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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3/08 18:53:08
Name 具臣
Subject [일반] 심심해서 쓰는 무협 뻘글 7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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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국번은 당연히도 황상을 지근거리에서 늘 보필하게 되었다. 다행히 귀양갈 일은 없었고, 별 생각도 못한 변덕과 트집을 몇달 견뎌냈더니 뜻밖에도 지낼만 해졌다. 이제 천자는 까다로운 상관 수준. 세상 참 모를 일이군 싶었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뭔가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락제는 조카인 건운제의 제위를 찬탈한 사람이었다. 인후仁厚하다는 평가를 받던 건운제는 문무백관의 마음을 산 사람. 심지어 군권君權과 신권臣權의 조화로 명 제국을 건강하게 만들면 장기적으로는 황제에게 더 이득이라 보고 자신의 권한을 줄이기까지 했다.
이에 반발한 것이 당시 한왕이던 연락제. 아버지가 애써 건국한 주씨의 명을 조카가 신하들에게 넘기려 한다고 불만을 터뜨렸고, 형제였던 다른 친왕들과 연합하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신료들 사이에서는 친왕들을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다. 결국 서진의 팔왕의 난을 들며 건운제를 설득, 한왕의 삭번을 추진했다. 오초칠국의 난을 보면, 한왕의 승산은 없으니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신료들의 예상이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던 것이, 친왕들의 병력을 모두 합쳐도 도독부 두엇 합친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뜻 밖에도 한왕은 군사를 일으켰다. 오늘 삭번을 받아들이면 내일 죽음을 당하리라 본 것이다.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을 얕보는 경향이 있는데, 한왕 역시 자신이 아버지와 전쟁터에서 명을 세울 때 갓난 아기였던 조카를 우습게 보기도 했고.

당연히 진압될 줄 알았던 반란은 이상하게 돌아갔다. 승리를 의심하지 않은 건운제가 정치적 고려를 너무하다가 한왕을 죽이지는 말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망설이는 범은 달려드는 벌만도 못하다고 했던가. 칼을 뽑았으면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데, 상대가 죽을까 망설이니 싸움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여기에 관군과 반군의 지휘부 기량 차이가 더해지면서 전세는 뒤집혔다. 명 태조가 건국 후 무자비한 숙군을 한 덕에 관군 지휘부는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반군의 지휘부는 한왕 덕에 명 태조의 칼날을 피한 숙장宿將들. 결국 건운제는 궁궐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야 했다.

간신히 한왕은 연락제로 등극했다. 그런데 그 부하들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는데는 쓸 수 있으나 천하를 다스리는데 쓸 재목은 못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기존의 대소 신료들 가운데 사람을 뽑아쓸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모두 건운제를 섬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잘못이 있으니 사람을 믿지 못했고, 의심은 암귀暗鬼를 만들었다.
세상인심이란 게, 건운제를 지지하고 동정하는 사람은 많아도 건운제를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구 밑에서 일했다고 그의 사람은 아니었고, 설사 누구 사람이라도 세력이 있을 때나 따르지 생길 게 없어진 다음에도 충성을 바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연락제는 한둘 있을까 말까한 건운제의 충신을 거르려다 거의 모든 조정을 못쓰게 된 것이다.
마음 속의 암귀에 사로잡힌 연락제는 일을 믿고 맡기지 못했고, 수틀리면 닥치는대로 처벌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리 하면 건운제 밑에서 잘 나갔던 자들과 그 자손은 알아서 도망갈테고, 신진세력 아니면 기존세력에 불이익받던 사람들이 자연스레 한림원을 채우게 될 거라는 생각도 하면서.
화국번이 귀양을 가지 않은 건, 연락제가 봤을 때 그나마 덜 의심스러워 그럭저럭 데리고 있을만한 신하였기 때문이었다.

