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3/13 03:06:45
Name 칼슈마이
Subject [일반] 스즈메의 문단속 재밌게 본 후기 (스포)
쥬라기월드 도미니언 이후 정말 오랜만에 극장에서 본 영화네요. 리뷰 특성상 평어체로 작성하였습니다.

===

한 아이가 폐허를 홀로 거닌다. 지진으로 엉망이 된 곳에서 울며 어머니를 찾는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지진으로부터 12년이 지났고, 폐허는 어느새 다시 피어난 녹음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결국 주저 앉을 뿐.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나타난다.

스즈메의 이야기는 위의 꿈에서 시작된다. 영화의 인트로부터 스즈메의 심리를 대놓고 보여주는 꿈은 사실 이 영화가 12년 전, 동일본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트라우마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스즈메는 우연히 일본 열도 아래를 꿈틀거리는 재난의 근원, 미미즈를 막는 책무를 가진 토.. 뭐더라, 아무튼 그걸 해결하는 남주인공과 동행하게 된다. 그러나 언뜻 보면 즐거운 로드 무비로 보이는 이 장면들은, 계속해서 등장하는 미미즈, 그리고 그를 막기 위해 거니는 폐허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먼 옛날에 겪었던 재난 속을 헤매고 있는 스즈메를 보여준다. 그녀는 여전히 재난의 한복판에 있다. 비산사태로 폐허가 된 마을, 고베 대지진을 겪었던 고베, 말 할 필요가 없는 도쿄까지. 스즈메가 거친 모든 장소는 과거에 재난을 겪었던 장소이고, 비록 그 장소는 다를지언정 그 곳에서 재난을 겪은 모든 이와 스즈메는 동류이다.

그렇게 보면 많은 이들이 스즈메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크게 이상하진 않다. 그들은 단순히 가출 소녀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니다. 홀로 어머니를 찾으며 울먹이는, 그 때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을 돕는 건 그렇게 당연하진 않다. 하지만 재난을 겪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돕는 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재난의 피해자에게 싸구려 동정심이 아닌, 부려먹을 때는 부려먹고 도와줄 때는 도와주며, 불쌍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시선에서 따뜻함을 선사한다. 덕분에 스즈메는 힘을 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스즈메의 어릴 적 추억, 어머니가 만들어준 소중한 의자는 다리가 한 쪽 떨어진 불완전한 모습이다. 게다가 그 추억도 온통 검은색으로 덧칠해버린 일기장 속에 갇혀있다. 지진이 일어난 후에 어릴적의 스즈메는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일기장을 전부 까맣게 칠했는데, 어머니와의 추억은 슬프게도 그 까맣게 칠한 틈바구니 사이에 갇혀버렸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추억이 등장하는 장면의 비네팅들이 전부 일기장의 까만 덧칠들이다. 보고 소름이 돋았다. 아름다운 추억인데, 저토록 아픈 어둠에 갇혀있다니.

그렇기에 스즈메는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다니), 죽어도 괜찮은 거냐'고 말 하는 소타에게 이렇게 말한다. 죽어도 상관 없다고. 죽고 사는 건 운명? 뭐였더라, 아무튼 정해진 것이라고. 돌이켜보면 이는 평범한 여고생이 할 말이 아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그 검은 덧칠 위에 쌓아올렸기에, 언제 송두리째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1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지축을 울린 그 대지진처럼.

그러니 스즈메는 소타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물론 첫 눈에 반한 것. 잘생김이란 개연성도 당연히 존재하지만, 스즈메에게 소타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비추어 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반해버린 남자. 함께 있고 싶은 남자. 사랑하고 싶은 남자. 그러나 어머니처럼 미미즈라는 재난에 휩쓸려 나를 떠나버린 남자. 스즈메는 소타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스즈메는 더이상 어릴 적처럼 주저 앉지 않고 일어선다. 과거에는 어머니를 그저 떠나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울고만 있지 않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소중하게 품어온 어머니의 의자와 마찬가지로, 소타가 남긴 신발을 신는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재난이 야기한, 또다른 형태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던 이모와 얘기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나서서 소타를 되찾은 뒤 미미즈를 격퇴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여전히 어머니를 찾으며 홀로 헤매고 있던 어릴 적의 자신에게 의자를 건네주며 스스로를 치유한다. 소타도, 이모도, 엄마도 아닌, 일기장을 검은색으로 덧칠해버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자신이기에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현실로 돌아오고, 그 때 그들이 했던, 그리고 스즈메가 다시 한 번 해야만 할 다녀오겠습니다를 반복하며 재난의 문을 잠근다. 이후 소타를 떠나보낸 스즈메의 하늘 위로 참새(스즈메/スズメ)가 날아오르고, 스즈메는 돌아온 어머니, 아니, 소타를 반겨준다.

