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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01/06 22:30:10
Name kama
Subject [연재]Daydreamer - 13. 이방인(1)
  일요일. 일주일을 정하고 그 시작인 날을 휴일을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선포령으로 생겨난 역사 깊은 공식적 휴일. 하지만 휴일, 즉 쉬는 날이란 뜻에서 쉰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일요일 날 거리에 붐비는 사람들을 보면 현재 한국인들은 과거 화려한 축제를 즐기던 로마인들과 비슷한 의미로 해석하는 듯 보인다. 뭐, ‘쉰다 = 자거나 하면서 기력을 회복 한다’라는 해석으로 침대와 소파에서 스톤 폼(Stone Form)을 하여 수많은 주부들의 혈압을 올리는 남편들도 존재하긴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온 도시를 시끄럽게 뒤흔드는 일요일이라 하더라도 하루 종일 요란스러운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행동주기가 있는 법, 특히 일요일을 일종의 방비책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금요일 밤과 토요일 하루 동안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많기에 정작 그들 대부분이 정신을 잃고 누워있을 일요일 아침의 번화가는 평일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한산한 법이다.
  적어도 몇 분전까지는. 서울 외곽의 한 건물에 가게를 여는 사람에게는 꽤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조용한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가게 오픈을 위해 마무리 작업을 하던 그들은 난데없이 들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음에 어떤 이는 의자를 떨어트리고 어떤 이는 행주를 밟고 넘어지는 등 각자의 개성있는 방식으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일단 그 뒷수습을 끝마치고선 각자 자신들의 위치와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면서 도대체 어느 가게가 이런 파격을 일으키는 지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 난청을 겪는 이는 없었기에 진원지는 곧바로 밝혀졌다. 건물 2층에 위치한 PC방. 이 사실은 알고선 나이가 많은 부류는 이런 아침부터 사람들이 PC방에 몰리다니 나라가 망할 징조라 개탄을 하였고, 젊은 부류는 그들이 토요일 날 밤을 새고선 나오는 일행이라 판단하면서 추억으로는 밝게 남아있는 학창시절을 그리워하였다.  
  물론 정작 PC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같은 빌딩에 있는 이들이 자신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알았다고 해도 그냥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이들이 예의가 없어서나 남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그런 사소한 오해에 관심을 둘만한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수능을 치루는 고등학교나 최종 면접을 보는 회사에서나 느껴질 긴장감들이 PC방의 내외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더욱 절박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지금 찾아온 기회는 한동안 없었으며 앞으로도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기회였으니. 대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찬밥 신세를 당한지 꽤 되었다고는 해도 세계적으로는 온오프로 많은 대회들이 개최되고 있다. 오히려 어떨 때는 시즌이 겹쳐서 복잡한 문제를 낳기도 하니 좀 정리가 필요한 정도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외의 오프 대회는 주로 단기간에 집중되어 있고, 온라인 대회는 규모도 작고 국내에선 대중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장기간의 출연과 큰 상금, 그리고 대중적으로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대회로 이런 대회에 나가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 경력에 따라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PC방에 모인 모든 이들은 이번 예선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올라가야 한다는 각오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긴장감이 더해서 살기에 가까울 정도로 흉흉한 기운이 휘몰아치는 그 안에서도 여유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순한 관계자들이 아닌 선수였지만 그들은 충분히 그럴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김진호는 분노했다.

  “에라, 부러운 녀석들아! 아주 신났구나!”

  “켁, 그렇게 부러우면 형도 우승해요!”

  “힘들면 준우승해도 됩니다.”

  “그래, 잘 났다!!!”

  세계의 워3인들이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더 매지션, 안현호의 목을 조르던 진호가 투덜거리면서 팔을 놓자 현호는 조금 오버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이에 옆에서 구경을 하던 최성훈은 그의 등을 두드려줬고, 이번에는 자신이 목을 내주고 말았다. 잠시 이런 식으로 티격태격하던 세 명은 날카로워질 만큼 날카로워진 주변 인물들의 말 그대로 베는 듯한 눈초리를 받고서야 다시 점잖고 존경받는 워3게이머로의 모습을 선보였다.

