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6/19 12:15:37
Name 두괴즐
Link #1 https://brunch.co.kr/@cisiwing/7
Subject [일반] 팬이 되고 싶어요 上편 (음악에세이)
팬이 되고 싶어요 (上편)
-어렸을 적 내 꿈엔



누군가의 팬이 되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학생에서 초등학생이 되던 시절, 같은 방을 썼던 삼촌은 이문세의 팬이었고, 앞집 형은 듀스의 팬이었고, 옆집 누나는 김원준의 팬이었다. 딱지 친구는 김건모의 팬이었고, 그 친구의 누나는 신승훈의 팬이었으며, 그 누나의 절친은 이승환의 팬이었다. 얼마 전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온 형아는 디제이 디오씨의 광팬이었는데,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이었다.



개중에는 사대주의에 빠져 팝송을 숭상하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들의 경전마저도 그냥 그랬다. “뭔 말인지도 모를 노래를 왜 듣냐?”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물론 중학교 이후에는 영어를 배운 것 같긴 한데, 나로서는 여전히 팝송은 경음악 같다. 보컬도 뭐, 하나의 악기 아니겠어? 여하튼 당시 나는 누구의 팬이라고 하긴 뭐 했다. 그래도 나름의 경전은 있었으니, 바로 이 모든 노래의 종합선물세트, ‘최신가요베스트’!



1990년대에는 길보드차트가 성행했는데, 길거리 구루마(수레)에서 최신 인기가요 곡을 짜깁기한 테이프를 팔았다.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이 짝퉁 가요모음집을 사서 즐겨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요일엔 KBS의 가요톱텐, 토요일엔 MBC 인기가요 베스트50, 일요일엔 SBS 인기가요도 즐겨 봤다. 특히 수요일에는 부모님이 수요예배를 드리러 교회를 가셨기 때문에 매주 놓치지 않고 방송을 봤다. 그 모음집의 히트곡을, TV에 나오는 가수의 인기곡이 좋았고, 꽤나 챙겨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인기가요를 좋아할 뿐 누군가의 수록곡까지 챙겨듣는 팬은 아니었다.



삼삼오오 모여 자신의 우상에 대한 간증을 나누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때때로 종교 갈등이 벌어져 더 위대한 우상을 겨뤘는데, 대개는 쪽수가 많은 쪽이 이겼다. 가끔은 핵주먹 신자를 보유한 종교가 이변을 일으킬 때도 있었지만, 위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발린 종교인들은 굴욕감을 달래며 열심히 전도에 나섰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그 노래도 좋고, 이 노래도 좋고, 다 좋은데?”라고 했고, 신자들은 “어쩌라고?”와 다를 바 없는 “어, 그래.”를 했다. 영혼 없는 중생의 의견은 담임이 정한 급훈과 같았다.



언젠가 한 친구에게 팬이 되는 방법을 물었다. 걔는 별 이상한 걸 묻는다는 식으로 나왔는데, 나는 나의 ‘꾀돌이’ 과자 절반을 왼손에 부어주면서 되물었다. 그러니 걔는 이렇게 물었다.

“요즘 무슨 노래 좋아하냐?”

“글쎄, 유피의 <바다>?”

“그럼, 그 곡이 들어있는 유피 앨범 사서 들어봐.”



  그래서 사서 들었는데, <바다>말고는 좋은 곡이 하나도 없었다. <뿌요뿌요>도 인기를 끌었지만, 나는 별로였다. 들을수록 별로였다.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별로였다. 그 앨범을 샀기 때문에 더 별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한 푼 두 푼 모았던 그 세월, 나의 꾀돌이, 나의 새콤이달콤이, 나의 아폴로, 나의 치토스! 유피의 팬이 되기 위해 슈퍼마켓을 피했고, 문방구 아저씨의 반기는 인사를 무시하던 그 세월아! 요약하면 ‘내 돈 내놔!’



