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세로 유명한 유명한 조제프 푸셰. 하지만 푸셰 이야기는 아닙니다.
보통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국 시절의 처세가로 말하면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이라는 책으로도 유명한 조제프 푸셰라는 인물이 자주 언급 됩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이 있을까 싶어 간단하게 설명하면, 푸셰라는 사람은
'수도원에 있었다가, 수도원을 통수치고 혁명에 참가해서 지롱드파에 있었다가, 지롱드파를 통수치고 급진적 자코뱅파로 돌아서서 루이 16세를 처형하는데 한표 보태고 반항하는 반혁명 세력을 대학살해서 명성을 떨치다가, 급진 자코뱅 세력의 대표인 로베스피에르를 통수치면서 테르미도르 쿠데타 세력에 붙었다가, 그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세워진 총재정부를 통수치는 브뤼메르 쿠데타에 협조해서 나폴레옹에 협력했다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 등에서 패배하자 이번엔 나폴레옹을 통수쳤던'
인물입니다.그 격동의 시대에서 그야말로 온갖 위치와 세력으로 자리를 계속 바꿔서 탈바꿈 하면서 질기게도 살아난 인물로 유명한데.... (여기에 더해, 나폴레옹의 부인인 조제핀부터 길거리의 거지들까지 곳곳에 정보원과 비밀경찰을 배치해서 정보를 수집해서 써먹은 인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푸셰라는 인물의 행적 자체는 분명 극적이긴 하되, 인물의 '처세' 라는 면에서 보면, 첫 단추부터가 지롱드파를 뒤통수치고 공포정치 하에서 여기에 붙어본다고 루이 16세의 사형에 표를 던지고 리옹에서 사람을 대략학살하는 '극단' 이었기 때문에 그 극단적인 과거를 과거를 지우려고 계속 극단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던것 같거든요.
말하자면 우리가 보통 뛰어난 처세술을 지녔다고 하면, 여러 이해득실로 엮인 인간관계 속에서도 유들유들하게 적을 안 만들고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흐르면서도 그 안에서 자기가 누리고 챙겨먹을건 챙겨먹는, 그런 느낌을 말할때 '처세가 좋다' 곤 하는데, 푸셰는 '적' 이 너무 확실한 사람이라 거기에는 포함이 안 되지 않나 싶습니다. 즉 적을 안 만든다기보다는 계속 적을 '만들' 어 내면서 어찌어찌 버티는 인상, 이런 느낌을 개인적으로 받았습니다.
당장 나폴레옹의 밑에서만 해도 한번은 해임되고, 또 한번은 뮈라를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음모에 연루되기도 하는등(결과적으로 탈레랑만 뒤집어 썼지만), 빈말로도 나폴레옹과 사이가 화목하다고는 볼 수 없었고, 단지 '더 나은 대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쓰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루이 16세의 처형에 표를 던지고 리옹 학살에 앞장선 과거가 너무나도 명확한 주홍글씨라, 결국은 왕당파의 대두에 벌벌 떨어야 하는 낙인이 찍혀 있기도 했구요. 결과적으로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을 팔아먹어서 어떻게든 명줄을 부지한다고 해봤지만, 부르봉 왕조가 돌아온 후에는 얄짤없이 추방 되고 결국 고국 프랑스에 돌아오지도 못한 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이 시대의 여러 인물을 보면서, 처세라는 부분에서 그 유명한 푸셰보다도 어쩐지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독재권력을 움켜쥐고 프랑스 제1통령이 될때, 제 2통령으로 꼽힌 캉바세레스(Jean Jacques Régis de Cambacérès) 입니다.
나폴레옹 관련 일대기를 보면 거의 반드시, 그리고 얼핏얼핏 이름이 언급되는 인물인데, 뭔가 보면 볼수록 '조용히, 권력의 중심에서, 딱히 적을 만들지 않고' 오랫동안 나름 잘 버틴 사람 아닌가 싶더군요.