천자의 속을 알게 되자, 화국번 머릿 속에 떠올랐던 생각은 '이젠 받은 걸 갚아줄 때인가?' 였다. 한미한 가문을 비웃고 죽을 구덩이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천자의 손으로 죽일 꼼수가 몇 떠올랐지만 참았다.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도 들었거니와, 무엇보다도 황상의 속을 읽었다는 것을 들켰을 때 어찌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십여년이 지났다. 여전히 천자는 암귀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화국번은 잘 버티고 있었다.
그는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면서 어느 파벌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천자의 곁에서 별탈없이 오래 지내는 걸 본 여러 당파에서 한번씩 손을 내밀었지만, 어차피 들어가봐야 그 곳의 순혈은 못 된다는 걸 잘 알았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껄껄 웃으며 아쉬운 소리 잘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친한 척하며 골칫거리 떠넘기는 짓도 잘 못하는데, 별다른 덕도 못보고 뒤치닥거리만 해줘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화국번은 그들의 힘이라도 빌려 한림원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들은 화국번이 한림원에 있기에 손을 내민 것이었지 한림원에서 빼줄 생각은 아예 없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무엇보다도 어느 당파라도 들어갔다가 자칫하면 천자의 눈밖에 날 지도 몰랐다. 황상은 자신의 손발이 한눈 파는 걸 좋게 볼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도 떠밀려서 3황자의 태부가 되었다. 원래 황자의 스승 겸 후원자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그런데 황자가 적장자라면 천자가 되니 아무 문제 없지만, 적자면서 차남 이하라면 이게 또 묘해진다. 언제 이들이 황위를 노릴 지 모르고, 설사 자신은 그럴 뜻이 없더라도 체제전복을 노리는 세력에 이용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만약 이들이 황제와 동복형제라면 황태후의 덕에 목숨은 건질 수도 있는데, 그러면 누군가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해진다. 역모가 아닌 다른 죄를 지은 경우에도 마찬가지. 상앙이 죄를 지은 태자에 갈음하여 태부를 처벌한 일은 이후 여러 왕조에서 되풀이 되었다.
할아버지인 태조와 아버지인 연락제를 닮은 건지,모든 황자들은 성격이 예사롭지 않았다. 야심있는 첫째와 음흉하고 의심많은 둘째, 철없는 망나니 세째. 3대째 피바람이 불 지도 몰랐다.

아무리 평소에 웃고 지내고 사이가 좋아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등 돌리는 사람들. 화국번은 이들로부터 대단한 영예라는 축하를 받으며 3황자의 태부로 추천 되었다.
이게 태뢰太牢의 소라는 건가.
화국번은 침울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했다. 아직 젊어 경륜이 모자라고, 집안도 한미하여 감히 태부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못된다고 고사했다. 그러나 황상은 대뜸 화국번을 지명했다. 3황자의 학문이 부족하다며.

여기서 화국번은 천자의 뜻을 읽었다. 단순히 학문의 문제였다면 제위에 오를 황태자를 가르치는 것이 더 급하다. 자신을 태부 아닌 적당한 자리 하나 줘서 적장자에게 붙여야 했다. 한미한 집안에 세력도 없는 자신을 3황자의 태부로 붙이는 까닭은 뻔한거 아닌가 - 내가 했던 짓을 내 아들들이 되풀이 하는 꼴은 못보겠다는거지.

그런데 갑자기 일이 요상해졌다. 황태자가 사냥을 갔다가 석연치 않게 - 물론 증거는 없었다 - 낙마해 크게 다쳤고, 시름시름 앓더니 죽어버린 것이다.
내가 지은 죄가 큰아들에게 갔구나! 내 아들이 내가 한 짓을 하는구나! 업보가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연락제는 참척에 거의 정신을 놓고 형과 형수에게 용서를 구하며 불전佛殿에 살다시피 했다. 젊어서는 아버지와 전장을 누비며 나라를 세웠고, 나이 들어서는 압도적인 세력을 뒤집고 천자가 되었다. 살면서 힘든 일은 많았어도 못할 일은 없었다. 황제가 된 뒤에는 말 한마디 눈짓 하나에 모두가 벌벌 떨었다. 세상 모든 일 뜻대로 하던 사람이 비극을 당하자 이겨낼 수 없던 것이다. 젊어서 실패와 늙어서 충격은 다르기 마련.
연락제가 폐인처럼 되자 연년생 2황자 조왕과 3황자 위왕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죽은 사람은 죽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제 누가 후계자로 될 것인가. 심지어 조왕은 조용히 무림 고수들까지 끌어모았다.

