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3/06/19 20:09:57
Name 밥과글
File #1 수정됨_IMG20230619170400.jpg (81.9 KB), Download : 11617
File #2 수정됨_IMG20230619170339.jpg (74.6 KB), Download : 11610
Subject [기타] [추억] 나의 기억들 (수정됨)




  

제 기억 속 아버지는 상당히 무책임하고 무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업을 실패하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돌아다니는 사이 저희 집안은 시집도 안 간 어린 고모의 손에 맡겨졌지요.  엄마와 저, 할머니는 고모가 벌어오는 월급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고모는 그런 빠듯한 삶 속에서도 조카인 저를 듬뿍 아껴주었는데요. 90년대 부산에서 상당히 유명한 장난감 가게에서 일하면서 틈만 나면 저에게 장난감을 사주었습니다.  오죽하면 월세 살이를 하면서 주인집 아들보다 제 장난감이 훨씬 고급스럽고 숫자도 많을 정도였으니까요.  고라이언(우주용사 볼트론),  고자우라(무적캡틴 사우르스) 등 당시 영-실업 이라는 곳에서 수입해 오던 온갖 로봇 장난감이 제 손에 있었습니다.

고모 덕분에  웬만한 집안에도 없던 게임기가 어린 제 손에 들어왔는데요  .  고모가 게임과 기기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장난감 가게에 들어온 정발판 게임기를 사준 것이기 때문에,  고모도 게임에 대해 잘 모르고 너무 어린 나이였던 저 역시도 비디오 게임기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해 활용도가 떨어졌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미 슈퍼 패미컴(현대 슈퍼 컴보이)가 출시된 뒤로 장난감 가게 한 켠에 있던 오래된 정발판 패미컴(현대 컴보이)를 사준 것은 슈퍼마리오1 이나 닌자거북이 등을 하면서 잘 활용했는데,  세가 세턴의 정발판을 고모에게 선물 받고도 게임팩을 산다는 개념이 없어서 몇 년동안 소닉3D 만 하다가 처박아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천추의 한이 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엄마와 고모를 얼마나 고생시키고 있는지 몰라 마냥 아버지를 좋아했지만,  집안 돌아가는 사정을 깨닫게 된 나이서부터는 사춘기와 더불어 아버지를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섭섭함은 한 가지 게임에 얽힌 사연으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파랜드 택틱스2 라는 PC게임이지요

이 역시 초등학교 때 고모가 사준 물건 입니다.  저에게 컴퓨터가 생기자 고모가 직접 직장 근처의 게임 가게로 달려가 애들이 할만한 게임을 추천 받은 끝에 구입해서 선물해 준 소중한 게임이었습니다.  고모가 선물이 있다는 말에 할머니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고모 회사 근처까지 부리나케 갔던 기억이 납니다. 품에 파랜드 택틱스2 정품 패키지를 안고 집에 올 때 그 두근거림을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하네요

그런데 비극적이게도 파랜드 택틱스2는 저희집 컴퓨터에서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원인을 생각하면 메모리 부족 탓이었습니다.  멀쩡하게 돌아가다가 여주인공이 비키니 컨테스트에 참여하는 대목에서 튕기는 증상이 있었습니다.  당시까지도 아버지를 믿고 있었던 저는 컴퓨터 가게를 하는 친구가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소중한 파랜드 택틱스2 CD를 맡기며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한 달, 일 년.  아무리 기다려도 지금은 바빠서 안되겠다는 말만 종종 내뱉던 아버지는 결국에 "어? 내가 그 시디를 어디다 뒀더라?" 라는 한마디와 함께 저를 영원히 실망시켰습니다.  지금도 파랜드 택틱스2를 제일 좋아하는 게임으로 손에 꼽는 만큼 그 당시 아버지가 게임을 고쳐주지도 못하고 CD까지 잃어버린 것은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걸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게 너무 서운했고요

몇 년이 지난 뒤 문방구 가게에서 파랜드 택틱스2의 번들 시디를 발견한 저는 그제서야 파택2의 정상적인 엔딩을 보게 됩니다.  몇 년 사이 제 컴퓨터의 스펙도 올라갔기 때문에 문제없이 진행이 되더군요.  지금 보면 심플하기 그지 없는 게임이지만 저는 아직도 파랜드 택틱스2의 엔딩곡을 들으면 아련한 마음이 흐르며 눈물이 납니다.

