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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4/06 19:26:41
Name 유리별
Subject 머리를 잘랐습니다.

완연한 봄날씨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세네요. 눈을 뜰 수 없게 부는 바람에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엊그제 서울에 개나리핀 것을 보고 어라, 서울이 우리동네보다 빨리피네. 했는데 어제아침 집 앞 개나리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저렇게 동시에 꽃이 피는걸 보면, 그래 봄이 오긴 왔는데 너넨 대체 어떻게알고 한꺼번에 그렇게 피는거니 따지고싶어집니다. 언제봐도 자연은 감탄하게 합니다.

날이 포근해지긴 했는데 하늘은 탁해졌습니다. 혹시 초속 6미터로 바람불던 날, 밤 하늘은 보셨나요? 그날 달과 금성과 목성이 일렬로 섰었습니다. 금성은 샛별이라 새벽녘에나 보이는 별인데 그날 하늘이 너무 맑아 달과 목성사이에 수줍게 서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합니다. 흔치않은 일이라니 놓치기 아쉬운 하늘이라 추운데 아빠님 겨울파카를 둘러쓰고 한참이나 목을 길게빼고 하늘을 쳐다봤었습니다. 그렇게 맑던 하늘이 날이새니 탁해지다니. 어제 또 하늘이 감탄이 절로나올만큼 맑더니만 오늘 바람이 이렇게 부는 걸 보면 봄날씨란 사람 마음을 일렁일렁하게 하는 만큼 참 알 수 없구나싶습니다. 맑은 하늘의 따뜻한 봄날씨를 만끽하고싶은데 올해는 그런날이 있어줄런지..

약.. 7년만에 짧은 머리를 했습니다. 그동안은 주욱 검은 긴 생머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머리가 살랑살랑 물결치는 펌은 딱 한번 해봤습니다. 딸만 둘이신 아버지께서는 여자라면 검은 긴 생머리! 하는 로망을 가지고 계셨기에 어릴적부터 저의 머리는 늘 검은 긴 생머리였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중학교에서는 반드시 단발머리를 했어야 했기에 어느날 가서 문득 잘라왔는데, 아버지께 정말 크게 혼쭐이 났습니다. 사진이라도 좀 찍어 남기고 자르던지, 아니면 자르겠다 말이라도 하고 잘라야지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레 가서 그 긴머리를 한번에 잘라 낼 수 있냐고. 그날 저녁 아버지께서는 왕창 삐지셔서 말 한마디도 안하고 내내 술만 드셨습니다. 그러고보니 오늘 머리 자른 건 서프라이즈인데, 또 왕창 삐지시려나요.

고등학교때부터 내내 긴 생머리였다 문득 짧게 커트를 친 것은, 제 첫사랑과의 이별 때였습니다. 실은 그때는.. 지금 떠올려도 가슴 먹먹하고 너무 아프고 너무 슬프고 너무 힘겨워 등 뼈가 아파오기 때문에 잘 떠올리지 않습니다. 너무 아픈 기억이라 뇌에서 알아서 지워서인지 잘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생일이 가까워 온 어느날 엄마님 따라 갔던 미용실에서 문득 나도 자를까? 해서 잘라버렸었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짧은 머리는 그 때가 처음이었고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다행이었지만 짧은 머리의 효과는 약 일주일 정도 뿐이더군요. 머리가 짧아져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냥 나고, 내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 것은 아니더군요. 나를 둘러싼 환경도 그닥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 후 주욱 길러온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왔습니다. 펌을 한번 해본 것 외에는 딱히 손댄 적도 없어서 갈라지지도 않고 머릿결도 좋은 편이라 은근한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긴 머리를 자르러 간 것입니다. 동네 미용실에 갔더니 역시나 아주머니 몇 분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계십니다. 아는 이야기가 나오면 몇마디 거들까 싶다가도, 딱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거울만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긴 머리를 묶어 한번에 석석 잘라내는 걸 보시더니 아주머니들마다 다들 놀라 한마디씩 하십니다. 아가씨가 그 긴 머리를 아까운 줄도 모르고 왜 잘라내버리냐고. 그냥 한번 웃고 말았습니다. 그냥요.. 하고 작게 대답했지만 제 대답엔 처음부터 관심이 없으셨던 아주머니들 께서는 이내 다른 화제로 넘어가십니다.  

