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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2/27 12:26:31
Name sungsik
Subject [역사] 성군도 역사를 조작하는가?


방송사에서는 프로젝트가 크면 기획점검회의를 연다. 참가자들은 모두 약간씩 긴장한다. 
누구도 프로그램의 성패를 자신할 수 없고, 실패한다면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순제작비 15억에 달하는 ‘3D입체복원 조선왕조의궤’ 회의 도중의 일이다. 
작가가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했던 과정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배경을 설명해나갔다.


“친모마저 당쟁에 휘말려 자식을 죽이자고 이야기하는...”


사도세자가 죽게 되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은 이유를 당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늘 있어왔던 설명방식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역사책들도 당쟁이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어머니도 당쟁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자식의 목숨과 맞바꿀 당파적 이익이 과연 존재했을까? 작가에게 질문했다.



“잠깐! 그 친모는 자식을 죽이면 어떤 이익을 얻게 되죠?”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선희궁 영빈 이씨, 영조에게 친자식 사도세자에게 대처분을 내리자고 말한 여인이다. 
그녀는 노론, 소론 어느 편에 가담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역시 질문에도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모두 약간씩 난감해 하고 회의는 진행이 되지 않았다. 
‘이런 의견이 있을 수도 있으니 원문을 다시 확인해보세요’라고 말하면서 회의는 정리되고 말았다.



‘당쟁의 와중에 억울하게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 250년을 줄기차게 이어온 이 생각은 진정 올바른 것일까? 
한양굿이나 경기도당굿에서는 지금도 사도세자를 별상이라며 모신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원혼이 신의 지위로까지 격상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도세자는 살인자다. 학자 중에 사도세자의 살인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도세자의 살인에는 이상하리만치 너무 관대하다. 
사도세자의 살인은 살펴볼수록 심각하며 그 살인방식은 매우 끔찍하다. 내관 김한채를 죽였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잘라 들고 궁내를 돌아다녔다. 혜경궁 홍씨의 목격담이다.


“그 머리를 들고 드러오오셔 내인들에게 회시하오시니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버힌 거슬 보아시니...” - 『한중록』-


일부의 주장처럼 노론 집안인 친정을 비호하려는 마음에 혜경궁 홍씨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러나 이 사건은 실록에서도 드러난다. 
세자 본인의 입으로도 그 사건을 시인하고 내관 김한채를 위해 휼전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그 후에도 살인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다. 그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어지간한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더 많다. 
정조가 읽고는 타이틀을 ‘『천유록(闡幽錄)』’에서 ‘『대천록(待闡錄)』’으로 직접 고쳐준 책 속에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들어있다.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 而烙刑等慘]


사도세자는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였다. 
이는 영조가 직접 말한 내용이며,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의 왕자 중에도 살인에 관여하고도 왕이 된 왕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방원과 수양대군 등이다. 
그러나 그 살인은 쿠데타나 권력 다툼의 와중에 일어났으며 그 경우에도 왕자가 직접 때려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드물다. 
연산군이 포악하다 하나 직접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없다. 때리다 말았고 결국 다른 사람이 죽였다. 
세자가 무고한 사람을 100여 명이나 직접 살해한 경우는 동서양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그날 밤 영조는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친다. 그 첫마디 역시 살인에 대한 것이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 않았느냐?[汝搏殺王孫之母]


영조는 ‘박살’이라고 했다. 박살은 손으로 때려서 죽이는 것 아닌가. 세자가 제 자식을 낳은 후궁을 때려서 살해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참혹한 행위가 극에 달했음에도 모두 쉬쉬했다. 병으로 한두 사람을 때려죽인 수준에서 벗어나 습관적 살인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도 살해당했다. 
어머니를 모시는 내인을 살해한 행위는 효를 강조하는 유교국가에서 용납될 수준이 아니건만 모두들 입을 다물었는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결국 일은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그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폐세자반교문에 나오는 선희궁 영빈 이씨의 증언이다.


