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5/08 11:00:29
Name 트린
Subject [단편] 어느 게임 마니아의 일상생활



0.
수성은 한숨과 함께 룰북 번역을 끝마쳤다. 1년 여의 사투가 이루어 낸 영웅적
업적이었다. 책 맨 끝의 찾아보기가 남았지만 복잡다단한 규칙의 바다에서 헤엄치
는 동안 거의 모든 것을 외웠기에 그것까지 번역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제대 후
가져온 깔깔이 차림의 그는 한글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그나마 보일러를 안 튼 방
에서 가장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뿌듯함은 온데간데 없고 피곤함과 함께 비관이 스물스물 피어 오른다.


"번역하면 뭐하냐고."


수성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멍청함을 비웃었다.
이번에 번역한 어드밴스드 스쿼드 리더(Advanced Squad Leader. 이하 ASL.)란 게
임은 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분대 전투 보드 게임이었다. 이 게임을 설명하자면 글
쎄...... 마소(마이크로 소프트)가 낸 분대 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인 클로즈 컴뱃
시리즈와 닮았다고 해야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클로즈 컴뱃은 ASL의 직계 자손이
라고 해도 무방했다. ASL은 70년대 후반에 나온 게임이니까.
ASL은 우리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봤던 그 모든 분대
단위 전술 행동을 가능케 해 주는 게임이었다.
분대장(리더)과 분대가 게임의 기본 단위이며 가옥과 가옥을 넘나들며 적과 싸운
다. 탱크 같은 중장비는 소대나 분대가 아닌 단 한 대 단위로 등장한다. 우수한
분대장은 사격, 육박전, 사격을 받았을 때의 괴멸 여부 체크 등에 도움을 준다.
게임은 시나리오를 거듭하면서 다른 상황과 다른 유닛들을 제안한다.
수성은 우연히 외국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ASL을 발견했다. 그는 당장에 피가
끓어 지름신의 제단 앞에 자신의 신용 카드를 산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80만 원이
라는 출혈을 감수하며 기본팩과 역사 속의 유명 전장들을 시나리오 화한 확장팩들
을 대부분 사 버렸다.
우여곡절도 무척 많았다. 이베이에서 소문이 나서 두 배를 줄 테니 자신에게 되
팔라는 메일이 왔던 적도 있었고, 한 푼이라도 아껴 보겠다고 우체국 통관 쪽에
수입 가격의 근거로 제시해야 하는 서류를 위조한 적도 있었다.
보드 게임만 사서 방 안을 채운다고 부모님에게 듣는 소리가 싫어 ASL이 왔을 때
는 싸구려 중고 컴퓨터 게임이라고 둘러대는가 하면 데이트 비용이 없어서 애인과
잠시나마 불화를 겪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휙휙 지나가던 과거의 쓰라린 기억들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물에 잉크를 풀었을 때처럼 의식이 점차 아래로 확산되다가 하얗게 사라졌다.
수성은 잠이 들었다.




1.
다음날부터 수성은 플레이어 구하기에 나섰다. 그는 곧 과학 기술의 발전을 저주
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때만큼 하이텔이 사라진 것을 원망한 적도 없었다. 예전
같으면 하이텔이나 나우, 천리안이 건재해서 거기에 플레이어 공지를 올리면 그만
이었다. 그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알아서 보고 연락을 했다. 그러나 인터넷이 활
성화된 이후로 수많은 TRPG 플레이어와 보드 게임 플레이어가 자신들만의 사이트
를 만들어 흩어졌다. 그러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단 성
향 파악부터 시급한 일이었다. 경매 게임을 좋아하는 팀 사이트에 워게임 공지를
올린다든지 하드코어 유저에게 카탄을 추천하면 어색할 뿐더러 그야말로 헛짓이기
에.
그는 검색기에서 보드 게임을 검색어로 지정하여 상위 순위 십 몇 개를 뽑았다.
그리고 사이트 안에서 게시물을 무작위로 수십 개 읽어 분위기를 파악한 뒤 그중
몇몇 군데에 다음과 같은 공지를 올렸다.



