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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6/09/20 20:03:38
Name 퉤퉤우엑우엑
Subject [소설] 殲 - 11.모순
무언가가 코를 간지럽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손을 휘저으며 눈을 떴다.
아무도 없다. 그저 먼지라든가 벌레가 코를 스치고 지나갔겠지.

그런 것보다, 아무래도 잠들어 버린 것 같은데.
절대 이런 상태로 잠들지 않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몸이 거부한 모양이다.
공원에 있는 벤치에 누워서 잠든다는 건 내 나이를 보았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불량사유가 되었을거다.

멀리 있는 높은 시계탑을 보았다. 4시 40분 정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면 대충 1시간 반 가량은 잤다는 거네. 1시간 반 동안 욕을 먹거나 놀림을 받았을거고.

태일이 정한 저녁이라는 약속시간은 역시 맘에 들지 않는다.
저녁이라는 게 정확하게 몇시부터 시작한다고 기준을 정할 수가 없다.
대충 일몰 후부터라고 생각하고 하늘을 보았다가, 하늘에 낀 무수한 구름들이 태양을 가리고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름대로, 5시에서 6시 사이 쯤이라고 생각했다. 별로 많이 남은 시간도 아니니 그냥 걸으며 기다리고 있기 위해 벤치에서 내려왔다.
내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쪽에서 두 여고생이 속삭이고는 웃으며 지나간다.
만약 내가 저기 있다면 당연히 공원 벤치에서 자고 있는 어떤 학생에 대해서 비웃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모습을 다시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일어서서 공원 중앙의 분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사실, 공원에 사람이 많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람이 죽은지 이틀도 되지 않았으니까 지나다닐 수 있다고 해도 꺼림칙한 장소일 수밖에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왜인지 사람을 죽여놓고도 아직 이러고 있는 내가 무섭다는 느낌이 지나갔다.
그 일이 나에게 엄청난 일로 다가오고 그를 고민하고 있지 않은 이유를 나도 알 수가 없다.
분명히, 큰 죄책감을 느끼고 방 안에 틀어박혀 술이나 마시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할텐데.
'술은 나이에 맞지 않으니까 그냥 머리를 감싸쥐고 있어야 한다고 해두자' 라고 생각이 들어버렸다.
또, 그렇게 생각한 것에 대해 자신이 싫어졌다. 이건 거의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수준이 아닌가.


무한히 물고 늘어지던 생각을 쓸데 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러는 사이 주변은 좀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어둠이 조금씩 조금씩 짙어질수록 인적은 드물어져 갔다.
사건이 밤에 일어난 일이니까 당연했다. 이제 내가 앉아 있는 분수대 근처에는 아직 걷고 있는 한 부부와,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세명의 아주머니 뿐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는 교복이 없으면 마치 조기축구회처럼 보이는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벌써 몇번째 시계를 보았다. 아직 6시가 조금 안된 시각이다. 이렇게 시간이 늦게 가는 건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일어나서(이것 역시 몇번째인지 모르겠다) 천천히 걸었다.
분수대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눈은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하늘을 보고 고정했다.
별 이유없이 기지개를 켜고 심호흡을 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숨이 거친 듯, 팔까지 위아래로 요동친다. 몸부림 치려다가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느...늦었...죠..."

그 사람이 마지막 유언을 남기듯 짧게 말하고는 내 등에 기대어버린다.
어깨에 있던 손을 잡고, 뒤를 돌았다. 뛰어온 모양이지만 그걸로는 이 지각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정확히 시간을 정하라고 했잖아. 3시부터 기다렸다고."

반정도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뭐, 3시부터 기다린 게 맞긴 맞잖아.

"저녁이라고 했잖아요. 3시부터 기다리다니요."
"...뻔뻔하다고 생각안해?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1시간은 늦은거야."
"네. 미안해요."

