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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11 10:28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몸에게 열심히 교육을 시켜봐야겠군요. 그런데 '그녀에게'가 몸이 본질임을 보여주는 영화였나요? 본지 오래됐더니 디테일 한 건 다 잊혀지고 그 영화의 막장스러운 설정만 머리에 남아있네요;;;
15/01/11 10:34
서론에서 설명해주신 실험결과와 마지막에 소개해주신 방법론은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식적 생각보다 무의식적 신경활동이 먼저라는 게 실험결과의 핵심이고 소개해주신 자기계발의 방법론 또한 [무의식적 신경활동->의식적 생각]이라는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조화로운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후자와 같은 경우는 그 구조를 만들어내자는 생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실험결과에 따른다면 한 줌의 자유의지도 없으며, '그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에 앞서 무의식적 신경활동이 앞서야 하며, 방법론을 적용하는 행동은 스스로 마음먹고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자기계발에 대해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이신다면, 소개해주신 방법론은 실험결과와 상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 자기계발을 정의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제한된 형태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 모르겠지만, 덮어놓고 자유의지가 없다는 주장과 자기계발은 공존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저 열심히 노력하라고만 말하는 것이(1만 시간 드립 등)]에 대해서는 http://goo.gl/RMvk8g 이 부분을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5/01/11 10:43
1. 자기계발의 정의에 대해
자기계발의 정의를 저와 다르게 내리고 계십니다. 啓發(계발)은 슬기와 사상 등을 일깨우는 행위를 말하므로 자기계발이란, 포괄적으로, 자신의 정신적 함양을 이루는 것으로 봐야할 겁니다. 여기에 굳이 '의지'라는 요소를 포함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2.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인간이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정신-사유-반성'기능까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도 저도 하고 있으니까요. '그 구조'를 만들어내는 생각이란 일종의 '반성'기능입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겠다는 의지보다, 생각 자체가 먼저 발생하긴 합니다만, 생각자체를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죠. 이런 선후관계를 생각해 보면 정신적 작용 앞에 선험적 근거로 몸을 상정한 메를로-퐁티의 혜안이 정말 대단한 겁니다. 3. 덮어놓고 자유의지가 없다고 진행한 글 맞습니다. 그리고 자유의지에 관한 것은 사상이 아니라 과학적, 실험적 관찰결과입니다. 우선적으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깔고 논지를 전개해야 합니다.
15/01/11 11:23
3에 대해 : 이건 해석하고 정의하기 나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1에 대해 : 자기계발을 의지와 무관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해 엄격한 결정론과 자기계발이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이군요. 어..음..회의주의에 빠진 결정론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주장이긴한데..이게 어떤 형태로 공존한다는건지 상상이 안되네요. 별개로 저 링크를 소개한건 비판하는 대상과 비판하는 글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보이려는 의도였습니다. 자기계발서 중에는 (물론 정신승리하는 내용도 있겠지만) 전문가나 아니면 전문저술인이 과학적 성과를 소개해주는 책들도 있고, 일반인이 알기 쉽도록 과학적 성과에 대해 과학적인 내용은 배제하고 사례만으로 채워 핵심내용을 전달하는 책들도 있는데 싸잡아서 쓸모없다고 말하긴 힘들 것 같아요.
15/01/11 11:39
3 : 과학적 사실에 대해 나름의 해석을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논문만 나와도 교차검증이 기본인 세상인데, 그 실험결과를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게 용납되면 안되겠죠.
1 : 결정론과 공존한다기 보다는 무관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흔한 불쏘시개 자기계발서들은 결과를 바꾸기 위해 해야할 노력을 주장하는 것에 반해, '회복탄력성'은 아무리 험난한 결과라도 그걸 받아들일수 있는 부서지지 않는 멘탈을 키우는 것이 목표라고나 할까요. 이런 입장이면 결정론으로 어떤 인생의 결과과 오는지 상관이 없죠. 또한 그러한 멘탈을 키우는 방법이 육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따르다 보니 (習을 강조한 점이 그렇죠) 자유의지가 없는 점을 오히려 이용해먹는 쪽이라 역시 결정론에 무관하게 멘탈은 챙길 수 있다... 뭐 이렇게 생각합니다.
15/01/11 12:13
마스터충달 님도 여기(https://pgr21.com./?b=8&n=55897&c=2090480)서 의지를 말씀하시네요. 그렇다면 마스터충달 님도 역시 용납되지 않는 주장을 하는 것이겠군요. 제 얘기도 여기서 0에서 0.0000001로 변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자기계발이 가능하려면 최소한 여기서는 의지가 개입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계발에 의지란 요소를 포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데, 그 과정에서조차 의지가 필요없다면 그게 자기계발인지 의문입니다. 돌이켜보니 자기계발을 한 것이지 몸이 시켜서 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자기계발방법에 대해 소개해주실 필요도 없는 것이고요.
15/01/11 12:48
굳이 말하자면 의지라고 부를수도 있는 것일 뿐입니다. 흔한 자기계발서처럼 부지런해지는 법, 회사생활 잘하는 법, 공부 잘하는 법, 성공하는 법 등을 의지를 갖고 있다고 이룰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실현화 할수 있는 것은 긍정성을 높이는 것 뿐이고, 그런 방향으로 육체를 유도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유도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결정론이 아니라 볼수도 있으니까요. 허나 방향만 정해지면 선순환에 의해 그 정도가 이루는 크기도 의지로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의지를 강조하는 자기계발서가 틀렸다는 점은 여전히 성립할 수 있지요.
15/01/11 13:06
'덮어놓고 자유의지가 없다고 진행한 글'인데 슬그머니 '굳이 말하자면 의지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 등장한다는 게 아쉽습니다. 방향만 정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간에 방향을 정하는데 있어서 그걸 부정하기 힘드니까요.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처럼 느껴졌는데 마스터충달 님께는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나봅니다. 별로 신경도 안쓰시는데 괜한 논의를 진행한 것 같네요.
덧붙여서.. 제가 보기에는 결국은 마스터충달님의 방법 또한 의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순환이 시작되면 조절할 수도 없는 자기계발이라면 가장 중요한 건 선순환을 시작하고 유지하기 위한 의지일테니까요. 너무 섣불리 틀렸다고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대화 즐거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15/01/11 13:13
저는 자유의지가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가능한가를 따지고자 끌고온 것이 아니긴 합니다.
기존 자기계발서의 의지력 강조를 부정하는 데에는 실험적 전제만으로 충분하니까요. 저도 논의 즐거웠습니다.
15/01/11 10:51
현상학과 심리학, 의지, 자기계발서까지 너무 광범위하고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할 것들을 너무 짧은 글에 몰아넣으신 것 같아요.
