 낭비했고, 그리고 선조때 활약했던 조선 역사상 최고의 인재풀을 정쟁싸움으로 죄다 날려먹은 폭군에 가까운 왕이었습니다. 인조반정이 마치 정통성 없는 세력이 억지로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과 비슷하게 취급받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 까보면 당시 광해군에 대한 지배층과 백성들의 민심은 거의 최악에 가까웠습니다. 쫓겨나면서 1g의 동정도 못 받고 본인도 그걸 알아서 제대로 저항조차도 못하고 왕위를 내놨고요.
22/05/08 19:48
4천년 전에 피라미드 지은걸로 4천년후 후손까지 그거 원툴로 연명하게 해주는 경우도 있을거고.
영락제가 자금성 지은것도 500년은 갔고. 궁궐을 새로 짓는다는건 곧 중심지가 바뀐다는건데 이게 고구려처럼 유의미한 경우도 있고 백제처럼 무의미한 발악인 경우도 있고. 결국 종합하면 정권의 대규모 공사는 권력구도의 변화일 따름이고 그렇게 해서 얻은 권력을 어떻게 써먹냐가 관건이지 그 자체를 비판하는건 딱히 별의미 없어보입니다. 백성들의 불만...은 백성들은 집앞에 눈 쓸라고만 해도 귀찮고 피곤해합니다...
22/05/08 20:19
22/05/08 20:33
뭐 보시면 알겠지만 이미 광해군은 한 번 새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하나 더 지었지요. 그리고 또 추가로 증축했고... 여기에 어떤 명분과 실리를 갖고 오시고 싶으신 건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22/05/08 19:58
궁궐병은 명분들중의 하나이고 (가볍다는 건 아님)
그보다 더한게 수차례의 대규모 옥사와 그로 인한 붕당간 밸런스조절 실패죠 봉산옥사에서부터 일관되게 보여준 모습들은 되려 왕인 광해군을 신하인 이이첨이 이용해먹는거 아닌가 싶을정도
22/05/08 20:16
궁금해서 학위논문 좀 뒤져보니 광해군의 학계 평가는 아직도 좀 애매해 보여서.. 인터넷에서의 평가처럼 무조건 폭군이다!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뭐 찬탈-폐위될 정도면 결국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긴 한데... 왕조실록 자체가 결국 승자의 기록이라는 한계를 생각하면 미묘한 점이 없는 것도 아니고...(임경업에 대한 평가 같은 것도 정권 잡은 서인들이 실록 막 수정하고 하면서 만들어진 지분이 적잖은거 고려하면..) 학계에서 더 확실하게 결론내려 주는 게 낫겠죠.
22/05/08 20:19
역사관련 썰을 보면 '~라고 보는 것이 트렌드이다', '~라고 보는 분위기이다'라는 표현을 많이 보는데, 이게 정통 학계의 다수설인지 역덕들 중 목소리 큰 사람의 주장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죠.
사실 학문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X가 Y보다 멍청하다', 'Z는 천하의 개쌍놈이다' 등의 주관이 듬뿍 들어간 평가를 하는 것이 어색하다는 점에 비추어 역덕 주류의 의견일 가능성이 짙다고 생각해요. 비전공자 및 비역덕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주류 학계에 따르면...' or '역덕들의 주류 의견에 따르면' 등과 같이 주장의 주체를 명시해줬으면 좋겠어요.
22/05/08 20:24
인터넷이니까 크킹식으로 말하면 궁궐 증축은 당시 조선 왕의 바닥 오브 바닥 이었던 왕권을 세우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이순신이 살아있었으면 이성계 하는 거 그대로 이순신이 왕이 될 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그걸 하고서도 왕권이 회복이 안 되서, 정쟁으로 인재풀 깍아먹어야 한 건 무능력이지만요.