딱히 머리에 손댈 일 없었던 저는 미용실엔 자주 안와봤지만, 여자들이 스트레스가 쌓이면 미용실에 오는 이유는 알 것 같습니다. 가면 옷도 받아주고 혼자 고개숙이고 감기에 귀찮았던 머리도 감겨주고 머리자르는 언니가 살긋살긋 웃으며 이렇게하면 예쁘겠다 저렇게하면 예쁘겠다 하고 기분도 맞춰줍니다. 아주머니들은 정보 공유도 하시고 수다도 떠시구요. 물론 마치고 나서 머리모양이 마음에 안들면 좋았던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야 한순간이지만 말입니다.

오늘 제 머리는 성공적입니다. 딱히 5살은 어려보인다는 말에 혹해버린 것은 아닙니다. 내내 길었던 머리를 정리하고 나니, 아 이제 아침에 머리감기 힘들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듭니다. 목 언저리에 바람이 슝슝 지나가니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확실히 긴 머리로 가려져있던 목이 훤히 드러나니 훨씬 더 추워진 듯 합니다. 머리카락이 있고 없고에 따라 생명이 오락가락한다는 저 먼나라의 아가들을 위해 지난 겨울 손으로 떴던 모자가 떠오릅니다. 그 아가들 머리에 머리카락이 나서 아가가 따뜻해질 때까지는 모자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역시 머리카락이 있고 없고에 따라 느껴지는 추위의 정도는 다른가봅니다. 이게 지금 홀가분한건지 섭섭한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달라진 것은 없겠죠. 한 일주일은 보는 사람마다 헉, 하고 놀라겠지만 그걸로 끝일 겁니다. 곧 짧은 머리에 익숙해 질테고 곧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이 지나갈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쨌든 가벼워진 머리카락 덕분에 기분도 좀 좋아졌으니까요.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함께 깔끔하게 정리된 듯 싶기도 합니다. 6년 전, 첫사랑과 이별 후 머리를 자르고 나서 얼마 안있어 새 사랑이 찾아왔었습니다. 그때도 봄이었고, 아마 이맘때 쯤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시원스럽게 잘랐으니, 무언가 좋은 일이 찾아올 지도 모르지요. 가슴의 무거운 무언가를 잘라 내버린 기분이 듭니다. 막연한 기다림 저 아래에는, 빈 마음만큼을 채워줄 무언가가 생겨주길 기다리는데 자꾸만 힘든 일로만 채워져 일년에 흘릴 눈물 한달내 다 흘려내 지쳐버린 가슴이 있습니다. 먹은 나이만큼 눈물도 말랐구나 했는데 그것도 아닌가봅니다. 가뜩이나 순식간에 지나칠 봄인데 눈물이나 흘리고있기에 아깝잖아요. 좋은 일이 찾아올 거라 기대라도 해야합니다.

얼마 전 기분 좋은 초대를 받았습니다. 요새 사람도 안만나고 집에서도 동굴같은 방에만 틀어박혀 피지알만 뒤적이고 있는 저에겐 너무 설레고 약간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람 안만난지 너무 오래된 데다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는 잘 가지 않아 아직 날짜가 멀었는데도 가슴이 두근대고 긴장이 됩니다. 그래도 이 얼마만의 외출인가요. 은근 기대가 됩니다. 봄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신기한 일이 종종 찾아오니 말입니다. 친구에게 자랑했더니 넌 그런데 안 갈줄 알았어..하고 놀라더군요. 너무 의외여서 걱정이 된다는 눈빛이었습니다. 뭐 평소에 안하던 짓도 해보고 그러는거죠. 봄도 왔고, 머리도 잘랐으니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계신 모든 피지알러님들도 좋은 일이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봄이니까요.





