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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8/19 06:42:45
Name 루미큐브
Subject [일반] 검은아침
정말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특히 무언가 계획을 잡아나가는 것, 전체적인 트리를 총괄하고
세부적인 가지에 잎파리까지 모든 것을 구현해야 하는 기획이라는 놈은
사람을 잡아도 몇 번을 잡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6시
어제 취침시간은 아침을 우유에 커피를 말아서(?) 대충 때우고
오전 8시부터 10:30분까지의 간이침대에서의 잠, 그리고 22시간이 흘러서
또 다시 맞이하게 되는 오늘의 아침은 안개가 심하게 끼어서 아무것도 안보이는
검은아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내가 짤 수 있는 한계는 이정도인데
예측/실행 가능한 모든 항목 중에서, 단계별로 걸러야 할 항목을 걸러야 하나?
아니면 심층적인 진행에 대한 예측이 꼬이게 되면, 차라리 All-map 으로
하나하나씩 무식하게 옵션을 찾아서 나가야 하나... 등등등의 고민

자게에 어제 글을 남긴 어떤 분은 기획을 배우러 직장을 그만 두시고 유럽으로 유학을 가신다네요?
뭐 자신의 하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가신다는 열정이 부럽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내심 말리고 싶었다지요

아무튼 인간의 머리 한 두를 기름틀로 짜내서 나오는 결과물의 품질엔 한계가 있더군요
기발한 생각을 가진 신인들도 처음엔 좋은, 그럴듯한 실행폼이 나오지만
일년에 한 두가지를 자신이 하고 싶은 열정을 보태서 하는 학생때와 이 곳은 분명 다릅니다.

나오면 실시간대로 미친듯이 짜내기를 강요당하죠, 회의시간 필 받으면 3-4시간은 기본이고(그렇게
회의를 줄여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은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도 똑같습니다
요새 몇몇 IT계에서 운영하는 스마트폰 업무조율? 이런거 없습니다. 면상갑론상박토론난상식의
회의가 없으면 굴러가지가 않아요)

팀장에게 불려가게 되면 고쳐야 할 것 투성이
본부장에게 불려가게 되면 '내가 지금 실무를 잡아도 너보단 잘 하겠다' 라는 핀잔과 비아냥
이만저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중앙제어가 아닌 24시간 내내 연구실의 개별냉방기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이런걸로 행복을 찾다보니 사람이 참 구차해지는 느낌입니다.
술과 담배를 아예 안하는 몸인지라, 그렇다고 간식거리만 들이 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죽어라 스타를 보고 워크경기를 보고 그러는거죠, 적어도 선수들의 플레이에 몰입하면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날도 덥고, 지금 하는 일에 회의감도 들고 그래서 사람이 지치는지
요새들어 기획서나 입찰제안서를 쓰는게 마음대로 안되는 느낌입니다.
덕분에 농어촌공사의 새만금 모니터링 입찰건은 공중으로 분해되 버렸죠
나름 2달 발품팔아 조사하고, 없는 인맥 끌어다가 연구인력 편성하고 그랬는데
연구단장이란 사람이 딱 한마디 하더군요

"야.. 우리 아무래도 안되겠다. 공사에서 다른데 줄 놈을 미리 찜해놓고 있었나봐?"

"............................"(그렇게 15분간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 봤다는)

그런데 나중에 검토해 보니 내용이 좋지가 못했습니다. 다른데서 사정사정해서
받아온 지원서를 보니까 "아니 얘내들 여기까지 생각했어??" 라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지더군요
어떻게 보면 '적장에게 감명 받은 상황' 입니다. 섬뜩하지요, 자만과 패기로는 이루는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레벨이 가진 깊이의 바닥을 알게 되면 답은 두 가지입니다.
포기하거나, 정진하거나  

아무튼 계속 오류만 나고, 원인은 모르겠고.. 그런 상황이 몇 달 반복되니까 자꾸 사람이 중간중간에
쓸데없는 행동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그냥 일이고 뭐고 내선 살짝 뽑고 소파붙여서 눈붙이고
요새도 WCG 본답시고 곰TV켜고 점심부터 3시까지는 그냥 제껴버리고 있습니다.

