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을 오래 했으면 좋겠어
["그러길래 검사 좀 제때 제때 받았어야지!"]
병원 출입문을 나서며 나는 괜한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동네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으면 나한테 바로 얘기를 했어야지! 왜 말을 안 해?"]
["그러게.. 진작 너한테 얘기할걸.."]
엄마는 죄인처럼 미안해했다. 엄마는 환자였지 죄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의 병은 아들 앞에 엄마를 죄인처럼 초라하게 만들었다. 나는 엄마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사실은 그동안 안과검사를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잘 받고 있는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내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그냥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게 다 속상하고 미웠다. 일원역과 삼성서울병원을 잇는 셔틀버스 정류장에 서서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쌀쌀한 겨울, 병원 정류장 앞에서 엄마랑 나 단둘이 이 세상에 덜렁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탑승을 안내하는 셔틀버스 기사님은 추운 날씨에도 녹색 재킷만을 걸친 정장차림으로 친절하고 깍듯하게 탑승안내를 하고 있었다. 나는 몸에 밴 듯한 그의 직업적인 친절에도 괜히 마음이 약해지며 울컥해졌다. 버스에 탑승해 묵묵히 차창을 바라보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참 만에 말을 걸었다.
["암튼.. 이제라도 검사받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이야.. 큰일 없을 거야. 괜찮아."]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없이 눈만 깜빡였다. 그 눈이,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나는 대답 없는 엄마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주름진 손이 작고, 까칠했다. '큰일 없을 거야. 괜찮아.' 나는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엄마의 녹내장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해 말 겨울이었다. 엄마는 11월 초순에 동네안과에서 진단받은 내용을 한 달 반이 지나서야 뒤늦게 털어놓았다. 마치 눈 다래끼라도 걸린 사람처럼 지나가는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녹내장..? 잘 모르는 병이었지만 얼핏 들은 한 가지 사실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실명에 이를 수 있는 불치병'. TV에서 하던 건강 프로그램에서 지나치듯 그렇게 들었던 것 같다.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백내장과는 다르게 녹내장은 완치가 불가능한 질병이라고 했다. 심해지면 실명에도 이를 수도 있다고 했던 나이 든 의학박사의 설명만이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랑은, 그리고 우리 집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질병이라 생각하고 한 귀로 흘린 채 채널을 돌렸다. 나와는 아주 먼 얘기였었다. 그런데 고혈압에 당뇨만으로도 벅찬 우리 엄마에게 녹내장이라니. 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에라도 삿대질에 온갖 욕이란 욕은 전부 다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정말 이래도 되는 거냐고. 눈을 마주본 채로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어쨌든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했다. 우선 큰 병원을 자주 다녀본 친구 원준이와 상의했다. 원준이는 다른 것보다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얼른 받아보는 게 급선무라고 했다. 나는 고민 끝에 직접 삼성서울병원에 연락을 했다. 다행히 진료일이 금방 잡혔다. 그렇게 직장에 하루 연가를 내고 엄마와 단둘이 삼성서울병원 별관에 도착했다. 병원은 마치 대학 캠퍼스처럼 커다랬다. 이렇게 큰 병원에 와보긴 난생 처음이라 괜히 위축되는 기분도 들고 긴장도 됐다. 의학드라마에서 볼법한 풍채 좋은 인상의 나이든 담당의사는 낯선 기기로 엄마의 두 눈을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펴봤다.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한참 후 그는 건조한 말투로 짧게 말했다. 오른쪽 눈은 녹내장이 확실하고 왼쪽도 약간 의심이 된다고. 정확한 건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짧은 두 마디에, 병원 진료실 천장이 내게로 무너져 내렸다. 검사결과가 나온 후에 자세히 얘기하자며,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의사는 몸을 일으켰다. 마치 얼른 손님 테이블을 순환시켜야 이윤이 나는 소문난 음식점 주인처럼 담당의는 바쁘게 몸을 움직여 옆 실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불렀다. "저, 선생님!" 의사가 뒤돌아봤다.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대답을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 최대한 깍듯하고 공손하게 물었다. "저기 혹시.. 오른쪽은 초기인건가요, 아니면.." 내 눈에 애처로운 희망이 담겼다. 담당의가 대답했다.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초기는 아닌 것 같네요." 간결한 그의 말은 항상 두 마디를 넘지 않았다. 의사는 곧바로 돌아섰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검사일은 2주 뒤로 잡혔다. 진료비를 계산하고 관련 서류를 받아들고 병원 문을 나서면서 나는 엄마에게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왜 안과검사를 제때 제때 받지 않았느냐고. 왜 진작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냐고. 그렇게 내뱉는 신경질과 짜증의 화살은 허공을 돌아 그동안 엄마의 병에 무심했던 내 가슴팍에 와 꽂혔다.