  “하긴 어떻게 보면 기회인 셈이지. 예선에 참여한다면 자리를 뺏을 가능성이 매우 큰 인간이 둘이나 빠지는 상황이니까. 아니, 덕분에 한 장이 줄어버렸으니 손해인가.”

  이번 대회는 16강으로 진행되고 저번 3위까지 시드를 주어 세계 예선에서는 총 13명의 선수를 뽑고 있었다. 참가권을 전 세계로 어떻게 분배를 하느냐도 세계대회를 치루는 운영 측의 고민 중 하나인데 아무래도 한국과 중국을 주 타겟으로 하는 대회다 보니 그 동안 두 나라의 선수들에겐 4장의 티켓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번은 우승자, 준우승자가 모두 한국 선수라는 점을 감안하여 한 장 줄어든 3장의 출전권이 한국에 주어졌다.

  “사실 중국이 4장인 것을 생각하면 굳이 깎을 필요가 있나 싶지만 말이죠.”

  “뭐 어쩔 수가 없지. 게다가 이젠 중국을 우습게 볼 수도 없고 말이야. 나와 성훈이는 이번에 중국에서 점점 발전하는 실력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왔지. 기반이 단단해지고 넓어지면서 이제 더 이상 2-3명이 이끌어 나가는 그런 모습이 아니야. 무서운 신예들이 많이 치고 올라오고 있어.”

  “그리고 아무리 너라 하더라도 리허는 조심해야 할 것 같더라. 내가 그에게 져서 말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전성기 인 듯 보여. 더욱이 너는 언데드에 좀 약한 편이었잖아.”

  “으음, 그런가. 몇 몇 선수 것만 리플레이로 봤는데 좀 더 살펴봐야겠네. 진호 형, 중국은 WEG 예선했나요? 결과는 못 봤던 것 같기는 한데.”

  “아직. 내가 알기에 한국이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 현 상태면 리허는 거의 올라올 것 같기는 하지만.......또 모르는 게 예선이지.”

  진호는 고개를 돌려서 PC방 내부를 바라보았다. 아직 예선이 시작되지는 않았고 1조와 2조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 말도 없이 모니터에 집중을 하면서 마지막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다. 가끔 뭔가가 답답한 지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가던가, 긴장을 한 탓인지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리는 선수의 모습도 보였다. 그래도 관계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눈다던가, 벽 한쪽에 조잡해 보이는 진행표가 걸려있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전체적인 광경 자체는 일반적인 PC방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보통사람이라면 워3만 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한 마음에 종업원을 찾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풍경들. 하지만 그 안에서 그들처럼 격전을 펼쳐야 하는 입장이라 그런지 그는 PC방 내부를 보면서 머리카락 끝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워3게이머는 그다지 전망이 밝은 직종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그나마 기업팀 스폰을 받으면서 안정적인 연봉이 가능해진 스타에 비하면 워3게이머는 아직 프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도 어려운 수준이다. 수입은 사실상 상금. 그런 상황에서 장기적인 리그에 진출하는 것은 상금은 물론이거니와 약간의 출연료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어준다. 한국과는 달리 유럽과 중국 쪽에서는 스폰서와 국가주도의 차원으로 팀들이 운영이 되므로 그런 팀들에 소속이 되면 상황은 나아지지만 어차피 그런 지명도를 얻기 위해서는 오프라인 대회가 가장 큰 기회임은 변함이 없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워3게이머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라가야하는 기회인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서의 대회는 한동안 없었고 앞으로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이번 예선에 임하는 자세들도 남다를 것이다.

  ‘기회라.’

