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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25 08:55
통제력 유지를 위해 숭유억불정책을 내세웠지만 왕가는 불교에 관심이 많았지요. 세종이 궁내에 태종을 위한 불당 건립하려고 신료들 전부와 한판 붙은 적도 있습니다.
19/07/25 09:02
숭유억불치고 왕족들은 불교와 멀지 않았습니다.
당장 태조부터가 무학대사로 시작해서 불교와 가까웠고 세종은 형이 스님이고, 아들인 세조도 불교신자였고요. 거기에 세조때는 왕한테 술먹고 야자까는 신하도 있긴했...(귀양갔지만)
19/07/25 10:01
효렁대군은 스님 아닙니다..
현재 왕족종친중 가장 많이 번성한게 효령대군파입니다. 생전에 아들 7명, 손자 33명, 증손자 109명.. 현재 유명인으로 이정재씨, 이휘재씨, 이경규씨, 이수만씨, 써니씨 등등 출가한건 아니고 불가에 관심이 많았고, 위치가 위치인지라 조용히 지내신거죠. 덕분인지 90세까지 장수 (앙녕대군은 왜...)
19/07/25 10:19
주로 집에 스님 초청해서 법회주관하거나 사찰중건하는데 도움을 줘서 불교에 빠지신건 맞긴 합니다만,
그냥 불교신자 일뿐, 본인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진 않았습니다.
19/07/25 10:59
그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려고 다른 왕자들이 망나니, 불교귀의 했다는건 조선 중기엔가 퍼진 야사...
초기쪽에는 그런 기록 없다고 합니다
19/07/25 08:12
아무리 둘째형이 승려여서 좀 봐준감이 있었다고 설정 집어넣고, 신하들하고 자유로히 토론하고 설전했다고 해도 그렇지..,아 근데 저 스님은 신하도 뭐도 아닌데???
19/07/25 08:43
대충 소문들어서 어이없는 내용인줄은 알고있었는데, 감독이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네요. 저시대의 그깟 중 한명이 대군들을 부려먹다니...;;; 황당하네요. 크크
19/07/25 08:19
왕권 거의 최고조인 시기에, 더 잘 한 왕 찾기도 힘든 왕한테,
전조 말아먹은 데 지분도 상당할 텐데 무슨 면으로... 그 이유로 개털 취급 받던 중이 저런 말을-_-;
19/07/25 09:32
영화질이야 그렇다치고 저 장면 하나만으로 그렇게 까일 일인가 싶긴 하네요
비슷한 시기를 다룬 뿌나나 육룡이 나르샤도 장면 하나만 들가 오면 저 급을 넘어설텐데요
19/07/25 09:55
뿌나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협고수가 나오는 퓨전판타지장르니까요.
진짜 역사적 사실은 이것이다! 라는 착각을 애초에 차단하고 있습니다.
19/07/25 09:50
갑자기 딴 소리지만..
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한건 아니지만 억불숭유라고 배웠던 기억이나는데 숭유억불로 요즘은 바꿔서 표기하기로 한건가요?? 궁금궁금..
19/07/25 10:32
뭐 순교라고 하고 싶었나...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왕가가 불교와 친했으니 불사가서 개인적으로 부처님한테 절 할 수도 있었을테고 세종에게도 무학대사 같이 왕사 역할 한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뒷 배경 보니 저긴 어전인데... 도성내 모든 절이 폐사 되어도 할 말 없죠
19/07/25 11:02
그런데 저건 시각으로 보면 사극 대다수가 걸리긴 합니다.
예) 상놈이 양반에게 틱틱대는 말투로 비아냥대고 트집잡고 여하튼 오만불손함 - 실제로는 당장 멍석말이 맞아죽음 조선후기 여성이 남성에게 턱 쳐들고 대꾸하고 욕하고 여하튼 오만불손함 - 전기면 몰라도 성리학 세뇌된 임진왜란 이후면 맞아 죽음 그래도 애초에 역사왜곡으로 미운털이 박혀서 그런지 다 미워 보이는군요. 저부터도.