너의 이름은.은 연결. 잊혀져 가는 재난, 사람과의 연결을 통해 잊지 않을 것임을 다짐한다.
날씨의 아이는 구원. 한 개인에게 부과된 막대한 재난을 해방시킴으로써 구원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위로. 여전히 폐허를 거닐고 있을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이다.

사실 재난 3부작은 각각 위의 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으나, 가장 중점이 되는 소재는 개인적으로 위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 3부작의 너무나도 훌륭한 마무리였다고 생각한다.

아쉬운 점? 물론 있다. 미미즈의 연출에 좀 더 변주를 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고, 다이진과 사다이진 이야기도 필요에 맞춰 끼워넣는 느낌보다는 좀 더 관객들이 몰입감을 가질 수 있도록 매끄럽게 등장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세리자와도 마찬가지. 또한 로드 무비로서 중간중간에 속도감 있는 편집은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지만, 아무래도 만듦새 자체는 투박한 면이 있다. 결국 작품 내적으로 충분히 전달되는 것이 아닌, 작품 외적으로 곰씹어야 전달되는 면도 꽤 많기 때문이다. 이러니 개연성에서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스즈메의 문단속이 그린 주제와 메시지는 아름답다. 비록 지진이나 재난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인생에 한 번쯤 크든 작든 미미즈를 겪기에, 스즈메의 이야기는 마음 속을 울리며 다가온다. 이제 12년 후의 폐허에서 떠도는 아이는 없다. 참새는 날아올랐으니까.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3/03/13 07:32
수정 아이콘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2회차 예정인데,
신카이 마코토 언어의 정원부터, 재난 3부작 전부 극장에서 보고 또보고, 씹고 또 씹었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을 가장 재미있게 봤습니다.

사실 관람 전에는 모 유투브 영상에서 재난 트릴로지 작품의 구성과 패턴, 배경설화의 설명까지 가미된 해석영상을 보고 흥행 폭망 걱정을 하긴했는데, 이정도면 충분히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고사기까지 신경 안쓰고 봐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세구
23/03/13 08:11
수정 아이콘
저도 스즈메 정말 좋았습니다. 마음에 울리는 게 있더라구요
여수낮바다
23/03/13 08:43
수정 아이콘
사다이진이 넘 뜬금 없이 등장한게 이해가 안 갔었지만, 뭐 일본 신화상 무슨무슨 존재라니까 하고 영화 후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던 순간에는 그걸 알리가 없어서, 당황했었습니다. 이모가 참아왔던 말을 한게 그 뒤 사다이진이 조종해서 그런가? 악의 화신인가? 뭐 그러면서 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스킵이나 개연성 부족은, 중요하지 않을거 같습니다

칼슈마이 님이 잘 정리하신, 치유에 초점을 두어 보면, 정말 잘 만든 영화라 생각합니다
이쥴레이
23/03/13 08:44
수정 아이콘
저도 이번에 아주 만족스럽게 봤습니다.
개연성 따위는 남자 얼굴이 잘 생기면 나도 금사빠가 될수 있지..

스즈메 체력이야 만화니 그러러니 하고 역동성이나 이야기전개가 빠르잖아??