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서론과 실험결과 그리고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도 의문이 많이 들구요. 위에 언급해주신 책들은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섣부른 결론에 도달하려는 시도와는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읽지 않고 백과사전의 요약글을 참고 하셨다면 저자에 대한 모독에 가깝습니다. 좀 더 분야를 한정해서 어떤 측면에서 의지가 없다고 주장하시는 건지 자유의지와 자기계발서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설명하셨다면 더 좋았을뻔 했네요. 저도 자유의지가 허구라고 보는 사람입니다만, 많은 부분 사회생물학적 관점과 들뢰즈의 관점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설명하려면 책한권 써야하지요. ㅠㅠ
15/01/11 11:02
백과사전 요약글은 저도 읽으면서 뭔 소린지 모르겠던데요;;;;
퐁티에 대한 것은 지금은 책을 갖고 있지는 않은데, 학교 다닐때 수업들으면서 읽었던 비평서 위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플라톤은 그냥 본래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 썼고 사르트르는 급하게 백과사전, 지식백과, 인터넷 잡글들을 긁어서 참조했습니다. 제일 쉽게 써놓은 게 역시 리그베다 위키라 그걸 인용했습니다. 어짜피 이 두분은 비교용으로 모신거기도 해서... 그래도 퐁티에 관해서는 허투루 공부하고 적은 글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제대로 공부했다는 보장도 없...) 일단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2007년의 실험적 결과와 반세기 이전의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사상이 너무나 매치가 잘되는 점을 쓰고자 했습니다. 이 글에 한해서는 자기계발서는 솔직히 운 띄우기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원래는 뒤이어 긍정성을 끌어올리는 구체적 방안과, 그 이전에 '회복탄력성'이란 개념부터 설명을 해야지 진짜 자기계발의 방법을 말하는 글이 되는데 그럴라면 하룻밤 안에는 안되겠더라고요;;
15/01/11 10:58
우왕 제 글이 감히 공식적인 책들과 동급으로 참고문헌씩이나 되어버리다닝!!!!
사실 저는 이젠 저 글을 썼던 당시와는 조금 다르게 양립가능론으로 생각이 많이 기울었습니다. 근데 뭐 양립가능론은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 고전적 의미의 '인과율에서의 자유' 가 없다는 점에서는 결정론과 차이가 없지요.
15/01/11 11:13
만약 '회복탄력성'이 결정론의 허무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면 오히려 자기계발서(또는 모든 자극의 방법과 가짓수)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요?
15/01/11 11:33
최대한 간단히 설명해보겠습니다.
회복탄력성은역경을 이겨내는 힘을 말합니다. 회복탄력성은 훈련(習)을 통해서 증가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1. 뇌의 재-회로화 : 긍정적인 사고를 하도록 뇌를 재-회로화 시킵니다. 감사일기나 착한일 하기등이 있습니다. 2. 운동 : 운동을 통해 뇌세포 생성을 촉진하고 우울증을 예방한다고 하는군요. 여기에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소통의 방식 변화, 그로인한 리더십 함양 등의 내용도 있습니다만 제일 중요한 두가지는 저거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훈련으로 강화할수 있기에 회복탄력성을 마음의 근육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이걸 결정론의 허무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은 오로지 저 혼자의 추론이었습니다. 솔직히 실감도 안나는 결정론 따위 그게 사실이어도 신경끄자는 입장입니다만 그래도 뒷목을 싸하게 만드는 것은 불행마저 결정되어 있을수도 있다는 사실이겠죠. 행복함 여유로움이 결정되어있다면야 결정론이 오히려 환영받을 일일테고요. 그런데 책에서는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이라면 오히려 역경과 불행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라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더 높이 튀어오를거라고 말이죠. 그래서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불행이건 행복이건 마음의 준비만 되어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할까요? 뭐 이럼 다시 어짜피 실감도 안나는 거 신경끄자가 되는 것 같긴 합니다만;;;
15/01/11 11:57
우울증 환자들이 약물치료를 받아서 기분이 나아진다고 해도
(전달물질 조정으로 ㅡ 약에 의해) 약을 끊은 후 얼마 후 또 다시 재발하는 이유는 사고회로가 이미 공고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약을 끊어도 과거에 우울을 낳던 그 생각의 회로대로 가기 때문이죠. 약은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해주지만 사고 패턴이 이미 공고해진 뇌의 회로를 꾾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냥 묵묵히 좌절하지 않고 가는 게 맞는 거죠. 진짜 훌륭한 정신과 의사들은 인지치료와 정신분석을 통한 환자의 훈련과정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고 유물론에 빠지지 않아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이죠.
15/01/11 12:23
하루의일기 님//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 자기계발서는 전혀 보질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 처음 이 개념을 배울땐 김주환 교수님 책이 유일했는데, 요즘은 꽤 검색이 되는 것 같더군요.
15/01/11 12:27
마스터충달 님// 네. 많이 회자되더라고요.
자기계발서 작가들은 심리학 이론을 입맛에 맞게 잘 이용해서 말 많이 하잖아요. 뭐.. 단순 경험론이 아니고 과학적으로 이미 얘기 된 것이니 내 책 내용은 신뢰할만하다! 라는 맥락이랄까요. 넵.
15/01/11 12:16
감사일기와 착한일 하기라니... 초등학생도 아니고...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에게 문화적 과정이 인간 행동의 표현형에 미친 영향은 비슷한 과정이 인간이 아닌 종에 미친 영향보다 엄청나게 크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에드워드 윌슨의 추종자지만 이 부분이 윌슨이 비판받는 지점이기도 하구요. 이것은 인간 행동에 대한 진화론적 연구가 인간이 아닌 동물의 행동에 대한 진화론적 연구보다 엄청나게 힘들다는 뜻이 됩니다. 진화적신형(이제까지 없던 문화적 행동)이라는 용어가 생겨서 이제까지 없었던 인간의 의지가 발현되는 것을 설명하기도 하고요. 또한 철학적으로는 살펴봐서, 구조적으로 파악한다면 무의식의 싸움터에서 역사적/사회적 파편(문화)적 요인들에 의해 시작된 싸움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할 것이고, 존재론적으로 파악하자면 싸움의 결과를 억압하는 무의식의 최종 귀결점으로서의 의식이 더 중요하다 할수 있겠지요. 제가 가장 이 글에서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결론에 끼워맞춰 여러가지 것들을 짜집기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론이 서두에서 논의로 끌어온 것을 오히려 뒤집고 있어요. 계속해서 은님과 하루의 일기님이 그 부분을 지적하고 계신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엔 가져오신 자료들이 너무 미약합니다. 제대로 논리의 고리를 만들지도 못하고요. 제가 아무리 허무주의자라도 기계다라는 결론을 여기다 쓰지 않는 이유기도 하지요. 제 머릿속의 결론과 학적 엄밀성은 분명 다른 영역이니까요.
15/01/11 12:35
일단 변명을 하자면 그러한 학문적 가치를 목적으로 하는 글이 아니긴 합니다. 소개의 목적으로 쓰였고 그를 위해 쉽게 쓰고자 함이 목적이었죠.
위에도 댓글을 달았지만, 인간의지가 존재하지 않음을 실험적 근거로 인정하고 논리를 전개한 글입니다. 대전제에 해당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인정합니다. 감사일기나 착한일 하기는 최대한 축약해서 표현하다보니 유치해보이긴 하지만 그 훈련이 기능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충실한 근거가 있는 방법들입니다. 초등학생용이란 폄하는 너무 하다고 생각되네요.
15/01/11 12:41
학문적 가치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으신 것은 압니다.
충실한 근거가 있다는 것은 분명 학습에 의해 의지가 생긴다는 말이네요? 결론이 뒤집히는 것 맞네요. 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죄송해요.
15/01/11 12:57
그 근거들이 특정 훈련이 뇌세포나 행동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관찰한 형식입니다. 결국 인풋 아웃풋을 짝짓는 거라 오토마타의 논리를 뛰어넘었다고 보기도 어렵더라고요. 다만 그 훈련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 의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는 단순 결과값 출력의 선순환 이라고 봐도 상관없어 보입니다.