여기서 화국번은 승부수를 던졌다. 몸을 던져 위왕을 막았다. 사적으로는 아버지이나 공적으로는 신하이다. 인신된 자爲人臣의 도리는 충성과 순종忠順이니, 자식이자 신하는 아비이자 임금의 뜻에 따라야지 제위를 쟁취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일갈했다. 또한 동생된 자爲人弟로서 형을 공경하고 복종하며 형이 구차해지지 않게 해야敬詘而不苟 한다고 소리쳤다. 왜 옛 성현은 경자만 쓰면 되지 굽힐 굴자까지 썼겠느냐, 형이 구차해지지 않게 한다는 뜻이 무엇이겠냐며 목이 쉬도록 외쳤다. 철딱서니없는 위왕에게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조용히 말하면 숨어있는 동창의 귀가 듣지 못할까봐 일부러 더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칼을 갈아온 형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위왕은 마지못해 화국번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위왕의 뜻을 꺾고는 조왕의 태부와 담판을 지었다. 나를 비롯한 위왕의 측근들이 자결할테니, 황제가 되신 뒤 위왕의 안전은 보장해주시오! 모두들 '뭐 이런 벽창호가 있나,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바보가 되어버렸군' 수군거렸다.

역시나 연락제는 이 모든 걸 보고 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권력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말뚝같은 삼형제가 하나만 남을 판에 화국번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파국을 막은 셈. 황제가 된 뒤 처음으로 신하에게 마음을 열었고, 화국번은 황금의 산을 만났다. 어쩌면 의심가는 아들에 대한 분노가 투영되었으리라. 더 손이 컸던 건 황후였다. 아들 사이에 피바람이 불고 누가 이기든 하나는 죽게 되었는데 화국번이 살린 셈이었으니. 화국번은 더 큰 황금의 산을 보게 되었다.
황태자의 죽음에 얽힌 증거없는 의문은 조용히 덮였고, 조왕이 황태자를 거쳐 홍인제가 되었다. 위왕의 측근들은 모두 낙향했다. 화국번은 늙어버린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장원을 샀다.

화국번이 자리를 잡자 가뭄이 왔다. 부호들은 가뭄이 오면 돈을 더 벌기 마련, 쌀 몇섬으로 남의 조상 대대로 내려온 논밭을 쓸어담았고 겉보리 몇말에 남의 집 아들딸을 사왔다. 자식을 파는 부모는 부잣집 종으로 가면 굶어죽지는 않을 거라는 말로 자신과 아이들을 달래는 수 밖에.
화국번은 달랐다. 농민들에게 쌀과 콩을 품삯으로 주며 강바닥을 파고 둑을 쌓아올려 저수지를 만들었다. 화국번 덕에 땅과 자식을 팔지 않고 흉년을 넘겼고, 이후에는 화국번의 저수지 덕에 흉년이 덜 왔다. 화국번은 수세水稅로 본전을 찾았고, 농민들도 물값이 좀 들었지만 흉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또 비단과 도자기에도 투자를 했는데, 흉년으로 논밭을 잃은 농민들을 노비로 산 게 아니라 품삯을 제대로 주고 일꾼으로 쓰며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가뜩이나 많은 돈이 더 많아지면서 민심까지 얻었고, 화진천이 화국번의 뒤를 이으며 화씨세가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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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8 19:59
수정 아이콘
오... 너무 재밌어요!
23/03/08 21:17
수정 아이콘
재미있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휴머니어
23/03/08 22:44
수정 아이콘
크으 필력보소.
23/03/09 07:10
수정 아이콘
매번 고맙습니다.
23/03/08 23:30
수정 아이콘
열전 한편을 본듯한...!
23/03/09 07:11
수정 아이콘
매번 고맙습니다.
23/03/09 01:35
수정 아이콘
연락제면 영락제 느낌이 나는군요.
정화의 대원정때 공을 세운 해남파의 무인 한명 등장시키는건 어떨까요.
남해십칠검 일식 백경출해, 십칠식 파형만리 등등...
23/03/09 07:13
수정 아이콘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세번째 글 즈음에 넣겠습니다.
사실 영락제와 건문제를 그대로 넣긴 좀 그래서 일부러 티나게 살짝만 고쳤습니다.
그나저나 초식 이름을 두개 받고 열다섯개 지으려니...다시 생각해보니 남해삼십육검이었으면 큰일날뻔했군요.
23/03/09 10:55
수정 아이콘
해남백이십팔로검으로 할걸...
23/03/09 21:51
수정 아이콘
!!
herman_n
23/04/19 00:35
수정 아이콘
오 재미있네요!
23/04/20 09:27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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