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2/05/26 12:59:56
Name PRADO
Subject [일반] [15] 슈베르트

IMF 가 터지고 일 년. 우리는 살던 도시에서 쫓기듯 마산으로 이동했다.

작은 평수였지만 우리 식구가 살기에 나쁘지 않았던 아담한 빌라에서 가게 딸린 방 두 칸 월세로 이사를 왔는데, 나는 그 집이 처음부터  너무나도 싫었다.



처음엔 그 가게 전체를 쓰던 아빠는 이후 돈이 아쉬웠는지, 공간을 합판으로 나누어 벽을 치고 한 귀퉁이에 사무실을 만들어 세를 받았다.



그나마 넓었던 가게가 절반으로 줄었던 건 내게 큰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중요한 건 세입자들이었다.



절반으로 나뉜 그 사무실이 정확히 언니와 내가 쓰는 방 벽과 맞닿아 있어, 저녁내내 소음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아저씨들은 오후 경부터 새벽까지 그곳에서 노름을 했다.



노름만 했냐 하면.. 욕도 하고 싸움도 하고, 매일같이 다방에서 커피를 배달시켜 배달 온 여자들을 희롱하기도 했다. 그 소리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들려 하교 후 내 방에 들어가면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걸 며칠 반복하다 보니 나도 꾀가 생겨, 음악을 틀어 그 소음을 조금이라도 잠재워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음악을 주로 카세트 플레이어로 들었는데, 길거리 짝퉁 음반을 주로 사서 가요를 듣기도 하고 라디오를 듣기도 하다가.. 그마저도 너무 지겨워져 엄마가 사주신 슈베르트의 송어를 어느 날 틀어보았다.



엄마도 나도 클래식이란 걸 거의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TV에서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을 듣고 엄마가 사 오신 거였다. (그것도 아마 좌판에서 산 카세트였을 것이다.)



당연히 대중가요를 더 좋아하던 나였지만, 하교 후 잠들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반복하기엔 가요보다 클래식이 나았다. 그래서 하교 후 매일같이 슈베르트의 송어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볼륨을 최대로 키우고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그 속에 있노라면 세상에 나 혼자만 고요히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만의 돌파구를 찾은 것 같아 기뻤지만, 이후엔 오히려 노름판 아저씨들이 나에게 소리 좀 줄여달라며 사정을 했다. 나는 중2답게 부루퉁한 얼굴로 아저씨들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숙제를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저씨들은 생각 외로 순순히 돌아가며, 그러면 조금만이라도 줄여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중 아저씨 한둘은 내게 율무차나 유자차 등을 종이컵에 타서 가져다주기도 했다.



약일 년 이상 매일 듣던 그 음악은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사한 후 곧 내게서 잊혀졌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한가하게 음악을 들으며 숙제할 여유가 없어져서 이기도 했을 것이다. 소음으로부터 나를 도피시켜주었던 그 음악, 틀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할 수 있었던 그 음악을..



아이가 태어난 후,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CD 플레이어를 사고, 아이 감성에 좋다는 클래식, 영어 동요나 구연동화가 들어있는 -아이가 관심도 없을-CD 들을 욕심껏 주문하던 중, 내 기억 속에서 잊혔던 송어가 문득 떠올랐다.