제목 : 분대 전투 시뮬레이션 ASL 플레이어 모집합니다.

본문 : 제목대로 ASL 플레이어를 모집합니다. ASL은 리더 중심의 (중략)
토요일마다 시간이 나면서 잘 결석하지 않으실 분이면 좋겠고, 성별은
상관없습니다. 구로에 있는 제 자택에서 플레이하니까 참고하십시오.
2차 세계 대전사 해박한 분과 영어 가능자 우대이며, 제 일요일 TRPG 플
레이까지 참가하실 수 있는 분은 대환영입니다. D20 모던을 플레이하는
데 요즘 플레이어가 많이 사라져서 보강이 필요했거든요. ^^
4인 마감이니 첨부한 메일 주소로 신청서 빨리 보내 주십시오.




2.
공지를 올린 지 아흐레가 지났다. 새로운 플레이어와 세상사를 이야기하면서 게
임을 즐기겠노라는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동안 문의 편지는 딱 세 통 왔
다. 고2인데 공부 때문에 3주에 한 번 참가 가능하다는 편지, 본문에 길게 설명했
는데 ASL이 무슨 약자인지 묻는 뜬금없는 편지, 중고 TRPG 서적과 보드 게임을 팔
고 싶은데 생각 없냐는 편지.


'제약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던 거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저런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본인이 재미를 즐기기 힘들었다.
2차 대전사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전혀 모르면 도로에서 노출되었을 때 분대를 깔
아뭉개려 달려오는 티거에게 얼마나 공포를 느끼겠는가? 스탈린 공방전에서 소련
군은 하수도를 이용해 기습이 가능하고, 독일군은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영어 문제는 더욱 그랬다. 기본 팩은 자기가 번역을 해서 플레이에 지장이 없겠
지만 이 ASL이란 놈은 확장팩이 나올 때마다 또 새로운 규칙이 등장했다. 박격포
가 나오면 박격포 규칙이, 하천을 건너는 보트가 나오면 보트 규칙과 물살 흐름
규칙이 새로 나오는 식이었다. 규칙이라고 해 봐야 1 더하기 2는 3이다, 한 칸 움
직이는 데 0.5가 든다, 주사위를 12이상 굴리면 고장이다 등이었지만 이런 것이
수백 개. 컴퓨터면 모르겠지만 사람은 결국 규칙 책을 참고해야만 했다.
확장팩도 번역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싫다.
모든 플레이어가 부분적으로 쫙 맡아서 한번에 했으면 하는 게 이제는 번역에 질
린 수성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혼자 맡아서 완벽히 해 줄 사람이 있음 더 좋고.
상심한 수성은 실망한 나머지 다 때려치고, 요즘 유행하는 유희왕 카드 게임이나
구슬왕 게임이나 해 볼까 하는 자폭적인 생각을 하였다. 플레이어가 아무도 없는
게임을 80만 원치나 사놓고 마음 고생하는 것보다는 국민학생이나 중학생, 또는
유희왕 동인녀 사이에서 게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열이틀째가 지난 시점이었다. 수성은 습관처럼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그러고 히
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네 통의 편지가 있었는데 제목이 전부 보드 게임 모임 참
가를 희망하는 것이었다.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두 명은 영어 강사이고, 한 명은 무역 관련업 종사자로서
바이어 접대를 맡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마지막은 사진을 첨부한 미녀
플레이어로서 (이게 사실 왕 좋았다!)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며 첫 워게임 플
레이인만큼 이해해 달라고 적어 놓았다. (당연히 이해하지! 에구, 귀여운 것!)
게다가 이 네 명 전부 일요일 TRPG 플레이에도 참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역시 마
지막 여성 플레이어만 TRPG 경험이 없을 뿐 나머지는 경력자였다.
웃음은 박장대소로 변했다. 수성은 이렇게 우수한 플레이어들을 한꺼번에 얻다니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장 답장을 적어 네 명에게 첫 모임을 이번주에 하자고 회신하였다. 플
레이어들은 전부 직장인이라서 토요일 일곱 시에나 가능하다고 말했다. 밤샘도 상
관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집안 반대 없이 밤샘까지 마음대로 가능한 플레이어라니 대박이군!"


