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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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은 후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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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급히 계산대 아래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허둥대면서 나오다가 무릎을 부딪치는 바람에 아파서 눈물마저 핑 돌았지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밖으로 따라 나갔다. 밖은 여전히 비가 억수처럼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원래부터 비에 젖어 있던 그는 불과 몇 초 사이에 목욕탕 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완전히 푹 젖어 버렸다. 물론 나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뭔가 누런 종이를 꺼내더니 오른손으로 움켜쥔 채 내게 물었다.
“사고가 난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세요.”
나는 막연히 횡단보도 쪽을 가리켰다. 그러다 손을 내젓고는 다시 말했다.
“아니, 횡단보도에서 한참 저쪽으로 갔었어요. 트럭에 치여 튕겨나는 바람에......”
그 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바람에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에 흥건한 빗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손님은 좌우를 살피더니 횡단보도 옆으로 걸어갔다. 나는 머뭇거리면서도 뒤를 따랐다. 경찰이 그려놓은 흰색과 주황색 선이 보였다. 아이가 치인 후 그대로 트럭에 깔려버린 곳이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아직도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는 것만 같아 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손님은 오히려 앞으로 걸어가 경찰이 그려놓은 윤곽선 바로 앞에 섰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더니 품속에서 뭔가 누런 종이를 꺼내 오른손에 움켜쥐었다.
“혹시 차가 오는지 좀 봐주세요. 위험하니까.”
그러더니 그는 우유팩을 들고 있는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 누런 종이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그 위에 겹쳤다. 그리고 무어라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하면서도 그가 시킨 대로 차가 오지는 않는지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늦은 밤이라 그런지 달려오는 자동차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일순간, 손님의 손 사이에서 불길이 확 일어났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손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양손을 아래로 내렸다. 세찬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불길은 그대로 공중에 뜬 채 잠시 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우유팩도 누런 종이도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뒷걸음으로 물러나 다시 보도로 올라오더니 내게 몸을 돌렸다.
“완전히 젖어 버렸네요. 어서 들어가죠.”
그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제야 나는 몹시 춥다는 걸 깨달았다. 한참 더운 여름철이었는데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빗물을 흠뻑 뒤집어쓴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몸 안 깊은 곳에서부터 한기가 돌았다. 턱이 저절로 덜덜 떨릴 정도였다.
나는 급히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그도 뒤를 따라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짓단에서 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나는 창고에서 수건을 꺼내 머리와 팔다리를 닦고, 손님에게도 다른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담요를 찾아내 일단 몸에 둘둘 감았다. 온몸이 격렬하게 부들부들 떨렸다. 뱃속에 얼음덩어리가 들어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손님은 물에 젖어 축 늘어진 재킷을 벗더니 온장고에서 뜨거운 음료를 둘 꺼내왔다. 하나는 내게 주고 자신도 병을 하나 땄다.
“따뜻한 걸 마시면 좀 나아질 겁니다. 이건 제가 사는 걸로 할 테니 걱정 마시고요.”
농담 섞인 목소리에 겨우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흘리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뜨거운 커피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몸에 온기가 약간 퍼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양손으로 커피 캔을 움켜쥔 채 더듬더듬 말했다.
“왜, 왜 이리 추, 추운지, 모르겠네, 요.”
“영적인 냉기라 그렇습니다. 음(陰)한 영을 접하셔서 그래요. 조금만 있으면 다시 괜찮아질 겁니다.”
영적인 냉기? 영? 무슨 괴기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게 있으니까. 그렇게 담요를 뒤집어쓰고 한참을 부들부들 떨고 있자 간신히 추위가 가라앉으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는 수첩 하나를 꺼내 뭔가를 적더니 다시 수첩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나는 물었다.
“아까, 뭐죠?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손님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생각하신 그대로일 겁니다. 그 아이가 누군지는 아시죠?”
“귀신?”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터무니없이 쉽게 나왔다. 손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사고로 죽은 그 아이입니다.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있더군요. 낌새가 느껴지기에 조만간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마침 여기서 마주치는 바람에 영을 달래준 겁니다.”
절반 이상은 못 알아들을 그런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절반만으로도 충분했다. 요컨대 귀신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다. 나는 황급히 물었다.
“그럼, 이제 다시는 안 나타나요?”
편의점에 귀신이 또다시 나타난다니, 생각만 해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손님은 고개를 저었다.
“안 나타납니다. 이제 저 세상으로 갔어요. 아까 초코우유 보셨죠?”
“예? 예.”