어느새 그 가쁘던 숨을 회복했는지 말이 술술 나온다. 아마 힘들었던 척을 했던 게 아닐까.
나도 그로기 상태인 태일과 흔쾌히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서, 그리 나쁘지는 않은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뭔가, 평소보다 말이 짧아졌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됐고, 보여준다는 것부터 보여줘."
"그러려고 했어요."

태일은 내가 걸어 나왔던 분수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좀 더 안쪽으로 가서 얘기하죠."

뒤돌아 선채로 말하고는 말없이 걷는 태일을 따라, 진행이 좀 빠르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조용히 따라 걸어갔다.




분수대에 도착하자 태일이 갑자기 멈추어 서고 나를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도 모두 가버린 모양이다. 귓가에 들리는 건 귀뚜라미 소리 정도.

태일은 날 바라보는 채로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다.
뭔가 우물쭈물 대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둘 중 어느것이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말 좀 해봐."

내 말을 듣고 정신이 든 사람처럼─생각을 정리했거나─자세를 조금 고쳐 잡고는 다시 날 뚫어지게 바라본다.

"한가지 물어볼게요."
"뭘?"

이유없이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치 어떤 대회라도 나가는 것처럼 몸이, 마음이 긴장했다.

"선배가 요즘에 자주 쓰러지는 이유 알고 있어요?"
"......어...?"

이상한 질문에, 당황했다.
입을 말은 나오지 않은 채로 '아...' 하고는 벌렸다. 나에 비해, 태일의 표정은 너무나 단호했다.
문득, 그저께 밤에 공원에 있던 태일과 닮은 사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어...그건 대체 왜..."
"그냥 대답해줘요. 알아요, 몰라요?"

내가 간신히 반문한 말을 끊고, 급한듯이,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냉정한 채로 태일이 말했다.

"당연히 모르지. 알 리가 없잖아?"

판단하고 말것도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역시, 그렇겠죠."

맥 빠지게도, 내가 이 대답을 생각했던 것 만큼 태일도 예상했다는 듯한 눈치였다.
역시 장난이었고, 역시 너무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 했던 거겠─

"하지만, 전 알고 있는걸요."
"어?"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아니, 무관심하다고 할까.
속으로 이런 진지한 상태에서 장난치다가, 무슨 이벤트 같은걸로 놀래켜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되물었다.

"알고 있다고? 왜? 그리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웃으며 말하려다가, 태일의 얼굴을 보고는 멈칫했다.
어떻게 보면 무서울 수도 있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날 증오하다시피 하는 것 같았다.

"이유는, 설명하자면 길겠죠. 하지만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저번에 선배가 했던 추측이 맞다고 대답할 수 있어요."

......?
무슨 추측을 의미하는지 생각했다. 당연히 알 수 있을리 없다.

"모르겠어요? 선배가 말했던, 그 총을 들고 있다고 한 사람이 바로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거라구요."

순간, 숨이 막혔다.

이내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장난이겠지...장난이겠지...' 를 되뇌이면서.
하지만, 태일과 닮은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다시 나타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무...무...무...슨...말이야...?"

최대한 냉정을 잃지 않으며 노력했지만, 몸은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온몸은 벌벌 떨리고 있었고, 입은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몸이 떨림에도, 전혀 춥지 않고, 오히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역시 멍청하군요. 아니면 엄청나게 똑똑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아아, 그러기엔 그쪽 몸 상태가 너무 떨리고 있긴 해요."

태일의 표정은 아직도 그대로 있다. 조금은 자신감에 찬 표정 같기도 하다.
뭐가 어떻게 된건지 전혀 모르겠다.
어째서 태일이 여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부터, 저 말의 의미가 뭔지도.

"하지만, 이제 곧 전자가 맞는 말이라는 걸 알아 낼테니까."

말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냐고 물으려 할 때, 태일이 먼저 말했다.

"결국 이 동네에 숨어 있다는 살인귀는 당신이었던 거죠.
그렇게 당황한 척하고 있지 말아요. 그게 당신에게 독이 될테니까."