15/01/11 13:22
마스터충달 님// 다만 그 훈련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 의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는 단순 결과값 출력의 선순환 이라고 봐도 상관없어 보입니다. >>>>> 동의합니다.
15/01/11 11:38
결정론을 깨닫고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 보통 두 가지 1. 내 의지가 하는 일이 없다니!! 2. 내가 기계라니!! 정도일텐데, 결정론을 1 번으로 이어나갈 논리적 이유가 전혀없다는 것이 양립가능론이죠. 사실 많은 사람들이 결정론과 운명론을 착각하는데,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일 너는 불고기를 먹지 못할 거야' 같은 게 운명론이라면 '네가 불고기를 먹을 지 말지는 네가 결정할 수 있어. 다만 네 성격과 불고기에 대한 선호도, 불고기의 가격 등 수많은 요인을 고려해볼 때 네가 무슨 결정을 할 지는 이미 정해져있지' 가 과학적 결정론이죠. 즉, 결정론 자체는 인간의 정신 역시 어떤 원리를 따른다는 정도의 이야기일 뿐, 인간이 일방적으로 주변환경이 정해주는 대로 따라간다는 것이 아니죠. 지렁이를 때리면 꿈틀하고 사자를 때리면 잡혀먹히듯, 사람도 환경에 대해 자기 스스로 반응할 힘이 있다는 사실은 결정론을 받아들이든 말든 변하지 않습니다.
추가: 단적으로, 여호와에게도 고전적 의미의 '인과율로부터의 자유' 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 교인은 아닙니다만, 결정론은 꼭 유물론이 아니어도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예로 듭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양반이 인간의 타락을 보면, 당연히 예수 보내서 구원해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이 양반의 속성과 인과율을 전제로 놓으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가 없죠. 두 번째 이야기역시 과학적 결정론을 확대해나가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기계여서 so what? 이라고 생각해도 그만인데, 굳이 으아니 인간이 기계라니 흑흑!!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그냥 본인의 취향이죠. 물론 영혼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무의식중에 전제하면서 살던 사람이라면 과학적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순간 '램프의 지니가 짜잔~ 하고 나왔는데 날 소환한 사람이 없는' , 자기 정체성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죠. 근데 잘 생각해보면 소환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니가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듯이, 영혼같은 꼬리표 (내가 선택한 적도 없는) 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 허무주의자입니다. 다만 허무주의가 '머리 트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가지게되는 생각' 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건 전적으로 본인이 답을 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5/01/11 11:48
아마도 '전적으로 본인이 답을 정할 문제'라는 대답이 인간이 기계이지만 인간다운 기계임을 말해주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인간이 기계임을 부정할 방법은 없지만 아름다운 기계가 되는 길은 분명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또한 아름다움은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과가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아름다운 기계가 되자! ^^ 고 항상 다짐합니당. 흐 감사해요.
15/01/11 11:56
두번째 이야기가 조금 애매하지 않나 싶어요. 신에 의한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신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면 자기 정체성이 무너지겠지만, 신에 의한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과학적 결정론을 받아들인다면.. 처음엔 힘들겠지만 결국은 자기 정체성을 새로 재구축하겠죠. 꼬리표가 없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건 그나마 자유의지를 담보할 수 있는 전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15/01/11 13:37
음 전 고전적인 '인과율로부터의 자유' 를 부정할 뿐,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제가 인과율로부터 자유롭다면 제가 저를 통제할 방법도 없는 거니까 저는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고전적 자유의지는 그냥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한, 논리적 정합성 자체가 없는 오개념이죠. 다만, 저건 그냥 오개념이지만,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인 지를 생각해 보면 (도덕적 책임이라든지 결정의 주체라든지) 결정론을 받아들이고도 우리는 충분히 그런 개념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본문에서 인용된 제 글에서 제게 이런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 계신데, 몇 년 지나고 나니 제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있네요. 인생은 신기하다는.
15/01/11 14:17
제가 실수로 과학적 결정론을 OrBef님 처음 덧글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했네요. 둘 다 인과율을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전자를 통해서는 양립가능론을 말하고 싶었고, 후자를 통해서는 '1. 내 의지가 하는 일이 없다니!!'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나저나 어떤 입장을 택하고, 또 그 선택을 바꾸기도 한다는 게 제가 보기엔 대단해보입니다. 전 아직 어떤 입장을 택할 자신이 없네요. 특히 저 둘에 대해서는 말이죠.
15/01/11 11:02
저는 사회심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입니다. 우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공부가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유의지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심리학에서 '사회인지' 이론 분야와도 매우 밀접한 견해로 알고 있습니다. 미묘하고 섬세하면서도 다양한 온갖 '현재 처한' 외부적 환경, 및 과거로부터 누적적으로 조직되어 온 인지 구조를 추적하면 인간의 행동이나 심리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 때 인간은 궁극적으로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들여 그로부터 행동이나 관념으로서 결과물을 산출해내는 'OUTPUT 기계'에 불과하게 됩니다. (물론 행동주의와는 다릅니다. 행동주의는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신 작용'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요) 이러한 관점에 따라 사회인지론자들은 '동기(drive/motivation)'이라는 개념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정확히 조작적으로 실체화시키기 어려우며, 이른바 '전가의 보도'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또한 굳이 '동기'라는 개념을 끌고 들어오지 않더라도 인지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15/01/11 11:11
심리학도로써 바라본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사상은 어떠신가요?
전 솔직히 자유의지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충격보다 메를로-퐁티 철학의 아름다움에 더 큰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칸트 이후에 선험적 근거에 대한 대게의 철학자들의 주장이 영 맘에 안들었는데 (아니면 중간에 못알아들은 하이데거라든가....) 메를로-퐁티는 몸을 상정한 점에 완전 매료됐었거든요.
15/01/11 11:40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어느 정도까지 허용된 자유의지는 습의 과정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 습의 과정으로 세포간의 연결이 공고해지면 그렇게 습을 통해 만들어진 일정 사고행동 패턴을 컨트롤하는데 힘과 노력과 의지가 덜 들게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꼭 부정적으로 볼 것도 아닌 것이 그런 습관과 사고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도 결국 습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죠. 정신치료에서 인지치료와 분삭치료가 그럼에도 유의미한 이유가 있는 것이 그겁니다. 사고 수정을 계속하는 습의 과정을 거치면서 관련되는 회로의 연결이 강화되는 것이고 그렇게 인지가 변화하는 거죠. 철학은 제가 잘 몰라서 본문에 나온 것으로만 얘기하자면 참 지당한 얘기이나, 저는 습 과정에서의 자유의지와 필요성에 손을 들어주고 싶군요. 제 자신도 그렇게 변해왔으니까요. 사실 세상에 많은 것들을 의식으로 수행해야 하고 의지로 수행해야 한다면 사람은 신경과민으로 일찍 죽거나 미치죠.
15/01/11 11:46
그런 입장에서 저도 정신작용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좀 아니라고 봅니다.
말씀하신대로 습을 자유의지의 우회적 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몸이라는 세뇌도구를 활용해서 정신 변화의 방향을 잡는 것이니 말이죠. 문제는 그 미분값이 0에서 0.00...0001로 변화하는 것에는 의지가 있을 수도 있지만 한번 방향을 잡고 계속 훈련을 하면 선순환 과정이 생겨버려서 그 다음엔 의지없이 계속 그 방향으로 가버린다고 하더라고요. 이럼 또 의지의 역할이 참 없어보이긴 합니다.
