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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4/28 09:29:31
Name 유리별
Subject 봄의 끝자락입니다.
  엊그제 꽃잎담은 비가 내려 하루종일 꽃비구경하며 안타까워했다는게 믿을 수 없는 날씨입니다.
비처럼 떨어지는 꽃잎이 아까워 한참을 비를 원망하다가도, 그래, 니가있어 다음 꽃도 피겠구나 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수수꽃다리며 철쭉이 가득 피었습니다. 이제 봄도 막바지입니다. 저 꽃들 떨어지고 나면 여름이겠죠. 이미 벚꽃잎이 다 피어 야들야들하니 소복해졌고, 내리쬐는 햇살도 생각보다 따끈한 것이 이미 여름햇살다운데, 그나마 바람이 차서 봄다운 날씨가 되었습니다. 갈수록 봄이 짧아진다고 안타까워했더니 바람도 어떻게든 봄자락을 잡고 버텨주려나봅니다. 오늘은 날이 더 따뜻할 거라 하니 이제 정말 여름이 코앞에 왔습니다. 5월부터 초여름 날씨라죠.. 올해는.
  아쉽습니다. 눈깜짝할 새 벌써 봄이 다 가버리다니요.


  지난번에 이별했다던 오라버니는 그 후 며칠동안 앓아누우셨습니다. 나이서른넘어 아버지께서 놓아주시는 링겔맞으며 종일  누워있었다고, 살면서 위가 아파보긴 처음이라며 위염과 위경련이란 이런것이었냐고 칭얼댑니다. 스트레스성 위염을 달고살아 때되면 한번씩 뒤집어지는 위를 가진 저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이별해서 아프다며 징징거리는 모습은, 언제봐도 안타깝긴 하지만 그닥 이뻐보이지도 않습니다. 이별하면 아픈것이 당연합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 쏟았던 사람과 헤어지는데 당연히 아프지요. 흉이 져서 평생 아플지도 모를 일입니다. 큰 수술을 하거나 크게 다쳐보신 분들은 아실겁니다. 비오거나 날이 좋지 않거나 피곤하면 찾아오는 욱씬거리는 그 은근한 아픔을. 마음에 남은 상처도 흉이되어 비가 오거나, 술을 마셨거나, 밤늦은 고요한 시간에 한번씩 욱씬대겠죠. 모두가 다 그러니까 세상에 이별노래가 넘쳐나고, 이별했다 하면 모두 아프고 쓰라린 눈으로 쳐다보며 위로하는 것이겠지만 역시 그닥 이뻐보이지는 않습니다. 누가 다쳐 피나는 모습만 봐도 제가 다친듯 아프고 저려와 당장 구급약을 찾아대는 저는, 그 칭얼거림이 반갑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별이 힘들긴 힘든 것인가 봅니다. 저는 살이 눈에띄게 빠졌었습니다. 마치 아픈사람인냥 2주새에 살이 저절로 쭉 빠져서 빠지는 김에 그냥 빠져버려라 하고 놔두었더니 너무 급격히 체중이 줄더군요. 그래도 뭐 언젠가 멈추겠지 했더니 정말 어느샌가 멈추긴 멈춰주었습니다. 몸무게가 빠지거나 말거나 실은 그런 것따위 아무렇지도 않고 신경쓰고 싶지도 않을 마음이었습니다. 오라버니는 평생 배앓이한번 한 적 없다더니 처음으로 위경련과 위염을 얻어 앓아 누우셨었죠.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이별하신 어떤 분도, 불면증에 거식증까지 찾아와 고생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살 많이 빠졌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분은 정말..... 위험해보일만큼 단기간에 심하게 살이 빠지신 상태였습니다. 피곤해보이는 얼굴에 푸석한 피부.. 손끝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커피잔을 들어올리는 게 힘겨워 보일 정도였습니다.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지만 그 속이 어떠할 지 짐작이 가지 않을 수 없더군요. 어디 징징거릴 곳도 없는데다 징징거리실 분도 아니라는 걸 알아, 혼자 묵묵히 감당하고 계시는 그 분 앞에서, 역시나 아프다며 징징거리던 오라버니는 이뻐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나이도 훨씬 많으면서, 참 마음은 아이처럼 어려보입니다.

