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9/17 13:31:31
Name 마스터충달
Subject [일반] 내가 책을 읽는 조금은 특별한 이유
책 <비주얼 씽킹>에는 다음 구절이 나온다.

"남들이 뭐든 다 해준다면 일의 가치도 배울 수 없고 제때 독립할 수도 없다. 스탠퍼드대 학장 겸 부총장을 지낸 줄리 리스콧 하임스는 2015년 출간한 <헬리콥터 부모가 자녀를 망친다>에서 '헬리콥터 부모'를 묘사하며 자녀를 과잉보호하고 너무 많은 일을 해주는 부모에 대해 경고했다. 헬리콥터 양육은 똑똑할진 몰라도 독립적으로 살아갈 기술이 없는 성인을 배출하게 된다."

이 구절을 읽자니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교권 추락 사태가 떠올랐다. 교사에게 갑질하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학부모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헬리콥터 부모'가 아닐까 싶다. 자식을 과잉보호하려는 마음이 갑질과 부당한 요구로 표출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교사이고 학부모의 부당한 요구를 듣는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아마 젊은 시절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싸웠을 것이다. 어느 정도 둥글둥글해진 지금은 "네~네~" 하면서 무책임한 수용으로 대응할 것 같다. 그러나 어느 것도 상대를 이해하는 행동이라 볼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나마 무책임한 수용으로 대응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그러면 최소한 귀찮은 다툼을 피할 수 있고, 경력에 피해가 가는 일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선생님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우리 교육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때 떠오른 것이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에 나온 한 구절이다.

"모든 것은 이해하면 용서할 수 있다."

정말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갑질과 부당한 요구에도 그래야 할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그러려면 조건이 있다. 지식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에 합당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헬리콥터 부모를 만나 부당한 요구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자. 이때 학교 운영의 현실적인 측면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갈등을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나도 알고 학부모도 아는 지식이지만, 학부모는 그걸 알고 있음에도 특별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더구나 그 요구를 철회했을 때 학무모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헬리콥터 부모'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으면 맥락을 바꿀 수 있다. 그렇게 과도한 보호를 일삼는 것이 자식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치는 일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갑질과 부당한 요구가 줄어들도록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 또한 모두 아는 지식이다. 하지만 알고 있던 지식이라도 시야가 좁아지면 잊고 지나칠 때가 많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근거 삼아 설명하여 설득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당연하게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 그러한 지식이 널리 퍼져 '아이를 과보호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인식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 그러면 갑질과 부당한 요구를 하는 일이 어느 정도는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가 더 많다. 이해와 용서를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 방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문제 상황에 처한 한 개인으로서 갖추면 좋을 태도 정도에 관한 이야기다)

<비주얼 씽킹>의 저자 템플 그랜딘에게도 과제량이나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며 연락하는 부모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 뒤에는 다음 문장이 이어진다.

"나와 대화를 나눈 일부 부모는 자녀의 직장에까지 전화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들거나 상사에게 자녀의 안부를 물어본다고 털어놨다."

'털어놨다'라는 단어가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템플 그랜딘은 자신에게 항의하려 씩씩거리며 전화한 상대가 자기 상황을 털어놓도록 만들 수 있었을까? 그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으로 인간관계 능력이 그닥 좋지 않다고 스스로 털어놓는 사람이다.

나는 그 이유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템플 그랜딘은 '헬리콥터 부모' 문제를 알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상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고, 나아가 상대의 무례한 요구도 기꺼이 용서할 수 있지 않았을까?

모든 것은 이해하면 용서할 수 있다. 그러려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지식을 쌓아야만 한다. 우리가 독서하고 공부해야 하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세상을 더 원만하고 화목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이유도 더하고 싶다.

