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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3 17:01
이념 대결의 끝은 결국 자기파괴죠...
그런 의미에서 요새 벌어지고 있는 이념대결을 매우 씁쓸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건 한국처럼 결국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갈라지던가, 아니면 프랑스 혁명 처럼 다 때려부수고 나서야 진정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 동안 무고한 사람들이 무수히 다치는 건 둘째치고서요
22/12/03 17:03
빨치산이면 정순덕 정도 되는 네임드 아니면 자료가 거의 없을 겁니다.
대다수가 추위와 배고픔에 죽든 국군에게 사살됐든 그냥 무연고로 묻혔을테니까요.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도 거의 없던걸로 압니다. 잘 봤습니다.
22/12/03 17:16
정순덕이 누군가했더니 마지막 여자빨치산이군요.
그런 사람보다는 이현상, 김삼룡, 이주하 같은 사람들이 자료가 많을 것 같습니다. 현송학도 혹시 그런 자료가 남아있을까 싶었습니다.
22/12/03 17:07
본인이 중요한거지 친척 누군가가 혹은 가족 누군가가... 그런겈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양집안은 경상도쪽이고 극우에 가깝지만 친형은 극좌 인생을 40년 넘에 살았습니다. (제가 늦둥이라 친형과 나이차가 좀 나네요) 그런 환경에서 저 자신은 중도에 가깝고 그동안 양쪽에 다 정치성향을 표시하던 때가 있지만(어쩔수없이) 양쪽에서 욕만 먹는 그런 취급이죠. 가족에 굳이 얼매이지 않고 원하는 쪽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담감 떨쳐내세요 힘내세요.
22/12/03 23:57
오랜만에 90년대 나온 단편소설이나 소설을 읽던것처럼 장면 스스로 상상하면서 글을 재밌게 읽었읍니다 현재보다 그때 더 자유로운 사고를 할수 있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글입니다
그리고 이글을 통해서 우린 상당히 복잡하게 엮여 있는데 그때도 8~90년대까지도 다들 동의했던것같은데 왜 요즘은 그걸 망각하고 있을까 생각도 하게됩니다
22/12/04 10:48
전쟁이라는 큰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보통 개개인들의 삶은 참 고달팠겠지요. 일제시대에 태어나셔서 광복과 6.25 전쟁을 거쳐오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끔 들어보면 정말 한 명 한 명이 역사다 싶어요.
22/12/06 11:13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비교적 자세하게 당시 상황을 알고 계시네요.
제 외할아버지는 아들없이 딸만 셋을 두었기 때문에 제일 막내인 저를 포함한 외손자들이 한식즈음에 성묘를 합니다. 제 형제들이나 이종사촌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데, 저는 제 외가의 상황을 좀 알고 싶더군요. 그래서 당시 상황을 대충 알고 계시는 제 어머니(한국 나이로 94세)께 질문을 해서 조금씩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의 외조부는 백범 김구와 꽤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때 일인데, 간재 전우선생의 제사(?)에 참석하러 평안도에서 충북 괴산을 방문했을 때, 상해 임정에 대한 얘기를 하다 염탐하던 사복 순사에게 발각되어 호된 고문과 함께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간재 문집을 전하려고 하인을 보냈다고 제 어머니는 알고 계시던데, 독립자금을 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방후 제 어머니의 외삼촌은 먼저 서울에 가서 거처를 준비하겠다고 남하하게 되었는데, 바로 삼팔선으로 갈라지는 바람에 평생 이산가족으로 지내다 80년대 후반 작고를 하셨습니다. 백범의 도움으로 육사2기생이 된 후 한국전쟁때는 연대장으로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연대장이 되기에는 시간상 너무 짧은 기간이라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전쟁때라 그런 것이 가능했던 모양인지 그렇다고 하네요. 그리고 제주도에서 3천명의 목숨을 놓고 결단을 내릴 때, 모두 석방시켜 살려냈다고 합니다. 그 때 석방된 부호의 딸과 두번 째 결혼을 하게 되었고, 슬하에 4남을 두었습니다. 제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9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고, 간재 전우의 마직막 제자였던 제 외조부는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유람하면서 훈장생활을 하시다 제 어머니가 14살 되던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제 외조부가 거둬 준 어머니의 사촌오빠에게 의탁하다, 위안부를 끌려갈 것을 염려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를 하게 되었답니다. 어머니를 거둬 준 사촌오빠에겐 배다른 4형제(남동생)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3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제일 큰 동생은 사상이 달라 처형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보도연맹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세번 째 동생은 함경도 단천이라는 곳으로 끌려 갔다가 탈출해서 두달간 야간에만 이동하는 방법으로 천신만고 끝에 고향인 충북 진천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미친 사람처럼 식탐을 보이다 한달만에 세상을 떴다고 하네요. 네 째 동생은 전쟁때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둘째 동생만 살아 남아 아들 형제를 두어 대를 잇게 되었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원글을 보고 저도 기억을 되살리는 차원에서 전해 들은 이념대립기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22/12/06 19:43
찾아보니 백선엽이 20년생으로 45년에 월남해서 46년에 중대장 맡고 49년에 사단장을 맡았군요. 그 시절이라면 연대장이 되었다는 게 거짓은 아닌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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