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뛰어난 서사와 문장력을 갖춘데다 재미까지 있는 웹소설을 읽어서 추천합니다.
블루멘크란츠는 가상의 근세 시대를 기반으로 한 3인칭 연대기적 전쟁 소설입니다.
프랜시스 엘라라는 기병대 하급 장교가 나오는데 여기서 엘라의 사연을 잠깐 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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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출세하고 싶지만 집안도 연줄도 없고 그나마 있던 연인에게서도 막 버림 받은 불쌍한 기병 대위 프란시스 엘라. 소설의 시작과 동시에 좌천된 우리의 주인공 엘라가 국경 지대에서 새로운 임무를 맡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초반부의 엘라는 용감하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는 청년 장교입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그닥 존중받지 못하고 인간 관계는 상황에 따라 파탄과 수습을 왔다 갔다하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그는 장래마저 우려스러운 지경에 이릅니다.
도입부에서 여기저기서 물 먹고 군대의 쓴 맛과 정 떨어지는 맛을 골고루 경험하던 엘라는, 전투에서 간만에 자신의 호적수라고 할만한 적군을 만납니다. 그런데 상대는 나보다 계급도 높고 격식 있는데다 기사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은 실력자네요.엘라 자신은 개판 오분 전인 상부 조직 뒤치닥거리에 여념이 없는데. 엘라는 스스로가 초라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자존심이 있기에 스스로를 타이르며 그래봤자 나나 상대나 어차피 도찐개찐, 둘 다 세상의 중심에서 먼 이 구석진 땅 끝까지 쫓겨온 처지일 뿐이라고 되뇌입니다. 엘라의 좌절과 고뇌야 어떻든 간에 아무튼 군사 명령이 코 앞에 들이닥치게 되면서, 그는 싸웁니다. 그리고 싸워서 어찌어찌 이깁니다.
하지만 기껏 이겼더니 엘라의 공은 무시 당하거나 남이 가져가 버리고 엘라 본인은 더 낮은 베이스에서 경력을 다시 쌓아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방황하는 엘라, 그는 조국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남을 구하려다 부상을 당한 엘라. 그는 노력하지만 그 노력의 결과물은 오히려 그를 해칠 뿐입니다. 하필 군부의 주요 세력과 사이가 틀어져서 승리에 대한 보상은 커녕 자리를 뺏길 위기에 처한 엘라. 엘라는 전쟁 소설의 주인공답게 썩 괜찮은 검술 실력 및 전술 구사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시대는 개인의 나비짓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엘라는 사회 제도의 경직성과 전쟁의 비참함, 개인의 영달, 이런 것들의 의미 사이에서 번민합니다. 영예는 간데 없고 전투는 어려우며 그 동안에도 역사는 흐릅니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드디어 엘라와 얽혀있는 맹약의 주인이 등장하며 과거로부터 이어진 복수의 피 값을 요구합니다
이게 총 9권 중 1권 정도까지의 내용이고, 소설은 등장 인물의 행동과 대화 위주로 사건을 계속 빠르게 전개시킵니다. 엘라는 적당히 진지하면서도 시니컬한, 요즘 판타지 소설에서 보기 드문 사실감과 무게감을 가진 캐릭터입니다. 초반부의 엘라는 부하들을 이끌면서 이러 저러한 성공과 고충을 겪고, 주변에는 흡입력있는 안티히어로 및 그외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엘라는 그들과 인연(악연)을 키우는데요. 글은 전반적으로 절제된 어투를 사용해서 사건의 극적 긴장감을 키웁니다. 또 글의 어투가 건조한만큼 느와르 계열의 책들처럼 사건의 주요 줄거리에 집중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글을 좋아하시는 분은 찾아보실만한 소설입니다.
블루멘크란츠는 근세식 회전 및 시가 전투, 지휘관의 전투 결정 장면이 잘 묘사된 소설입니다. 소설에는 기병과 머스켓총, 군주정 및 동맹 연합체, 비밀 결사와 신문이 등장합니다. 판타지나 마법이 등장하지 않는 진짜 근세 서구식 전쟁을 소재로한 소설은 우리나라 장르 소설계에서 마이너한 편인데 그만큼 내용을 사실감 있게 뽑아내기 어려워서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열 보병에 대한 고증은 제가 근세 밀리터리쪽에 큰 조예가 없어서 패스하고, 소설에는 중반 이후 나오는 주요 회전이 하나 있는데 이게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이 전투에 관한 부분을 좀 늘리고 분량을 채워 넣어서 아예 소설의 마지막 부분으로 사용해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그러면 전쟁 이후 급작스럽게 종장을 찍어야해서 소설의 마무리가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네요.
