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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3/15 21:18:45
Name 具臣
Subject [일반] 심심해서 쓰는 무협 뻘글 9 (수정됨)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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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욱은 연공실을 나섰다. 멀찍이서 무공수련이 끝나길 기다리던 무사가 다가왔다.
ㅡ 대주님, 보주님께서 삼익표국 건은 없던 일로 하시랍니다.
ㅡ 뭐? 그래...알았다.
이제 체념한 듯 한숨을 쉬고는 집무실로 갔다. 가보니 부대주 정범이 와 있다. 입이 촐싹거려서 그렇지 무당의 속가제자로 한가락 하는 검객.
ㅡ 아니 형님. 또 왜 이러신대요?
ㅡ 뭐 뻔하지. 우리가 멋대로 군 거지.
ㅡ 형님이 나섰으니까 이 정도라도 된 거지.  보주님은 그냥 무시하셨쟎아. 미리 말씀 안 올렸다고? 지난 번에 호서전장 건은 그런 것까지 내가 신경써야 하냐고 하셨쟎아요. 지난 달에는 가만히 있으니까, 넌 놀고 먹다가 아비 재산이나 물려받을 생각이냐 그러시고.
ㅡ 그러게나 말이야.
ㅡ 아니, 아들을 대주로 앉혔으면 밀어줘도 모자랄 판에 사사건건 이러시면 어쩐대요. 아들이 둘이면 몰라. 이러니까 연혼대 애들이 형님에게 슬슬 기어오르지.

정범이 불평을 쏟아놓고 간 뒤, 채욱은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에라 그냥 무공비급이나 보자. 무림인이라면 무공비급을 보는 게 당연하다. 헌데 채욱은 조금 특이했다. 아버지 채홍이 젊은 시절 모았던 쓰레기에 가까운 비급들을 읽는 것이었다. 낙장이 많아도 너무 많은 정파 무공, 사파 무공 가운데 시덥쟎은 것, 어느 수준이 되면 줘도 안보는 하오문 수준의 무공. 일반적인 무림인이라면 저런 비급에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채욱도 수련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비급을 팠다. 이런 삼류 비급은 그냥 심심풀이로, 그걸 쓴 사람이 어떤 무공 배경에서 무슨 생각으로 초식을 짰는지 짚어보는 것이었다. 낙장이 많은 정파 비급은 수수께끼 풀 듯 빈틈을 어떻게 채우면 좋을까 궁리해보고.
이건 도가 계열 내공심법을 익히다 만 사람같긴 한데...불가 쪽도 섞였나? 아무튼 정종심법의 흔적이 있긴 한데 제대로 배운 건 아니고... 밀종의 대수인을 따라해보고 싶었나보군. 그러다 안되니까 할 줄 아는 철포삼을 끌어다 쓴 모양인데, 이러다 손 다치지...

그 때 채홍이 인기척도 없이 불쑥 들어왔다.
ㅡ 넌 또 그거 보고 있냐? 그런건 백날 봐야 도움 안된다고 몇번을 말해. 그 시간에 아비가 구해준 소림 속가 제자들 보는 비급을 더 파라니까. 나 젊었을 때 누가 이렇게 챙겨줬으면 오대세가를 따라잡았을 거다. 내가 그런 비급들을 모았을 때는 워낙에 없을 때라 그거라도 모았던 게야. 너야 배 불러서 그런 걸 모른다만.

말 한마디를 해도 듣는 아들 기분 나쁘게 하는데 천부적 재질이 있는 채홍의 젊은 시절 고생담은 그렇게 또 시작했고, 오늘도 한시진을 넘긴 뒤에야 간신히 끝났다.

채홍은 원래 하오문의 잡배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 하오문에서 잔심부름을 하다가, 수염이 나고 덩치가 커지자 자연스레 칼받이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채홍은 다른 졸개들과 달랐다. 다들 돈 몇푼 생기면 술 마시고 여자를 사거나 노름을 했는데, 채홍은 술과 도박은 거들떠도 안보고 무공비급을 샀다. 그래봤자 하오문에 돌아다니는 뻔한 비급이었지만.
글을 모르니 주루에서 장부를 쓰는 장소삼이나 약방의 전씨 노인에게 아쉬운 소리하며 비급을 읽고, 밤잠을 줄여가며 무공을 익혔다. 장소삼은 여아홍이나 남전계퇴에 쓰는 글자나 알지 비급에서 쓰이는 글월은 잘 몰랐고, 전씨 노인도 혈도와 혈맥을 잘 알았지만 무공은 익혀본 적이 없다보니 큰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그런데 마침 녹림의 장건채에서 욕심을 너무 부리다가 지역 부호 하나를 죽여버렸다. 그래서 그 지역을 관할하는 천호가 토벌을 해야 했는데, 이 친구도 좀 많이 해먹었다보니 군세軍勢가 모자랐다. 그래서 의용군을 뽑았고, 채홍은 어차피 칼받이로 사는 거 어쩌면 기회가 될 지 모른다며 지원했다. 다른 곳도 아닌 관으로 가니, 하오문에서는 끄나풀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쉽게 보내주었다.