“요사이 그곳에 갔다가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頃日往彼闕幾乎被殺 僅以身免]


이런데도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성리학이 통치이념인 조선에서 무고한 백성 100여 명을 직접 살해하고 친모의 내인을 죽인 자가 왕이 될 수는 없다. 
맹자는 신하가 군주를 시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제선왕(齊宣王)의 질문에, 인을 해치고 의를 해치는 자는 군주가 아니므로 군주를 시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죽여도 좋다고 한 것이다. 사도세자는 왕이 되면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올 것이 예고된 사람일 뿐이었다. 
영조조차 이렇게 친제 묘지문에서 말한다.


“아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시절에 이런 자, 나 듣지 못했다.[噫 自古無道之君何限 而於世子時若此者 予所未聞]


세자의 이런 패악은 일찍이 전라도에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가? 
전라도 용안(익산)현감이던 이정(李瀞)은 그 소문을 상소하면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세자의 그 패악이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백성들은 수군거리고 희생자는 늘어나기만 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장인인 홍봉한은 사건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대신들은 세자를 비호하면서 병으로 인해 생긴 아무것도 아닌 사건인 것처럼 말한다. 
신하들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그의 습관적 살인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 기대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세자는 죄책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고한 백성을 더 죽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버지 영조에게 반발해 두 번이나 우물에서 투신자살 소동을 벌인 불효를 저질러도 영조가 너무 심하게 대했기 때문이라 말하고, 
죄 없는 백성을 무수히 죽여도 병에 의한 것일 뿐이며 기본적으로 세자의 자질은 훌륭했다고 설명한다. 
친어머니가 영조의 신변이 위험하니 세자를 죽이자고 말해도 오히려 궁중의 여인이 국본을 흔들었다고 말하고 만다. 
당시 신하들이 한 이야기다. 당시 신하들의 태도도 문제가 많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은 그 태도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  (삭제된 승정원일기(영조 38년(1762) 5월 29일 기사)



왜 세자의 살인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을까? 그 출발점은 『승정원일기』가 삭제된 영조52년 2월일 것이다. 
정조의 효심은 아버지를 흉악한 살인마로 내버려 둘 수 없었고 그래서 일기는 오려지고 세검정에서 씻겨 사라졌다.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는 사도세자 관련 부분에서는 유독 너덜너덜하다.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갔다.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는다. 여기에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이 있었을 것이다. 『승정원일기』 곳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此下一張刀削 丙申因傳敎洗草]


그 후 민간기록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정조는 『현륭원지』를 작성하면서 단 한군데에서도 사도세자의 비행을 언급하지 않는다. 
현륭원지』를 읽은 사람이 어찌 사도세자가 흉악한 연쇄살인범임을 알겠는가? 
게다가 영남학자들은 만인소를 올리면서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밝히겠다고까지 했으니...



역사의 조작을 반드시 악인이 하는 것만은 아님을 잘려나간 『승정원일기』는 잘 말해준다. 
진실을 오려내는 역사조작을 효심 가득한 계몽군주 정조가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래서 오늘날 경기도당굿에서는 수많은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도세자를 신처럼 모시며,
 방송드라마는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그려 시청자들은 눈물로 그를 동정하게 되었다. 

시중 서점에는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도세자는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역사서까지 진열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가 당쟁에 사로잡혀 자식을 죽였다는 설명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효심 가득한 정조가 저지른 역사조작, 250년이 지난 지금도 얼마나 성공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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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퍼와봅니다.
역사의 조작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지만, 사실 저걸 조작이라고 하기엔 실록에 그 정황이 너무 노골적으로 나와있지요.
아래는 정조가 세손시절 승정원 일기의 내용을 지워달라 애원하는 기사입니다.


