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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7 00:54
현리전투는 엔하위키시절에 처음 봤는데 계속 뭔가 어떤 전투였는지 평가가 실시간으로 변하는거같습니다. 국군의 개판오분전인모습->아니다 국군도 뭐가 있었다->중공군:어? 이게아닌데... 이런느낌
19/12/07 01:07
제대로 싸우지 않고 부대가 와해되어 도망간 것은 맞는데 중국측 자료까지 살펴보면 제대로 싸울 준비를 하고 돌파하려 했다면 훨씬 더 큰 피해를 봤을 겁니다.
19/12/07 01:03
그러니까 상대가 우리 봇듀오와 정글을 다이브쳐서 잡겠다고 완벽한 준비를 해놨는데 우리 이즈가 여눈뽑겠다고 아군 핑 무시하고 집가서 게임이 안터진거군요? 크크크
19/12/07 08:08
박정희 시절 북괴 김일성 초대 돼지와 그졸개들이 전쟁재개하면
이번에 틀림없다 무조건 남조선함락이다라고 호언장담한 자부심의 바탕은 유재흥이 국방부장관에 올라가는 한심한 남한 상황보고 저큰소리 친걸겁니다
19/12/07 10:26
자게에서도 유재흥에 대해 이야기가 올라오긴 했는데 현리에선 크게 졌어도 영천 전투 승리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영천을 빼앗겼을 때 미국은 한국을 서사모아로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승인했었거든요. 다행히 영천을 지킴으로써 계획은 무산되고 인천상륙작전도 실행될 수 있었죠
19/12/07 09:55
1. 51년 5월 당시 인제 방면에서는 미 10군단이 중공군 12군단, 27군단, 20군단을, 원통 방면에서는 국군 3군단이 인민군 5군단을, 속초 방면에서는 국군 1군단이 인민군 2군단과 3군단을 상대하고 있었음.
2. 미 10군단에는 국군 5사단과 7사단이 배속되어 전방에 배치 중이었고, 국군 3군단에는 국군 9사단과 3사단이 전방 배치 중이었음. 3. 국군 3군단의 본부는 후방 하진부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국군 3군단 예하 사단들이 현리를 거친 이후 방대산을 거쳐 하진부리로 가기에는 방대산이 너무 험했기 때문에 오마치를 거친 이후 침교를 거쳐야만 했고, 따라서 1차적으로 오마치가 국군 3군단으로서는 요충지였음. 4. 오마치가 요충지임을 파악한 국군 3군단은 오마치에 병력을 배치하였으나 당시 오마치는 미 10군단 관할 지역이었고, 미 10군단은 이를 근거로 국군 3군단에게 오마치에서의 병력 철수를 요구했고, 국군 3군단은 결국 병력을 철수하게 되었으나 이후에도 미 10군단은 오마치에 병력 배치 등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 5. 중공군은 중공군 27군단과 20군단이 미 10군단 예하 국군 7사단을 협공하고, 중공군 12군단이 미 10군단 예하 국군 5사단을 공격하는 사이 중공군 12군단 예하 60사단과 81사단이 국군 5사단과 7사단 사이를 빠져나가 각각 오마치와 침교를 장악, 이후 중공군 12군단이 국군 5사단을 격퇴하고 하진부리로 이동하여 최종적으로 국군 3군단을 3중 포위하여 섬멸할 계획이었음. 6. 동시에 인민군 5군단이 국군 3군단(9사단, 3사단)을 공격하고, 인민군 2군단과 3군단이 국군 1군단((수도군단, 11사단)을 공격하여 동부 전선 전역에서 총공세를 가하는 게 51년 중공군 6차 공세 당시 작전. 7. 중공군과 인민군의 작전이 시작되었고, 국군 3군단과 국군 1군단은 인민군을 맞아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국군 7사단은 중공군 27군단과 20군단의 협공에 크게 밀렸고, 중공군 12군단 예하 60사단과 81사단은 작전대로 국군 5사단과 7사단의 사이로 빠져나가 오마치와 침교를 장악하는 데 성공함. 8. 그런데 본래대로라면 국군 5사단을 공격했어야 할 중공군 12군단의 나머지 병력들이 착각을 일으켜 국군 5사단 방향이 아닌 미 10군단 예하 미 2사단 방향으로 진격하여 벙커힐을 공격하게 됨에 따라 중공군은 3중 포위 작전에는 실패를 하고 2중 포위에만 성공함. 9. 국군 7사단의 옆에 위치하고 있던 국군 9사단은 7사단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만약을 대비해 병력을 침교 방향으로 빼놓으려고 하였으나 마침 오마치에 침투해 있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이에 실패하고, 당시 병력들이 이 상황을 9사단장에게 보고를 하였으나 9사단장은 침투 병력이 소규모일 것으로 잘못 판단하여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며 안일하게 대처함. 10. 결국 국군 7사단은 완전히 밀려서 현리 방향으로 후퇴를 하고, 이에 맞춰 국군 3군단 예하 국군 9사단과 3사단도 3군단 본부가 있는 하진부리로 후퇴하기 위하여 현리 방향으로 이동함. 11. 얼떨결에 국군 3개 사단이 집결하게 된 현리는 지휘계통의 혼선과 통신망의 붕괴로 매우 혼잡한 상황에 직면하고, 이를 보고 받은 국군 3군단장은 헬기를 타고 하진부리에서 현리로 이동함. 12. 현리에 도착한 국군 3군단장은 3개 사단에서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오마치를 탈환할 것만을 지시하고 지휘계통의 정리나 병력들의 심리 안정화 등의 별다른 조치 없이 본부가 있는 하진부리로 헬기를 타고 다시 복귀함. 13. 그러나 각 사단별로 1개 연대씩, 총 3개 연대만을 차출하여 오마치를 탈환하기에는 시기적으로 이미 늦은 상태였고, 국군 3군단장의 하진부리 복귀는 "사령관이 도망을 간 것"으로 와전이 되어 내부적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켰으며, 중공군과 싸워서 큰 피해를 입은 국군 7사단 병력을 중심으로 적군에 대한 공포 심리가 형성, 오마치에 있는 중공군의 존재가 널리 퍼지며 포위되었다는 사실 등으로 인해 당시 현리에 남아 있던 병력들 사이에서는 크나큰 불안심리와 혼란이 발생함. 14. 하나둘 탈영 병력이 생기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전 병력이 화기와 보급품, 심지어 계급장까지 내던지며 거의 맨몸으로 하진부리를 최종 목적지 삼아 방대산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개별적으로 퇴각하기에 이름. 15. 일차적으로 약 40% 수준의 병력이 하진부리로 퇴각하는 데 성공하고, 최종적으로는 약 70%가 하진부리에 집결하게 됨. 16. 그나마 국군 1군단이 인민군 예하 군단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차단하였고, 중공군 12군단이 엉뚱하게 벙커힐을 공격함에 따라 하진부리까지 3중 포위를 하는 데 실패하면서 나름 병력 피해가 적을 수 있었음. 17. 이후 중공군의 보급 능력 저하와 미군의 막강한 보급 능력을 바탕으로 한 화력 공세로 중공군의 진격 저지와 동부 전선 방어는 성공함. 18. 현리 전투의 결과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밴 플리트에 의해 국군 3군단은 이전 국군 2군단에 이어 해체가 결정되었고, 개전 초기부터 이승만에 의해 전작권이 사실상 미군에 위임된 상황이었음에도 국군의 체면을 생각하여 국군에는 한국군 육군 본부를 통해 명령을 하달하던 방식이 국군도 미군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하달받는 방식으로 바뀜. 일단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은 대략 위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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