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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6/06 19:37:21
Name Neanderthal
Subject [일반] 프로복싱이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바뀐 이유...
현재 복싱기구에 상관없이 세계타이틀매치는 모두 12라운드로 치러지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15라운드 경기였지요. 이렇게 타이틀매치가 3라운드가 줄어든 이유에는 한 비극적인 시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기의 링 한가운데서 글러브를 섞었던 선수 가운데 한 사람은 바로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김득구...

아재 권투 팬이라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지요. 강원도 출신으로 알려진 김득구는 원래 이름이 이덕구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혼하시면서 새아버지의 성을 따라 이 씨에서 김 씨로 성을 바꾸면서 이름도 덕구에서 득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70년대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출신의 청소년들이 그랬듯 그도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자 열다섯 살 때 무작정 가출을 하여 서울로 상경합니다.

하지만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었던 그는 서울에서도 이런 저런 밑바닥 직업들을 전전합니다. 구두닦이, 제과점 점원, 버스 행상과 같은 일들을 전전하다가 도저히 이렇게는 성공할 수 없겠다고 여기고 권투를 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 당시 권투는 믿을 건 두 주먹과 깡밖에 없는 청년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옵션이었습니다.

권투에 입문한 그는 나름 재능을 보여주었고 1980년에는 라이트급 한국 챔피언이 되었고 1982년에는 라이트급 동양챔피언이 되었습니다. 당시 동양챔프가 되면 자연스럽게 WBC나 WBA같은 국제기구의 랭킹에도 이름이 올라가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당시 WBA 라이트급 세계챔피언 레이 "붐붐" 맨시니 선수가 그에게 도전자의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레이 "붐붐" 맨시니 선수는 당시 한창 떠오르고 있던 라이징 스타였습니다. 백인이었고 잘생긴 미남 선수였기에 앞으로 승승장구가 기대되던 선수였고 펀치가 공기를 가르고 날아오는 소리를 딴 "붐붐(BOOM BOOM)"이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강력한 양 훅이 주무기였던 선수였지요.

하지만 김득구 선수의 각오도 대단했습니다. 열세가 점쳐지는 상황에서도 타이틀을 따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당시 악혼녀가 임신을 한 상태였던 김 선수는 정말 여기서 타이틀을 따지 못하면 죽는다는 절박한 각오였을 것입니다. 한 미국 기자에 따르면 그는 경기에 앞서 머무르던 호텔 방 화장실 거울에 피로 "Live or Die"라고 써 놓았었다고 합니다(물론 한국어로 써 놓은 것을 기자가 번역한 것일 텐데 한국어 표현이 정확히 뭐였는지 궁금합니다).

1982년 11월 18일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호텔 특설링에서 벌어진 WBA 라이트급 세계타이틀매치...도전자는 당시 많은 도박사들과 복싱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초반부터 챔피언과 접전을 벌였습니다. 강펀치의 챔피언에 맞서서 물러서지 않고 같이 맞불을 놓는 경기를 펼쳤습니다. 적어도 9회 까지는 대등한 경기였고 한 때는 챔피언을 몰아붙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10회부터 서서히 균형추가 맨시니 쪽으로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11회부터 13회까지는 경기가 일방적인 맨시니 선수의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13회에서 김득구 선수는 39회나 맨시니 선수의 정타를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14회...라운드를 알리는 공이 울리자마자 맨시니 선수는 김 선수에게 강력한 양 훅을 적중시킵니다. 그리고 김 선수를 다운시킵니다. 김득구 선수는 믿을 수 없는 정신력으로 링줄을 붙잡고 일어서지만 주심이었던 리처드 그린은 경기를 중단시켰습니다. 김 선수는 다시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말지요.



경기 하이라이트...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된 김 선수는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고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들의 임종을 지켜본 어머니의 뜻대로 장기 기증을 하여 두 명의 미국인들에게 새 생명을 선물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 경기의 비극은 김득구 선수의 죽음으로만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김 선수의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음독자살을 하였고 타이틀전의 주심을 맡았던 리처드 그린씨 역시 몇 달 후 경기를 빨리 중단시키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고 맙니다. 맨시니 선수 역시 그 뒤로 선수로서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은퇴를 하였습니다. 기량이나 인기로 봤을 때 대스타가 될 자질이 충분했던 그였으나 역시 링에서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습니다.