『 왕세손(후에 정조)이 수은묘(垂恩廟:사도세자의 묘)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재실(齋室)에 나가 여러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고 하령하기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경들을 소견하였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목메어 스스로 견디지 못하다가 하령하기를,

“그때의 처분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마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어서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데, 이제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지금에 이른 것도 이미 사람의 도리로 견딜 것이 아니거니와, 완고하게 아는 것이 없는 체한 것은 다만 대조(大朝)께서 위에 계시고 또 그때의 처분에는 감히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 그지없는 아픔을 생각하면 어찌 일찍이 먹고 숨쉬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늦추어진 적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또 대조의 명을 받아 외람되게 송사(訟事)를 듣고 판단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모년(某年)의 일기(日記)를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지금의 의리로는 모년의 일에 대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다시는 눈을 더럽히고 이[齒]에 걸지 말아야 옳을 것이다. 사초(史草)로 말하면 명산(名山)에 감추어 만세(萬世)에 전하는 것이므로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는, 일기는 이것과 달라서 그것이 있든 없든 관계되는 것이 없다. 이제 이것을 내가 청정(聽政)한 뒤에도 둔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백료(百僚)를 대하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으나 억제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하고는 눈물이 비오듯하니, 좌우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정조가 세손 시절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사도세자에 관한 기록을 지워달라 애원하는 장면. 
사초는 감히 어떻게 해달라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일기는 중요치 않으니 지워달라 울며 애원합니다.
그러나 영조는 이 요구를 거절하는 듯...하다가 결국 일기를 세초해버립니다.)



임금(영조)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이번에 하교한 것은 나라를 위하고 충자(沖子)를 위한 것이나,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비사(秘史)는 의논할 수 없더라도, 《정원일기(政院日記)》로 말하면 천인(賤人)들도 다 보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 것이다. 사도(思悼)가 어두운 가운데에서 알면 반드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유족(裕足)을 끼치는 뜻이겠는가? 비사가 이미 있으니 일기가 있고 없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오늘 시임(時任)·원임(原任)이 마침 입시(入侍)하였으므로 이미 하교하였다. 승지(承旨) 한 사람이 실록(實錄)의 예(例)에 따라 주서(注書) 한 사람과 함께 창의문(彰義門) 밖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하라. 내 마음은 종통(宗統)에 대하여 광명(光明)하나 이 일은 수은(垂恩)에게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이번 하교는 병행하여도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일기를 보더라도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무신년의 흉도(凶徒)의 남은 무리로 엄히 징계할 것이다. 다들 반드시 이 말에 따르고 국법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


(정확히 말하면 정조가 직접 조작을 한 건 아니고 세손시절 영조에게 간청을 해 허락을 얻어낸 것이지요.
또 사도세자가 왕손의 어미, 즉 후궁을 때려죽인 것에 대한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대화 역시 실록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세자가 죽인 여인)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재미있는 건 이 직후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행실을 옹호해주기 급급하고,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지적하는 게 아닌 이 일을 고한 나경언을 죽여야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제목은 역사 조작이라 이야기 했고 그에 대한 지적을 본문으로 이야기 했지만, 
조작하려고 해도 결국에 기록이 남는 것이 또 역사인듯 싶습니다.
이렇게 기록이 다 남아있는 걸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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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프의대모험
13/02/27 12:32
수정 아이콘
헉; 몰랐던 사실 알고 갑니다..
정지연
13/02/27 12:34
수정 아이콘
사도세자가 살인마였다니... 그간 당쟁 운운한건 완전 잘못알고 있었던거군요.. 제가 영조래도 아들이 저모냥이면 가만 안뒀을거 같습니다..
13/02/27 12:46
수정 아이콘
살인마라..부를 정도인가는 전 아직 확신이 안 서지만, 분노 조절 능력이 없는 건 거의 확실한 듯 싶습니다.
wish buRn
13/02/27 12:48
수정 아이콘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영조가 잘한거였군요.
13/02/27 13:58
수정 아이콘