초코우유. 분명히 그 아이의 귀신이 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손님이 계산하고 그 아이에게 주었다. 하지만 귀신이 우유를 마셨다니 이상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초코우유를 마시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다니, 초코우유가 무슨 귀신 쫓는 부적 같은 거라도 된다는 말인가? 내 머릿속에는 의문이 넘실댔다. 손님은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등을 벽에 기대더니 말을 꺼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겠지만 옷도 말릴 겸 설명을 하지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저승으로 갑니다. 하지만 때로는 저승으로 가지 않고 이승을 맴도는 경우도 있어요. 그걸 흔히들 귀신이라고 하고, 저는 대개 영(靈)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영은 어떻게 해서 생기느냐? 보통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이 영이 됩니다. 그 한은 죽음에 대한 억울함일 수도 있고, 입어보지 못한 옷에 대한 미련일 수도 있고,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슬픔일 수도 있고, 자신을 죽인 사람에 대한 복수심일 수도 있어요.
영이 생기는 원인이야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이승에 남아 그걸 해소하고 싶어 한다는 거지요. 그런 한이 강한 영들은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실체화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애꿎은 사람들을 해치기도 합니다. 원래는 영적인 세계에 있어야 할 존재들이 이승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제가 하는 일은 그런 영들을 다시 저승으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하는 일?”
“이것도 나름 직업입니다. 꽤 드문 직업이지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보다는 힘들지만, 그래도 벌이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는 잠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조금 전의 그 아이도 갑작스러운 죽음이 너무나 억울했던 겁니다. 이제 일곱 살.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먹고 싶은 것도 많았고 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목숨을 잃어버린 거죠. 그래서 쉽사리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에 남은 겁니다.”
손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눈가에 주름이 졌다.
“그 아이가 편의점 안에 나타났을 때는 저도 놀랐습니다. 분명히 도로에서 사고가 났다고 들었거든요.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영들은 대부분 사망한 장소 부근을 떠돌아다니는 지박령(地縛靈)이 됩니다. 그래서 으슥한 밤이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섬뜩하게 하거나, 심하면 다른 사고를 일으키기도 하지요. 하지만 편의점에 나타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말을 걸었죠.”
“말을 걸었다고요?”
나는 놀라서 엉겁결에 물었다. 그러나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예. 물어봤습니다. 왜 여기에 온 거냐고.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더군요. 상당히 두서없는 이야기였지만 가만히 듣고 있자니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평소에 제일 좋아하던 걸 먹고 싶어서 왔다고 하더군요. 실은 사고가 나기 전에도 먹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마침 용돈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사먹지 못하고 그냥 집에 가다 변을 당한 겁니다.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에요.”
“그 먹고 싶었다는 게......”
“초코우윱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영이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 한을 풀어주면 저승으로 떠난다는 것이지요. 제가 한 일이 그겁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주었지요. 한은 풀렸고 아이의 영은 이제 저승으로 갔습니다. 이제는 이승에 남아 있지 않아요. 아마도 제삿날에나 가끔씩 올 겁니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느덧 냉기는 가시고 몸의 떨림도 멎어 있었다. 나는 아이가 초코우유를 마시던 소리를 떠올렸다. 편의점 바닥에는 우유팩이 떨어지면서 흐른 초코우유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어쩐지 슬픈 느낌이 들었다.
손님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더니 냉장고에 걸쳐 놓았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제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네요. 슬슬 가봐야겠습니다.”
그는 지갑을 뒤적이더니 천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뜨거운 음료의 값이었다. 그리고 명함도 하나 주었다. 앞뒤가 새하얀 종이에다 붓글씨 같은 글씨체로 이름과 연락처만이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혹시라도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연락 주세요. 그 때는 아마 점장분께 비용을 청구하겠지만요.”
그는 웃으면서 우산을 펴 들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사라지자 몸을 돌려 창고로 들어갔다. 빨리 마르도록 수건과 담요를 펴서 걸어놓고, 대걸레를 가지고 와 물투성이인 바닥을 청소했다. 초코우유가 흐른 흔적도 깨끗이 닦아냈다. 그날 날이 밝아오고 아침시간 아르바이트생이 교대하러 올 때까지, 손님이라고는 더 이상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며칠 후 소문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사고를 낸 트럭 운전사는 음주운전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죄를 물을 길은 없었다. 그도 결국 병원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동네 주민들은 술 마시고 운전하는 바람에 한꺼번에 두 집안이 사단이 났다며 수군댔다. 불행 중 다행으로 트럭이 회사 소유였기에 회사가 아이의 집안에 보상금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그 돈으로 아이의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 후로도 나는 편의점에게 계속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이의 영이 다시 나타난 적은 없었다.
어느 날, 수척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가게에 들어왔다. 그리고 초코우유 하나를 계산하고 우유팩을 손에 든 채 밖으로 나갔다. 나는 기묘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자 나는 문으로 다가가 유리 너머로 아주머니를 몰래 살펴보았다. 그녀는 사고가 났던 곳 근처로 걸어가더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우유팩을 가만히 도로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 있다가 손등으로 눈가를 몇 번이나 훔쳤다. 나는 계산대로 돌아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