15/01/11 11:52
공부해보셔서 아시겠지만
아이들은 수많은 뇌세포를 갖고 있죠. 아이들이 성장하고 교육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습관과 주된 사고를 해온 방향으로의 주로쓰는 회로 외의 다른 뇌 시포들은 나이가 들면서 죽어버리죠. 원래 태어날때 부터 아이들의 뇌 세포는 어떤 고리가 만들어진 상태가 아니였죠. 성장과정의 습을 통해 얻게 된 결과고요. 새계적인 석학들이나 예술가들이나 그 해당분야의 마에스트로 급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본래 생물적 영향도 있지만 뇌 세포가 연결을 짓고 그것이 고리를 완전히 짓지 않았을 때 부터 교육이 되었기 때문이죠.
15/01/11 11:56
안타까운 점은 아이들의 뇌가 성장할 방향, 즉 비교적 주로 쓰고 싶어지는 회로가 유전으로 정해진다는 거고.
안도가 되는 점은 그 아이들의 뇌가 완전히 성장하려면 25세까지 걸린다는 정도랄까요? 그러니 어렸을땐 하고싶은거 죄다 시켜주는 게 답이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15/01/11 12:03
유전 영향을 받긴 하죠.
그러나 인간은 내 아이에게 무엇이 유전되는지 뭘 가장 잘 받아들이고 습을 하게 되는지 모르죠. 말씀하신 대로 탐색에는 자유의지가 필요한 부분이 맞죠. 흔히 말하는 수학 과학 영재들은 이미 어릴 때 부터 자기가 재미있고 흥미있어서 하다보니 적합한 사고능력을 갖게 되고 그 과정에서 계속 공부하다보니 잘 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부모의 강제 말고 스스로 한 아이들이요. 이 흥미조차도 유전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 내가 가진 유전자 중에 발현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 과학은 완전히 풀어내지 못했죠.
15/01/11 12:12
거기에 환경적 요인까지 더해져야 하니 단순히 유전자만의 것으로 판단할 수 없는 없을겁니다. 제대로 연구하려면 일정규모 이상의 표본을 밀착 연구해야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다만 어떻게 변화 할 것인지를 예상할 수는 없어도 변화된 결과가 왜 그렇게 되는지는 추적할 수 있다고 봅니다.
15/01/11 12:21
유전 연구는 이미 그런 식으로 이뤄지고 있고 맞는 지적입니다.
얘기하면서 든 생각이 사고 과정의 회로다발을 만드는데 본드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이 뭔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아마..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선호하고 습관화 시키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 그 본드 역할에 도파민과 엔돌핀의 작용인가 싶기도 하네요. 기분 조절로서의 신경전달물질 역할 말고 다른 역할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신경연결 선호에 있어서 신경간의 본드역할? 글 추천드립니다. 대화도 글도 재밌었습니다.
15/01/11 12:41
무언가 가속화시키는 촉매가 있다는 발상은 참 흥미롭네요. 그게 정말 존재한다면 약물로 재능발현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15/01/12 09:22
잘할 수 있으니 흥미가 생기는 게 아닐까요 흥미가 생겨서 잘할 수 있는 것보다는 잘할 수 있으니 흥미가 생겼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는데요
입양아 연구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친부모와 iq가 상관계수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헤드스타트 프로그램도 실패했고 그리고 환경의 영향력이 중요하다면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비슷한 지능을 같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없는데 말입니다. 물론 환경의 영향력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15/01/11 13:00
저는 마케팅 공부를 하다가 뇌신경과학을 처음 접했는데, 관련된 글을 읽으니 참 재미있고 반갑습니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인간의 무의식을 활용한 마케팅전략을 짜고 있을 정도로 소위 돈이 되는 학문분야라, 시간이 흐르면 상당수의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자꾸 도전해보려고는 하는데 관념어가 다수 등장하는 글을 읽으면 항상 머리가 아프네요. 훗...
그러고보니 저도 위에서 "은"님이 지적하신 것과 비슷한 의문이 하나 듭니다. 반복된 학습을 통해 뇌를 발달시킨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어떠한 행동을 실행한 후 양의 피드백을 할지 음의 피드백을 할지 결정하는 주체는 뭘까요? 어떤 이는 운동을 해보고 즐거움 혹은 필요성을 느껴 운동을 더 하는 반면, 어떤 이는 괴로움 또는 불필요함을 느껴 운동을 안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행동을 무의식의 결과라고 전제한다면,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 속에 특정행동에 대한 호불호가 내재되어 있다고 봐야 타당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 싫어하던 것을 성인이 되어 좋아하는 경우가 생기는 걸 보면, 환경의 영향도 매우 중요한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자기계발서도 특정 환경을 조성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요?
15/01/11 13:07
유전과 환경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 호응하는지 완벽하게 알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을겁니다.
말씀하신대로 환경을 변화하는 것도 진짜 자기계발에 가까운 일일겁니다.
15/01/11 13:09
수정 도중 댓글이 달려 다시 적습니다... 추가로, 1만시간의 법칙은 충달님의 제시한 자기계발방식과 완전히 동일한 것 같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무의식에 의해 결정되나, 그 반대경우도 가능하기 때문에 반복훈련을 통해 뇌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니까요.
15/01/11 13:16
음.. 피드백에 대한 내용은 아마 초기 행동심리학을 창설한 파블로프의 이론으로 대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흔히들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 대해서 아는 것은, 개가 종소리를 듣자 침을 흘리는 반응을 보였다는 정도이고 파블로프의 후기 연구에 대해서는 잘들 모르시죠. (참고로 파블로프는 개 실험에 30년을 투자합니다... 대단한 집념이죠.) 파블로프는 후기 연구에서, 어떤 순서의 학습이 좋은가와 그 행동을 강화시키는 피드백과 약화시키는 피드백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파블로프의 이후 연구에 대해서 찾아보세요.
15/01/11 13:22
피드백의 결정주체는...
자기 자신이겠죠. 그런데 피드백을 해야겠다는 이 생각과 결심 조차도 뇌에서 의지와 생각 그 이전에 선행한다고 한다면 할 얘기가 없어지네요.
15/01/11 13:41
댓글 하나 더 달자면, '내가 의식하지 않은 결정은 내 결정이 아니다'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내가 내 결정을 의식하기 전에 뇌활동이 끝났으니 그건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것은, 본문과 댓글에서 계속 나오는 반복을 통해서 농구를 잘하게 된 사람의 반응속도가 의식적 행동이 아니니까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지요. '내 의식' 과 '나' 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좀 주의해야하는 위험한 행동 아닌가 싶습니다.
15/01/11 15:05
'내 의식'과 '나'를 같은 개념으로 보느냐 아니냐는 철학적 논의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위험하다기보다는 영역이 다른 문제지요. 뇌과학의 입장에서는 내 의식 즉, 내 의지는 이미 뇌에서 판단이 끝난 모니터를 보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니까요. 만약 마스터충달님이 이런 말씀을 하고 싶으셨다면 그냥 뇌과학적 견지에서 이 글을 쓰셨으면 끝나는 겁니다. 플라톤이나 메를로퐁티까지 갈 필요까지 없구요. 더구나 사르트르라니...ㅠㅠ 저는 과학적으로는 결정론자지만 철학적으로는 존재론자거든요.
