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4년, 후궁 두 명이 들어옵니다. 윤기견의 딸과 윤호의 딸이었죠. 그리고 이듬해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가 죽게 되죠. 그로부터 2년, 국모의 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새로 뽑느냐 후궁 중에서 업그레이드 하느냐(...)의 상황에서 후자가 선택됐죠. 좋은 후보가 있었습니다. 마침 성종의 아이도 임신한 상태였죠.
보통 그녀를 1445년생으로 보아 성종보다 12살이나 연상으로 봅니다만 태실(태반을 묻은 거요) 속의 태지문에는 1455년생으로 돼 있다고 합니다. 뭐 어찌됐든 성종보단 연상이죠. 같은 해 들어온 정현왕후 윤씨(중종의 어머니)는 어렸구요. 그녀의 집은 가난했고 아버지 윤기견도 일찍 죽어서 살기가 쉽진 않았을 겁니다. 나름 인생역전을 한 것이죠. 반면 정현왕후는 잘나가는 집안에서 잘 자랐구요.
이 때 그녀에 대한 평가는 후대와는 정반대입니다.
"숙의(후궁에게 내리는 품계, 종2품) 윤씨는 주상께서 중히 여기는 바이며 나의 의사도 또한 그가 적당하다고 여겨진다. 윤씨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 대사를 위촉할 만하다. 윤씨가 나의 이러한 의사를 알고서 사양하기를, ‘저는 본디 덕이 없으며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사전(四殿)에서 선택하신 뜻을 저버리고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고 하니,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 더 그를 현숙하게 여겼다."
대왕대비 정희왕후의 말입니다. 성종도 좋아하고 자기 맘에도 쏙 들었다는 것이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7월에 말이 나온 후 8월에 바로 왕비가 됐고, 11월에는 아이를 낳습니다. 후의 연산군이었죠.
국모가 됐겠다, 다음 왕이 될 아이도 낳았겠다, 그녀의 인생은 이제 탄탄대로였습니다. 윗분들이 많긴 하지만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갈 분들이었죠. 그야말로 최고의 시간이었겠습니다만... 그런 행복은 채 1년도 가지 않았습니다.
"오래 사니 별 일 다 보게 되는구만."
성종 8년 3월 29일, 정희왕후는 대신들을 불러 이렇게 말을 꺼냅니다.
"이달 20일에 감찰 집에서 보냈다고 일컬으면서 권숙의의 집에 언문을 던지는 자가 있었는데, 주워 보니 정소용(정 3품)과 엄숙의가 서로 통신하여 중궁과 원자를 해치려고 한 것이다."
여기선 정소용이 한 짓인 것 같은데 임신 중이니 나중에 국문하겠다고 합니다만, 이게 윤씨가 꾸민 일이라는 게 드러났죠. 얘기는 계속됩니다.
"하루는 주상이 중궁에서 보니 종이로써 쥐구멍을 막아 놓았는데, 쥐가 나가자 종이가 보였고, 또 중궁의 침소에서 작은 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열어 보려고 하자 중궁이 숨겼는데, 열어 보았더니 작은 주머니에 비상이 들어 있고, 또 굿하는 방법의 서책이 있었다."
비상, 독약입니다. 윤씨는 자신의 종인 삼월이가 바친 것이라 했고 삼월이가 이를 실토하면서 모든 게 드러나버렸죠.
"중궁이 옛날 숙의로 있을 때 일하는 데에 있어서 지나친 행동이 없었으므로 주상이 중하게 여겼고 삼전(세 대비)도 중히 여겼으며, 모든 빈들 가운데에 또한 우두머리가 되기 때문에 책봉하여 중궁을 삼았는데, 정위에 오르면서부터 일이 잘못됨이 많았다. (중략) 지금에서 본다면 전일에 잘못이 없었던 것은 주상이 주적(왕비)이 없으므로 각각 이름을 나타내려고 했을 것이다."
중전이 되자마자 "잘못된 일"이 많았으니 예전에는 일부러 착한 척 했을 거라는 거죠. 그녀는 설마 왕을 헤치려는 건 아닐 거고 첩들을 제거하려는 것이라고 추측했고, 이런 투기를 지적합니다. 원래 제후의 예로 아홉 명까지는 허용돼 있는데 이를 투기하는 건 문제라는 거였습니다.