  실은 그 오라버니 마음 속에는 오래 전부터 한 아가씨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처음 본 순간 가슴한가운데 쏙 들어와 앉은 그 아가씨는 눈에 안보이면 찾게 되고 눈에 보이면 이쁘고 귀여워 한없이 잘해주게 되었습니다. 종일 그 아가씨 이야기만 떠들어 공주님께 야단도 맞았었는데, 어느 순간 공주님도 그 아가씨 이야기를 하건 말건 포기하게 될 만큼 자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아파보이고 여려보여 자꾸만 마음이 간다했습니다. 길을 걷다 공주님께 어울리는 귀걸이가 있어 손에 들고나면, 곁에 그 아가씨의 귀에 걸어주고픈 귀걸이도 하나 보이곤 했다고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한 가슴으로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지는.

  적어도 저는 안될 것 같습니다. 한번 사랑을 시작하면 제 삶을 통째로 쏟아붓고도 모자라 세상을 다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데, 그걸 두 사람에게 나눠 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그 오라버니는 조금 달랐나봅니다. 끊임없이 그 아가씨를 기다리고 아가씨에게 마음을 비추고 아가씨를 챙겼습니다. 오라버니는 단 한번도 아가씨가 세컨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만들 생각도 없다고 했지만 그 아가씨는 한번도 자신이 퍼스트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라버니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가씨는 그 오라버니의 거대하고 높고 탄탄한 공주님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다 줄 생각이 아니면서 왜 자신에게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아가씨는 힘겨워했습니다. 오라버니는 아가씨에게 다 주고 있는데 왜 그렇게 힘겨워하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습니다. 공주님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나쁘게 말해 불륜이고 좋게 말해 로맨스냐 했더니 오라버니 목소리가 험악해집니다. 하긴 오라버니가 그러면서 공주님께 소홀해지기라도 했다면 그건 불륜이라 타박했겠지만 공주님께 소홀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저도 참 난감했습니다.

  결국 이별 후 아프다 징징거리던 오라버니는 아가씨에게 무한 사랑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이별은 너를 위한 것이라며, 자신을 받아달라고 끊임없이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그게 버거웠나봅니다. 자신이 헤어지라 해서 헤어진 것도 아닐텐데, 마치 그런 것처럼 말하는 오라버니의 말에 아가씨는 자꾸만 상처받았습니다. 이미 자신이 여자친구인 냥 바라는 오라버니의 앞에서 아가씨는, 전혀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데 사귀는 것도 아니면서 바라는 오라버니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마치 도피처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 놓고, 받아줄거냐 확인받아 놓고 헤어진 오라버니의 모습에 상처받았습니다. 아가씨는 오라버니가 다가갈 수록 한걸음씩 물러섰고, 점점 마음을 닫았습니다. 그 모습에 오라버니는 화를 버럭버럭 냈습니다. 이미 오라버니의 머릿속에 이별이, 그 아가씨에게 모든 것을 다 주기 위한 것이었음이 가득해보였습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어린아이처럼 어린 마음에 화도 난 제가 이별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것이며,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아프고 힘들고 괴로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했기 때문에 그 아가씨가 상처받고 물러난 것이라고 조근조근 말해주었더니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제서야 한걸음 물러났습니다. 이미 아가씨는 상처를 많이 입은 상태였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라버니가 다시 공주님께 돌아간 것인지, 혹은 어른처럼 혼자서 이별을 묵묵히 감내중인지는. 아무래도 9년간 첫사랑과 연애하며 한번도 이별을 겪어보지 않아, 나이는 많아도 이별에 대한 마음은 아이같이 어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이먹어 늦게 간 군대마냥 약간은 부럽기도 하지만 많이 안타까운 상태같이 느껴집니다. 이번 이별로 인해 오라버니의 마음도 조금은 자라겠지요. 그러고보면 공주님도 참 쿨하십니다. 오라버니가 이별하자는 폭탄선언을 하셨을 때는 절대안돼!!!하고 허락해주지 않으셨다던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그런 아픔도 겪어봐야 자랄 수 있는 걸지도 몰라. ' 하셨다니. 오라버니의 어린 마음을 보고 계셨을지도 모르죠. 그분은 무섭고도 대단하신 공주님이시니까요.