22/05/08 20:46
광해군 평가를 높이려고 쓴 글이 아니라 그냥 광해군이 한심한 짓거리 하는 와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 흥미롭네? 성격의 글 정도로만 읽으면 될 거 같은데, 너무 '평가'에 집착할 필요 없을 듯 싶습니다. 애초에 역사라는 게' 얜 폭군임 암튼 그럼.' 같은 식으로 접근 하는 것을 굉장히 경계해야하기도 하고요.
22/05/08 21:13
정작 인조반정을 한 주체들이 내세운 명분에는 '너 궁궐 너무 많이 짓더라'는 빠져있더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물론 당대 백성을 괴롭힌 일이긴 맞지만 왕조 시대에서는 그냥저냥 있을법했던 일 아닐까요?
22/05/09 12:04
그렇진 않습니다. 궁궐공사는 백성에게 무리가 가는 일이기에 특히 조선 중기까지는 임금도 없이 그냥 노역인 경우가 많아서 하다못해 그 경복궁조차 태조 때 한 번에 다 안지어지고 700칸인가로 시작해서 5천칸으로 천천히 증축 됐습니다. 창덕궁 창경궁 모두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광해군은 이미 원년에 선조 죽기전쯤 다시 짓기 시작한 창덕궁을 시작으로 창경궁이 완성될 쯤 경희궁과 인경궁 건축을 시작합니다. 당시 인경궁은 7천칸 정도의 대규모 궁궐이고 경희궁도 경복궁의 2/3정도의 규모였다는데 이걸 동시에 진행한 왕은 조선이 아니라 역대 한반도 왕조를 통틀어도 광해군이 유일할 겁니다. 그나마 비빌게 흥선군의 경복궁인데 그래도 8천칸의 단일 궁이었고 그나마 많은 전각을 경희궁에 있는 걸 해체해서 옮겨 재조립라는 식이었죠. 이게 그냥 생으로 짓는 것과 엄청나게 다른 게 전근대 시절 궁궐을 짓기위한 대규모 목재를 구해 이동시키는 게 얼마나 큰 일이었나를 생각하면, 터도 다 밀어버리고 제로 베이스에서 궁궐 두개를 다시 짓는 건 게다가 말로는 매일 후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말하던 광해군의 궁궐공사는 정말 미친짓이 맞습니다.
22/05/08 21:30
광해군의 내정 실정이라고 일컬어지는 여러 행태들, 이를테면 폐모살제, 옥사, 역모 소동, 궁궐 증축, 뜬금 없는 제천의식 시도 등은 일관되게 왕권강화 시도 맥락상에 있는 듯...
22/05/09 09:46
이상하게도 국사 보는 사람들은 왕권강화라는 단어에 지나친 환상을 가진 경우가 많죠. 현대국가가 국민국가고 옛 나라들은 왕조국가라는 점, 그래서 정통성의 기반이 다르다는 차이를 제외하면 왕권강화의 장단점은 독재체제의 장단점과 여러가지로 수렴할 수 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전성기에 접어든 국가들 체제는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거나 최소한 왕과 신하들 사이가 건전한 나라가 대부분이기도 했고요.
22/05/08 23:43
별개로 교하로 천도했으면 어땠을까요
남한산성 대신 강화런 했다가 같은 혹은 다른 결말. 강화에서 조금 더 들어와서 수도 앞까지 옆나라 처럼 흑선이 들어와서 서방에 문을 빨리여는 개화엔딩이나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크크
22/05/09 15:52
군 붙은 둘 중에 그래도 연산보다는 낫다는 광해와
조종 붙은 애들 중에 최악인 인조가 서로 붙어있으니 묘한 시너지가 나죠.. 마치 브론즈4와 아이언1의 대결이랄까..
22/05/09 16:12
애초에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왕인데 인조의 무능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올라간 평가라서 약간 거품성이 있었죠.. 그리고 그 거품이 꺼져가는 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2/05/09 17:19
광해는 전시에 분조 받아서 직접 싸움터에서 굴렀기 때문에 이거 하나만으로도
인조에 비해 훨씬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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