잘했다고 보기엔 아들을 죽였으니 잘했다고 해야하나.. 싶긴 하지만,
정조를 왕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사도세자가 살아있었으면 그 영향력이 엄청났을 것인데 행실조차 저러니
정조가 국정 운영을 제대로 못함은 뻔한 사실이긴 했겠지요.
깃털티라노
13/02/27 12:51
수정 아이콘
사도세자의 행실은 솔직히 실드가 불가능하죠
애초 사도세자의 적장자 정조임금의 수준이 할아버지 영조가 요구하는 수준을
차고넘치는 초만렙급이었기에 사도세자의 악행,정신병적 행위가 그냥 덮혀지고
눈감아진 면이 크다고 봅니다.
만약 정조가 사도세자의 적장자가 아닌 다른(영조가 또아들을 봤다는 가정에서) 아들의
소생으로 세손에 올랐다면 사도세자는 정말 완전 까발려지고 벗겨져 역사의
냉엄함속에 질타를 받았을건데
자신은 반미치광이로 태어났지만 어떻게 큰아들은 조선역사상 거의 세손가락안에 들어가도
남을 영명한 군주라서 아들쉴드를 그냥 1000%로 뒤집어 쓰고있는 거라고 봐야죠
13/02/27 13:58
수정 아이콘
정조가 영민해서여서도 있지만, 정말 효자였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에 효자가 아닌 왕이 어디있겠습니까만은.. 정조는 그 중에서도 좀 특별했어요.
그런 효심을 보이면서도 연산군처럼 미치지도 않고 과격하긴 했지만 선은 지키면서 행동했으니...

사도세자는 그 덕을 상당히 많이봤고, 이런 정조의 행동이 후에 엄청난 떡밥을 낳은 거 같네요.
깃털티라노
13/02/27 19:45
수정 아이콘
아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사도세자는 정조아니더라도 쉴드를 받을수 밖에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삼종의 맥은 좋으나 싫으나 오직 사도세자와 그의 후손만이 이은상태
정조부터 대한제국 말까지 왕은 모두 사도세자의 자손이니 조상을 쉴드치는건 당연할거고
13/02/27 20:15
수정 아이콘
근데 세조의 즉위같은 경우 성종 때 들어나지 않았을 뿐이지 신하들 사이에선 벌써 비판적 시각이 나옵니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인데도 말이죠. 하지만 사도세자는 아니죠.

사도세자와 차이가 있다면,
세조는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권력자인 반면 사도세자는 죽임을 당한 것. 그것도 친아버지에게.
너무 엄청난 일이 일어났기에 사도세자는 그 행실을 막론하고 어느정도 피해자의 이미지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신하들이 그 원인을 왕인 영조에게 직접 물을 수 없으니 애먼 다른 신하에게 화살이 돌아간 거 같고요.
사실 그 일 자체를 거의 입밖에 꺼내질 못했죠.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측이든 부정하는 측이든..
정조 입장에선 어느 쪽 입장도 필요없고 사건 자체를 그냥 입밖에 꺼내지 말라는 게 아니었나..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다행인 건 정조가 폭주하지 않고 감정을 참 잘 컨트롤 했다는 것.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할아버지를 또 부정하진 않았던 거죠.