이 경기를 계기로 해서 경기 전 선수들의 건강 상태를 면밀하게 체크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혈압 정도나 체크하던 관행에서 벗어나서 경기 전 선수들의 심전도나 폐기능, 뇌기능 등도 확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라운드 수 역시 15회에서 12회로 줄었으며 라운드 후 휴식 시간 역시 60초에서 90초로 30초가 더 늘었습니다. 그리고 닥터스톱 제도가 도입이 되어서 링 밖의 닥터가 보기에 선수의 건강이 위험하다고 판단이 되면 양 선수 코너 측이나 주심과 상관없이 닥터의 전권으로 경기를 중단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링 사이드의 링 줄도 세 줄에서 네 줄로 한 줄 늘려서 선수들이 넘어지면서 링 밖으로 밀려나가는 경우가 없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은 결국 한 선수의 비극적 죽음의 자양분을 먹고 나서야 이루어진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비극으로 끝이 났던 한 시합...그것은 승자는 없고 모두가 패자였던 시합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진정한 승자는 김득구 선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I became a new man because I did boxing, if I didn't, I would've been a nobody streetfighter, a thug. I won against myself. " - Duk Koo Kim]
("나는 복싱을 했기 때문에 새사람이 되었다. 만약 복싱을 하지 않았다면 그냥 길거리 싸움꾼, 양아치가 되었을 거다. 난 내 자신을 극복했다." - 김득구 선수)



계체를 위해 저울에 올라선 김득구 선수와 그를 지켜보는 레이 맨시니 선수...



김득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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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t. Hammer
16/06/06 19:39
수정 아이콘
영화 챔피언이 김득구 선수 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였죠.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minyuhee
16/06/06 19:47
수정 아이콘
당시 미국에서 2억이란 굉장한 금액, 지금 봐도 큰 돈인데 그때로 보면 어마어마한 돈을 대전료 + 위로금으로 주었지만
그 돈을 둘러싼 가족들의 분쟁이 이어졌고, 그 후에 어머니가 자살했지요.
다빈치
16/06/06 19:47
수정 아이콘
7전8기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죠.... ㅠㅠ

대단한 정신력이라고 해야하는걸까요...
minyuhee
16/06/06 19:56
수정 아이콘
맨시니는 장례식 때 한국에 왔는데 한국인들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것에 놀랐다고 했죠.
당시의 한국인들은 강력한 적에 맞선 명예로운 전사였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맨시니의 딸이 학교에서 니네 아빠 살인자라며? 그 말 듣고 와서 울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Neanderthal
16/06/06 19:58
수정 아이콘
맨시니 선수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이이죠...저 경기 뒤로 두 번 더 타이틀 방어는 했지만...
얼마 전에 김득구 선수의 아들과 만나서 마음의 짐을 덜었다는 뉴스를 보았던 기억도 납니다...
마이클조던
16/06/06 19:59
수정 아이콘
16/06/06 20:31
수정 아이콘
글 잘읽었습니다~
16/06/06 21:10
수정 아이콘
당시 경기 시간과 방송 시간이 갭이 있었지요. 이미 사고가 일어난 후인데 버젓이 아무 말 없이 방송을 해서 지탄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당시 경기를 봤는데 방송국은 기억이 안나네요.) 여하간 김득구 선수의 죽음이 영향이 매우 큽니다.
Eye of Beholder
16/06/07 03:39
수정 아이콘
엠비씨였던거 같은데 말입니다. (아님 케비에스 뿐...) 여튼 저에게도 '시저스 팰리스 호텔' 이름만 들으면 김득구 선수가 먼저 생각이 납니다. 정말 중반까지는 이거 잘하면 어어? 하는 분위기였는데..
꼬마산적
16/06/06 22:33
수정 아이콘
챔피언을 만든 감독조차 당시 영상을보고 이리 말햇죠
"한번도 단 한번도 백스텝을 밟지 않더라"
당시 김득구 선수가 얼마나 대단햇는지를 말해주는 한마디라고 생각합니다
쇼미더머니
16/06/07 01:07
수정 아이콘
몰입해서 잘 읽었습니다. 김득구, 참 아픈 이름이죠.
지니팅커벨여행
16/06/07 07:35
수정 아이콘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몇년 전 비슷한 일이 또 있지 않았나요?
하향길에 접어든 한국 권투의 마지막 세계챔피언 최요삼 선수가 12라운드 판정승을 따내고도 결국 사망한 사건이 기억나네요.
당시에 정말 안타깝고 슬펐는데...
16/06/07 09:53
수정 아이콘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Neanderthal
16/06/07 11:12
수정 아이콘
곽경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유오성이 김득구 역할을 했지요.
16/06/07 23:12
수정 아이콘
https://youtu.be/S3mBksc5tyg

위에 댓글에서 언급한 영화 <챔피언>의 영상을 뮤비로 만든 최진영의 <Champion> 뮤직비디오입니다. (오래전 영상이라 음질이나 화질은 안습입니다.)
한 때, 노래방에서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덕분에 다시 꺼내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노래방으로 가야겠네요. 감성 폭발 직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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