아버지의 무심함과 고모의 사랑을 대비시키며 ,이 글을 장식할 사진은 파랜드 택틱스2의 번들 시디였습니다.  그런데 서랍을 뒤지다보니 웬 묵직한 물건이 들어차 있더군요.  악튜러스의 정품 패키지 시디였습니다. 6장이나 되는 두툼한 두께의.  

어떻게 이렇게 까맣게 잊고 살았나 할 정도로 새삼스러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 정품 게임은 아버지가 제 값을 주고 백화점에서 사다준 것이었습니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던 아버지는 종종 돈이 생기면 좋은 과일과 고기를 들고 집에 들르곤 했습니다.  차라리 생활비를 달라며 타박하는 어머니에게 혼이 나면서도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 날도 고급스러운 과일을 구하기 위해 백화점에 들렀다가 무심코 전화를 걸었던 것이겠지요

"너는 뭐 갖고 싶은 거 없냐?"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이런 식으로 제 손에 들어온 게임이 두 어개 더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꺼낸 악튜러스를 가동시켜 봤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아버지에게 악튜러스를 사달라고 했던 계기,  서정적인 오프닝 음악과 함께 화려하게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을 다시 볼 수 있었지만 게임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더군요. 윈도우10의 영향일까요?
까맣게 잊어버린 게임 내용을 곱씹어보기 위해 나무위키를 켰습니다.  제 기억 속의 악튜러스는, 길 찾기가 짜증나는 것 말고는 훌륭한 대작인데 누군가가 분석한 바로는 단점이 많은 미완의 게임이었습니다.   항목을 모두 읽은 이후 게임을 재밌게 한 저조차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정확한 지적들이었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쉽게 탈락하기도, 윤색 되기도 하는구나 .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곱씹습니다.  어린 시절 우주 명작이라고 생각했던 게임은 단점을 많이 지닌 불완전한 작품이었고,  서운한 기억만 앞서던 아버지는 제법 비싼 게임 패키지를 아들에게 덥썩 안겨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파랜드 택틱스2를 할 수 있었던 컴퓨터도 아버지가 맞춰준 물건이었을 겁니다.

저는 고모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보답한 적이 없는 철 없는 어른 입니다.  게임에 대한 추억들을,  어려운 가정 형편에 비해 과분할 정도로 쌓을 수 있게 해주었던 주변 어른들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아마 저보다 더 괜찮은 환경 속에서도 부모님의 눈치코치나 야단 속에서 겨우겨우 게임을 해야 했던 분들도 있겠지요.

오늘은 어른들께 전화 한 통 돌려야겠습니다.





  





  