  그는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실내에 있는 모든 선수들이 각자의 이유로 심한 절박감을 느끼고 있을 터이지만 사실상 그 자신만큼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벌써 26살. 게이머로는 정년퇴직이 눈앞에 있다고 해도 무방한 나이다. 단순히 손놀림이 느려진다던가 하는 신체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의미라면 진호는 충분할 정도의 전성기 기량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문제는 사회적인 점이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도 슬슬 대학교 졸업과 취업을 준비해야 할 기간. 그동안 몸담았던 학생의 신분에서 사회인으로 독립을 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물론 그는 사정상 대학을 쉬며 게이머로서 이미 사회에 발을 내밀기는 했지만 그가 들어간 사회는 안정성과 반사이익이 좀 심하게 부족한 영역이니. 그는 중국의 한 팀에도 소속되어 있었고 과거에 벌어놓은 상금도 꽤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런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슬슬 잔치를 끝낼 시간이 오는 것이지.’

  그렇기에 더욱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정말로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니까. 머리로는 떠나야 할 때라고 느끼면서도 몸은 아직 이 자리에 남아있고 싶다는 욕심을 지니었다. 리그에 진출한다면, 그래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면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절충안 정도의 기능은 발휘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그 순간.

  “형!”

  “응?”

  자신을 부르는 성훈의 소리에 좀 생각을 많이 했나보다 하면서 현실세계로 시선을 돌린 그는 곧바로 자신의 다리에 날아 들어온 충격에 숨을 멈추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사고회로에 마비가 왔지만 ‘누가 이런 짓을!’ 이라는 궁금증은 곧바로 해소가 되었다.

  “중요한 예선을 앞두고 있는 인간이 그렇게 멍해 있으면 어떻게!”

  워크래프트3 게이머들 중에서는 원로에 속하는 그에게 이런 행동과 이런 말을 동시에 할 인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더욱이 어조와 내용과는 매치가 잘 되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할 사람은 더더욱. 그는 다리를 쓰다듬으면서 앞에 있는 여성을 쳐다보았다.

  “만나자마자 차버리는 것은 뭐예요, 누님.”  

  “중요한 예선이 있는 사람이 연습도 안하고 노인네처럼 앉아있으면 그렇지.”

  진호는 살며시 한 숨을 내쉬었다. 뭐 이리 오지랖이 넓은지. 하긴 그렇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달려들어서 게임 전문 기자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뭐, 확실히 대단한 일이기는 한데 실제로 만나고 다니다 보면 그 대단함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이래 보여도 나름 생각이 있는 것이에요. 전 6조 시드라 한참 후에 시합을 하는데 지금부터 긴장을 하면 어떻게 버텨요. 지금은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쉬는 게 좋다고요.”

  “으음, 나름대로 생각이 있구나. 완전히 얼어버린 줄 알았는데. 열심히 하라고! 난 이 일을 맡기 전부터 네 팬이었으니까.”

  “어라, 누님. 여자친구 있는 사람은 포기하고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좋지 않겠습니까? 여기 어리고 멋진 남자가 하나 있는데 어떻.......큭!”

  아아, 내가 맞았던 게 저거였나 보구나. 그래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정확한 정강이 차기에 맞을 만했으니 그런 거겠지. 현호도 일말의 동정심 없는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아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지영 씨가 안 왔네? 어쩐 일이야? 그렇게 금실이 좋더니만.”

  “금실은 무슨 금실이에요. 다른 일이 있어서 못 온 것뿐이에요. 원래 데려오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왜? 사랑의 힘은 위대한 법이잖아?”

  “.......애인도 없으면서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지 마요. 전 지금 선을 추구하는 스님의 심정으로 이 곳에 왔단 말입니다.”

  “흐음, 여자는 정신을 흐트러트리게 하는 원흉이다, 이거구나. 어떻게 한담 이렇게 멋진 연상의 여인이 찾아왔으니. 자, 윤하 씨라고 다정스럽게 불러봐~.”