아이도 나처럼 그 음악을 좋아하게 될까? CD를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송어부터 찾아 재생해 보았다. 아기는 틀어줘도 아무 반응이 없다. 낯선 소리가 나자 잠깐 흥미를 가지다 곧 제 장난감에 몰두할 뿐. 하지만..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그때의 감정이 다시 생생히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운듯하다 이내 무언가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은 울림을 느낀다. CD 플레이어 앞에 우두커니 서서 송어를 듣는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함께 피아노 연주를 따라가고 있다.  나도 모르게 콧가가 시큰해진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2/05/26 13:20
수정 아이콘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저녁 때와 주말 아침마다
전축 카세트 테이프로 틀어주시던
클래식 음악 전집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좋은 줄을 몰랐는데
다 커서 가끔씩 귀에 익은 선율이 들리면
엄청 반갑더라고요.
곡명은 대부분 모르지만요^^;
22/05/26 17:19
수정 아이콘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음악을 잘 접하지 않아서 그런가;; 어렸을때 들었던 음악이 한번씩 생각날때가 있더라구요. 저도 마찬가지로 제목이 기억나지 않을때가 많아서 한번씩 엄청 답답해하며 검색해보고..^^;
22/05/26 17:43
수정 아이콘
음악은 어떤 시절이나 순간과 결합되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저도 기억에 남는 순간들과 1:1로 연결된 곡들이 몇 있네요... 들으면 그 시절이 떠오르고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과 함께 가슴이 찡해지더라고요.
오월의날씨
22/05/26 18:48
수정 아이콘
저도 어릴 적, 마산에서 셋방 산 적이 있어서 그 당시 풍경이 그려지는 것 같아요. 아련한 느낌이 드는 글이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5701 [일반] [15] 개똥철학 [2] 집으로돌아가야해4354 22/05/26 4354 3
95700 [일반] [15] 슈베르트 [4] PRADO4203 22/05/26 4203 12
95699 [일반] [15] 불안이 시작된 날 [5] 청순래퍼혜니4112 22/05/26 4112 6
95696 [일반] 원피스 극장판 스템피드 후기 [8] 그때가언제라도6927 22/05/25 6927 0
95695 [일반] 최근에 본 웹소설 후기입니다! ( 약간의 스포주의! ) [19] 가브라멜렉8516 22/05/25 8516 1
95693 [일반] 우리는 타인의 나태와, 위험한 행동에 오지랖을 부릴 권리가 있는가 [18] 노익장5853 22/05/25 5853 1
95692 [일반] [테크 히스토리] 한때 메시와 호날두가 뛰놀던 K-MP3 시장 / MP3의 역사 [47] Fig.1105666 22/05/25 105666 40
95691 [일반] 인플레이션 시대에 현금과 주식보다 코인을 보유하라 [28] MissNothing9169 22/05/25 9169 4
95689 [일반] AMD B650 칩셋 메인보드 제한적 오버클럭 지원 [9] SAS Tony Parker 7905 22/05/25 7905 1
95688 [일반] 미국에서 또 총기사건이 발생했네요. [161] 우주전쟁15037 22/05/25 15037 2
95687 [일반] [15] 할머니와 분홍소세지 김밥 [8] Honestly7137 22/05/25 7137 36
95686 [일반] 세련되면서도 유니크한 애니메이션 음악 5선 [9] 이그나티우스7165 22/05/25 7165 5
95685 [일반] [15] 빈 낚싯바늘에도 의미가 있다면 [16] Vivims8095 22/05/24 8095 56
95684 [일반] 손정의가 중국에 세운 ARM, 4년만에 중국이 장악 [82] 삭제됨20409 22/05/24 20409 3
95683 [일반] 서아시아에서 다시 불어오는 피바람 [22] 후추통17440 22/05/23 17440 8
95682 [일반] 유튜브에서 본 소고기 미역국 따라해보기.JPG [36] insane12026 22/05/23 12026 5
95681 [일반] 개신교 뉴스 모음 [76] SAS Tony Parker 13419 22/05/23 13419 2
95680 [일반] [15] 프롤로그 [4] Walrus4785 22/05/23 4785 11
95678 [일반] <범죄도시2> 후기(스포) [35] aDayInTheLife9246 22/05/22 9246 0
95677 [일반] 배아픈 시대를 지나서 배고픈 시대로 [24] kien.15542 22/05/22 15542 11
95676 [일반] [15] 카레 [4] 연휘가람5339 22/05/22 5339 12
95675 [일반] 미국 인사 963명을 입국 금지 조치한 러시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제외. [21] 비온날흙비린내10318 22/05/22 10318 0
95674 [일반] [웹소설] 군림천하 - 전설이 되지 못한 신화 [85] meson12859 22/05/22 12859 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