수성은 무조건 OK였다. 그는 기분이 좋아 요 근래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3.
초겨울은 해가 빨리 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해는 6시 28분에 졌다. 주위가 어
두컴컴했다.
새로운 플레이어들은 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 모두 도착했다. 수성이 크게만 놀
라지 않았으면 이 점도 무척 좋아했을 것이었다. TRPG든 보드 게임이든 플레이어
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10분에서 30분, 크게는 한 시간이나 아예 안 오는 등 약속
을 쉽게 어기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는 왜 늦었는지 연락이나 해명을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비상식적인 인간도 만나 보았다.
각설하고 수성이 크게 놀란 이유는 플레이어들이 전원 외국인이라는 점 때문이었
다. 닉네임으로 자신을 지칭했고, 사진 첨부한 여자는 동양인이었기에 이를 전혀
몰랐다.
자신을 다크 스폰이라고 칭했던 영어 강사 스티븐 발러는 미국인. 블러드스테인
이라는 닉을 쓰는 영어 강사 알프레드 슐츠는 독일계 미국인. 몰록이란 닉을 쓰고
무역업을 한다는 표트르 브롬코프스끼 뻬이짜는 당근 러시아인. 마지막으로 혈해
란 닉을 쓰는 대학원생 칭링은 대만인.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단 하나. 백옥같이
피부가 새하얗다는 점.


"대체......"


수성은 금발, 홍발, 은발, 벽안 등을 앞에 두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군대 복무
시절 UFO를 본 게 자신의 인생에 가장 놀라운 순간(언제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번 해 보겠다.)일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오늘 일은 그것을 뛰어넘었다.
수성은 문득 이 일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특이점이 두
개도 아니고 네 개나 모였을 경우에는 서로간에 어떠한 연관 관계가 있다고 생각
해야 옳았다.
이 경우에는 추측은 단 하나뿐이다.
수성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네 명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서로 아는 사이시죠?"


슐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전라도 억양이 섞인 유창한 한국
어 사용자였다.


"사실 야들허고 나가 친구랑깨요. 헌데 말이요. 우리 팀 마스터가 갑자기
잠적해 부러서요. 보드 게임허고 TRPG를 함께허는 팀을 구하고 싶어서 요
로코럼 되었어요. 이해 좀 해 주쑈."


......누가 이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줬는지는 몰라도 장난기가 가득해서 아니
면 사투리를 전파해야 한다는 일념 아래 끊임없이 노력한 게 틀림없었다. 전라도
에서도 저렇게 심하게 사투리 쓰는 사람들은 50대 이상 또는 깡촌에 있는 사람 말
고는 찾아보기 힘든데.
발러가 끼어들었다. 그는 약간 조심스러운 어투였다.


"본의 아니게 속여서 죄송합니다. 마음 상하셨나요?"
"아뇨, 아뇨. 같은 팀이셨다고 절 왕따만 안 시키신다면야."


사람들은 그의 재치 있는 농담에 폭소했다. 수성이 심적 충격을 조금만 덜 받았
더라면 네 명 다 이상하게 송곳니가 길고 번뜩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
었으리라.




4.
그들은 구로역에서 수성의 집까지 걸어오면서 주로 2차 세계 대전 이야기를 나누
었다. 수성은 2차 세계 대전 군사 소설을 쓰려는 꿈을 안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꽤 적극적으로 공부했는데도 네 사람의 지식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폰 파울
루스를 바로 옆에서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흐루시쵸프에 대해서는 극도의 반감(물
론 표트르는 제외)을 나타냈다. 그들의 이야기는 사료에 나오지 않은 것이 대부분
이었지만 존재하는 다른 조각에 비춰 보면 절대로 허풍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
리에 있었던 사람이나 가능할 너무나 솔직한 감회가 묻어 나와 놀랄 지경이었다.
이런 높은 수준을 가능케한 것은  언어가 해결되어서 영문권 이외의 독일, 소련
의 논문집을 팠든지 초 마니아여서 참전 용사들 협회를 돌아다니면서 인터뷰질을
했든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수성은 배울 게 많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좋아했다.
오면서 가게에 들러 간식을 샀다. 갹출하려고 수성이 지갑을 꺼내자 그들은 말리
면서 그가 장소 제공자인데다 게임 주인이기도 하니까 회비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앞으로도 계속. 꽤나 너그럽고 여유로운 조치였다.
치사해 보일까 봐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언제나 이러한 대우를 꿈꾸고 있었
기에 그들이 더욱 좋게 느껴졌다.
수성의 집은 넓은 옥탑방이었다. 그는 집에서 따로 나와서 살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 그들은 현관에 멈춰 서서 머뭇거렸다. 수성은 낯선 곳을 거북해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하고 들어오시라고 정중히 권했다. 네 사람은 고맙다고 말하면서
도 발을 떼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차에 오면서 그들 중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표트르가 입을 뗐다.