  “.......후우.”

  “야! 너 지금 무시했지!”

  “그러니까 저런 인간은 제쳐두고 여기 젊은 청년이 있으니.......아야!”  

  방관자였던 현호가 ‘이 사람들이 과연 워3란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이 사회 자체가 어딘가 이상한 것은 아닌지 그런 의심이 드는 광경이었습니다.’라는 후일담을 남겨도 이상하지 않은 장면들은 역시나 긴장감으로 살기가 번뜩이는 1-2조 선수들의 찌릿찌릿한 시선과 조용히 좀 해달라는 운영 측의 요청을 받아 PC방 바깥으로 쫓겨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진호는 다시 언제 그랬다는 식으로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여기 이렇게 있어도 되요?”

  “응? 무슨 말이야?”

  “어차피 우리랑 이렇게 노닥거리려고 온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워3예선은 기사도 사진도 올라가지 않으니 보나마나 그를 취재하러 온 것 아닌가요?”

  “아, 그게, 사실은 말이지, 말하자면.......큰일 날 뻔 했네! 조 예선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인터뷰를 해놨어야 했는데.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 진출하면 특별히 인터뷰 두 줄 더 추가해 줄께.”

  할 말은 모두 끝내고 나올 때만큼이나 재빨리 뛰어 들어가는 윤하를 보고 진호는 혀를 찼다.

  “저러니 연상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지. 어떻게 안 잘리고 잘 버티고 있구나.”

  “하하, 그런 점이 매력 포인트 아니겠어요?”

  “어이, 성훈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현호는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항상 진실을 추구하는 사나이죠.’라고 떠드는 것을 무시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확실히 화제 거리가 되는 모양이네요. 하긴 워3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번 기사를 볼 만한 내용이긴 하지만요.”

  “그래, 관계자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 주목을 받을만한 사건이지. 그러니까 주최측에서도 예외를 인정해서 참가시킨 것일 거고. 대회 홍보도 되겠다, 나쁠 건 없지.”
    
  “제가 보기에는 설마 하는 마음에 그런 것 같은데 말이죠. 무엇보다 예선만으로는 큰 이야깃거리가 안 되잖아요. 진짜 화제가 되려면 본선에 올라와야겠죠.”

  “그래, 온라인 예선을 통과했으니 실력이야 있겠지만.......”

  진호는 시선을 PC방 쪽으로 돌렸다. PC방 간판이 크게 붙어있는 유리문 틈 사이로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여기서 올라가는 건 3명. 세계에서도 비교할 곳이 없는 워3 최강국, 그 중에서도 알아주는 인물들만 모인 이 자리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지켜보자고.”

  진호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현호 역시 살짝 입 꼬리를 올리면서 진호의 어깨를 짚었다.

  “난 형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더 궁금한걸요?”

  .......진호의 미소는 곧바로 사라졌다. 과도한 긴장도 좋지 않지만 과도한 방심도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헤드폰을 쓰고 워3의 효과음을 듣고 있음에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마우스를 누르는 소리가 귀를 아프게 자극한다. 물론 PC방의 양산형 장비들이라 그런 것은 아니다. 예선에서도 자신만의 전용 장구를 챙겨 오니까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평소에 사용하던 것들이다. 그럼 왜 이럴까? 물론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겠지. 진희는 살며시 헤드폰을 벗었다. 예전에 느꼈던 감정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 혹은 크게 혼날 짓을 하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불려갔을 때 했던 생각들.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상관없으니 얼른 시작이나 해라! 라는 외침을 지금도 내지르고 싶어졌다. 사실 수십 명의 사람이 몰려있는 가운데 정확하게 딱딱 준비가 되어 시작을 하는 것은 컴퓨터란 기계가 사용되지 않는 분야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고, 그도 이런 저런 예선 현장을 다녀봤기에 예선시합이 정각에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의 차이는 꽤나 멀다. 관계자가 지나갈 때마다 이제 시작인가, 라는 생각에 눈을 번뜩이다 세팅 문제임을 알고선 기운이 빠지는 것도 이제는 지칠 정도.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긴장감만 높아지고 온 몸의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서서 자신이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에도 짜증이 날 정도가 된 것이다.