15/01/13 01:34
주말에 좀 일이 생겼어서 답이 늦었네요. 네 저도 이건 '나' '의지' '자유' 등의 단어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15/01/11 15:53
결정과 신체능력(농구)는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한 사람에게 A와 B 두 가지의 인격이 있고 인격들이 서로 개입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가정해보면 A가 반복을 통해서 농구를 잘하게 되어서 B도 자기도 모르게 농구를 잘하게 되었다면 B 또한 자기도 농구를 잘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A의 인격의 의식이 내린 결정(=B가 의식하지 않은 결정)을 B의 결정이라고 말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B가 그것을 '나'의 결정이라고 말하기도 힘들 것 같고요.
그렇다면 '내가 의식하지 않은 결정은 내 결정이 아니다'라고 말할 여지가 조금은 남아있지 않나 싶습니다.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행동 또한 그 선택이 이미 비의식적으로 결정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아직 의식과 비의식이 어떤 관계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니까 단정짓긴 어렵겠죠. 내 의식과 나를 맥락과 관계없이 같은 개념으로 보는 건 위험한 행동이 맞습니다만 '나'라는 개념에 무엇을 집어넣는지도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에 더 크게 의존하긴 하겠지만요.
15/01/11 19:52
농구와 같은 프로 스포츠 종목의 경우가 오히려 지극히 결정론적인 것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스포츠 스타들이 동작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의식적이지 않거든요. 물론 모든 동작이 의식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고, 여유가 따르는 상황에서는 자기 반성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지만, 경기가 절정에 도달하는 승부처 같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의식이란 무의미한 것이지요.
이를 잘 말해주는 것이 스포츠 선수들의 본헤드 플레이입니다. 자신보다 한 단계 낮은 선수들 혹은 아마추어들과 플레이할 때는 미미르의 샘물을 잔뜩 들이킨 현자마냥 한 치의 오차 없이 정교하게 액션을 선택하던 선수가, 본연의 무대로 돌아가서는 팬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하고 아둔한 플레이를 하면서 경기를 그르치는 경우를 쉬 볼 수 있거든요. 이에 대해 해당 선수가 어떻게 플레이하는 것이 정답인지를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의식적인 판단을 내릴 여유가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평소 입력된대로 자동인형처럼 플레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죠. 이외에도, 코치가 아무리 선수의 나쁜 버릇을 교정하려고 공을 들이고 선수 역시도 교정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중에는 이전의 습관을 반복하면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라든가...이런 것에 의식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죠. 결국, 선수와 선수가 맞닥뜨렸을 때에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의식적인 판단에 따른 선택의 적절성이 아니라, 각 선수가 얼마나 빠른 리스폰스를 타고났는가, 곧 감각 신경과 운동 신경 사이의 신경물질 전달 속도가 얼마나 빠른가, 혹은 평소에 얼마나 적절한 플레이 습관이 운동 피질에 입력되었는가, 소뇌의 신체 조정 능력은 얼마나 좋은가 등등과 같은 기계적인 요소에 의한 선택의 적절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한 문장으로 표현 가능합니다. ["수의적/의식적 판단 없이 모든 동작을 처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최고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의식적 판단으로 동작을 처리한다면 프로 스포츠 선수 자격이 없다고 말해도 무방할 테고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스포츠 능력은 1) 해당 스포츠에 필요한 근육과 신경계의 능력 2) 평소에 트레이닝에 의해 입력된 습관 이 두 가지로 환원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 2번의 습관 역시도 래디컬하게 파고 들자면 신경계에 포괄이 되니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분해놓은 이유는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 사실상 스포츠 능력은 굉장히 환원적인 능력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컨대 메시가 아스날 전에서 골키퍼의 위로 볼을 띄워 농락했을 때, 이미 메시의 뉴런들은 메시의 의식이 알아차리기 이전에 결정을 다 끝내놓은 상태였다는 이야기죠. 이쯤 되면 [임기응변 혹은 플루크]와 [의도한 플레이]의 구분은 꽤나 난해해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저 양 선수 중 어느 쪽이 잘 정련된 기계인지만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겠지요.
15/01/11 22:41
제가 스포츠 능력을 결정론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하진 않은 것 같고, 그렇다고 의도된 행동에 대해 모두 비의식적으로 결정되어있지 않다고 말한 것도 아니라서 제 덧글 어떤 지점에 대한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튼 재미있게 읽었고 상세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스포츠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면에서는 흥미가 생기네요. 예전에 봤던 https://pgr21.com./?b=6&n=53330 이런 글도 떠오르고요.
15/01/12 04:11
음 뭐...그러니까, 운동 수행 자체가 지극히 기계적으로 수행되고, 그래야만 하며, 이 사이에서 의식의 기능을 찾을 수 없다면, 인격의 분열성과 같은 것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스포츠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뒤 자신의 플레이 영상을 보면서 '내가 하려고 마음 먹었던 동작은 저런 것이 아니었어'라고 탄식하고 아쉬워할지도 모르겠지만(A와 B의 분열), 실제로는 그들이 취했던 동작들은 그 순간 그들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최선의 결단이 아니었겠느냐...뭐 그런 생각입니다.
15/01/12 09:39
아 그렇군요. 근데 저는 '내가 결정하지 않은 결정도 내 결정이다'를 일반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반례를 들었을 뿐이라서 소개해주신 경우에도 불구하고 그 반례가 무색해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 소개해주신 경우가 그 일반화를 강화하긴 하지만 제가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의식하지 않은 결정은 내 결정이 아니다'라고 말할 '여지'에 불과하거든요. 그건 반대가능성이 하나라도 있다면 확보할 수 있잖아요? 단순히 A가 짜장면을 선택하고 B가 짬뽕을 선택했다면.. A가 가위를 내고 B가 보자기를 냈다면.. 이걸 모두 신경패턴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15/01/13 01:39
문 닫힌 뒤라서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댓글 답니당~
그렇네요. 애초에 대뇌까지 결재요구가 올라가지도 않는 경우와 의식을 나중에라도 할 수 있는 경우를 구분할 필요는 있겠네요. 관련해서, Alfred Mele 이라는 철학자 (철학의 대가라기보다는 철학 polularizer 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 a dialogue on free will and science 에서 자유 의지를 세 가지로 다르게 정의하고 각각의 존재여부에 대한 각 캠프의 의견을 중립적으로 서술한 책이 있는데요, 저는 유명한 책보다 이거 읽고 엄청 도움 받았습니다. 제가 양립가능론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도 되었어요. 나중에라도 시간 되시면 일독을 권합니다.