그녀는 마무리로 "이미 국모가 되었고 원자가 있는데 어쩔까?"라고 합니다만 이미 뜻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중전을 폐하는 것이었죠. 답은 정해져 있고 니들은 대답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성종은 자기가 직접 듣고 아는 것이라며 니들은 그 죄를 논하라고 명령했죠. 하지만 신하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었죠. 이미 애가 태어났고, 왕이 될 몸이었던 겁니다. 옛 일을 상고해야 되니 사기의 후비전을 들고 왔는데, 거기서도 태자가 위태로우니 이 일을 들춰내지 말라는 대목이 나왔죠.
"옛날에 폐하지 않아야 할 것을 폐하였다가 잘못된 것이 있고, 마땅히 폐해야 할 것을 폐하지 않음으로 해서 옳은 경우도 있었는데, 질투하는 것은 부인의 상정입니다. 전하의 금지옥엽이 장차 번성하려 합니다. 그러니 미리 헤아릴 수 없으며, 원자가 지금은 비록 어리다 하더라도 이미 장성한다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마지막 부분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죠 (...) 김효강은 이를 걱정하며 별궁으로 보내서 한 2~3년간 반성하게 하자고 건의합니다. 하지만 성종은 빈으로 강등, 바깥으로 보내려 했죠. 그 방법에 대해서도 성종은 종묘사직에 고하고 신민들에게도 이를 포고하려 했고, 신하들은 여자에게 투기는 당연한건데 왜 그렇게 스케일 키우냐고 막았죠. 결국 성종은 짜증내며 4주 후 아니 내일 다시 얘기하자고 합니다.
다음 날, 성종은 이렇게 말을 시작하죠.
"내가 반복해서 생각해 보니, 이 문제는 투기만이 아니다. 가지고 있는 주머니에 비상이 있었으니, 비록 나를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국모의 의범을 잃는 것이 심하다. 별궁에 두는 것으로는 징계하는 뜻이 없다."
여기서도 신하들은 계속 반대했고, 빈으로 강등하되 사제로 내쫓지는 않는다는 것으로 합의를 봅니다. 그리고 그 날로 바로 내쫓을 준비를 했고, 가마까지 준비된 상황에 갑자기 좌승지 이극기와 우승지 임사홍이 달려왔죠. 좀 세게 나왔죠.
이극기
- 어제랑 오늘 재상들 불러 회의했다는데 뭔 일인지 몰랐습니다. 근데 지금 들으니 중궁을 강등한다매요. 뭔 죄 저질렀는지 모르겠는데 종묘에 죄를 고한다고 빈으로 깎아야 됩니까? 거기다 중국에도 이를 알렸는데 폐하면 또 중국에 알려야 되는데 뭐라고 할 건데요? 또 사방 백성들에게 말해야 되는데 또 뭔 말로 할 건데요?"
꽤나 까칠하게 나왔죠. 성종은 일단 더 들어줍니다. 이번엔 임사홍이었죠.
임사홍
- 중궁이 잘못한 건 맞다고 보구요. 지난 9년간 궁에서 별 일 없었으니 이것도 좋은 일인데요. 지금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원자가 있는데 폐하면 어쩌려구요? 뭘 잘못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중국에도 세번째로 중궁 세웠다고 하면 쪽팔리지 않을까요? 거기다 전에 중궁을 칭찬하는 교서를 반포했는데 갑자기 이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데요? 원자 생각해서 세 번만 더 생각해 보세요.
이에 성종은 독약과 저주 건 등을 말하지만 이들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특히 임사홍이 강하게 나왔죠.
"여러 소인들이 한 것을 실지로 알지 못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 등은 죄가 없다고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만일 대강(大綱)을 논한다면 나라의 근본이 지극히 중합니다"
윤씨가 한 게 아니라 아랫것들이 제멋대로 한 것일 거다, 그래도 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원자를 생각하자, 지금 쫓았다가 나중에 뉘우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그냥 별궁에서 죄 뉘우치게 하자, 투기하는 건 당연한 거고 딱히 중요한 거 아니다, 옛날에 세종 때도 세자빈 쉽게 내좇았다가 평생 후회했다...