"죄송하지만 두 번만 같은 말씀을 더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어떤?"
"초청의 인사를요."
"무슨 관습 같은 건가요?"


표트르는 쑥쓰러워하는 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하
나같이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네. 말하자면."
"좋습니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뭘."


그들은 세 번 들어오라는 말을 들은 후 감사를 표하며 수성의 옥탑방에 들어섰
다. 사람들은 외투와 가방을 단정하게 정리한 후 서가에 꽂힌 TRPG 관련 서적과
보드 게임들을 둘러보며 관심을 표했다.


"크툴후의 부름에다 스파이크래프트. 세븐즈 시라니 수성 씨도 어지간한
마니아군요."


표트르는 감탄하면서 구판 섀도 런 모스크바 소스북을 뒤적거렸다. 두 사람은 잠
시 서로가 좋아하는 TRPG 시스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편 소설 '뱀파이어와의 인
터뷰'를 원작으로 삼은 TRPG 시스템 뱀파이어 머스커레이드 이야기가 나오자, 표
트르는 얼굴을 찌푸렸다.


"게임 시스템은 새로운 시도인만큼 높이 삽니다만 그 뱀파이어 설정들은
악취미의 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어이없는 인간적
설정들인지 몰라요. 그나마 진실을 잡아낸 것은 노스페라투 설정 정도랄
까요?"


그는 단순히 자신의 감상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분노하
고 있었다. 수성은 머릿속으로 이 친구가 어떻게 진실임을 단언하는지, 왜 이리
흥분하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자기는 부인하지만 사실은 극성 스토리텔링 시스템 혐오자인가?'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전투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TRPG 시스템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표정에서 드러났나 보다. 말이 끊기면서 약간 어색한 감이 두 사람 사이
에 감돌았다. 구원의 손은 좀 떨어져 있던 슐츠에게서 왔다.
그가 표트르에게 말을 걸었다.


"TRPG 말고 보드 게임 쪽도 보랑께. 토탈러 크리그도 있당께로."
"어, 정말?"


표트르는 책을 꽂고 슐츠 곁으로 다가갔다. 둘은 꺼내서 칩과 카드, 지도판 상태
를 살펴보고는 단박에 이렇게 말했다.


"수성 씨, 이거 사 놓고 하지 않았죠?"
"네. 영어에 곤란을 느껴서요."


슐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걱정 싸게싸게 내려놓으쑈. 긍께로 우리가 거시기를 거시기하겠다 이 말
이시."