최근 이런것들을 들여다 보면서 느낀게
"매너리즘이나 백워커리즘에 빠진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입니다.
평소 트위터를 너무 좋아하시는 박용만 두산 회장님이 일과시간 중에 트위터를 하다가
어떤 Follower 분의 뜨끔한 질책을 받으셨다지요? "일 안하세요? 회장님?" 이라고
그래서 집중할 수 있는 업무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야근에 적응하다 보니
할당량을 조금씩 늘려서 편 다음에 잘라먹는 식의 업무가 자꾸 진행되는게 아닌가라는 분석을 해 봅니다.

자아비판이라는 게 누가 시켜서 강압적으로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어가는 사회금언 중심의 체제도
어느곳에서는 존재하지만, 마음을 다잡으려면 정말 독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일만 열심히 하면 프로가 될 것이라는,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순진하고 고지식으로 일관했던 적도 있었지만
차라리 요령만 붙어서 능구렁이 처럼 스스로를 굴려나가며 안개낀 아침을 뜬눈으로 보는 지금보단
기계처럼 죽어라 한 가지를 독파하는 그 때가 훨씬 그리워지는 거야 어쩔 수 없나봅니다.

요령이라는 열매는 정말 선악과보다 더 달콤하고 무서운 겁니다. 열심히 해야 하는건 알고 있지만
그 열심이라는 게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모피어스의 알약 두 개를 놓고
오늘도 직장인들은 고민하지요, 젊은신인들이야 select 냐 new 냐 겠지만, 벌써부터
여기서 stop 이냐 아니면 continue 냐 고민하게 되는 제 자신이 왠지 싫어지는 아침입니다.


나는 왜 일을 할까?
무엇때문에?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난 것에 대한 보상을 위해?
내 팀원들과 조직의 이익을 위해? 이건 좀 아닌것 같고...
개인의 성장과 야망?? 흠..
안정된 직위와 배우자를 위한 최선의 배려?
사람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여유? 이게 여유인가?
여유 찾으려고 하면 등이 다 휘고, 머리는 백발일텐데?
일이 일을 부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하는 것은 아닌가?
에스컬레이터나 컨베이어 벨트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 처럼?
말 꼬리를 잡고 제주도를 가려 했는데, 삼천포로 돌아가려 하는?


후우.. 살다보면 좋은 소식이 많았으면 좋겠네요
사는게 좋은게 좋은거라지만, 오늘 아침 포털에 안좋은 기사가 하나 실려있더군요?

어떤 개발자분께서 과로로 인해 폐암이 걸려서 폐를 절제했기 때문에
회사에 피해보상청구를 했다가, 사측과 진통이 상당히 심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그 개발자분도 참지 못하고 결국 폭로에 가까운 내용들을
좔좔 다 기자 앞에서 쏟아버린 느낌입니다. 오죽하면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뭐 제 주변에서는 흔한 일입니다만, 너무 개발자분들을 나무라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이래저래 동병상련이라고 머리쓰는 직업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머리를 쓰면 골치가 아픈데, 답은 없으니 더 골치는 아프고
그럴 수록 더더욱 아이디어는 저글링 버로우고, 파해를 위해 담배를 피우고
사무실 벽에 다트 붙여놓고 멍하니 표적 중앙만 바라보고 있고

마치 앞마당 털린 저그가 어쩔 수 없이 자원 짜내서 히드라로 어택땅 가지만
이미 벙커 뒤로 3탱크가 사이좋게 언덕 위에서 시즈모드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거랄까요?


프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언제나 초심을 다잡기에 뻔하면서도,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맹세할 일이 얼마나 될런지는 미지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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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19 07:59
수정 아이콘
Fluctuat nec mergitur
라틴어인 이 말은 파리시 문장의 범선에 새겨진 표어입니다.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라는 표어이지요.
지독한 악천후에 센 강이 요동치고 키가 꺾이고, 돛은 찢어져도 배는 가라앉지 않는다... 가라앉게 하지 않는다. 역사에 농락당한 파리다운 표어지요.
성인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게 아닐까요.
쉽게 포기하지 마라. 마지막까지 주저앉지 마라. 그러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라. 그러면 가라앉지 않는다는것.