  ‘민혜가 온다고 했을 때 그냥 오라고 할 걸 그랬나.’

  막상 그녀가 말을 꺼냈을 때는 신경이 쓰여 정신 사나워질까봐 거절을 했는데 차라리 같이 대화라도 나눌 상대가 있으면 좋았을 것인데, 라는 후회가 생겼다. 다른 게이머들과 모르는 사이는 아니고 평소에는 대화를 나누거나 장난을 칠 정도로 친한 사람들이 꽤 있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서로 같이 예선을 치르는 입장에서는 서로 신경이 날카로운지라 터놓고 이야기하기도 난감했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 연습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장에 붙을 선수는 물론 같은 조에 있는 선수들의 리플레이를 어떻게든 구해서 연구하였다. 게임도 꾸준히 하고 작은 대회들에도 꾸준히 모습을 보이며 경기력 유지에 신경을 썼다. 그러니 지금은 억지로 게임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잠시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더 좋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행이랄까, 규모가 큰 PC방이었기에 머리를 식힐 만한 휴식공간이 존재했다.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음료수 자판기도 있고 책들-대부분 게임이나 컴퓨터 관련 잡지지만-도 놓여져 있는 아늑한 공간이.
   이미 선객이 있었는지 자판기 옆 쓰레기통에는 꽤 수북하게 캔들이 쌓여있었지만 그가 들어갔을 때는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한 목적이니 그런 상황이 감사할 뿐. 진희는 시원한 음료수 하나 뽑아 들고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PC와 다른 선수들에게서 거리를 벌려놓으니 그나마 여유가 생기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혼자서도 잘 했잖아?’

  그는 음료수를 마시면서 예전 일을 생각했다. 그가 유일하게 방송무대를 밟아봤던 그 때의 첫 예선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신인이었으니까. 아는 길드원들 중에도 나온 사람도 없었고, 그는 도심지에 갓 올라온 풋내기 시골청년과 같은 낯설음을 느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지금과 다른 하나의 차이점이, 아주 커다란 차이점 하나가 존재했다. 쉽게 말해 그 때는 긴장을 할 정도의 정신조차 없었다. 그의 앞에는 라이센 신, 신의식이라는 커다란 산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존재는 진희에게 막강한 부담감과 함께 결정적인 집중력도 선사해주었다. 지금 붙을 상대가 약해, 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저번 대회를 우승한 안현호나 준우승한 최성훈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이 무대에서 신의식이라는 남자와 비견될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더욱이 그의 뒤에는 가연이도 존재하였다. 그녀의 몫까지 합하여 그가 지니고 있던 각오는 그 이전까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촉진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줄 중심대도 없다. 이에 적응을 하고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세우는 것이 진정한 고수로 가는 길임을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그걸 해야 하는지를 파악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응?”

  다 마신 음료수를 빙빙 돌리며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있던 순간, 진희는 누군가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예선 시작을 알리러 온 운영요원인가 싶었지만 상대를 바라보고 나선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어리다. 무엇보다 가슴에 있는 명찰이 선수임을 그에게 알려줬다. 자신처럼 머리를 식히러 온 건가.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상대를 살며시 살펴보았다. 순하게 생겼군. 처음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곧바로 들었다. 살이 붙어 동글동글하지는 않았다.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평이한 인상. 하지만 크고 둥그런 눈과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미소를 내보이는 입가로 인해 상대방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그런 생김새였다. 그는 살짝 의아함을 느꼈다.

