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 우주관을 나타낸 그림. 중간의 Bhuloka라고 되어있는 곳이 인간이 사는 지상계입니다.)
불교는 우리가 알다시피 범인도 문화권에서 기원전 발흥하여 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주요 종교로 자리잡았는데요. 따라서 동일한 곳에서 발흥한 인도의 주요 종교 힌두교(당시에는 아직 베다 위주의 브라만교에서 힌두교로 서서히 전환되어 가는 과정이었지만)와 세계관, 신격, 사용하는 용어 등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공유했습니다.
예컨대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의 <십지품> 파트에서는 보살의 10가지 경지와 그에 해당하는 세속에서의 위치를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힌두 신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1지 : 환희지. 부처님을 생각하며 환희하고 불법을 생각하며 환희하고 보살을 생각하며 환희하고 보살행을 생각하며 환희한다는 경지입니다. 세속에서 수행이 여기에 도달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된다고 합니다.
제2지 : 이구지. 정직하고 참을성있고 고요하고 선한 마음 등 열 가지 마음을 일으켜서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경지입니다. 세속에서 수행이 여기에 도달하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된다고 합니다. 인도 신화의 세계관에서 전륜성왕의 위치는 신들보다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넘볼수도 없는 차이가 난다고 보기도 그런 애매한 위치입니다. 예컨대 고대의 전설적인 전륜성왕 나후샤(Nahusha)는 신들의 왕 인드라가 부도덕한 행동으로 힘을 잃고 천계를 떠나 대신할 왕이 필요해지자, 신들에 의해 천계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제3지 : 발광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끊긴다고 하는 경지입니다. 세속에서 수행이 여기에 도달하면 천상의 삼십삼천을 다스리는 삼십삼천왕이 된다고 합니다. 이 삼십삼천왕은 힌두교에서 일반 신들의 왕인 인드라에 대응되는 것으로 아는데, 삼십삼천의 명칭도 아마 이것과 관련이 있을것 같습니다. 힌두교에서 최상의 3신(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아래의 주요 신들을 트리다샤라고 하는 33신으로 분류하거든요. 바수 8신+아디탸 12신+루드라 11신+아슈윈 2신을 합쳐서 33 신격입니다.
제4지 : 염혜지. 능히 열가지 지혜를 갖췄다고 하는 경지입니다. 세속에서 수행이 여기에 도달하면 야마천을 다스리는 야마천왕이 된다고 합니다. 이 야마천왕은 힌두교에서는 사자들의 세계를 다스리는 신인 야마(Yama)에 대응되는데요. 물론 사후세계를 다스리는 신은 어느 신화에서건 강대한 위상을 지닌 신이고 힌두교의 야마도 지닌 힘으로는 인드라보다 위가 아닌가 싶은 전승이 종종 있기는 합니다만, 어쨌거나 지위상으로는 인드라가 신들의 왕인 힌두교와 달리 불교에서는 야마의 지위를 인드라보다도 위로 올려버렸는데 이유가 뭔진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제5지 : 난승지. 수승한 도를 더욱 구한다고 하는 경지입니다. 세속에서 수행이 여기에 도달하면 천상의 도솔천계를 다스리는 도솔천왕이 된다고 합니다. 힌두 세계관에서는 일반 신들이 사는 스와르가 로카와 브라흐마가 있는 브라흐마 로카 사이의 가장 첫 단계로 마하르 로카라는 공간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이게 도솔천과 1:1로 대응되는 곳인지까지는 제가 확실히 모르겠네요. '도솔천왕'에 해당하는 어떤 신격이 있다는 얘기도 들어본 바 없고...그냥 스와르가 로카를 뛰어넘지만 브라흐마 로카로 가기에는 살면서 쌓은 공덕이 모자란 사람들이 가는 어떤 멋진 세계입니다.
제6지 : 현전지. 선한 마음과 지혜를 구하는 마음 등이 모두 원만해졌다고 하는 경지입니다. 세속에서 수행이 여기에 도달하면 천상의 선화천계를 다스리는 선화천왕이 된다고 합니다. 힌두 세계관에서는 마하르 로카 위에 자나 로카라는 천상세계가 존재. 이것도 선화천과 대응관계인지는 모르겠음
제7지 : 원행지. 화엄경에서는 이 7지 보살에서부터 성문, 독각 등의 비대승 계통 불교 수행자들의 지혜를 스스로의 지혜로 넘어선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속에서 수행이 여기에 도달하면 천상의 자재천계를 다스리는 자재천왕이 된다고 합니다. 힌두 세계관에서는 마하르 로카와 브라흐마가 사는 브라흐마 로카 사이에 타포 로카라는 세계가 존재.