* 아야나미레이님에 의해서 게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12-04 23:19)
* 관리사유 : 좋은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valewalker
23/06/19 20:26
수정 아이콘
악튜러스 패키지가 설정일러스트집도 엄청 고퀄로 동봉됐었는데 어릴땐 그런 부록들의 가치를 잘 몰랐어요.
구매했던 게임글의 매뉴얼, 부록들을 다 그냥 책장에 꽂아 놨었는데 이사갈때 부모님이 다 버리고 저는 나중에 엄청 후회했죠 ㅠㅠ
밥과글
23/06/19 20:30
수정 아이콘
전 부모님이 책이나 게임들을 그렇게 버린 적이 없습니다. 게이머로써 행복한 가정환경 이었네요.
사진 속 악튜러스도 설정집이 같이 남아 있더군요
서린언니
23/06/19 20:28
수정 아이콘
뭘 해도 재미있는 시절이었습니다. 중간에 튕기던 진행불가 버그가 있던 간에요 ...
밥과글
23/06/19 20:31
수정 아이콘
튕기고 멈추던 걸로는 악튜러스보다 소맥 게임으로 고생을 많이 했네요 크..
及時雨
23/06/19 21:40
수정 아이콘
글이 참 좋네요.
밥과글
23/06/20 06:0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알콜부이
23/06/20 10:29
수정 아이콘
들어봐요~ 눈을감고~ 듣지못한 듣지않던 소리~~~
악튜려스 주제곡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알콜부이
23/06/20 10:30
수정 아이콘
아직도 찾으면 있네요
https://youtu.be/VULZdIe1QUA
23/06/20 18:07
수정 아이콘
옛날 얘기를 들으니 저까지 아련하네요. 고모님은 정말 .. 좋으신분이었네요 ㅠ
밥과글
23/06/21 07:03
수정 아이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모에게는 지금도 신세지고 있습니다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공지 추천게시판을 재가동합니다. [6] 노틸러스 23/06/01 30594
3758 [역사] 산업혁명이 만든 기네스, 과학혁명이 만든 필스너우르켈 [27] Fig.15346 23/08/10 5346
3757 오래 준비해온 대답 [17] 레몬트위스트5187 23/08/08 5187
3756 나는 운이 좋아 칼부림을 피했다. 가해자로서든, 피해자로서든 [45] 상록일기5441 23/08/04 5441
3755 몇년이나 지난 남녀군도(+도리시마) 조행기 [4] 퀘이샤4929 23/08/03 4929
3754 사극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방원에 대한 이성계의 빡침 포인트에 대한 구분 [29] 퇴사자5035 23/08/02 5035
3753 권고사직(feat 유심) [60] 꿀행성14817 23/07/30 14817
3752 가정 호스피스 경험기 [9] 기다리다13095 23/07/28 13095
3751 만년필 탄생의 혁신, 그리고 두 번의 뒤처짐 | 워터맨의 역사 [12] Fig.112733 23/07/26 12733
3750 교사들의 집단우울 또는 분노 [27] 오빠언니13084 23/07/22 13084
3749 초등학교 선생님은 힘든 것 같다... 아니 힘들다 [98] 아타락시아112915 23/07/20 12915
3748 제로 콜라 그럼 먹어 말어? [71] 여왕의심복13669 23/07/14 13669
3747 밀란 쿤데라, 그리고 키치 [10] 형리11801 23/07/13 11801
3746 [역사] 설빙, 샤베트 그리고 베스킨라빈스의 역사 / 아이스크림의 역사 [42] Fig.111838 23/07/11 11838
3745 중국사의 재미난 인간 군상들 - 위청 [26] 밥과글11833 23/07/10 11833
3744 펩 과르디올라는 어떻게 지금 이 시대의 축구를 바꿨는가. [29] Yureka11850 23/07/01 11850
3743 [기타] [추억] 나의 기억들 [10] 밥과글12201 23/06/19 12201
3742 [역사] 김밥은 일본 꺼다? / 김밥의 역사 [29] Fig.112619 23/06/28 12619
3741 자영업자 이야기 - 직원 뽑기에 실패하였습니다. [46] Croove12825 23/06/26 12825
3740 흔한 기적 속에서 꿈이가 오다 (육아 에세이) [14] 두괴즐13548 23/06/12 13548
3739 imgur로 피지알에 움짤을 업로드해보자 [8] 손금불산입13458 23/06/01 13458
3738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겪은 버튜버 걸그룹 "이세계 아이돌" 감상기 [49] 잠잘까16321 23/06/14 16321
3737 아이가 요즘 열이 자주 나요 (면역 부채와 열 관리 팁) [62] Timeless15390 23/06/10 1539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