- 유리별 드림.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4-19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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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ve
12/04/06 19:29
수정 아이콘
할때는 고달프고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추억이 된답니다 그리고 건강함이 최고입니다!
잘다녀오세요+_=
다음세기
12/04/06 19:42
수정 아이콘
바람이 분다.........
ⓘⓡⓘⓢ
12/04/06 19:43
수정 아이콘
올해의 봄은 없을것만 같았는데 봄이 오긴 오네요... 자연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가시눈
12/04/06 19:48
수정 아이콘
머리 감는게 귀찮아서 짧게 자르고 다니는 남자입니다만 긴 생머리하고 계신 분들 보면 귀찮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물도 많이 쓰고 샴푸도 많이 쓰고 말리는 시간도 많아 지고....제가 여자라면 정말 귀찮아서 못 살 것 같아요.
그나저나 요즘같은 봄날씨는 정말 싫으네요. 창문을 열고 달리면 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날씨가 참 좋은데 바람이 너무 추워요.
오늘 서류뭉치를 바람에 날렸는데 손 쓸 틈도 없이 20M 상공으로 날아가더군요;;
나이가 들수록 봄이 아쉬워지네요.
지나가다...
12/04/06 19:55
수정 아이콘
겨울을 싫어하는 저는 봄이 왔다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 자비 없는 바람은 대체..ㅡㅡ;;