감정을 잘 컨트롤하긴 했는데...그게 수원화성의 축성이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 게 흠이라면 흠-_-;
13/02/27 13:29
수정 아이콘
전혀 몰랐습니다. 새로운 걸 알았네요.
아무래도 일반인은 직접 실록을 읽지 않으니, 사극을 통해 이미지를 만드는 편인데
위의 글처럼 대체로 사도세자가 비운의 왕자로 나오는 사극이 대부분이었지요. 이런 부분이 있다면 마냥 당쟁에 희생된 건 아니군요.
하긴... 영조가 아무리 까탈스러운 임금이라고 쳐도 아들을 죽이는데 명분없이 죽이진 않았겠지요.
결론적으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기록이 있더라도 사도세자가 우호적으로 다뤄지는 이유는, 아들을 잘둔 덕이라고요. 그것도 복인게지요.
몽키.D.루피
13/02/27 13:36
수정 아이콘
그렇게 쉬쉬하다가 사도세자가 왕이 됐으면.... 진짜 끔찍하군요.. 충동조절장애 + 사이코패스 기질도 있어 보입니다..
무플방지위원회
13/02/27 13:49
수정 아이콘
우리 역사 중에도 아직 이렇게 까맣게 모르던 내용들이 있군요. 흥미롭습니다.
사도세자가 왕이 되었으면 연산군이 사극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빈도가 현저히 떨어졌을 것 같네요. 연산군으로선 아까비입니다.
13/02/27 14:00
수정 아이콘
연산군은..세자 땐 멀쩡했습니다. 즉위 초만해도 괜찮았는데.. 어느순간 갑자기 폭주...

만약 사도세자가 왕이 됐으면 조선 후기의 모든 부정적 이미지는 사도세자가 다 뒤집어 썼을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참하게 죽었으니 개인에겐 불행하지만 역사적 평가로보면 본인에게 참 다행일 수 있지요.
13/02/27 14:12
수정 아이콘
이렇게 구체적으로는 몰랐지만 사람 죽였다는건 알고 있었는데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거 같네요.

저런 증상이 나타난 이유가 영조와의 갈등으로 인해 생긴 정신질환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아마 몇년 집권도 했었죠. 원래 그런 사람이였으면 그 조차도 안됐겠죠. 그 과정에서 영조와 완전 틀어지고 저리 된거죠..
어린시절로망임창정용
13/02/27 14:43
수정 아이콘
민비의 실체를 알았을 때만큼이나 큰 충격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개망이
13/02/27 20:26
수정 아이콘
영조가 정말 잘했군요. 저런 사람이 왕이 되었으면 얼마나 막장이었을지..
저런 아버지 밑에서 어떻게 정조처럼 훌륭한 자식이 태어났는지도 놀랍네요.
13/02/28 04:22
수정 아이콘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내용을 pgr에서 볼수있다는거 자체가...
명성황후 민씨일가도 참 문제지만 (일제가 격하시킬려고 만든 단어가 민비라고해서 이렇게씁니다.)
사도세자부분이 사실이라면 정말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최대의 싸이코라고 불려도 의심이 없겠네요
(근데 왜 그렇게 살인을 즐겼는지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는게 아쉽네요 단순히 죽이지는 않았을텐데...)

*** 왜 역사다큐멘터리와 드라마에서 사도세자의 안좋은부분은 안내보내거나 오히려 미화시키는지
알거같네요 하지만 다른것도 아닌 실록에까지 나온부분을 그렇게 숨기거나 사도세자를 미화시켰어야했는지가...
Dear Again
13/02/28 09:49
수정 아이콘
'민비'라는 말은 매천야록등 우리쪽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민비라고 씁니다
키스도사
13/03/27 18:39
수정 아이콘
민비는 비칭이 아닙니다. 민비가 비칭이라는 인식은 1990년대 들어서 민비를 미화시키면서 "민비란 말은 일제가 만든거!"라는 이상한 논리가 퍼지게 된거죠.
워3팬..
13/02/28 07:10
수정 아이콘
정신병이 아니라 사이코패스 같은데요
순두부
13/02/28 11:13
수정 아이콘
사도세자가 미치게 된데는 영조도 한몫을 했죠.

혜경궁 홍씨의 말대로, 아버지 영조대왕의 지나친 훈계와 닥달로 인해 우울증과 화병을 앓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쓴 편지에 가슴이 답답하며 울음이 나고 마음이 아프니 약을 찾아봐 달라고 호소하는 글이 있고, 실록에 나타난 영조와의 대화 또한 미치기엔 충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조는 웃으면서 대화하다가 돌연 태도를 바꿔 세자를 죽일 듯이 혼냈고, 그 때마다 세자는 무슨 대답을 할 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대답을 잘 해도 "조사하면 다 나와" 하는 식으로 거짓말이라고 혼냈고, 못하면 당연히 혼냈다.