2주 후에 진행된 정밀검사는 생각만큼 복잡하진 않았다. 엄마는 1번부터 7번까지 표지판이 적힌 검사실의 이 방 저 방을 드나들며 성실히 검사에 임했다. 검사를 마치고 원무과에 가보니 검사비가 꽤 많이 청구돼있었다. 비용을 카드로 결제하면서 나는 내가 취준생이 아닌, 직장인이란 사실에 감사했다. 그동안 전공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힘들 때도 많았는데, 이 순간만큼은 박봉이나마 돈을 버는 직장인인 게 너무나 다행스럽고, 고맙고 감사했다. 다음날 다시 방문한 병원에서 담당의는 검사결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왼쪽 눈은 정상이고, 오른쪽 눈은 아직 초기이다. 안약을 처방해줄 테니 3개월 후에 다시 경과를 보자. 우려하던 여러 상황 중에서 가장 다행스런 결과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대상모를 누군가를 향해 나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고개를 숙였다. 진료를 마친 후 일원역 승강장 나무의자에 앉아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가만히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치?' 내 마음이 손바닥을 타고 엄마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엄마는 그제서야 속에 있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긴데.. 그때 처음 너랑 삼성병원 갔다 온 날은 무섭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더라. 만약에 니가 어디 멀리 떨어져 살기라도 했으면 니 아버지랑 나는 둘 다 시골사람들이라 큰 병원 가서 비싼 돈 주고 검사받을 생각도 안하고 미련하게 병을 계속 키웠을 텐데. 그래도 우리 막내아들이 어디 안가고 이렇게 옆에 있어줘서 덕분에 이렇게 바로 큰 병원 가서 검사도 빨리 받고 하는구나.. 싶은 마음에 다행이고 고맙고.."]
평소답지 않게 살짝 떨리는 듯한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괜시리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깟 검사가 뭐라고. 나는 대답 대신 엄마의 작고 까칠한 손을 힘주어 잡았다. 뭐라도 말을 해주고 싶은데, 뭐라 해야 할지 막상 할 말이 잘 떠오르질 않았다. 대답 없이 한참을 깜빡이던 내 눈이,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글썽이고 있었다. 시큰해진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때 문득 엄마의 카톡이 떠올랐다.