나는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오늘도 책을 읽는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3/09/17 13:5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멋대로 덧붙이자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과 '계속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는/놔주는 것'은 별개의 층위입니다. (충달님의 글이 그렇지 않다고 암시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자는 나 자신의 영혼의 평화(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정신 위생)을 위해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꼭 후자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고승이 자비심을 가진 채로 (어쩔 수 없이) 괴물이나 악한의 숨통을 끊는 동양 설화의 클리셰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그 반대쪽에는 복수를 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불행해지는 박찬욱 복수 3부작의 주인공들이 있겠고요.
마스터충달
23/09/17 14:03
수정 아이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후자가 아니라 전자로 살기 위해서라도 공부와 수양이 필요할 것 같네요.
노회찬
23/09/17 18:36
수정 아이콘
예전에 자신의 자녀를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했던 부모가 생각납니다. 그들은 살해해야만 했던 이유를 이해했을까 갑자기 의문이 듭니다.
학교폭력의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학폭을 저지른 이유를 알면 용서할 수 있을지 갑자기 의문이 듭니다.
어떤 부모의 자녀를 감싸다가 결국 고소를 당한 특수교사는 합당한 지식이 없었을지 갑자기 의문이 듭니다
마스터충달
23/09/17 18:39
수정 아이콘
모든 일을 이해하고 용서하자는 것에는 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노회찬
23/09/17 18:40
수정 아이콘
그럼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용서하기 위해 책을 읽으십니까? 진짜 순수하게 의문이 들어서요
마스터충달
23/09/17 18:46
수정 아이콘
이해하고 용서할 만한 일을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서죠. 말씀하신 3가지 예시는, 저로서는 이해하고 용서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노회찬
23/09/17 18:47
수정 아이콘
모든 것은 이해하면 용서할 수 있다. 그러려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지식을 쌓아야만 한다. ..이 문장과 배치되는 말씀을 하시는거 같은데요?
마스터충달
23/09/17 18:49
수정 아이콘
어떤 부분에서요?
노회찬
23/09/17 18:50
수정 아이콘
이건 제가 오독했군요. 제 잘못입니다
노회찬
23/09/17 18:55
수정 아이콘
그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모든 지식을 갖추었다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것도 순수하게 궁금해지네요
마스터충달
23/09/17 19:09
수정 아이콘
제가 오해하기 쉽게 글을 쓴 것 같네요. 교권 추락 사태에 있어서 교사들의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여 문제가 벌어졌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저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니, 아는 것도 없이 상대를 대했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쳤을 것이라는 점까지 생각이 닿았습니다.

저는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에도 선이 있고, 그 선을 넘어가면 결국 법이라는 강제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법(아동복지법 제17조)에 문제가 있다면 법을 고쳐야 하고요.

다만 이런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한다면,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많은 일들은 이해하고 용서할 만한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좀 더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겠죠.

아마 '모든 것은 이해하면 용서할 수 있다.' 이 말을 한 사람도 그런 맥락에서 말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면 그건 신이나 신의 아들 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노회찬
23/09/17 19:48
수정 아이콘
저는 진짜 순수하게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죠.

한편으로 생각하길, Ai가 있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해당 ai를 판사로 삼아 재판을 하면 과연 살인범에게 이해와 용서를 바탕으로 관대한 판결을 내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그렇다면 인간은 신을 창조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봤고요.

간만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회복탄력성 글 때부터 당신의 글을 좋아했어요
마스터충달
23/09/17 19:57
수정 아이콘
알 수 없는 영역의 일이지만, 만약 인간이라면 측은지심이 본성이라 생각하기에 너그러운 판결이 나올 것 같고, AI라면 인간이 만들었기에 역시나 인간의 경향을 따를 것 같습니다.