소설 속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투쟁적입니다. 인생은 갈등의 연속이고 전쟁은 정치의 연장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전쟁 소설이 그게 당연한게 아니냐 싶겠지만, 세계관과 설정은 소설내 장치로만 소비되고 등장 인물들은 여전히 21세기적으로 사고하는 일부 장르 소설도 있는만큼 이런쪽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게 좋더군요. 이처럼 소설은 인물의 가치관에 세계관을 녹여내어 가상적 시대 상황에 대한 몰입감을 높입니다. 이 몰입감 분야의 최고봉 중 한분이라면 역시 우리나라 판타지계에는 이영도씨가 있겠네요. 하지만 작품의 초반-중반 어느 부분에 다다라서는 이 소설도 꽤 높은 몰입감을 가져다 줍니다. 소설은 이후로도 서구 근대 태동기의 과도기적, 시대 전환적 분위기를 풍기는데, 매 화 짧게 끊어 써야 하는 웹소설의 태생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시대정신의 앞머리를 논한 작가의 용기를 높게 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느끼는 이 소설의 백미는 문체입니다. 소설 문장의 대부분은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장이 평균적으로 좀 많이 짧은 편인데 가끔씩 한 두줄 던지는 혼잣말이나 상황 묘사가 빛을 발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포인트일수록 글에 어쩔 수 없이 힘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블루멘크란츠는 사건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와중에도 글이 상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독자가 그 여백을 밀고 들어가서 생각할 수 있는 꺼리가 많아집니다. 예를 들면 엘라가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혹은 표현할 여건이 주어지지 않는 감상을 독자가 대신 느끼고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던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독자가 여운을 느낄 수 있다던지 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가끔 건조하지만 치열한 전투 묘사와 대비되는 자연의 무상함, 인생사의 덧없음이 배경으로 깔리면서 분위기가 가끔씩 낭만적이 되기도 합니다. 글의 정취만 놓고 보면 칼의 노래랑 비슷한 부분이 꽤 있다고 하면 좀 과찬이 되려나 모르겠네요.
물론 소설에는 아쉬운 점도 몇 개 있습니다. 그 중 소설 외적인 부분에서 가장 큰 아쉬움이자 이 리뷰를 쓴 이유를 들자면, 이 소설 블루멘크란츠는 처음 보았을 때 양판소 계열의 소설인지 아닌지, 내가 중간에 읽다 말 공산이 높은 소설인지 아닌지 독자 입장에서 알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리디북스에서 해당 소설에 대한 소개 문구를 읽으면 10대 – 20대 초반 독자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데요, 출판사가 마케팅 타깃을 좀 빗맞춘 느낌입니다. 저도 심심하던차에 우연한 기회에 읽게된 책이고, 아마 일반적인 상황이였으면 이런 책이 존재하는지조차 알기 어려웠을 것 같고요. 출판사측에서 좀 더 1 – 2세대 정통 판타지 무협 SF 계열 작가들 또 은영전 반지의제왕 얼불노 등등을 읽고 자라며 아직까지는 그래도 우리나라 장르 소설계의 허리를 담당하는, PGR등에 상주하는 20대 후반 - 40대의 독자층에게 어필하는 방식의 표지나 소설소개 부분 마케팅을 했으면 좋았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저 포함 이런 잠재적 독자층은 웹소설을 이것 저것 검색해가며 스크리닝할 시간적 여력도, 이제는 관심도 없어서 소설 소개글이나 표지, 리플/리뷰 정도 보고 아닌 것 같은 책은 아예 손도 안 댄다고 생각하거든요. 독자 마케팅 전략을 좀 바꿨더라면 소설의 인지도가 지금보다는 많이 올라갔을 거 같습니다.
아무튼 결론을 말씀드리면 블루멘크란츠 재미있습니다. 소설 속 방황하는 인물은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이런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중간의 전투씬에서 독자는 쫄깃함을 느낄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좀 고전적인 장르 소설들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1권 끝까지 읽어보시고 취향에 맞고 계속 읽을지를 가늠해볼만하다고 생각해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