제8지 : 부동지. 깨뜨릴 수 없고 흔들리지 않는 지혜를 얻었다 하여 붙은 명칭입니다. 세속에서 수행이 여기에 도달하면 1천 세계를 다스리는 대범천왕(힌두교의 브라흐마신)이 된다고 합니다. 이 대범천왕은 여러 이치를 자유자재로 설하여 성문(당시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 수행자들을 비하하던 표현)이나 벽지불(세상과 거리를 두고 홀로 수행하여 어느 수준의 깨달음에 도달한 이들)에게 보살의 덕목을 일러준다고 하는데요. 석가모니가 처음 깨달음을 얻은 후에 세상에 가르침을 펼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범천이 나타나 가르침을 펼치도록 종용했다는 전승과 아울러 생각해보면 재밌는 부분입니다.
제9지 : 선혜지. 선과 불선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법을 안다고 하는 경지입니다. 세속에서 수행이 여기에 도달하면 2천 세계를 다스리는 대범천왕이 된다고 합니다. 굳이 대범천왕을 1천 세계를 다스리는 대범천왕과 2천 세계를 다스리는 대범천왕으로 나누어 놓은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힌두교에서도 브라흐마가 사는 세계를 보통 브라흐마 로카(혹은 사티야 로카)라고 부르는데, 간혹 브라흐마 로카와 사티야 로카를 별개의 서로 다른 세계로 구분해서 단계적으로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제10지 : 법운지. 시방세계의 무한한 부처님들의 무한한 법의 광명을 오직 이 경지의 보살들만 받아서 감당할 수 있다고 하여 이런 명칭이 붙었다고 합니다. 세속에서 수행이 여기에 도달하면 마혜수라천왕((힌두교의 시바신, 마혜수라는 시바의 이칭인 마헤슈와라(Maheswara)의 한역명입니다.)이 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화엄경>>에 등장하는 힌두 신들의 위치를 살펴봤는데요. 한가지 신기한 것은 전체를 통틀어서 비슈누에 해당하는 무언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비슈누가 현대 힌두교에서 차지하는 거대한 위상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죠.(화엄경의 원전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집필될 무렵엔 비슈누가 힌두교에서 위상이 그리 크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사실 현대 비슈누의 위상으로 습합된 여러가지 요소들 중엔 상당히 오랜 예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신격이나 개념들도 있거든요. 예컨대 비슈누의 가장 유명한 화신인 크리슈나 신앙의 경우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기록 등을 살펴보면 헬레니즘 시기에 이미 서북인도 일대에서 성행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고 합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볼 부분이, 결국 <<화엄경>>에서 제시되는 개념상으론 인간이 지혜와 수행을 닦아 힌두교에서 천국의 왕인 인드라, 최고신에 해당하는 브라흐마나 시바신의 위치까지도 갈 수 있다는 건데요. 힌두교에서도 인드라의 자리까지는 인간이 공덕이나 최고신에 대한 헌신 등을 통해 갈 수 있다고 보기는 합니다(대표적인 예로 자신이 정복한 전 세계를 비슈누 신의 요구에 따라 바치는 헌신을 보여 다음 세상에서 인드라가 될 것을 약속받은 아수라 발리). 다만 최고 신격에 해당하는 브라흐마나 시바가 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데 이런 차이는 역시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대체로 남방불교와 교류가 활발해진 최근 불교학계의 트렌드는 대승-소승이라는 표현이 대승 입장에서의 우월의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여 지양하고, 북방불교-남방불교 혹은 북전불교-남전불교라는 표현을 보다 선호하는것 같던데요. 다만 <<화엄경>>의 원전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처음 형성될 무렵의 불교는 현재와 같이 지역적으로 남방의 남방불교와 북방의 북방불교로 깔끔하게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넓은 인도대륙 내에서 남방불교의 기원에 해당하는 부파와 북방불교의 기원에 해당하는 부파 그리고 해당 부파들을 지원하는 재가자 집단이 사방에 점재한 채 서로 뒤섞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북방-남방이라는 표현이 당시 상황을 나타내기 어려우므로 대승-소승이라는 표현을 썼을 뿐 차별의식의 발로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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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시절 불교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맥락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나름 복잡한 문제인 모양이더라고요. 한때는 북방불교가 불교의 기원에서부터 내려오는 적통이 아니라고 하는 대승비불설 이런게 흥했다가 다시 또 이제는 '그렇다고 남방이 더 적통에 가깝냐면 그것도 아니다, 양쪽 다 오랜 시간 변용을 겪었고 그시절로 이어지는 맥락이 있으니 딱히 더 적통을 따지기도 어려움'이쪽으로 다시 가는거같고...
힌두교에서도 경전에 따라서는 최고신 브라흐마=인간에게 내재한 아트만이라 하여 사람의 내면에 최고신이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그것이 불교의 가르침과 연결된다(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어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네요.
그렇다 썰 정도로 들어서 진위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브라흐만이라고 만물의 본원이 되는 의식? 같은 개념이 있기는 합니다.
근데 이게 브라흐마 신격이 처음 형성될 무렵엔 브라흐마=브라흐만이었던 모양인데, 브라흐마 신앙이 완전히 개털이 된 지금은 그것도 뺏겨서 비슈누파는 비슈누가 브라흐만이라고 하고 시바파는 시바가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샥티파는 또 여신을 숭배하는 이질적인 종파에다 지역별로 차이도 있어서 얘기가 또 다른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