거시기가 두 번이나 들어갔지만 수성은 단박에 알아듣고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칭링은 게임도 게임이지만 수성의 군사 관련 서가에 더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라이프 2차 세계 대전사를 훑어보면서 그녀는 가끔 수성에게 눈웃음 지었다. 별반
뜻이 담겼을 리 없지만 수성은 왠지 가슴이 무언가에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
서 정신이 몽롱하고,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자, 이제는 게임을 할 시간. ASL 기본팩 첫 시나리오는 1942년 10월 6일 스탈린
그라드에서 시작한다.
독일군은 5일 드제흐진스끼 트랙터 공장 안의 소련군을 포위하고 섬멸하려 든다.
소련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308 소총 사단을 동원하였다. 해서 고리 중 일부인
독일군의 십수 개 분대가 오히려 포위를 당하는 형국인 시나리오였다.
수성과 표트르가 소련군, 나머지 사람들이 독일군이었다. 시나리오 카드에 있는 대
로 분대를 배치하는 도중 표트르가 러시아 어(아마도. 러시아를 잘 모르는 수성은
그렇게 짐작하였다.)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슐츠가 대번에 안색이 변해 표
트르만큼 유창한 러시아 어로 되받아쳤다. 그는 연거푸 켈소 상사라는 독일군 분
대장의 부대 칩을 가리키면서 장광설을 펼쳤다. 표트르도 지지 않았다. 둘은 이제
게임 칩 배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연거푸 주고받았다. 표트르는
말하면서 동작이 무척 큰 친구였다. 그에 반해 슐츠는 꼿꼿이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말싸움은 한이 없었다. 칭링은 한숨을 쉬고는 몇몇 여자들이 흔히 지루할 때 하
는 것처럼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수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큰맘 먹고 말수
가 극도로 적은 스티븐 발러에게 물어보았다.


"죄송합니다만 대체 저 두 사람 왜 그러는지요?"


그는 수성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척이나 강렬한 눈빛이었다. 무슨 투과 광선
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빛이 마음 깊숙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망설이
던 발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슐츠가 당시에 했던 일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표트르가 목격했다는군
요. 슐츠 본인은 부인하지만요."
"그렇군요. 애증이 깊은 사이군요."
"그런 셈이죠."


발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길래 무심코 수긍했던 수성은 곧 얼어붙었다.
'당시'라니?
ASL의 높은 명성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컴 게임이 나오기 전에 수많은 전장
상황을 재연한 게임 시스템의 우수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사료를 충실히
참고한 시나리오가 더욱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군사 마니아 상대로 역사 속의 전
쟁이었다는 설득만큼 그들의 주머니를 털기 쉬운 것이 없었다. 제작사 아발론 힐
은 이런 강점을 놓칠 허술한 회사가 아니었다. 고로 게임 안의 독일의 389 보병
연대와 소련의 308 소총 사단의 전투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이라면 저들은 과연 '무엇'인가?
수성은 대체 이게 무슨 도깨비 짓인지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혼란한 눈은
두리번거리다가 또 한번 놀랄 만한 거리를 찾아내었다. 발러는 그런 그를 미안해
하는 눈치로 살폈다.
칭링은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빨대를 꽂았다. 자세히 보니 빨대가 꽂힌 물
건은 바코드가 찍힌 전혈 헌혈 전용 수혈팩이었다. 그러고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
가 보는 앞에서 빨대를 쪽쪽 빠는 것이 아닌가!
송곳니.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을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세 번의 초청 인사 후 방문.
인간의 픽션에 대한 조롱과 분노.
그리고 피.
왜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을 못 알아차렸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것은 아
무것도 없는 밤의 대평원 위에 100미터짜리 할로겐 등을 둘러 밝게 밝힌 건물이
서 있는 것처럼 명명백백했다. 그러나 현실감이 부족한 예제처럼 지금 이 상황도
현실감이 빵점이었다.
수성은 대체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도라도 할까? 무신론
자인만큼 신에게 빌 수도 없다. 물론 십자가도 없다. 냉장고의 마늘 범벅인 김치
는 어제 야식으로 라면 끓여 먹으면서 전부 동이 났다. 그래서 그는 계속 멍한 상
태에 빠져 있었다. 공포와 당황으로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비교적 뚜렷하게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대체 무슨 짓이야! 무서워하는 거 안 보여?"
"배고팠다고. 그리고 왜 나만 가지고 난리야. 저기 저 둘 봐. 이빨 드러
내고 상대방 만행을 비난하면서 싸우는데 알아차릴 때가 되었잖아. 너도
그래서 언질을 준 거 아냐? 저 친구가 둔해서 못 알아차리고 답답하니까."


발러는 안경을 추스리며 맞받아쳤다.