19/07/25 15:30
의외로 상놈이 양반에게 비아냥되는 일은 많았습니다. 조선초만 해도 조정에서 파견된 수령이 지방 향리한테 발로 차이고 그랬죠. 괜히 부민고소금지법이라는 현 시각으로 이해되지 않는 법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또 여성이 남성한테 말대꾸하고 그런 것도 이름있는 양반가문에서나 허용이 안 됐던 거지 일반 평민에겐 전혀 해당사항이 아니었고 오히려 조선 중후기가 되면 적어도 집안 내에선 여자의 권력이 상당히 올라갑니다. 효라는 사상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다보니 여성이기 전에 어머니이고 그에맞춰서 집안 어른으로서의 권한이 쎄지죠. 오히려 조선전기가 집안빽이 없으면 그냥 쉽게 이혼당하고 쫓겨나기 일수였습니다.
19/07/25 16:05
전자의 경우 예외적인 상황이라 기록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며, 그나마도 향리라는 특수한 중인계급에 한정된 것이겠죠. 부민고소금지법 역시 지방권력의 고인물로서 중앙권력과 알력싸움을 하던 향리를 법으로 견제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나마도 중후기로 가면 강한 백성으로부터 수령을 지켜주는 법이라기보다, 수령이 마음껏 백성에게 치도곤을 안길 수 있는 법으로 전락하였구요. 실질적인 양반과 평민의 생활상은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 나온 특권 정도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중에 신분제가 동요하고 잔반계급이 등장하면서는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나마도 당연히 돈과 권력을 모두 가진 힘있는 양반가는 예외였죠.
여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으로 성리학이 득세한 조선중기 이래 아녀자에게는 현모양처와 열녀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했고 이를 벗어나는 순간 사회적 비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조선 이전에는 데릴사위제가 횡행하였으나 정도전이 이를 고깝게 여겨 마땅히 배척해야 할 제도로 규정한 이래, 조선 중기 이후에는 데릴사위제가 매우 희귀한 케이스로 변합니다. 신사임당 정도의 가문이어야 상대적으로 급이 떨어지는 집안 이원수를 데릴사위로 데려올 정도였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로 가면 몰락 양반가나 서민층 위주로 여성들이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인식이나 권리의 주장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여성에게도 글공부를 시킨 매우 예외적인 경우인 허난설헌마저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비극적 결말을 맞이해야 했죠. 관심있으신 분들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에서 작성한 아래의 글을 한번쯤 읽어보심도 좋겠습니다. http://mahan.wonkwang.ac.kr/nonmun/2005non/9.htm
19/07/25 17:01
예외적인 상황이라 기록된 게 아니라 조선초에는 지방 호족의 힘이 양반을 뛰어 넘는 경우가 많았고 그게 부민고소금지법의 유지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됩니다. 중후기에는 법 자체가 무의미한 법이 되어 그 법으로 인해 수령에게 치도곤을 안기고 말고 할 일도 없었습니다. 수령이 횡포를 부려도 그건 법에 의존하여 부리는 게 아닌 그냥 수령의 힘 자체가 강력해져서니까요. 또한 중후기로 가면 힘없는 양반보다 유력가의 노비가 힘이 더 쎈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괜히 머슴일을 해도 대감집에서 해야한다는 말이 나온 게 아니죠. 신분사회고 그것이 고착되었다고 하나 역전현상을 보이는 경우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닙니다.
여권의 경우 고려시대라고 뭐 다를 게 있나요. 오히려 훈민정음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여성도 글을 통해 소통이 가능한 경우가 많았고 그 기록들을 보면 무슨 남자한테 한마디 못하는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닙니다. 그정도의 배움이 있는 경우 오히려 남녀모두 서로에게 존중을 보이는 게 훨씬 더 일반적이죠. 고려시대야말로 언문조차 제대로 없어서 여자는 배움 자체가 없었지만 조선으로 넘어와서 여성이 가져야할 덕목을 강조하다보니 그에 대한 최소한의 교육이라도 이루어졌죠. 허난설헌 등의 비극적 결말을 이야기하지만 고려시대에 그런 한계를 안타까워 할만큼 배움을 가진 여성이 존재하긴 한가요? 그리고 데릴사위제는 무슨 그게 여권를 무슨 여권을 상징하는 제도처럼 말씀하시는데 그런 게 전혀 아닙니다. 데릴사위제라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가문을 이을 남자가 없는 집안이, 혹은 여성을 단순 노동력으로 인식하는 집안이 가문을 잇기위해 혹으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남자를 집에 들이는 제대로 철저히 남성중심적 사회에 적용되던 제도입니다.
19/07/25 14:07
감히 왕에게 직설을 날림으로서 관객에게 통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면
그 왕이 많은 사람들에게 성군으로 인식되어있는 세종대왕 이라는대서 포인트를 너무 잘 못 잡은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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