  라일락 향기가 바람타고 멀리멀리 퍼집니다. 라일락은 실은 우리나라꽃이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마치 수수를 묶어놓은 모양이라 해서 수수꽃다리라 불리우던 꽃을, 유럽의 선교사가 향이 너무 좋다며 데려가 개량해서 역수입을 한 것이 라일락입니다. 그래서 라일락의 다른 이름이 양수수꽃다리인데, 수수꽃다리보다 약간 꽃이 촘촘하게 나고 향이 조금 더 진하긴 하지만 일반인은 거의 구별하기 힘들다 합니다. 이름 참 예쁘죠. 수수꽃다리. 라일락이라는 이름도요. 저는 이 수수꽃다리를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봄의 끝자락에 가장 예쁘고 가장 향이 진하게 나는 꽃입니다. 물론 다른 봄꽃 모두를 사랑하지만. 그런데.... 쓰다보니, 라일락 하니까 어느 교육방송 진행하시는 분이 자꾸 떠오르는... 이게 뭐지. 왜지. 호..혼란이;;;

  연보랏빛 수수꽃다리는 곁에 가기만 해도 은은하게 향이 나서 딱 알아챌 수 있습니다. 봄의 끝자락, 수수꽃다리 향 한번씩 음향하시고 아픈 가슴에 살짝 연고라도 바르심이 어떠실까요.





긴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저는 제 글이 긴 줄 몰랐는데 다 쓰고 보면 늘 엄청 기네요..
참, 호주에서 가을맞이 하고 계신 분은 _ 수수꽃다리 향이라도 떠올려보심이.!!
한국의 봄은 참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전 한번도 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한국의 봄을 사랑합니다.




- 유리별 드림.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5-0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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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m Chomsky
12/04/28 10:57
수정 아이콘
아아아아아아아 결국 봄.
오라버니님에게 (한동안) 겨울이, 유리별님과 호주에 계신 분에게는 함께 맞을 수 있는 봄이 오길 바랍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m]
감모여재
12/04/28 11:00
수정 아이콘
다른 의미에서 남얘기 같지가 않네요.
봄이 끝나야 다시 여름이 오고 가을이 지나 겨울을 거쳐 봄이 돌아오듯
유리별님에게도 봄이 다시 오겠죠.

저한테는 안 올거에요. 아아아아
Pavlyuchenko
12/04/28 11:58
수정 아이콘
작년에 비슷한 일을 겪어서 그런지 오라버니 분의 마음이 이해가 가네요. 그 당시에도 지금도 제 자신의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요.

이번 봄은 책상 앞에만 있어서 날짜도 계절도 못느꼈는데 봄이 가는군요. 제 봄날은 작년에 지나갔지만요.^^ [m]
12/04/28 12:04
수정 아이콘
어제 삼청동을 걷다가 라일락향기를 맡았는데 이 글을 보며 라일락얘기가 나오니 반갑네요
'봄의 끝자락, 수수꽃다리 향 한번씩 음향하시고 아픈 가슴에 살짝 연고라도 바르심이 어떠실까요.'
이 문장이 참 좋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2/04/28 17:4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글 정말 잘쓰시네요
12/04/28 18:41
수정 아이콘
우리가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사랑이라는 것은 그 존재 하나로 벅차고 고귀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를 두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그것을 진실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사랑의 반댓말을 욕심이라 부릅니다.. 내 마음 안에 욕심이 차면 찰수록 사랑을 넣을 공간은 부족해 집니다..

안타깝지만 그 오라버니는 그에 맞는 댓가를 치루고 계신 게 아닌가 합니다..

음.. 쓰다 보니 너무 진지해진 것 같군요..

유리별 님.. 우리가 눈과 피부로 느끼는 봄은 이제 저물어 가지만 진정한 봄은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늘 따뜻한 봄 속에서 지내시길 바랍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스노우볼
12/04/28 19:17
수정 아이콘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유리별님에게 또 지금 사랑때문에 힘들어 하시는 모든분들에게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길 기도하겠습니다.
항상 행복하시고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12/04/28 19:57
수정 아이콘
이별을 받아들이기 싫었으나 그러나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마치 봄 다음이 여름이고, 그놈 다음에는 가을 겨울이 따라오는 것처럼
누군가를 만난다는건 꼭 그 사람과 헤어질거라는 약속을 해버리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여야한다면요. 정말 그렇다면 저는 지금 잘하고 있는건지
우리의 이별은 어떠한지, 하나였던 우리가 이제는 서로가 없는 우리가 됐는데, 그게 둘씩이나 남겨졌는데 세상은 아무쪼록 멀쩡한지.
궁금하고 알고 싶은게 참 많은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멍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인생이라는 거 아무래도 저보다는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멀리
보고 알며 종종은 그 길을 알려주기도 하고, 아주 나중이 되어서야 그 때 왜 그랬느냐고 말해줄 수 있는 마음 아팠던 맞선임의 꾸지람처럼
그냥...잘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왜 이별마저 잘하려고 노력해야하는지, 그럼 잘하는게 뭔지, 왜 나는 아픈지, 그 사람은 왜 그리 아픈지.
뭐가 뭔지......아무튼 팀OP 화이팅입니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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