15/01/11 16:02
음... 사실 신경학이라는 게 복잡하죠. 공포는 생존과 관계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이라 amygdala라는 뇌 꼬리 부분에서 빠르게 전달됩니다. 메시의 드리블은 당연히 소뇌에서 대부분 담당하겠죠. 신경학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견해를 내놓지는 않습니다. 아니, 자유의지 같은 철학 냄새 폴폴 나는 것에 대한 토론의 영역은 신경학에 없죠.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전두엽에서 담당하는데 최종 판단자라 각종 감각에 직간접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받지만 뇌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의 영향 내지 지배를 받는다고 해서 자유의지의 유무를 논할 건 아닙니다. 어차피 몸이 주는 거의 모든 감각 자료는 뇌에서 처리됩니다. 설탕 한 줌의 비유는 설탕이 가장 간단한 유기물이라는 점에서 극단적인 환원론인 것으로 봐야할 겁니다. 인간의 의지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건 철학과 문학이 아니라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것이죠. 과학자가 과학이 우월하다는 걸 과시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실존주의 철학을 좋아하긴 하는데 신경학 연구와 메를로-퐁티가 얼핏 보기에는 비슷해보여도 연관짓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환원론자들과 실존주의자들은 시니컬함에 비슷해 보일 지는 몰라도 사실 극단에 놓인 완벽하게 배치되는 사고구조를 가진 사람들이죠. 더 간단하게 보면 신경학은 과학이고 실존주의는 철학입니다. 신경학의 오토마타는 신경 지도(map)의 개념이고 메를로-퐁티의 체화된 의식은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이죠. 오히려 이런 의미로 자유 의지를 박탈하고 무의식에 대해 논하는 건 신경학이 아니라 당연히 프로이트입니다. 철학사적으로 실존주의의 계보 앞에 프로이트와 니체가 이미 놓여있고 몸의 현상학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네요. 요즘 핫한 인지과학, 진화심리학 등은 프랑스 철학보다 영미철학과 언어철학 등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고 굳이 연관 짓자면 심리학 연구나 실험은 이쪽 계열이겠죠. 개인적으로 과학을 철학이나 사상에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오해를 너무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아서 의견을 제시해봤습니다. 과학이 영감을 줄 수 있지만, 일대일로 대응해서 과학으로 무언가 설명하겠다고 시도하다 보면 흔히 말하는 사이비과학이 되기 쉬우니까요.
15/01/11 16:24
신경학이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제게 좀 생소한데요.
제가 그런 부분에는 문외한이고 많은 부분 대중적인 과학책(주로 올리버 색스나 마이클 가자니가, 다니엘 레비틴 등)을 읽고 내린 결론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같은 비전공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나 책이 있을까요?
15/01/11 16:33
마지막 문단과 관련해 말해보고 싶은데요, 과학도 그렇겠지만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이 영감을 줄 수 있지만, 자기 생각에 대해 일대일로 대응해서 철학적으로 무언가 설명하겠다고 시도하다보면 흔히 말하는 사이비철학이 되기 쉬우니까요. 과학이야 합리적이고 관련 전공자가 많으니 그나마 검증하기가 쉽겠지만, 철학적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사용하다보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지면서 한편으로는 그럴듯해보이기도 해서 검증하기도 쉽지가 않죠.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된달까요.
별개로 삼공파일 님 글은 주의깊게 보는 편인데 레비나스를 이용해 쓰신 바람의 검심에 대한 글은 아직까지도 좀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글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이해가 안되니 제가 부족한 것이고, 글에 문제가 있어도 지적할 수 없으니 제가 부족한 탓일텐데, 이런저런 이유로 저에겐 숙제같은 글입니다.
15/01/11 16:40
제가 삼공파일님은 아니지만 저도 그 글이 숙제라서...
제가 레비나스를 읽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레비나스가 타자의 지평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제게 너무 나이브하게 느껴지는 건지 의문이 좀 들었어요.
15/01/11 17:59
바람의 검심도 레비나스의 윤리학도 제겐 낯설지만 삼공파일님이 써주신게 레비나스의 윤리학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주신거라면
아마도 제가 생각하는 나이브함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곧 쪽지 드릴께요. 너무 아둔한 글이라고 흉보지 마세요. ^^
15/01/11 22:03
우선 메를로-퐁티는 무의식을 부정했습니다.
정신분석학의 무의식과 체화된 의식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의 근원은 성적 욕망 등의 억압된 감정이 분출된 것이죠.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이 무의식 입니다. 그에 반해 체화된 의식은 몸 자체를 뜻합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의식의 발현이 아니라 몸을 기반으로 하는 반응이라는 것이죠. 자아가 하는 생각이 아니라 '몸이 하는 생각'의 개념입니다. 의사 결정이 의지를 가진 자아 즉, 자유의지가 아니라 몸에 체화된 것을 따른다는 개념은 오토마타 개념과 거의 같죠. 프로이트의 연장선이 아니라 프로이트를 철저히 부정하는 철학입니다. 그렇게 정신분석학을 부정하는 것에서 발상이 시작되었다고 추측되기도 하고요. 그리고 오토마타는 신경 지도의 개념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존재론적 고찰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과학적 결과물은 그쪽 계열이고, 철학적 고찰은 이쪽 계열이라는 식으로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럼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존재 의의가 없는 셈이죠. 주의해야 할 것은 방향성일 겁니다. 과학으로 철학(혹은 종교)를 설명하려 한다면 그건 순서가 잘못된 겁니다. 사이비가 될 공산이 크죠. 대표적으로 창조과학이 있습니다. 과학은 철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입증해야할 학문이죠. 반대로 철학이 과학을 설명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그것이 철학이라는 학문의 존재 의의라고 봐야합니다. 과학이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현상을 발견했으니, 철학은 그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겠죠. 저는 메를로-퐁티로 설명하고자 했지만, 사르트르의 텅빈 자아로도 설명이 될 수도 있고, 아예 중세 교회처럼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운명론적 가치관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어떤 설명이 더 적합한가를 논의해야 하고 적절한 것이 없다면 그 설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게시글에서 댓글로 논의하는 모든 분들이 다 철학자인 셈이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드리자면, 언급하신 영미 철학이나 언어 철학 중에 추천해주실 만한 것이 있으면 알려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나마 도킨스 정도만 알아서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15/01/11 22:59
메를로-퐁티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철학사적 계보로 볼 때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은 실존주의라는 족보로 묶이고 바로 위에 하이데거가 있고 그 위로는 후설이 있으며 옆 가지로 프로이트와 니체가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개념적으로 무의식, 의식, 자유의지 등의 용어 자체가 계보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연장선 상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창조과학 같은 사이비 과학은 [과학으로 철학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철학으로 과학을 설명하려고 한 시도]입니다. 과학은 과학적 결과물 자체로 끝나야 하고 철학과 종교에는 그 결과물이 영감을 줄 뿐이지, 그 원리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면 사실상 무조건적인 오류가 나타납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진화심리학 같은 것이겠죠. 인간에게 철학이 뭔 소용이 있길래 인간은 철학을 하려고 했고 종교는 왜 탄생했나 따위를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인간의 개별적 행동이나 집단적 행동, 혹은 생각을 설명하려는 행동학, 사회학, 심리학이라는 과학들은 제법 성공해서 자리 잡았죠. 일단 먼저 신경학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현상을 발견한 적도 없고 그런 결론을 내린 적도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무엇입니까? [자유의지]라는 말을 어떤 맥락으로 사용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거꾸로 신경학은 의지가 개입되는 신경과 개입되지 않는 신경을 기본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수의근과 불수의근이 구별하고 있고 기타 다른 신경의 작용도 전두엽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과 내리지 않는 것으로 구별하여 용어를 사용합니다. 