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달동안 우리를 즐겁게 해준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방금 종영했습니다.

저는 원래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기숙사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TV를 보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제게는 드라마보다 더 재밌는 여가활동도 많이 있거든요. (PGR이라든가, PGR이라든가...)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강추하는 것들만 간간이 찾아보는데, '뿌리깊은 나무'는 초반부터 참 많은 분들이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심지어 '너 아직도 뿌나 안 봐?'라는 식의 질문도 몇 번 받아봤습니다. 크크)
한석규느님이야 뭐 오래 전부터 본좌의 위치를 차지하고 계셨지만, 추노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장혁도 기대가 많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글을 좋아해서 항상 세종대왕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제 입장에서는, 결국 정주행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쳇...)

그렇게 12주가 흘렀고, 뿌나는 아마도 제 인생 가장 재밌는 드라마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올해의 연기대상은 바로 나다!'라는 강경한 의지를 표명해주고 계시는 세종 한석규느님의 연기도 너무나 훌륭했고
그 밖의 주연급/조연급 배우들의 연기도 꽤나 준수했다고 생각합니다. (추노-뿌나로 이어지는 장혁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흐흐)
무엇보다도, 팩트와 상상을 적절히 섞어주며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도록 우리를 몰아 붙이는 시나리오의 힘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상상이 너무 섞여서 사극의 또 다른 맛인 '고증'은 처음부터 안드로메다로 보낸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그러려니 합시다. 크크)

훈민정음 해례를 읽는 장면이야말로 오늘 마지막화의, 그리고 이 드라마의 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한 장면을 위해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겠죠. 드라마 전체를 정리해준, 또 드라마의 끝을 시작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선의 역사를 이끌어 온 한직골의 두 소년소녀가 이 장면에서 삶을 마무리하게 했던 것이, 보는 입장에서는 가슴아프지만 좋은 극적 장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두 소년소녀의 삶이 이 장면에서 끝났다기보다는 '완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때 생사조차 모르게 생이별하기도 했던 그들의 인생은 그렇게 한 자리에서 한 뜻을 이루면서 완성되었습니다. (+ 서문을 고어로 읽게 한 것도 좋은 장치였던 것 같습니다.)

정기준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많이 남습니다. '주상의 말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
과연 인간에 대한 세종의 기대와 신뢰는 성공했던 것일까요? 지금 한글은 한민족에게 축복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믿습니다. 비록 때로는 글자가 무책임하게 사용되는 경우들도 있고, 심지어 글자를 통해 사람을 상처 입히거나 집단적인 폭력을 가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쉬운 글자로서 누구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조차도 지식을 익히고 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허락해주고, 그리하여 한국이 뿌리부터 성숙한 나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글자가 아예 없는 부족이 한글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를 글로 표현하기 시작하는 날까지 왔으니, 세종의 꿈은 훌륭하게 달성되고 있다고 보아야겠죠.)
단, 이 선물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우리의 몫일 것입니다. 이 글자로 더욱더 성숙한 사회를 이루어나갈 것인지, 아니면 무책임하게 글자를 휘두를 것인지... 세종대왕께서 물으신다면, 정기준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질문에 자랑스럽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는 한국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세 달 동안 참 즐거웠습니다. 뿌리깊은 나무 제작진에게(특히 한석규느님에게), 그리고 PGR에서 함께 뿌리깊은 나무를 감상했던 여러 회원님들께(특히 눈시BB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포인트...
1. 무휼이 카르페이 다리를 그을 때만 해도 '이제 조선제일검에서 대륙제일검으로 거듭났구나'라고 생각했으나... 이제 편하게 잠드세요 무휼.ㅠㅠ
2. 아 윤평... 그는 좋은 양민학살자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양민학살만 하다 갑니다.
3. 한가놈이 한명회라니... 한가놈이 한명회라니... 밀본 진영에서 훈민정음의 정체를 알아챘던 게 한가놈이었죠. 그 때만 해도 '이런 똘마니가 그런 걸 알아내다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장면에서 그 부분에 대한 개연성이 생기네요. 대단합니다.
4. 장혁이 다음에 사극을 찍게 되면, 제발 그 때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주면 좋겠습니다. 추노에서도 그렇고 너무 불쌍해요.ㅠㅠ
5. 마지막화가 좀 아쉽다는 생각은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제작 시간이 부족했는지 예산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회차가 부족했는지... 하여튼 뒷맛이 매우 개운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도 막판에 거의 생방송 수준으로 제작이 이루어졌다고 들었는데, '나름' 괜찮은 마무리를 지어준 것 아닐까 하고 소심하게 쉴드를 쳐봅니다. (열악한 한국의 드라마 제작 환경은 마음 아프지만, 저는 오늘은 비판하지 않으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