영조가 세자가 있을 동안 벌인 선위 쇼만 3번이다. 그 중 한 번은 세자가 가만히 있자 넌 왜 가만히 있느냐면서 화를 냈고, 내가 시를 읽을 테니 울면 효성이 있는 걸로 알고 선위 명령을 거두겠다고 했다. 세자가 제대로 거부하는 퍼포먼스를 보이지 않으니까 이런 것이다. 다행히 세자는 눈물을 흘렸지만, 영조는 약속과 달리 선위를 거두지 않았다. 그 후 몇 일 동안 생난리를 쳤는데, 세자는 이번엔 제대로 반응을 해 줬다. 하지만 영조는 계속 선위하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세자가 매일마다 닫힌 문을 밀치고 들어가야 했다. 안 하면 또 불효자식이라고 욕 할 것 아닌가? 이 정도면 미칠 만 하다.

원래 영조 자체에게도 정신적인 문제가 보인다. 출생과 즉위 과정이 과정이니만큼 주변에 의심이 많았고 비천한 어머니의 출생 때문에 열등감도 심했다. 첫번째 아내 정성왕후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어머니의 신분에서 오는 열등감 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자신을 여러차례 비호해준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그것을 명분으로 삼는 반란도 있었기 때문에 의심증은 매우 깊었을 것이며, 자식들에 대해서도 편애가 심해서 어떤 딸은 몹시 아끼면서 어떤 딸은 매우 박대한 사실이 기록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다. 이러한 영조의 정신적 문제과 기질, 정치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도세자를 막다른 길로 몰고갔고 이것이 파국을 불렀다고 볼 수 있겠다.

http://mirror.enha.kr/wiki/%EC%82%AC%EB%8F%84%EC%84%B8%EC%9E%90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인건 어떤일이 있어도 안될일이긴 한데

영조가 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할수는 없죠. 아들에게 지나치게 기대해서 부담감을 준 아버지와 그 때문에 비뚤어진 아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13/02/2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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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보냐의 차이겠지요.
전 일단 둘 다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는 쪽입니다.

정조의 경우엔 사도세자와 똑같이 영조 아래에서 컸지만 사도세자의 전철을 발지 않았죠.
그래서 사도세자를 평가할 때 좋게말하면 인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한심한 것이고...
정조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지극정성이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또 한 개인의 행동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도 중요하죠.
일반적으로 광해군의 경우엔 아버지의 책임으로, 연산군이나 고종의 경우엔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더군요.
사도세자는 반반이거나, 혹은 아예 이런 내막 자체를 모르거나..고요.
순두부
13/02/2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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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문제는 좋아하는 자식에겐 극도의 편애를 하지만 싫어하는 자식에겐 극도로 홀대했다는거죠.

사도세자에 대한 미움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정조에 대한 편애는 더욱더 심해져갔고

이는 사도세자를 더욱더 미치게만드는 원인이 되었을것이며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더욱더 애틋한 감정을 갖는 이유가 되었을겁니다.
13/02/2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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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사도세자를 처음부터 싫어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세자를 아껴서 탈이었죠. 차라리 그게 문제가 됐던 거고요.
왜 그렇게 좋아했던 자식을 갑자기 미워하게 되었는가...부터 생각해야죠.
순두부
13/02/2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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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자식에게 너무나 기대가 컸었고 그 기대를 사도세자가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것 때문이겠죠

그래서 아들에게 지나치게 기대해서 부담감을 준 아버지와 그 때문에 비뚤어진 아들인거지요.
13/02/28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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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기대가 아무리 커도 사도세자 이외에는 답이 없는 게 당시 상황입니다.
영조의 유일한 아들인데요. 좋으나 싫으나 사도세자가 왕이 될 수 밖에 없는 거였죠.