사람이 생각을 하고 몸을 움직일 때 뇌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뇌는 신경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신경세포에는 전류가 흐르고 있고 신경세포 사이 사이에는 도파민이나 아세틸콜린을 비롯한 몇 가지 분자들이 화학적 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신경학이 밝혀낸 것은 이 원리일 뿐입니다. 철학에서 고민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에서 인간의 뇌는 벗어날 수 없고 실제로 그러한 원리는 신경학 연구와 의학적인 치료 방법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분자와 전자의 움직임으로 뇌를 전부 설명할 수 있고, 인간의 행동은 뇌가 지배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은 분자와 전자의 움직임으로 전부 설명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환원론은 비유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물리학과 화학으로 인간의 어떤 행동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원리를 옥시토신의 분비량과 시기로 설명할 수 있나요? 지식과 관련된 부분도 뇌가 기억을 저장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고 다른 메커니즘을 사용합니다. 논어에서 배움과 익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구분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악기를 다루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은 소뇌를 사용합니다. 자전거 타는 법은 자전거가 뭔지 모르는 치매 환자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골프처럼 보다 복잡한 운동은 뇌의 다양한 부분을 사용할텐데 프로 선수와 일반인은 당연히 사용하는 뇌가 다르겠죠. 명시적 지식이나 암묵적 지식이 사용한 용법의 의도와 그것을 적용하는 신경학의 설명이 별로 일치하질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지식을 구분할 때는 칸트를 인용하는 편이 훨씬 낫겠죠. 과학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특히, 메를로-퐁티의 조금 위에 있는 후설이 관계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고 그 고민의 결과가 바로 [현상학]입니다. 간단히 정리하긴 어렵지만, 후설의 입장에서 과학의 결과물에 대해서 철학은 개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현상이 존재하고 그 현상에 대해서 인식하고 사고하는 방법론이 존재하며 그 방법론의 본질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의무라고 생각했죠. 인간의 뇌에 대해서 연구하는 신경학에 대해서 철학은 그 연구의 결과물을 가져와 직접 사용하는데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인간의 신경에 대해서 탐구할 수 있는 것은 신경학 뿐이고 역도 성립합니다. 다만, 신경학이 뇌를 바라보는 관점과 입장, 그리고 그 관점과 입장을 생각하게는 인간의 사고, 그 사고와 대상의 관계에 대해서 탐구할 때 철학은 철학으로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후설의 이런 생각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로 바로 제자인 하이데거죠.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방법론은 그대로 차용했지만, 과학과 철학과의 관계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인간 존재와 철학과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이 현상학이 프랑스로 유입되면서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과학적 결과물에 철학이 개입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둘 사이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고 오히려 과학과 기술의 결과물들이 인간 실존을 되찾는데 방해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과학의 원리를 차용해서 그것을 해석하고 철학에 적용해야 겠다는 시도들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그 철학에 부당한 권위만 부여하게 됩니다. 철학이 과학보다 먼저 탄생했고 철학이 과학이 무엇인가 규정 짓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등장하는데는 그 무엇보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칸트는 [프린키피아] 덕분에 인간의 이성은 우주의 원리조차 설명할 수 있는 능력임을 알게 되었고 그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우주의 원리가 철학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한 게 아니라요.
15/01/11 23:57
제가 말이 꼬이는 기분이 드네요. 원리를 설명한다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제 입장은 과학은 자연의 관찰이고, 사실 증거의 확충이자 도구로 작동하며 철학은 그 증거들로부터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철학/종교 무용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요. 과학으로 인간 본질을 설명하려 해봤자 허무적 유물론 밖에 답이 없죠. 보다 깊게 논의 하고 싶은데 선후관계와 포함관계를 따지는 일이라 댓글로 이야기 하다간 혀만 더 꼬일 것 같습니다;; [사람이 생각을 하고 몸을 움직일 때 뇌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뇌는 신경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신경세포에는 전류가 흐르고 있고 신경세포 사이 사이에는 도파민이나 아세틸콜린을 비롯한 몇 가지 분자들이 화학적 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신경학이 밝혀낸 것은 이 원리일 뿐입니다.] 말씀하신 '이 원리'는 이미 19세기에 다 밝혀졌습니다. 지금 논란이 되는 것은 선후 관계의 문제죠.(본문에도 적혀있습니다만;;) '생각'과 행동을 위한 '뇌작용'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합니다. 문제는 생각보다 뇌작용이 훨씬, 1/1000초 단위가 아니라 최대 10초까지 정도로,빨리 작동한다는 겁니다. 본문에 적힌 실험 뿐만 아니라 교차검증을 위한 실험까지 끝나 과학적 발견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팔에 모기가 앉아서 '때려야지' 생각하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모기를 때리는 동작을 위한 신경물질은 출발했고, 그 신경물질로부터 모기를 때리려는 의식을 파악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발견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의 증거가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15/01/12 00:50
그 실험으로 자유의지의 유무를 판단하려면, 팔에 모기가 앉아도 때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는데도 팔이 알아서 모기를 때리면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겠죠.
축구공이 날아올 때 축구공을 차기 위한 동작은 대뇌의 판단보다 선행하고 뜨거운 것을 피하는 동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파도 그냥 축구공을 맞을수도 있고 손에 화상을 입어도 뜨거운 것을 참고 잡을 수 있습니다. 뜨거운 것을 인식하고 피할 때는 신호가 아예 뇌까지 가지도 않습니다. 뇌는 복잡하고 신호에 따라 전두엽에 도달하는 경로는 천차만별입니다. 그런데 내 [의지]대로 심장을 빨리 뛰게 할 수는 없죠. 이게 신경학에서 다루는 [의지]입니다. [자유의지]라고 함은 당연히 고등한 활동을 일컬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외부적 요인에 의해 정해진다는 뜻에서 자유의지가 없다고 해야 의미가 통할 겁니다.
15/01/12 01:41
선후관계의 문제임을 다시 지적해 드립니다. 말씀하신 예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팔에 모기가 앉아도 때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생각보다 [때리지 말라는 즉, 움직이지 말라고 근육에 명령을 내리는 신경물질의 전달]이 먼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의식이 팔을 움직이고 안움직이고를 결정하기 전에, 잡거나 말거나를 결정하는 신경물질 전달이 먼저 수행된다는 겁니다. 자유의지에 의심이 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감각신호와 운동신호의 속도차이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그 차이가 초 단위 이상 벌어진데서 이미 속도문제가 아니긴 합니다.) 우선 감각신호는 무조건 선행되는 겁니다. 문제는 인식보다 행동이 우선한다는 거죠. (모기를 느낌) → (잡으라는 신경물질 분비) → (모기를 잡겠다고 인식) 이런 순서입니다. 그럼 신경물질을 분비시키는 의지는 어디서 나온걸까요? 결국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수업에서도 모기를 때려잡는 것을 예로 들었는데, 삼공파일님이 말씀하신 반론이 정말 그대로 나왔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교수님의 답변을 거의 그대로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43969 이 글을 먼저 읽으시고, 선후관계의 모순에 대해 먼저 파악하고 난뒤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5/01/12 02:17
83년 Libet 실험이 가장 비슷해보이는 실험인데, 수업에서 가리키는 정확한 실험이 따로 있었나요? 과학과 철학의 관계 같은 것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확인부터 해봐야 겠네요.
15/01/12 03:11
헤인즈의 2007년 실험에 대한 기사가 네이쳐에 있습니다.
http://www.nature.com/news/2011/110831/full/477023a.html 논문 링크도 있네요 http://www.nature.com/doifinder/10.1038/nn.2112 본문과 참조글에서 모두 헤인즈의 실험을 언급하고 있는데, 굳이 다른 글을 찾으시는 연유가 궁금하네요.