그 이후 나는 누군가의 팬이 되기를 포기하고, ‘최신가요베스트’를 듣는 삶에 만족하기로 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은 정말이었고, 종교다원주의자의 넉넉한 품을 얻었다. 그러고 한참을 잘 살았다.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고, <삼국지5>도 하고, 《슬램덩크》도 봤다. 그뿐만 아니라, 탁구도 치고, 볼링도 치고, <스타크래프트>도 하고, 《엔젤전설》도 봤다. 그렇게 잘 살아갔는데, 그랬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았다. 그러니까  내게도 계시가 왔다. 사도 바울이 다마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느닷없이 예수를 만났듯, 나도 추석을 쇠러 간 시골에서 날벼락을 맞았다. 어린이였던 나는 그새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알고 보니 나의 우상은 중졸이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나는 그게 중요해진다. 바야흐로 때는 2000년 9월 9일이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3/06/19 13:41
수정 아이콘
흠...누구의 팬이 되신것일까...
두괴즐
23/06/19 13:46
수정 아이콘
그건 다음편에서. 흐흐.
머스테인
23/06/19 21:14
수정 아이콘
요 태지!!!
두괴즐
23/06/22 18:10
수정 아이콘
정답입니다. 흐흐.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025 [정치]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공격하라.(수능에 대한 일타강사 공격) [283] 맥스훼인20739 23/06/20 20739 0
99024 [정치] 황보승희 음성파일 "니(남편) 능력이 안 돼 남의 돈 받았다" [71] 어강됴리18023 23/06/20 18023 0
99023 [일반] [판결] 법원 "가상자산은 최고이자율 적용 대상 아니다" 재확인 [21] 졸업12638 23/06/20 12638 0
99022 [정치] 7만8천원에 징역 1년 구형 [82] 네야18812 23/06/20 18812 0
99021 [정치] 미중 외교회담 -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이다?! - 사실 말장난이다! [146] dbq12316281 23/06/20 16281 0
99020 [정치] 울산시, 250억원 기업인 조형물 건립 '백지화' [30] Gorgeous11939 23/06/20 11939 0
99019 [일반] (스포주의) 영화 플래시 개인적으로 좋았던 장면 [28] Anti-MAGE7994 23/06/19 7994 3
99018 [일반] 르세라핌 'UNFORGIVEN' 커버 댄스 영상입니다. [18] 메존일각8023 23/06/19 8023 13
99017 [정치] 양자역학 알아야 푸는 대학 전공 수준 11번 문제? 어떻길래 이권 카르텔까지? [93] 사브리자나15686 23/06/19 15686 0
99015 [정치] 올해 수능부터 "킬러"문항 배제 [240] 우주전쟁19529 23/06/19 19529 0
99014 [일반] 팬이 되고 싶어요 上편 (음악에세이) [4] 두괴즐8760 23/06/19 8760 2
99013 [일반] 새벽강변 국제마라톤 대회 참석 개인적인 후기(하프 코스) [12] 기차놀이7767 23/06/19 7767 14
99011 [정치] 윤석대씨가 수자원공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48] 검사15041 23/06/19 15041 0
99010 [일반] 브루노 마스 공연보고 왔습니다~ [16] aDayInTheLife8904 23/06/19 8904 1
99009 [일반] 뉴욕타임스 6.12. 일자 기사 번역(미국은 송전선을 필요로 한다.) [4] 오후2시9265 23/06/18 9265 7
99008 [정치] [단독] 尹, ‘수능 난이도’ 논란 [이주호 엄중 경고]…‘이주호 책임론’ 확산 [92] 졸업17631 23/06/18 17631 0
99007 [정치] 구소련이 동해에 무단 투기한 방사능 폐기물 [239] 숨고르기21165 23/06/18 21165 0
99006 [일반] [팝송] 비비 렉사 새 앨범 "Bebe" [1] 김치찌개7330 23/06/18 7330 4
99005 [정치] 양수발전 [13] singularian11881 23/06/18 11881 0
99004 [일반] <익스트랙션 2> - 계승과 가능성 탐구의 연장선. [9] aDayInTheLife7246 23/06/17 7246 0
99003 [일반] 로지텍 지프로 슈퍼라이트 핫딜이 떳습니다. [46] 노블13052 23/06/17 13052 1
99002 [일반] 도둑질 고치기 (下편) (도둑질 후기) [10] 두괴즐8287 23/06/17 8287 12
99001 [일반] 생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15] 번개맞은씨앗8226 23/06/17 8226 1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