똑똑히 보였다. 태일이 말을 끝마치고, 어디선가 나이프하나를 꺼내들었다.

"우선."

차가운 기운을 느낄 정도로─그 차가움을 살기로 느끼도록, 태일이 짧게 내뱉었다.
그리고 태일의 오른손에 있던 나이프는 내 다리 쪽으로 던져졌다.

──푸욱

왼쪽다리를 나이프에 찔리고 나서 직후의 잠시 동안은 통증이 없었다.
왜인지를 생각하려 했지만, 그보다 고통이 더 빨랐고 강하게 찾아왔다.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았다. 손으로 다리에 있는 나이프를 뽑으려 하자, 몇배의 고통이 느껴졌다.
결국 손으로 상처부위를 감싸주고만 있는 채로 태일을 바라보았을 때, 용서없이 두번째가 날아왔다.

──푸욱

이번엔 오른쪽 팔. 오른쪽 어깨의 조금 아랫부분에 나이프가 날아와 박혔다.

"으아아아아악!!"

참지 못하고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다리만을 다쳤을 때는 느끼지 못하는 고통이, 아니 그보다는 감각이 느껴졌다.
살기──.이대로 죽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나 보군요."

머리를 숙이고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보고 싶지만, 머리를 들어 올릴 만한 힘이 없다고 할까.
잠시 후에, 유일하게 보이는 그의 다리가 움직였다.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더 이상 참지 말고 빨리 나한테 덤벼들어요. 이렇게 가까이 있잖아요?"

그의 얼굴이 바닥에 비춰진 것도 아닌데, 날 조롱하는 듯한 표정과 시선이 그려졌다.
분명 조금 전만해도 즐겁게 보았던 태일이라는 후배가 이런 상황에서 내 앞에 서 있다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당연히 그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한가지,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만큼은 알고 싶었다.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는 무언가의 의무가 느껴진 듯 했다.

"우습군요. 역시 그런 힘은 당연히 남아있지 않은 거겠죠."
"그......"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음 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아니, 조금만 더 하면 말할 수 있어. 어떻게 이렇게 된건지 물어 봐야만 한다.

"어...어떻...게..."

숨이 가쁘다. 말을 하는 것이 너무 버겁다.

"나한테 이럴 수 있냐구요?"
"어...어떻...게..."

태일이 내가 하는 말을 잘못 생각하고 있어.
빨리, 죽더라도 물어보고 죽어야(아니)─해...

"......왜......이러.....는.....거....지...."

다리와 팔의 통증이 점차 심해지면서 더불어 정신도 흐릿해지고 있다.
더 이상은 아무런 행동도 못할 정도의 상태에서, 간신히 말을 꺼냈다.

"죽기 직전인데, 아직도 연기하는 건가요."

태일이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좋아요. 그렇게 듣고 싶다면 죽기 전에 한번 더 말해주도록하죠.
당신들이 우리와 다른 모두를 죽이려 하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들을 죽이는 겁니다. 어때요, 크게 깨닫기라도 했나요?"

또 다시 태일의 웃는 얼굴이(썩 기분 좋은 미소는 아니었다) 그려졌다.

"죽이려 하는 자를 죽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날 미워하거나 할 이유도 없겠죠? 물론, 당신은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만든 상대로서 날 미워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요. 겨우 당신에게 미움을 받는거라면 크게 괴롭지도 않으니까."

아직도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더 어려워 졌다. '내가 죽이려 하니까 날 죽인다' 고......? 그건 무슨......

"시간만 낭비했군요. 이렇게 쉬운 거였는데."

태일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뒤로 뻗어서, 뒷 주머니에 있던 백색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차가운 금속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것이 내 머리에 닿았을 때였다.

──철컥

내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으면 했던 감각으로도, 또 느낌으로도 차가움을 느꼈다.

"이만, 작별입니다."

총을 아직 쏘기도 전에, 내 귓가에는 이미 총소리가 울린 것 같았다.


















p.s
12화로 완결이 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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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9/2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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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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