  ‘이런 사람이 있었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선수들의 명단을 잠시 떠올렸다. 물론 아마추어 고수들의 얼굴 모두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온라인 예선을 통과하여 직접 오프라인에 나올 만한 인물들, 특히 그 중에서 앞의 남자처럼 자신과 연령이 비슷한 선수들은 대충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워3의 경우 현재 대부분의 선수들이 오리지널, 혹은 프로즌 쓰론 초창기에 시작하였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이들이 별로 없어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하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는 경우는 만나보지 못한 선수들도 꽤 많으니.’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진희는 자신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고 그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임을 파악했다. 그냥 웃으며 넘어갈까? 그게 무난하고 속편할 것 같았지만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대화는 긴장을 푸는 좋은 수단이 되는 법. 그는 살짝 심호흡을 하고 가능한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보이길 바라면서 입을 열었다.

  “예선에 참가하는 선수죠? 어디서 올라온 거 에요?”

  “.......”

  .......반응이 없다. 순간 자신을 무시했다는 생각에 진희는 발끈하였지만 상대의 표정을 보자 곧바로 수그러들었다. 무시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저렇게 서서 난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겠지. 진희는 혹시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딱딱하고 깔깔했는지, 얼굴을 찡그려서 험악하게 보인 건 아닌지 검토를 했지만 딱히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상대는 당황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조용히 자판기 쪽으로 향하였다.

  ‘예의가 바른 것 같기는 한데......설마 말을 못하는 건가? 벙어리?’

진희는 당황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판기 앞에서 멈춰 서서 동전을 꺼내려는 듯이 주머니를 뒤지다가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잔돈이 없었던 모양이라 생각한 진희는 일단 자기 주머니 안을 확인한 후에 자판기로 가 천 원 한 장을 넣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라 상대가 꽤 놀란 듯 뒤로 물러나서 좀 난감하기는 했지만 선의는 통한다는 생각에 천 원을 다 넣은 후 자판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괜찮으니까 하나 골라요. 음료수 하나 정도는 사줄 수 있으니까요.”

  상대는 몇 번이고 손을 흔들면서 거절을 하다가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점을 떠올렸는지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에야 음료수를 받았다. 거참 이런 거 가지고 그렇게 예의바르게 굴면 오히려 미안해지는 법이라고. 진희는 자신이 오히려 더 쑥스러워지는 느낌에 머리를 긁적였다. 상대는 가뜩이나 순해 보이는 얼굴을 더욱 부드럽게 하고선 살짝 웃으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낯선 소리. 진희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이 기본 상식 정도로 알고 있던 일본어임을 깨달았다. 아, 그래서 말을 아꼈던 것이구나. 하긴 언어가 다른 장소에 오면 그럴 수밖에.......그는 잠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럼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일본인이라는 말인가? 아니, 바로 옆 나라기도 하고 관광객이건 사업 관계건 많은 이들이 한국에 들리기도 하니 일본인을 만난다고 해도 놀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 장소가 일본인을 만나기에 가장 안 어울리는 그런 장소가 아닐까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1부 : Romance
1. Boy meet Girl
2. Boy meet Guy?
3. 남매
4. 데이트
5. 발을 내밀다
6. 예선 7일전
7. 끝과 시작
8. Log Bridge
9. 그리고

  2부 : Daydreamer
prologue
1. new challenger
2. 각자의 이유  
3. 한국으로
4. meet again
5. 한여름날 어느 복도
6. 東과 西
7. The Benissant
8. 교점(交點)
9. 파란 하늘
10. collision
11. 신의 아들
12. Like&Love





  이거야 원, 늦었다고 할만한 것도 아니군요. 12화가 8월 27일에 올라왔으니 거진 4개월ㅡㅡ;;; 늦어질 것 같기는 했는데 이 정도로 늦어질 줄은 저도 상상 못했습니다. 글을 잘 안쓰다보니 원래부터 별로 없던 글쓰는 재주가 완전히 굳어버린 걸까나. 다음 화는 적어도 이보단 빨리 올리겠습니다........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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