채홍은 두명과 함께 산채山寨 뒤로 숨어들어 불을 지르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칡덩굴을 잡고 절벽을 기어올라가 보니, 파수꾼들은 모두 적이 오는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두목이 오는지만 보고 있는 것 아닌가. 덕분에 손쉽게 불을 지르고 숨어있는데, 마침 채주 귀면홍살이 만취상태에서 불난 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칼도 없이 비틀거리며 나타난 귀면홍살을, 채홍은 숨어있던 바위에서 뛰어내리며 칼로 찍어버렸다.
술 한잔 하고 있는데 산채 뒤에서 불길이 올라오지, 관군 온다고 망보기가 친 징소리는 정신없이 울려대지, 연기를 본 관군은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지, 채주는 죽어넘어갔지, 다른 두목들은 다들 허둥거리며 달아나지...제대로 싸우는 녹림당은 없었고, 채홍은 채주와 다른 졸개 아홉의 목을 바치게 되었다.

큰 공을 세웠으니 큰 상이 내려졌어야 했지만, 천호가 일을 제대로 할 놈이었으면 애초에 하오문 졸개까지 끌어모을 상황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산채에서 빼앗은 은자는 천호가 모두 먹어버렸고, 채홍은 군졸 열을 거느리는 소기小旗로 들어가게 되었다. 더럽고 치사해서 갈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하오문 졸개로 사는 건 이제 끝내야겠다 싶어서 군문에 들어서게 되었다.

누군 기연도 찾아온다는데, 채홍은 그럴 팔자는 아니었다. 허나 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도법과 창법을 체계적으로 익힐 수는 있었다. 명문정파의 성명절기는 아니지만 모든 문파 무공의 기본이 되는 초식들은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채홍을 오년만에 완전히 다른 수준의 고수로 만들어놓았다. 병졸들이 배우는 창칼질이 아니라 무장들의 무공을 배우려면 창봉교두에게 술을 자주 사야 했지만, 길게 보면 그게 채홍에게 손해는 아니었다. 살아보려고 애쓰는 젊은 사람은 좋게 보기 마련. 남들은 해야하는 조련도 빠지려고 꾀병을 부리는데 술까지 사가며 무공을 익히려는 채홍은 돋보였다. 밑바닥 삶을 살았던 사람이 조직생활을 의외로 잘 하는 경우가 있다. 눈치가 빨라 윗사람에게 싹싹하고, 사람 거느리는 게 신나서 아랫사람에게도 잘하는. 채홍이 그런 사람이었고, 말 실수를 자주 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성내 부호 댁 후원의 불당에서 마나님께서 애지중지하는 아기만한 금불상이 도둑맞았다. 사흘 쯤 모든 포두와 포쾌가 뛰어다녔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날도 집사가 관청에 와서 독촉인지 부탁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채홍이 우연히 듣게 되었다.

ㅡ 아, 글쎄 탁발승 하나가 얼쩡거리더니, 다음 날 새벽 마나님께서 예불을 올리러 가셨을 때 불상이 없어졌더라니까요.
포두가 건성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로 때우자, 집사는 투덜거리며 관아를 나섰다. 그 때 따라나간 채홍이 말을 걸었다.
ㅡ 혹시 그 탁발승이 늙수그레한 짝눈이었나요?
ㅡ 어?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ㅡ 제가 짐작가는 게 있습니다. 한번 기다려보시죠.
하오문 시절 도둑들을 싫컷 봐온 채홍이었기에, 누가 어떤 수법으로 뭘 훔치고 어디에 숨는지, 장물아비는 누구인지 훤하게 꿰고 있었다. 그날 밤  부하들과 도박장 옆에 숨어있다가 불상도둑을 잡았고, 도둑은 관아가 아닌 산속으로 끌려갔다. 포두들이 쑤시고 다니는 바람에 장물아비에게 넘기는 걸 미루고 있었던 금불상은 부호에게 돌아갔지만, 도둑이 숨겨두었던 금원보 석냥과 은자 스무냥은 채홍과 부하들에게 갔다. 그 다음부터 채홍은 자연스레 부호들 사이에서는 해결사로 떠올랐다. 금은보화는 부호들에게 돌아갔고, 다른 장물들과 부호들이 내린 상급賞給은 채홍과 부하들의 손에 들어갔다. 다시는 뭘 훔칠 수 없는 곳으로 보내진 도둑들을 빼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였다.