엄마는 카톡을 좋아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 이후부터 카톡의 재미에 푹 빠진 엄마는 주변 친구들과 우리 가족들에게 매일 같이 좋은 글귀와 풍경 사진, 영상 등을 보내주곤 했다. 마치 엄마에겐 이것이 커다란 삶의 낙이자 하루를 열고 마무리하는 나름의 소명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사실 엄마가 보내는 사진이나 영상, 글귀들은 내가 보기에 대체로 촌스럽고 뻔한 그런 구닥다리 내용들이 많았다. 그래서 항상 답장 없이 읽고 넘기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때로는 좀 귀찮기도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매일 매일 꾸준히 카톡을 보내왔고 저녁에도 퇴근해보면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모습을 발견하기 쉬웠다. 그렇게 어느새 엄마에겐 카톡이 소중한 취미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일상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껏 그걸 몰랐다. 엄마의 카톡 같은 건 그냥 바쁘다는 이유로 읽고 지워버리고 가볍게 무시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그때서야 엄마의 카톡이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엄마에게 보내줄 예쁜 풍경 사진이나 좋은 글귀, 영상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사진이 오면 나도 답장으로 좋은 콘텐츠들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니 오히려 엄마는 내가 보내주는 콘텐츠들의 수준이 낮다며 내게 면박 아닌 면박을 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오기가 생겨, 두고 보라는 듯 더 눈에 불을 켜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러고 나선 한 번에 여러 개를 주르륵 연속전송하면 마치 개선장군의 행렬을 알리는 승전나팔처럼, 거실의 엄마폰에서 까똑까똑까똑 소리가 멈출 줄을 몰랐다. 이상하게 그 순간에 들리는 그 카톡 알림 소리가 그렇게 뿌듯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으로 내가 한 일은 녹내장 관련 카페에 가입하는 일이었다. 나는 녹내장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카페에서 치료 관련 글들도 정독하고 녹내장에 좋다는 아로니아, 결명자, 혈액순환개선제 등도 구입했다. 이제와 내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이 정도밖엔 없었다. 평소엔 부모님과의 외출도 무척 꺼려하고 귀찮아하던 나였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사치였다. 계절은 어느새 봄이었다. 벚꽃이 절정이던 4월의 어느 주말, 꽃구경에 관심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랑 단둘이 가까운 벚꽃축제를 찾았다.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듬직한 일일 애인이자 즉석 사진사였다. 엄마의 요구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까다로웠다.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한껏 정답게 포즈를 취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엄마가 카톡을 오래 했으면 좋겠다고. 사진을 찍으며 엄마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엄마. 나 다른 건 모르겠구.. 나는 엄마가 카톡을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어. 다른 거 안 바라니까. 나한테 뻔한 사진들, 엉뚱한 영상들 매일같이 보내도 좋고 이제는 그 카톡 안 씹고 열심히 답장도 해주고 좋은 사진, 영상들 있으면 열심히 찾아서 보내줄 테니까. 지금 좋아하는 그 카톡, 오래오래 더 많이 했으면 좋겠어 엄마. 그 좋아하는 영화도 극장가서 나랑 앞으로 더 자주 보자.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 그렇게 평생 지겹도록 할 수 있게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다 괜찮어, 엄마. 무서워하지 마.']
내가 찍은 사진이 맘에 안 드는지 엄마는 연신 투덜대듯 타박하고 있었다. 왜 다리까지 나오게 찍냐. 뒤에 배경이 가렸지 않냐. 사진이 너무 어두운 거 아니냐. 방금 전의 다짐은 까맣게 잊은 채로 나는 지지 않고 맞받았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잘 찍냐. 엄마가 몰라서 그러는데 실물보다 훨씬 잘 나온 거다. 오늘 날씨 흐린 거 안보이냐. 나중에 보정하면 된다. 벚꽃비를 맞으면서, 그렇게 우린 서로 옥신각신했다. "아, 알았어. 알겠으니까 다시 거기 서봐." 나는 못 이긴 척 다시 스마트폰 카메라를 켰다. '그래, 뭐라도 상관없다.' 나는 생각했다. 때로는 까탈스런 막내아들이든, 든든한 맏이든, 살가운 딸이든, 멋진 애인이든 어떤 역할이라도 다 괜찮았다. 그렇게 엄마의 카톡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주고 싶었다.
찰칵!
'어라?'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사진은 또 제멋대로 찍히고 있었다. "이야~ 예술이다! 어? 엄마 저기도 가보자!" 선수를 치듯 그렇게 큰소리로 둘러대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엄마를 능청스럽게 돌려세웠다. 한쪽에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외침이, 다른 한쪽에선 무명가수의 구성진 트로트 노래가 벚꽃 사이로 뒤섞여 울려 퍼지는 어느 봄날의 벚꽃축제였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6-22 15:0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