영조의 엄청난 기대가 부담이 됐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일만 지켜주면 그냥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영조가 죽기까지의 그 시기가 상당히 고달팠겠지만, 광해군도 세자시절을 버텨냈는데요 뭘.
광해군은 선조에게 처음부터 미움받고 효장세자도 인조에게 처음부터 미움받았지만 사도세자는 그런 케이스도 아니었죠.

영조의 기대감과 무리수로만 사도세자가 무너졌다고 하기엔 사도세자 역시 너무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세손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 입장에서 왕의 입장에서, 유일한 왕세자를 죽일 무리수를 둘 왕은 없습니다.
그런데 영조는 했죠. 이게 정말 영조가 피도 눈물도 없고 미치광이 왕이라서일까요?

영조 역시 자식 교육에 한해서 어리석기도 심하기도 했지만, 그 심하다는 게 정말 사도세자의 기행을 모두 책임질만큼 엄청나게 심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 생각합니다.
뭐, 이 부분에 한해선 각기 생각이 다르긴 하겠고 저 역시 더 공부할 수록 달라질 순 있겠지만 현재 생각은 이렇습니다.
순두부
13/02/28 12:39
수정 아이콘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와 사랑은 사도세자가 그걸 충족시지 못하니 미움과 증오로 바뀌었을겁니다.

최소한의 일만 지켜주면 그냥 왕이 될수 있다고 하나 영조는 정말 오랜시간 왕으로 재위했고 그 오랜시간동안 사도세자는 엄청 부담이 되었을겁니다.

광해군이 버텼다고 해도 광해군과 사도세자는 다른케이스고 모두가 다 광해군처럼 참을성이 높지는 않겠죠.

물론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에 대해 모두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없지만 아들이 그렇게 비뚤어진것에 대해 아버지는 일정부분 책임을 집니다. 특히 영조는 사도세자가 그렇게 비뚤어진것에 대해 어느정도 책임을 져야 하구요.

사도세자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미치광이 왕이라서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고 다녔을까요


영조가 왕세자를 죽인건 아이러니하게도 정조가 워낙 뛰어난 인물이었던것도 한몫하죠. 정조가 워낙 뛰어난 인물이다보니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고 정조를 왕으로 세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겁니다. 정조가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면 폐세자를 시켰으면 시켰지 죽이기까지는 안했을테죠. 정조가 왕위에 오른후 혹시나 사도세자가 아버지로서 정조에게 부담이 되지나 않을까해서 그 싹을 잘라버렸죠.

그리고 영조도 정조가 있었기에 사도세자에게 더욱더 심하게 하고 더욱더 비교를 하게 되고 더욱더 큰 부담을 줄수있었죠
13/02/28 12:50
수정 아이콘
제게 무슨 답을 원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ㅡㅡ;;
순두부
13/02/28 13:19
수정 아이콘
저는 딱히 님에게 답을 원하고 있지는 않은데요.... 제첫글도 님에게 직접적으로 쓴 글은 아니었고 제 글에 댓글다셨기에 답글을 달아드린것 뿐입니다.
13/02/28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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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오원춘 같은 범죄자에게도 본인이 아닌 부모나 사회적 요인에 책임을 물으시길 바라요. 안그래도 사회적 공공의 책임을 회피하는 요즘에 참 괜찮은 생각을 가지신 분이신 거 같습니다.
순두부
13/02/28 14:27
수정 아이콘
오원춘의 부모가 오원춘에게 어떤짓을 했는지 알수가 없으니 책임을 물을수도 없지요.

반면에 영조는 실록에 사도세자에게 어떻게 했는지 잘 나와잇습니다. 그러니 책임을 물을수도 있는거구요.

영조가 책임이 잇다고 해서 사도세자의 책임이 경감되는게 아니고 둘다 책임이 있다는겁니다.
애패는 엄마
13/02/2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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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두고 좀 읽어야겠습니다. 한번에 읽히지 않네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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