제 글을 오래도록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흐
김건희
23/09/17 20:25
수정 아이콘
사람은 배움을 멈추는 순간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효율적인 방법중에 하나가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생명 연장의 수단 중에 하나 라고 저 혼자서 생각 중입니다.
23/09/17 21:48
수정 아이콘
템플 그랜딘이 쓴 책이군요.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23/09/17 22:26
수정 아이콘
소설을 읽는 목적 중 하나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라고 하죠. 그렇지 않은 글도 사실 없겠지만, 어쨌든 굉장히 교양스러운 목적입니다. 물론 그러다 보면 전문 지식은 전문서를 보면 되고, 재미는 스마트폰을 보면 되므로, 사람들이 왜 점차 교양소설을 안 읽는지 알게 되기도 합니다만.
고오스
23/09/18 12:50
수정 아이콘
저는 어디선가 이런 문구를 본 후 남이 독서를 왜 해야 할때 이 말을 들려주죠

책은 특정 분야에서 최소 수만시간 이상 종사한 사람이 수백 시간 이상의 노력을 들여서 수백 페이지로 정리한 전문가의 일생이 요약정리된 것인데


네가 책을 읽으면 어떤 사람의 일생의 노하우를 몇 시간만에 습득할 수 있다

이 얘기를 듣는순간 무척 공감이 갔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856 [일반] 기껏 지은 제목이 엉망진창 근황이라니 [2] 여기에텍스트입력9836 23/09/19 9836 0
99855 [일반] [웹소설] 추구만리행 - 역사무협의 가능성 [19] meson8855 23/09/19 8855 18
99854 [정치] 유인촌 문체부 '셧다운제' 재점화하나...긴장하는 게임업계 [31] 기찻길12758 23/09/18 12758 0
99853 [일반] 박터지는 역대급(?) 4분기 애니 기대작들.... [52] 웃어른공격12508 23/09/18 12508 3
99852 [일반] 연차기념 요즘 본 만화 이야기들입니다 [19] Cand8761 23/09/18 8761 1
99851 [정치] 최강욱의 의원직 상실 및 김명수 사법부의 재판지연 [131] 아이스베어17176 23/09/18 17176 0
99850 [일반] 책 나눔 이벤트 결과 발표! [22] Fig.16476 23/09/18 6476 16
99849 [일반] 뉴진스 'Cool With You' 커버 댄스를 촬영해 보았습니다. :) [8] 메존일각8092 23/09/17 8092 21
99848 [일반] ‘순교 177주년’ 바티칸에 김대건 신부 성상 세워져.gisa [41] VictoryFood10965 23/09/17 10965 13
99847 [일반] 사적 제재와 사적 자치 [39] 상록일기10731 23/09/17 10731 10
99846 [정치] 미리보는 총선 모의고사,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후보 지지도 [43] 아롱이다롱이12893 23/09/17 12893 0
99845 [일반] 내가 책을 읽는 조금은 특별한 이유 [17] 마스터충달8518 23/09/17 8518 12
99844 [일반] 참교육 당한 웹툰 참교육 + 인종차별(특히 흑인 대상)이 매우 강한 터부가 된 이유 [253] 동훈25250 23/09/17 25250 8
99843 [일반] [팝송] 리타 오라 새 앨범 "You & I" [2] 김치찌개5745 23/09/17 5745 1
99842 [정치] 15년차 조선업 용접공 연봉 (feat. 미국, 호주 연봉 비교) [59] 간옹손건미축16353 23/09/16 16353 0
99841 [일반] 폴란드의 기다란 농토 [19] singularian13537 23/09/16 13537 26
99840 [일반] 요즘 본 애니 감상입니다. [50] 그때가언제라도10830 23/09/16 10830 2
99839 [일반] [2023 여름] 스포츠팬의 해외원정기 [3] 오징어개임7068 23/09/16 7068 5
99838 [일반] 저의 달리기 등급을 측정해 보았습니다. [9] 우주전쟁7334 23/09/16 7334 4
99837 [일반] 이번 공항테러 예고범은 어떻게 붙잡았을까? [27] phenomena9797 23/09/16 9797 4
99835 [일반] [에세이] 새 학기가 되어서 써보는 글 (몸과 마음이 한 곳에) [2] 두괴즐6037 23/09/16 6037 4
99834 [일반] 로또 아쉬운 당첨 후기.jpg [34] insane13148 23/09/16 13148 20
99832 [일반] 문구점 근무중 겪은 빌런 올림픽 "동메달"편 [66] Croove16392 23/09/16 16392 2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