"뭐든지 순서가 있는 법이야. 외과의사가 수술할 때 마취부터 하지, 바로
메스를 들어 배를 째던가? 억지는 그만해."
"......쳇. 나 네 몫의 도시락까지 다 먹을 거야."


칭링은 말릴 틈도 없이 번개같이 발러의 가죽 서류 가방을 채서 구석으로 도주했
다. 발러는 따라가지 않고 머리를 짚으며 탄식 조로 외쳤다.


"칭링아, 칭링아. 해츨링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냐."
"메에롱."


발러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측은한 눈길이었다.


"죄송합니다. 충격이 심하셨죠?"
"아, 네."
"저희들은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네에."
"인간들이랑 플레이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그렇군요."
"특히 마스터를 하는 사람들은 독특한 개성들을 지니고 있어서 더 좋고
요."
"오호라."


어설픈 대화 다음에 침묵이 찾아왔다. 그들은 무언가를 애원하는 듯한 눈길로 쳐
다보았다. 무언의 교차가 계속되었다.
수성은 필사적으로 생각에 잠겼다.


'마스터가 사라졌다고 했다. 정체를 알아채자 그들이 쪽쪽 빨고 화성에다
버렸을까? 그럼 그 마스터는 여대생? 좋겠다. 여대생이 마스터라니 나도
그런 팀에 들어가고 싶다. 향긋한 냄새가 감돌겠지. 쟤네들은 도시락을
싸 왔다고 하면서 전혈 혈액 팩을 가져왔다. 사 왔을까? 살 곳은 우리나
라에서는 단 한 군데뿐인데. 정말이지 적십자는 비리의 온상이다. 확 조
져 버려야 한다. 그나저나 나도 배고픈데 쟤들은 과자랑 콜라만 샀다. 간
식을 책임지는 것은 좋은데 자기네들이 그런 걸 안 먹어버릇해서 그런지
몰라도 뭐가 환영받는 간식인지 모르는군. 아까는 어색해서 아무 말 안
했지만 나중에 기회 봐서 만두나 김밥, 피자가 좋다고 말해야겠다. 통닭
은 내가 싫어하니까 곤란하다. 가만. 저들은 맥주를 먹을까? 보드 게임이
나 TRPG하면서 맥주 마시면 그것도 죽이는데. 그런 즐거움을 모른다니 동
정이 간다.'


그는 3초 안에 이 모든 생각을 쏟아 내고는 자기가 놀랐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
이 자신만을 바라보는데도 여유가 있었다. 사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수성은 문
득 아주 어렸을 적에 동네 여자애들과 하던 혁신적 소꿉놀이를 떠올렸다. 아빠,
엄마, 아기로만 이뤄진 표준 캐스팅에 난데없는 '아기 친구로 변장한 도깨비 군
단'을 도입했던 것이다. 이 참신하고 번뜩이는 요소로 인해 한동안 수성은 동네
소꿉놀이 판에서 퇴출을 당한 적 있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그때와 뭐가 다른가?
인간은 유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공격성, 사회성과 함께 유희는 인간의 본성을
지배하는 3대 감정이다. 주식이 아이들의 가짜 돈과 뭐가 다른가? 결혼과 소꿉장
난이 뭐가 다른가? 다른 것은 오직 어린아이는 환상 속에서, 어른은 실제에서 상
대방 내지는 사물을 소유한다는 점일 뿐 욕망의 발현은 어린아이 때부터 바뀌지
않고 규모만 커지면서 이어진다.
수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도깨비 군단이랑 놀아 볼까.
그는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분위기 깨지 말고 이제 플레이 들어갑시다. 칭링 씨. 그거 바닥에 흘리면
안 되요. 잘 안 지워진다고요. 표트르 씨, 슐츠 씨. 마침 다른 편이니까 서
로를 깨려고 애써 보세요. 감정이입도 백 퍼센트겠다 딱 좋잖아요?"
"그, 그럼."