참 신기한게, 머리는 자를 때마다 뭔가 기분이 달라집니다. 늘 같은 스타일로 잘라도요.
옷은 그럴 때도 있고 안 그럴 때도 있는데 머리는 늘 그렇다는 게 신기합니다. :-)
12/04/06 20:05
수정 아이콘
죄송합니다. 머리를 잘랐다고 써있어서 공포물인가 생각하고 클릭 했는데, 싱숭생숭 봄 생각 나게 만드는 글이었네요.
저는 휴가 때만 머리를(?) 자릅니다. 4개월, 한국을 들어가지 않고 깜박 했다가는 8개월 만에도 자르게 되다보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제 머리 길이를 보고 휴가 갈때 된 것을 가늠 하더라구요. 원래 한국인은 머리를 그렇게 기르냐는 둥..하면서 말이죠. 곧 있으면 이 곳 생활도 끝나고, 일년 내내 여름인 이 곳을 떠나 드디어 봄을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한 시점에 제 마음을 설레게 해 주는 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12/04/06 20:16
수정 아이콘
은은한 글 감사해요.
봄날.. 참 좋은 어감을 가졌어요.
Catheral Wolf
12/04/06 20:26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모두 좋은 인연이 찾아왓으면 좋겠습니다[옵레기]
리리릭하
12/04/06 20:40
수정 아이콘
여초사이트 PGR에 어울리는 감수성어린 글이군요. 달도 밝고 바람소리에 흔들리는 개나리도 아름답게 노란빛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사티레브
12/04/06 20:42
수정 아이콘
이글의 후기가 기대되네요
봄만큼이나 기분좋은 초대이길
봄보다 훨씬 길게 기분좋으시길
12/04/06 20:43
수정 아이콘
'봄이니까요.' 소소하고 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watervlue
12/04/06 21:00
수정 아이콘
저도 이제 늙나 보네요. 담담하고, 정갈하게 쓴 글을 읽고 코끝이 찡 해지네요.
오랜만에 찾아 온 봄을 계속 따뜻하게 보내시킬 빌게요.
양웬리
12/04/06 21:33
수정 아이콘
요즘 머리 커트에 정신을 쏟고있어서 이 글도 그런 글로 보였는데 이런 훈훈돋는 글일줄이야.. 좋은 글 셰셰!
12/04/06 21:3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정감 있는 어투에 태생적인 재능이 있으신 것 같아요.
주말 오후에 아는 누나랑 커피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거든요.
봄은 오는데 봄이 오질 않아요. 그래도 봄은 봄입니다.
친구가 여행을 다녀왔는데, 다녀오는 길에 젓가락을 선물해줬어요. 제가 여행갔다오는 분들한테 부탁하는게 젓가락이거든요.
물론 젓가락을 쓰지 않는 나라에 가는 분들껜 별 수 없는 부탁입니다만.. 아무튼 받은 젓가락에 일어로 뭐라 쓰여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했더니 좋은 인연을 만들어주는 젓가락이래요.
야 임마 젓가락 좀 좋은거 쓴다고 좋은 인연이 생기겠냐면서 너스레를 떨긴 했는데
그냥, 반반무많이, 아니 그냥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믿어보려구요.
참 아는 누나(는 커녕 아는 여자사람 또한)가 없는데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안물어보시는게 예의일겁니다 아마...
은하관제
12/04/06 22:27
수정 아이콘
바깥에 꽃도 보이는거 보니, 확실히 봄은 봄인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마음속에까지 봄이 온건 아닌것 같지만... 좋게좋게 생각해볼려 하는 중입니다 하핫.
산뜻하게 커트도 하신 지금, 유리별님께 찾아온 봄을 행복한 마음으로 따스히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
바늴라마카롱
12/04/07 01:47
수정 아이콘
제가 살고있는 창원엔 벌써 벚꽃이 만개했답니다 올해는 군항제가 빨리열려서 벚꽃 개화시기랑 안맞을줄알았는데 일주일사이에 벚꽃이 활짝 폈어요 흐흐흐 겨울내내 우울해서 내일은 진해 군항제가서 꽃구경도 하고 사람구경도 하고 그러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유리별님 글읽고 더욱더 가고싶어졌어요 봄이니깐요...
루크레티아
12/04/07 02:01
수정 아이콘
봄처녀 마음이 싱숭생숭하시군요.
뭐 그게 아직은 젊다는 증거랄까요?
一切唯心造
12/04/07 02:43
수정 아이콘
나이도 있고 여자도 아닌데 봄처녀마냥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말에 역시 난 이라는 생각도하고
이리저리 마음 속으로 재보기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봄바람이 찹니다 좋은 일만 생기시길
Absinthe
12/04/07 08:45
수정 아이콘
산뜻한 머리 스타일의 변화만큼 기분좋은 변화가 많은 봄날이 되시길 바래봅니다 ^-^
12/04/07 09:52
수정 아이콘
여성은 단발이 진리죠.
글 참 잘쓰십니다. 잘 읽고 가요.
필요없어
12/04/07 14:39
수정 아이콘
머리 자르러 간다 그러면 항상 "솜씨 좋은 망나니 근처에 있냐?"란 드립을 쳤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m]
12/04/07 21:39
수정 아이콘
4월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에 겨우내 얼어 있던 얼굴이 살며시 녹는다.



오늘 오후에 길을 걸으며 떠오른 생각으로 댓글 대신하겠습니다...좋은 글 잘 봤습니다...
王天君
12/04/20 00:20
수정 아이콘
봄은 원래 슬픈 계절 아닌가요? 이유없이 설레고 들뜨는 타인들을 보고 있자면 초라한 제 자신이 더 와닿아서 가끔씩은 화사한 꽃잎이 더 서러울 때가 있습니다. 따사한 햇볕도 벌과 나비들도 가끔은 부질없이 이쁘구나 하는 생각에 어깨에 힘이 빠져요.

그래도 유리별님께서는 새싹처럼 바깥으로 쑥 나오셔서 제가 만끽하지 못하는 눈부신 봄의 향연을 맘껏 누리시길. 전 호주에서 가을맞이 중이거든요. -_-
유리별
12/04/24 11:31
수정 아이콘
늘 슬프지만도 않은가봅니다. 많은 커플이 이별하지만 또 많은 커플이 생기는 시기이기도 하고..
뭐든 시작하는 계절이니까요. 부질없으면 어떻습니까. 이쁘니까 마음에 무언가 일렁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할 일 다한 애들인걸요.

호주에서 가을맞이라 쓸쓸하신가 봅니다. 곧 겨울이 오겠네요 _ 겨울맞이 잘 하시기바래요.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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