혹시 One for the road 라는 말을 아십니까?
사전에는 작별을 아쉬워하며 나누는 한 잔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대체 누구와의 작별을 아쉬워 하는 걸까요?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고 정당화 하며 살아가야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남에게 추월당해도 달릴 수 밖에 없는것이 어른의 세계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길을 죽어라 열심히 산다한들 하루가 꼭 좋은 일만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죠. 그래서 one for the road의 뜻은 돌아가는 길을 위해 마시는 단 한잔의 술을 뜻합니다. 그 단 한잔의 술로 오늘 안좋은 일과 포기하고싶었던 나, 이율배반적이었던 나 등을 전부 이별하는것이지요. 어른은 언제나처럼, 멈추지 않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프로니까요. 힘들고 무너지고 싶어도, 한잔의 술로 스스로를 다시 곧추세워서 나아가야 하지요.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설령 죽을지라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너무나 힘든 일상이시라 감히 짐작하지만, 패배하지 마세요.

아, 잘난척 떠들어 대었지만, 사실은 모 만화책에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오늘도 힘내서 좋은 하루를 맞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Ringring
10/08/19 08:55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말도안되는...과도함은 이뿐이겟습니까?

뉴스를 떠나서,제가 일하는 건축cg쪽은 이것보다 더할수도 있는데요. 머 회사마다 숙직실(숙직실이라해놓고 거의 회사에서 먹고자고 다합니다. 집을 보내지 않으니... 그리고 자리가 많이 있는것도 아니고 48시간 연속철야 그런것도 일주일에 한두번씩 매번하고)은 직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어찌 죽어나가서는 안되지 않아야 하겠냐는 방편과도 같습니다.

제가 그쪽 바닥에서 나오면서, "정말 이러다 사람죽을수 있어요" 라고 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그래서 어찌 잘못된 사람있어요?" 였습니다.

물론 일자체는 저에게 뿌듯함과 성취감을 주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8년동안 개인생활은 전혀없었고,병까지 안겨주었지요.

회사나오면서 노동법 이런것 막 뒤져보고 pgr에도 고발글처럼 써볼까도 생각했지만 하나도 실행을 하진 못했군요...
우리나라 여러분야에서 말도 안되는 곳들 너무 많습니다..

일주일에 5일 야근철야, 하루라도 옷가지러 집에 갔다오면서도 버티시는 분들 보면....
가정이 있어서 아이가 있어서...한집의 가장이라서..... 그러시지만.... 정말 그런분을 보면,
이게 정말 가정을 위한건지..하는생각들었습니다.

물론 그분의 문제가 아니라.. 갑으로 올라가는 회사,사회시스템,정부 이런것들....
정말 다 고발하고 싶은 심정이었던 기억이
이글을 읽으니 다시 살아나네요........

참 8년이란 세월을 프로라는 미명아래...제 몸을 위해선 무모하게 살았던것 같습니다.
머가 옳은지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달덩이
10/08/19 09:08
수정 아이콘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맹세할 일은.. 그런 기회를 잡을 수라도 있는 사람은 10명 중 1명이나 될까 싶은데 말이지요.

기운내세요.

본문중에 '..자신의 레벨이 가진 깊이의 바닥을 알게 되면 답은 두 가지입니다.포기하거나, 정진하거나' 라는 말이 머리속에 콕, 박히네요
저는 전자였었거든요.. 하하하. 오늘 하루 저도 기운 내야겠습니다.. ^^
포뇨포뇨
10/08/19 10:50
수정 아이콘
본문에 나온 글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담배피는씨
10/08/19 13:46
수정 아이콘
안되면 야근하고..
야근해도 안되면 철야 하고..
철야해도 안되면 주말에 나오고..
그래도 안되면....
이제 멀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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