표트르가 반기면서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임 약속 잘 지키지, 간식 사 주지, 영문 번역해 주지, 매너 좋지,
지식 풍부해서 배울 거 많지, 밤샘 가능하지 뭐가 불만이겠어요."
"아따, 역시 수성 씨는 싸나이 중의 싸나이여. 내가 저런 사람 좋아 디져
분당께. 자, 싸게 싸게 하 드라고. 덤벼. 덤벼 보드라고, 이 쏘비에뜨 돼
지 새......"
"단."


그는 이것 하나만은 단단히 주지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가로막았다. 다
시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괜히 말하나 싶었다. 아무 생각 없다가 그 말을 꺼내자
하고 싶어지는 것이 있지 않은가. '우리 이 선을 긋고 서로 넘어오지 말고 잠만
자자'라든가 뭐 그런 거. 하지만 이 친구들은 약속은 지킬 것 같은 느낌이 들었
다. 한마디로 신사적이었다. 그렇다면 미리 약속을 받아 놓는 것이 좋았다.


"밥은 배불리 먹고 오세요. 간식을 가져와서 드셔도 좋지만요. 부탁 드립
니다."


뱀파이어들은 호쾌하게 웃고는 시선을 다시 보드 게임 칩으로 돌렸다. 밤이 깊어
졌다. 그들은 함께 주사위를 굴렸다.



----------------------------------------------------------------------------






트린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6-10 20:36)
* 관리사유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3/05/08 11:00
수정 아이콘
예전에 썼던 밝은 분위기의 단편 함께 올립니다.
Cynicalist
13/05/08 11:08
수정 아이콘
흡혈귀들 말투가 월야환담같네요 크크 수혈팩쪽쪽빠는것도 그렇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3/05/08 11:20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단편인 게 아쉬울 정도네요.
13/05/08 11:23
수정 아이콘
Cynicalist /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쁘네요.
티르 / 감사합니다. 그런데 단편이라 깔끔하고 부담없고 재밌는 게 아닐까요? (...)
PizaNiko
13/05/08 11:53
수정 아이콘
d20 모던 플레이어가 모자랍니다, + 유저들이 다 자신만의 홈페이지로 흩어져서...
이부분에서 격동의 21세기 초 한국 RPG계의 현실이 느껴지네요.
저도 완전히 동일한 고통을 느껴보았기에 ㅠ_ㅠ
천진희
13/05/08 12:11
수정 아이콘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13/05/08 12:44
수정 아이콘
소설가를 하셔야..
Tristana
13/05/08 13:51
수정 아이콘
오 재밌네요
13/05/08 14:12
수정 아이콘
PizaNiko / 아아 그 고통 말도 못 하죠... 공감대가 있다니 기쁘네요.
천진희 / 칭찬 감사해요. ^^
par333k / 유명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미 데뷔한 작가입니다. ^^;;;
Tristana / 감사합니다. 연재 중인 애니멀 플래닛은 이것보다 더 재미납니다! (...)
13/05/08 14:38
수정 아이콘
윤주한 / asl 정말 좋아해요. 리틀워즈, 체인메일, 워해머 등 전투 테마의 보드게임 및 미니어처 게임에 흥미도 있고 플레이도 많이 해 보았어요. 윤주한 님도 asl 플레이어신가요?
제 시카입니다
13/05/08 16:03
수정 아이콘
재밌게 보고 갑니다.
애니멀 플래닛도 올려주시는거 알고는 있었지만 장편이라 선뜻 손이 안 갔는데.. 나중에 꼭 읽어보겠습니다~
트릴비
13/05/08 17:33
수정 아이콘
주인공 이름에서 뭔가 함의가 느껴지는건 제 착각인지 크크
잘봤습니다
13/05/08 19:07
수정 아이콘
제 시카입니다 / 꼭입니다, 꼭! (...)
트릴비 / 앗, 그런가요.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13/05/09 00:58
수정 아이콘
세븐스 시가 지나가는 말로라도 언급되니 왠지 반갑네요(...)
요즘이랄까, 근 십년 가까이 덴디밖에 안 하다보니
felixBsj
13/06/10 23:00
수정 아이콘
와.. 잘 쓰시네요.
그런데 정말.. 저런 상황 맞닥이고 싶기도 하네요~
lupin188
13/06/11 09:51
수정 아이콘
잘 보고 갑니다~~크크
13/06/11 10:22
수정 아이콘
lolicon 님 / 반응이 늦어서 죄송해요. 게시물이 밑으로 내려가서 살피지 않았습니다. 저도 세븐스시를 아시는 분이 있어서 반갑습니다. ^^
felixBsj 님 / 칭찬 감사해요. 저도 저런 플레이어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열과 성을 다해 썼습니다. (...)
lupin188 님 / 종종 단편 쓴 것 올릴게요. 장편도 쓰고 있어요. ^^
Rorschach
13/06/11 14:51
수정 아이콘
오오 여기에 올라오고서야 봤네요. 잘 봤습니다~

