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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01/07 00:42:07
Name 지구공명
Subject 그를 기다리며
내가 항상 존경해마지않으며 바라보고 있는 저 위의 치열한 싸움터에서는 지금도 승자에게 쏟아지는 영광과 패자의 눈물이 격렬한 불꽃과 함께 교차하고 있다. 가장 위에 군림하며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자에서부터, 짊어진 명예에 걸맞는 승리를 취하기 위해 눈을 번뜩이는 노장,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분투하는 약관의 기사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수많은 이들이 흠모하며 또 열광하는 영웅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운데에서도 내가 찾는 단 하나의 그림자가 없기에 나의 눈동자에는 공허함만이 비춰지는 것 같다.          

오래 전, 그와 내가 피차 새파랬던 시절.

그는 강한 에너지를 내뿜는 청년이었다.  마치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작은 돌멩이나 거치적거리는 바윗덩이, 꼿꼿하게 등을 펴고 맞서는 거목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도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들이 항상 나타나곤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노도와도 같은 자신의 에너지를 통해 그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곤 했다.

거칠지만 망설임이 없고, 서투름에서 나오는 작은 빈틈들을 그 뜨거운 호기로 채워 메꾸는 그 투사의 모습은 내가 선망하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세상에서 언제나 많은 것들에게 치이고 부딪히며 살아가는 나, 그리고 우리들이 그런 그의 모습을 선망하며 상쾌하게 불어닥치는 바람을 그리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필연이었다. 그만큼 그가 가진 강력한 에너지는 언제고 형태와 이름을 갖춰 세상에 드높아질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젠가의 그 날, 생각했다. 누군가가 생각했다. 저 자는 바람이다. 그치지 않고 불어닥쳐와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고 정상에 도달할 바람이다. 온갖 티끌들을 쓸어버리는 위대한 바람을 무엇이라 부르던가?


그는 그렇게 폭풍이 되었다.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정상 가까이 도달한 그 시절의 폭풍에게 거칠 것은 없어 보였다. 고고한 검으로는 폭풍을 벨 수 없었다. 강력한 마법으로도 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고 그는 그 높은 위치에, 가장 위대한 곳의 발치 앞에서 누구보다 먼저 도달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폭풍이 위대한 자리에 발자국을 남기기까지 이제는 다만 거대한 하나의 장애물만이 남아 있었을 뿐.

누구보다 약하고, 누구보다 더뎠으며, 누구보다 보잘것없었던 어떤 자들의 제왕. 스러져가는 왕국의 암운 앞에 미약한 희망을 싣고 작은 방주를 띄워 고난을 이겨내고, 몇 번의 영광을 차지한 뒤 끝끝내 가장 위대한 자리 앞에 도달한 또 한 사람의 영웅.  

강하고, 현명한 자다. 폭풍의 추종자들은 모두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도 그의 백성들은 너무나 약했다. 위험이 닥치면 장작개비처럼 무너질 작은 병사들에 불과해 보였다. 지금껏 그네들이 맞서 이겨온 그 어떤 위험들보다 더욱 위대한 위험이 여기에 있거늘 무엇을 걱정해야 하는가? 다만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면 강한 의지를 담은 채 날카롭게 빛나는 황제의 두 눈 뿐.그 눈마저 거센 폭풍에 감기고 나면 모든 것은 끝이 날 터였다.

천하의 이목이 모인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었다. 폭풍은 어느 때보다 강한 힘을 머금고 꼿꼿하게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황제를 향해 내달렸다. 폭풍의 위세가 사그라들 때도 있었지만, 제왕의 군사 역시 비명과 함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많은 피가 흩뿌려지고 시간은 흘러 폭풍은 결국 길을 멈추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의 눈은 끝끝내 감긴 적이 없었다.


폭풍이 패배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내가 그를 바라보았을 때 쓰디쓴 패배를 맛본 젊은 투사의 영혼은 그래도 요동치고 있었다. 또 한번 폭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거대한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도, 그를 믿는 우리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느꼈다.
    
얼마 후, 폭풍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고 조용히 다시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위대한 자리 앞에서 등을 돌린 뒤, 또 한 번, 또 다시 한번.......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세상에도 내 가슴에도 답답한 무언가가 많이 쌓이게 되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대지를 휩쓸며 내 가슴을 뚫어줄 폭풍을 기다렸다.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결국 내가, 그가, 우리가 바라보는 저 위대한 정상에 닿기 위해 그는 이 언저리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기다림이 축축한 무언가로 변해 가슴 속에서 쏟아지려는 무렵, 문득 작고 갸날픈 바람이 나의 지쳐 숙인 고개를 스쳐 저 아래로 사라져갔다. 진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풍기며.
나는 그 작은 바람을 쫓아 달렸다.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도착한 장소에는 한 때 폭풍이라 불렸던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누구보다 많은 티끌을 끌어안은 채로, 그 무게에 쫓겨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힘없는 모습으로.

나는 조용히 지쳐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 대신 내가 그를 기다렸던, 언제나 그가 있었던 장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상의 언저리, 위대한 정상의 끝에서 가장 가까운 그 장소를.

많은 기다림에 고달픔도 쌓여가지만 그가 다시 한번 나를 정상의 언저리로 인도해줄 것을 믿고 있다. 이윽고 그 언저리 위 가장 높은 자리에 도달하리라는 것 역시도.  

저 높은 곳, 저 신성한 장소에서 젊고 아름다웠던 누군가의 모습을 그리며,

나는 오늘도 폭풍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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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박성준 선수의 경기를 본 뒤에 그에 대한 그리움이 더더욱 사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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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히어로(변
07/01/07 00:51
수정 아이콘
저또한 폭풍의 바람을 다시금 누구보다도 느끼고 싶습니다.
생머리지단
07/01/07 01:04
수정 아이콘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죠
홍진호 선수 아직 젊으니까요. 지금 잠시 왕좌에서 내려와 있지만 언젠가 끊임없이 몰아치던 폭풍왕의 위용을 되찾을거라 믿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저그의 왕좌는 아직도 홍진호의 자리라고 믿고있으니까요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고했으니까, 한번더 추스리고 싸워서 이겨내길 바랍니다
스타판에서 이루어질 사상 최고의 드라마 주인공이 되길 바라면서
바람이 한번만 더 불기를 바라면서
토스유저는 이만
07/01/07 01:25
수정 아이콘
한쪽 피시방이라도 탈출하는 기적을 보여주세요 폭풍 화이팅 !!!!!!
07/01/07 02:00
수정 아이콘
샤오님// 기적이라뇨 ㅠㅠ 당연히 탈출할겁니다!!!
힘들겠지만 금방 이기고 다시 폭풍을 불러 일으킬거라고 믿어요
홍진호화이팅!
07/01/07 16:35
수정 아이콘
아. 정상의 언저리에 다시 한번 폭풍을 느껴보고 싶네요.
폭풍 힘내세요~!!

그리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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