중간 주인공 친구의 억까성(?) 이모와의 로드무비는 우리나라로 치면 80~90년대 감성 음악매들리 같으면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재난을 대하는 방법과 위로가 잘표현되었고
흔한 일본애니 마지막에 나오는 다녀왔어/어서와 가 항상 진부하다고 생각했는데 스즈메는 정말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가족을 그리워 하며 가장 듣고 싶은말로 연출을 하니 울림이 있더군요.
지금이시간
23/03/13 10:40
수정 아이콘
빠니보틀 같은 폐허 매니아 + 일본사람 + 자연재난이 많은 일본 피해자를 다듬어 주는영화라
일본 사람이면 매우 재미있게 볼 수 있을 듯 한데 저는 그렇지 않다보니 적당히 재미있게 보고 왔습니다. 충분히 볼 만했다고 생각하고요.
우리나라에선 지금 개봉작들과 비교해서 적당히 흥행 할 것 같은데... 큰 흥행은 또 어렵지 않을까 싶고요.
일본 문화, 자연재해 보다 인위적 재난이 많은 우리나라 특성상 완벽한 동감은 어려운점, 일본 폐허/지리, 중고등 소녀 감성 이런 것들이 좀 허들이 있다 봐서...
23/03/13 15:56
수정 아이콘
동일본대지진이 일본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충격과 상처를 주었는지 새삼 다시 느낄 수 있는 작품이였습니다. 별개로 신카이 감독 작품은 항상 기본 이상은 해주는 거 같아서 믿고 봐도 될 거 같아요.
23/03/29 08:29
수정 아이콘
호불호가 심해서 걱정했는데 어제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지진이라는 예상할 수 없는 재난과 그걸 겪었던 사람들의 삶...마음.. 등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8155 [일반] 학폭 피해자들을 위한 삶의 전술 교안 초본 ( 이라 하고 내 삶의 자기반성문 ) [8] 마신_이천상8886 23/03/13 8886 8
98154 [일반] 자녀, 감성(?)을 위해 경제적 손해(?)를 감수할 만한가? [인생 확장팩 29개월 플레이 후기] [74] Hammuzzi12039 23/03/13 12039 77
98153 [일반] (스포) 더 글로리 주관적으로 아쉬웠던 점 [96] Polkadot11853 23/03/13 11853 6
98152 [일반]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작 [20] 리니시아7809 23/03/13 7809 1
98151 [일반] <노스맨> - 묵직하고 긴 영화가 보여주는 힘.(약스포) [6] aDayInTheLife7040 23/03/13 7040 2
98150 [일반] 스즈메의 문단속 재밌게 본 후기 (스포) [7] 칼슈마이8496 23/03/13 8496 7
98149 [정치] 국힘 수석최고 김재원, 전라도 5.18 립서비스, 조중동 안 보고 전광훈 신문 구독 논란 [82] 터드프17304 23/03/13 17304 0
98148 [일반]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 간단 감상평 [19] 트럭8382 23/03/13 8382 1
98147 [일반] 뉴욕타임스 3. 4. 일자 기사 번역(테슬라에 실망한 자동차 칼럼니스트) [38] 오후2시13264 23/03/12 13264 5
98146 [일반] (스포)연애혁명 10년만에 대망의 완결 ​ ​ [8] 그때가언제라도9999 23/03/12 9999 0
98145 [정치] 전 비서실장 부검영장 신청 및 기각 / 이재명 부모 산소 훼손 [89] 동훈17055 23/03/12 17055 0
98144 [일반]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가 선택한 노래들 [11] 라쇼11087 23/03/12 11087 4
98143 [일반] 완결웹툰 추천-지옥급식 [17] lasd24111177 23/03/12 11177 3
98142 [일반] [스포표시줄있음] 스즈메의 문단속 보고왔습니다. [15] 징버거7080 23/03/12 7080 3
98141 [일반] 겨울 한 남자가 텅 빈 거리를 걷고 있었다 [1] 닉언급금지7352 23/03/12 7352 2
98140 [일반] [팝송] SG 루이스 새 앨범 "AudioLust & HigherLove" 김치찌개6543 23/03/12 6543 1
98139 [정치] 베트남 정부, 한국 국방부 항소에 "진실 부인, 깊이 유감 [60] 기찻길16977 23/03/11 16977 0
98138 [일반] 샤말란 감독의 신작 똑똑똑 간단평 [16] 인민 프로듀서10358 23/03/11 10358 1
98136 [정치] 사우디-이란 7년 만에 재수교, 관계 정상화 [60] 크레토스14030 23/03/11 14030 0
98135 [일반] 꼰대가 사라져가는 세상 그리고 아쉬움 [59] 한사영우12114 23/03/11 12114 11
98134 [일반] 심심해서 쓰는 무협 뻘글 8 [4] 具臣6551 23/03/11 6551 1
98133 [정치] 요즘 뭔가 야당의 존재감이 희박한거 같습니다. [128] 김은동13395 23/03/11 13395 0
98132 [일반] 어찌보면 야구의 질적 하락은 '필연' [137] AGRS13417 23/03/11 13417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