그런데 이전 마스터는 과연 어디로;;; 크크
13/06/12 00:32
수정 아이콘
Rorschach 님 / 장편으로 계획해서 뒷 이야기가 좀 있습니다만 언제 쓸지는...
정시레
13/06/18 09:53
수정 아이콘
우왕 0번 읽고 자전적인 수필정도인가 하며 보고 있었는데 읽다보니 엄청 재밌어서 몰입해서 읽었어요!!!
작가님이셨군요 재밌는 소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13/06/19 12:16
수정 아이콘
정시레 / 네 제 희망사항이 듬뿍 담겨 있어서 그렇게 보셨을 거예요. 재밌게 읽었다니 마치 요리 칭찬받는 주방장처럼 흡족하네요. 저야말로 감사해요.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296 명량해전에 대한 새로운 연구 [73] 눈시BBbr13322 13/05/14 13322
2295 그럼 상상이 많은걸 해결해 줄까? [14] par333k6850 13/05/13 6850
2294 상상하지 않은 만큼, 비겁해 질 수 있었다. [21] par333k8350 13/05/13 8350
2293 [연애학개론] 행복하게 해주기보다, 비참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 더 어렵다 [23] Eternity12691 13/05/11 12691
2292 [야구] 처음부터, 그리고 영원한 4번타자, 영원한 홈런왕. 장종훈 [32] 민머리요정9307 13/05/10 9307
2291 [단편] 어느 게임 마니아의 일상생활 [21] 트린9544 13/05/08 9544
2290 한 생명의 죽음으로 인해 [5] Love.of.Tears.7935 13/05/07 7935
2289 섬광처럼 [39] Tyrion Lannister19488 13/05/05 19488
2288 [LOL] LOL의 세계관 - 데마시아편 [48] 눈시BBbr20184 13/06/04 20184
2287 [LOL] 리그 오브 레전드의 세계 [25] 눈시BBbr10715 13/05/14 10715
2285 어머니 [26] PlaceboEffect6764 13/05/03 6764
2284 [스타2] 듀란/나루드, 울레자즈, 그리고... [14] 눈시BBbr8523 13/05/04 8523
2283 [스타2] [인물열전] 테란 편 [12] 눈시BBbr10630 13/05/03 10630
2282 [스타2] [벌레열전] 저그편 [10] 눈시BBbr9715 13/05/02 9715
2281 [스타2] [인물열전] 프로토스편 [42] 눈시BBbr12011 13/05/01 12011
2280 [스타2] [인물열전] 칼날 여왕, 사라 케리건 [18] 눈시BBbr10369 13/05/01 10369
2279 [스타2] 테란, 그리고 멩스크 부자 [19] 눈시BBbr10075 13/04/30 10075
2278 [스타2] [인물열전] 태사다르, 제라툴 [19] 눈시BBbr10609 13/04/29 10609
2277 [스타2] 저그, 초월체(Overmind) [15] 눈시BBbr9767 13/04/28 9767
2276 [스타2] 신의 첫 번째 자손, 프로토스 [6] 눈시BBbr8198 13/04/27 8198
2275 [스타2] 인류를 위하여. UED [15] 눈시BBbr9244 13/04/26 9244
2274 경제학 이야기 - 정부 지출은 효과가 있는가? [75] Nangmantoss8394 13/04/30 8394
2273 [스타2] [인물열전] 짐 레이너 [45] 눈시BBbr11867 13/04/25 1186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