성종은 이런 공세에 결국 gg를 칩니다. 맞는 말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습니다. 애 때문에 내쫓을 수 없게 된 것이었죠. 이들의 재결합을 기대하긴 어려웠죠. 이 해와 폐출 얘기가 다시 나오는 성종 10년, 그녀는 자신의 생일임에도 하례(축하례)를 받지 못 합니다. 대신들이 개인적으로 선물을 보내는 정도였죠. 그녀의 입지가 어땠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조선의 국모가 된 이후 8개월, 아이를 낳은 후 4개월, 대체 뭐가 그렇게 바뀌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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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 사건에서 강조되는 것은 역시 인수대비입니다. 야사(기묘록)에서도 폐출 이후 반성했나 알아보는 과정에서 그녀가 끼어들어 나쁜 쪽으로 왜곡했다고 적고 있죠. 때문에 조선시대 고부갈등의 대표적인 예로 보는 것입니다.
둘의 성향이 상극이긴 했습니다. 인수대비는 그 유명한 내훈을 지은 이였죠. 거기다 윗사람에게는 잘 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강압적으로 다스려서 세조 내외도 그녀를 폭빈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사람 밑에서 며느리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나는 홀어미인지라 옥같은 마음의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이 때문에
[소학] [열녀] [여교] [명감] 등 지극히 적절하고 명백한 책이 있으나 복잡하고 권수가 많아 쉽게 알아 볼 수가 없다. 이에 이 책 가운데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뽑아 일곱장으로 만들어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어머니로서의 마음으로나 조선시대 여인의 대표격으로나 가장 중요한 아랫사람을 보는 마음으로나 그녀가 며느리에게 바란 건 컸을 겁니다. 하지만 윤씨는 그녀를 만족시키기엔 너무도 부족했죠.
하지만 최초의 폐출 논의에서 이게 결정적이었을 거라 보진 않습니다. 일단 너무 빨라요.
인수대비의 이미지는 성종의 배후에서 정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때도 그렇죠. 한문도 잘 아는 인텔리에 야심도 컸으니 그럴 것이다... 고 합니다만 그녀가 전면에서 뭘 했거나 성종을 뒤흔들었다거나 하는 건 그닥 보이지 않습니다. 딱 하나 있죠. 불교 문제. 그녀는 여기에서만큼은 계속 교지를 내리며 반대했고, 신하들은 "왜 여자가 정치에 간섭하냐"면서 억불을 밀어붙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성종에게 기형 닭이 태어난 건 왕이 여자 말 들어서 그런 거라고 했겠어요. -_-;
다른 일에서도 이랬다면 그게 기록돼 있을 건데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불교 문제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과장돼서 만들어졌겠죠.
다만 궁 안에서는 영향력이 꽤 크긴 했을 겁니다. 이건 유교에서 여자에게 허락된 권력, 여자가 지배하는 집 안이었으니까요. 이 점에서 정희왕후와 성종에게 윤씨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하긴 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너무 빠릅니다. 애초부터 윤씨가 마음에 안 들었다는 식의 추측(이라기보단 그렇게 쓰면 재밌으니...)은 있지만 과연 그럴까 싶어요. 그녀가 처음부터 그렇게 미워했고 영향력이 그렇게 컸다면 아예 중전이 되지도 못 했을 겁니다. 반면 단 몇 개월 동안 윤씨가 달라진 게 없었는데 폐출 논의까지 갈 수도 없었을 거구요.
애초에 윤씨를 인정한 정희왕후와 성종이 단 몇 개월만에 태도를 바꾸게 된 것, 이건 원인을 윤씨에게서 찾아야 되는 것이죠.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 - 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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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봐야 돼서 여기까지 (=-_-)= 글이 뭔가 써지니 약속이 있네요. 약속 있을 때 글이 잘 써지는 건지... 이런 거 생활의 참견에서 본 거 같은데요.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2-05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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