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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연금된 지도 벌써 달포 가량이 지났다. 그러나 사실상 연금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두터운 강철로 만들어진 육중한 방문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잠금장치가 아예 없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문에 기대었던 광통령은, 문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스르륵 밀리는 바람에 꼴사납게도 바닥 위에 자빠져 뒹굴어야 했다. 문 맞은편의 감시병은 그런 소란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꾸벅꾸벅 졸고만 있었다. 광통령은 머쓱하게 일어나 먼지를 팡팡 털어낸 후, 방으로 돌아가 얌전히 문을 닫았다.
‘배포가 큰 녀석이다.’
광통령은 싱긋 웃었다. 적어도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는 안목은 있었던 셈이다. 비수를 발탁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그는 기분 좋게 눈을 감고 낮잠에 빠져들었다. 연금된 이후로 할 일이라고는 오로지 자면서 꿈을 꾸는 일밖에 없었다.
그는 꿈에서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을 보았다. 마에스트로. 저그의 지배자가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물리치고 있었다. 가우스 소총을 난사하면서 뒤로 물러서는 테란의 해병대. 그 위로 시뻘건 독극물이 퍼부어지고, 저글링과 히드라리스크들이 잔인무도하게 덤벼든다. 테란의 병력은 서글플 정도로 처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온 몸에 땀과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전멸 직전의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테란 지휘관의 얼굴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광통령은 몇 차례나 그와 더불어 대결전을 치른 적이 있었다.
‘나다.......’
광통령은 쓰게 웃었다. 그는 자신이 인정한, 몇 안 되는 호적수 중에서도 단연 으뜸가는 인물이었다. 그의 부대는 강인했고 그의 전략은 자유로웠다. 서로의 명운을 걸고 사투를 벌이면서도, 또한 종족을 뛰어넘어서 그들은 서로를 존중했다. 그런 상대가 마에스트로에게 저토록 처참히 짓밟히고 있다니. 마에스트로의 병력은 바야흐로 나다의 본진을 향해 일제히 진군하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커맨드 센터를 향해 퀸이 날아가고 있었다. 광통령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일어나셨습니까? 주무시고 계신 동안 잠시 실례했습니다.”
광통령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벽 저편의 의자에 앉아 있는 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를 펴고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자못 자신감 있어 보였다. 잘생긴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미소가 한 가닥 얹혀 있었다.
“비수인가. 이거 오랜만이군.”
“예.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바빠서 도무지 찾아올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런. 바빴던가? 내 소문에 듣기로는 어디선가 빈둥거리고 다닌다고 들었네만.”
광통령은 놀려대듯 말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빈정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프로토스의 새로운 지도자가 마에스트로와의 결전을 앞두고 행성 푸켓으로 휴가를 떠나 버렸다는 소문이 전 행성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 소식에 분노하여 비수를 탄핵하는 자들도 있었고, 만사를 포기한 듯 해탈한 사람들도 있었다. 광통령은 어떤가 하면, 그저 그렇거니 하고 생각하는 축이었다. 사상 최강의 적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그런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편이 사기 진작에도 더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비수의 표정이 광통령의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비수의 눈빛은 불과 한 달 전에 비해 훨씬 깊어진 듯했다. 젊은 패기에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충분한 휴식 뒤에야 싸울 힘도 나는 법이지요. 물론 충분히 먹기도 해야 할 테고. 저와 함께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대통령궁의 전속 요리사가 광통령이 연금된 방으로 음식들을 들여왔다. 전속 요리사 엄식신. 전 우주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요리사지만, 요리 도중에 자꾸만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는 바람에 살이 쪄 버렸다는 악명 또한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요리솜씨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맛깔나게 요리된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비수가 물었다.
“아까, 꿈을 꾸셨습니까?”
광통령의 예지몽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꿈을 꾸는 자. 그는 종종 꿈을 통해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차원의 현실을 목격하곤 했다. 그러한 예지몽은 종종 광통령에게 믿기 힘든 극적인 승리를 안겨주곤 했다. 또 그 예지몽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광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에스트로와 나다를 보았네. 치열하게 싸우고 있더구먼.”
“나다 말입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차원에는 없지. 아마도 다른 차원을 본 모양이네.”
“그렇습니까. 그렇더라도 그 둘의 대결이라면 상당히 흥미롭겠습니다. 혹시 결과까지 보셨습니까?”
광통령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비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마에스트로가 그를 압도했네.”
두렵지 않은가? 광통령은 눈빛을 통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웃음. 뜻밖에도 비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웃음이었다. 비수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역시 마에스트로답군요.”
식사를 끝낸 후 비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하지만 오래 앉아있지는 못하겠습니다. 마에스트로의 병력이 국경 가까이 접근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때가 왔는가. 광통령은 생각했다.
“아군 병력과의 조우 예정일은?”
“그게....... 내일입니다.”
광통령은 잠시 비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비수는 농담이나 흰소리를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장군은 그를 가리켜 ‘항상 웃고 있지만 알고 보면 정말 재미없는 애늙은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광통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터무니없군. 그런데도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응?”
광통령은 흠칫 놀랐다. 언제나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 비수의 얼굴이, 일순간 엄숙함으로 뒤덮였다. 비수는 일어선 자리에서 발뒤꿈치를 붙이고 똑바로 섰다. 그리고 광통령에게 낮지만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패배하면, 프로토스의 뒤를 부탁드립니다.”
“자네......!”
“뻔뻔한 이야기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말고는 부탁드릴 이가 없습니다.”
광통령은 말을 잇지 못했다. 비장함, 항상 웃음으로 가려 왔던 비수의 얼굴 뒤에 숨겨진 비장함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목숨을 걸었단 말인가. 광통령은 눈을 크게 뜬 채 비수의 얼굴만을 응시했다. 비수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의 프로토스 지도자들의 눈빛이 공중에서 뒤엉켰다. 그러다 일순간, 비수의 비장함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그의 얼굴은 다시 웃음을 띠었고 엄숙한 비장함은 그 뒤로 완전히 감추어진 후였다. 그는 마치 농담이라도 하듯 명랑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물론, 지고 돌아올 생각은 없습니다. 어렵게 잡은 권력을 그토록 쉽게 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요.”
그 말을 남긴 채 비수는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문을 나간 그가 팔을 뒤로 돌려 문을 닫기 직전, 뒤에서 광통령의 외침이 들렸다.
“지지 마라!”
비수는 잠시 그대로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군에 입대한 이후로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일순간에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그는 여기 서 있었다. 마에스트로와의 결전을 앞둔 채. 비수는 다시 눈을 떴다. 광통령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난 그대에게 패배를 가르친 기억이 없다.”
“저도 패배를 배운 기억은 없습니다.”
비수는 싱긋 웃으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기운찬 걸음걸이로 걷기 시작했다. 전쟁 준비를 완전히 끝마친 프로토스의 전 병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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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3일 토요일,
곰TV배 MSL결승전 김택용(P) 대 마재윤(Z)
경기시작 18시간 전의 설레발.
* anistar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3-03 2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