도둑들 씨가 마를 즈음 채홍은 병졸 쉰을 거느리는 총기總旗가 되었다. 돈 나올 구멍 하나없는 병졸들은 누구나 채홍 밑에 가길 바랬고, 상관들 역시 입으로만 인사하지 않는 채홍을 서로 데려가려했다. 시전의 작은 상인들이 채홍을 찾아와 하소연한 것은 그 즈음. 하오문에서 너무 심하게 뜯는다는 호소를 들은 채홍은 하오문의 패두牌頭를 찾아갔고, 예전의 칼받이 채홍을 기억하던 패두는 중인환시衆人環視하의 비무를 제의했다. 그런 비무라면 채홍을 죽이지 않는한 관으로부터 뒤탈이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목숨을 잃은 것은 패두였다. 그날 하오문의 모든 돈과 쓸만한 사람들이 채홍에게 넘어갔고, 나머지는 그 곳을 떠나야 했다.

채홍은 자신과 같이 불우하게 자랐지만 싹수가 보이는 청년들을 아꼈고,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채홍의 아우들이 되어 연혼대를 이루었다.

그런데 천호가 동생을 백호로 데려오면서 사단이 났다. 동생을 밀어주려니 공이 없어서 녹림의 산채 하나를 토벌하기로 했는데, 동생의 무공이 그닥이었고 목숨을 걸 생각도 없었다. 공은 세우고 싶고 피는 보기 겁나니, 싸움은 채홍과 그 부하들이 하고 공은 지휘관인 동생이 챙기는 그림을 그렸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 그 쯤이야 늘 있던 일이니 신출내기 백호가 조금만 눈치가 있었어도 아무 일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갓 들어온 백호가 제멋대로 지휘를 하다가 일을 그르쳐버린 다음, 저 대신 칼받이 화살받이가 된 하오문 출신들이 녹림과 내통한 게 아니냐며 몰아세운 것이다. 여기서 연혼대원 하나가 참지 못해 백호를 두들겨패버리고 사라졌다. 채홍은 백호의 잘못이 크고 지금까지 자신이 바친 돈도 많으니 그럭저럭 해결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그러지 못했다. 결국 군을 떠나 아우들과 함께 신지보라는 작은 방파를 차리게 되었다.

그럭저럭 신지보를 꾸리면서 나이가 들었고, 아들 채욱이 열일곱 되던 해 다른 젊은이들 열을 모아 신인대를 만들고 아들을 대주로 앉혔다. 채홍이 채욱을 보는 심정은 복잡했다. 아들이니 아끼고 사랑했지만,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눈에 차는 게 없었다. 나는 아버지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데 아들은 덤덤했다. 나는 아버지가 아무 것도 해 준게 없는데, 아들은 부하가 열이나 되는 신인대를 받았음에도 고마운 줄을 몰랐다. 나는 맨주먹으로 총기까지 오르고 신지보까지 세웠는데, 아들은 무당 속가제자 하나 데려오고 자잘한 돈벌이를 하는 정도였다.
누가 날 저렇게 밀어줬어봐. 벌써 남궁세가는 제꼈다 - 채홍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채욱이 남만 못한 건 아니었다. 무공이 강호의 후기지수까지는 못 되어도 근방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신인대도 기껏해야 무사 열로 '대'자를 붙이기도 민망한 조직, 표국이나 전장에서 일을 맡기는 것도 채욱과 정범이나 되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날도 채욱은 아버지가 웬 늙은이에게 얻었다는 쓰레기 비급을 읽다가 덮었다. 뭔가 현문정종의 내공심법을 바탕으로 한 모양인데 도무지 초식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뭘 그리다 말다가 다시 그리고. 맨 뒷장에는 무공이 아닌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까지 써있는데, 글씨가 크고 작고 한쪽으로 몰리고 삐뚤빼뚤 기울고 한두칸씩 띄워지고 여기저기 점 찍히고 줄 그어져 난리도 아니었다.
이건 참말 쓰레기군.

그런데 그날 밤, 잠못들고 뒤척이다 낮에 본 비급이 떠올랐다. 뭔가 엄청난 무공의 낙장이 많은 비급을 잘못 베꼈다는 느낌이 들어, 다음날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두번, 세번, 네번.....
이건 쓰레기가 아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초식.
비급을 보며 춘야희우를 나직히 읊어보았다. 이건 운기조식의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따라하기 쉽게 써둔 것이었다. 모든 무림인은 운기조식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해도 하루 두세시진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를 읊으며 하면 먹고자는 시간을 뺀 모든 시간, 심지어 무공을 펼치면서도 운기조식을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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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어
23/03/15 21:3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근데 한 편과 그 다음편의 연관성이 없어서 스토리 이해가 잘 안가네요.
23/03/15 21:44
수정 아이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게 주인공 셋이 등장하면서 사건 하나와 엮여나가려다보니 이리 되어버렸습니다.
책상에서 각잡고 플롯짜서 쓰는 게 아니라, 귀여니 스타일로 그냥 되는대로 쓰다보니.....^^;;
휴머니어
23/03/15 22:24
수정 아이콘
아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3/03/16 15:50
수정 아이콘
항상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23/03/16 19:26
수정 아이콘
매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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