15/01/12 03:45
레퍼런스들을 차분히 보고 있는데 신경과학자들이 인간의 자유 의지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악착 같이 수십년동안 실험을 한 지 몰랐습니다. 이 정도 해놨으면 과학의 영역이네요. 일단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의견만 제 개인적인 견해로 받아두세요. 허허. ㅠㅠ
15/01/12 01:14
철학이나 종교가 무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하신 인간 본질이라는 영역에 자유의지가 포함되고 이것은 과학이 다룰 수도 없고 다루려고 시도도 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에는 인간의 선과 악 같은 개념도 포함될 것이고 리처드 도킨스 같은 극단적 환원주의자들은 철학과 종교의 무용을 주장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제거하려고 하겠지만, 어차피 이 논의로 넘어간 순간 이건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철학의 영역입니다.
모기를 인식하는 감각 신호가 도착하는 시간보다 모기를 잡는데 쓰는 운동 신호가 도착하다는 시간이 더 짧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선악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겠죠. 그런 것은 철학과 윤리의 영역에서 토론할 문제입니다. 당연히 신경학이 많은 영감을 주고 철학과 윤리의 영역에서 토론할 만한 과제를 바꿀 수도 있겠죠. 지금 하는 토론도 그런 것이고요. 그렇지만, 신경학의 연구 결과가 이 토론의 결론에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15/01/11 16:11
글에 심각한 오류가 있군요.
(...이럴 땐 즐거운 일들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울게 하느니 차라리 강제로 개콘을 10시간 시청하게 하는 것이 낫다.)
15/01/12 08:54
이기적 유전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유전자는 생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생명체라는 수단을 택했다. 그런데 유전자는 스스로 직접 통제해도 되는 것을 굳이 생명체에게 뇌라는 판단 영역을 주고는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모든 상황에 적합한 데이터를 모두 입력하는 것은 너무 방대한 데이터 용량이 필요하고,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낮은 단점이 있기 때문에, 생명체에게 판단력을 주는 것이 더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라고요.
본문에 나와있는 습이라는 영역은 저는 체득이라고 부르고 이는 순간적인 판단력을 요할 때 씁니다. 이는 도킨스식으로 유전자가 담당하는 부분이고요. 체득에서는 자유의지가 아니라 몸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는 감각 기관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로, 생리적 욕구와 긴밀히 닿아있거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것과 마주했을 때 의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을 합니다. 하지만 유전자가 생명체에게 판단력을 주었듯이, 순간적인 판단이 아닌 꽤 장시간 생각하여 판단할 때는 자유의지를 따릅니다. 몇가지 예를 들면 벼락치기를 할 때, 당장에는 잠을 줄여서라도 책을 더 붙잡고 싶지만, 잠을 자야 그 내용이 기억에 더 잘 정리된다는 사실을 알고있기 때문에 잠을 자러 갑니다. 창의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싶을 때, 공기가 좋은 곳에서 가볍게 산책을 하면 뇌 스스로가 생각을 잘 정리하고 취합을 하더라는 경험이 있어, 생각하려고 머리를 싸매지 않고 산책하러 집을 나섭니다. 메시는 경기 중에는 빠르게 반응을 하지만, 언제 그 반응성이 떨어질지 알 수가 없어 평소에 죽자살자 훈련을 합니다. 너의 판단이 전부 너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었느냐는 질문에는 NO라고 대답하겠지만 마찬가지로 자유의지가 없냐고 물으면 NO라고 대답하겠습니다.
15/01/12 10:01
메를로-퐁티의 철학도 정신작용을 인정하고 있지요. 그는 정신-사유-반성의 기능이 몸이라는 판단의 본질로부터 솟구쳐 오른 기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적하신 장기적인 사유행위가 이에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댓글에서 몇몇 분이 "자유의지가 없다면서, 자기계발이라는 목표를 갖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요. 제가 자유의지를 끌고 온 것은 흔한 자기계발서가 정신적 계몽을 추구하는 것이 쓸모없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이 신경 매커니즘을 결정론이나 운명론으로 확장하려는 것은 아니었죠. 그래서 깨달음(명시적 지식)을 배우려 하지 말고, 뇌가 긍정적으로 작동하도록 훈련(암묵적 지식)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lic님이 깊은 생각을 위해 산책을 하시는 것도 환경적 요인을 개선하여 뇌의 기능을 상승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서, 자기계발을 목표로 삼는 것이 모순이다."라는 지적에 답변을 하자면 그러한 사유는 방향성이나 변화의 시작을 결정하는 것이고, 실질적 변화는 결국 입출력 작용의 선순환으로 습의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자기계발을 위한 꾸준한 고민(장기적 사유) 같은 행위도 결국 습의 작용이라고 봐야할 거고요. 그래도 그 변화의 시작이나 방향성을 결정하는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지적은 유효합니다만, 제가 뭐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 진리라고 설파하고자 쓴 글도 아니고 그러한 매커니즘을 유용하게 써먹자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자유의지 유무에만 집중하는 것은 철학적 탁상공론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뭐 저만 해도 사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메를로-퐁티의 정신 기능에 대한 주장에 동감하고 있으니까요.
15/01/12 18:02
모기 이론에서 먼가 이상하군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은 전후 관계가 이해가 되는데, 모기가 아직 없을때 모기가 물더라도 팔 안움직이는건 생각이 먼저 아닌가요? 팔을 안 움직이는 신경물질이 분비된다음 저런생각을 하는거라고요?
15/01/12 18:27
기존의 추측 : (모기 발견) → (모기를 안 잡겠다고 생각함) → (움직이지 말라는 신경물질 분비)
실험으로 밝혀진 사실 : (모기 발견) → (움직이지 말라는 신경물질 분비) → [모기를 안 잡겠다고 생각함] 선후 관계가 이렇다 보니 마지막 [모기를 안 잡겠다고 생각함]은 [모기를 안 잡는다는 것을 인식함]이라고 바꿔말해야 합니다. 즉, 모기를 잡겠다는 생각따위는 없고, 육체가 행하는 것을 인식할 뿐이라는 것이죠. 모기 이야기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니, 본문의 뱀의 경우를 보시는 게 이해하시기엔 더 나으실 겁니다.
15/01/12 18:40
그건 외부자극에 대해 얼마나 반응하는게 이득인가를 미리 따져놓은 스크립트의 일종 아닐까요? 디게 추우면 추위를 인지하는 신호들이 먼저 나오고 몸을 덥혀야겠다는 뇌신호가 후행하는것처럼요. 고차원의 두뇌 프로세싱이 필요없는 작업은 후진 mcu가 빨리빨리 처리하는 개념처럼
15/01/12 18:52
헤인즈의 2007년 실험에 대한 기사입니다.
http://www.nature.com/news/2011/110831/full/477023a.html 이건 논문링크고요 http://www.nature.com/doifinder/10.1038/nn.2112 이건 제가 참조한 OrBef님 글입니다.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43969 자꾸 자유의지에 핵심이 맞춰지는데 ㅠ,ㅠ 이 글은 그 개념을 끌어왔을 뿐이니 본격적인 내용은 다른 글을 참조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설명드릴 수 있는 건 위 글들에 다 있다고 보면 될겁니다. 저 같은 아마추어한테 들으시는 것 보다 이 글들을 보시는게 이해에 더 도움이 되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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