우선 이 사람의 대략적인 일대기를 살펴보면, 몽펠리에에서 딱히 부자 소리는 못 드는 귀족 집안 출신으로 태어나고, 이후 학교에서 (그의 경력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법학을 공부하고, 이후 몽펠리에를 기점으로 정치에 끼어 듭니다. 한때 삼부회 선거에서 낙선에서 정치적 시련을 맞이하지만 이내 곧바로 자신이 거주하는 현에서 특기인 법률 지식으로 법원의 재판장이 되어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러다가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후, 몽펠리에에서의 경력을 기반으로 국민공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바로 이 무렵, 루이 16세의 처형에 관련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푸셰는 이때 열렬한 '국왕 살해자' 가 되어, 정치적 입장이 완전히 고정되어버렸고, 부르봉 왕조가 돌아오니 당연히 자기 가족을 죽였다 여긴 사람들에게 백안시 되게 되는데...
여기서 캉바세레스는 국왕 살해에 기본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면서, "법정에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인가" "국왕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항의를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는 의견을 내는 동시에 "국왕을 인질처럼 삼아 보호하면서, 만약 타국이 쳐들어온다면야 처형할수 있다" 는 '조건부 처형' 론을 주장했습니다. 루이 16세는 처형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이게 캉바세레스의 말년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루이 16세의 목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후 무시무시한 공포정치 시대가 열렸지만, 캉바세레스는 왕당파 등이 아닌 어디까지나 공화당원으로서 '루이 16세를 사형하지 말자" 고 하지도, 그렇다고 "루이 16세를 단칼에 죽여버리자" 고 하지도 않는 온건파 공화당원의 입장이 되었고, 여기저기서 격렬한 정치 투쟁이 벌어지며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이 죽어나자빠지고 어제의 거물들이 오늘 처형 당하는 와중에서도 자기의 전공인 법률 문제 - 프랑스 민법의 초안을 잡는 문제에만 주로 전담 되어서(자꾸 빠꾸 당하긴 했지만) 풍파에도 엮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법률 전문가로서 여기저기에 자문을 많이 주면서, "모든 사람에게 친구, 동시에 그 누구의 적도 아닌" 위치를 유지하면서 전면에 나서지 않았는데, 여기서 뜻밖의 전기를 맞이합니다.
시에예스, 그리고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 총재정부가 극도로 비판 받으며 쿠데타의 분위기가 무르익는 상황이 되고, 그 주역으로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나폴레옹과 '제 3신분은 무엇인가' 로 명성을 가지면서도 한발 물러서 있던 시예에스를 후원하며 쿠데타 세력에 한발을 걸칩니다. 정치적으로는 늘 물에 물탄듯 하던 캉바세레스의 거의 필생의 승부수 였다고 봐도 될련지..
결과적으로 모두가 알다시피 쿠데타는 성공했고, 나폴레옹은 독재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시예예스는 나가리 되는 판이었지만, 캉바세레스는 저명한 법률학자로서 막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에게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프랑스 제국의 3명의 통령. 제1통령 나폴레옹. 제2통령 캉바세레스, 제3통령 르브륑.
그리하여 새로운 공화국 프랑스의 제 2통령이라는 자리에 오른 캉바세레스지만, 기본적으로 제 2통령, 제 2통령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고 모든 정책 결정은 제 1통령, 나폴레옹의 손에 있었습니다.
다만, 원래가 이 무렵 62세로 나이가 많았고 루이 16세 시절에 모포우 장관의 비서로 정치를 시작한 경력으로 온건 왕당파를 끌어들이는 얼굴마담 격 역할을 한 다음, 적당히 보상을 받고 정치 무대에서 퇴장한 르브륑과는 달리 캉바세레스는 이후 나름대로 통령 정부에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의 '법률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통령 정부가 수립된 이후 당장의 과제로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나폴레옹은 법률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유명한 '나폴레옹 민법전' 입니다. 주제가 주제다보니, 자연스레 캉바세레스는 이 문제에 관해 존재감이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대범한 나폴레옹과는 달리 캉바세레스는 소심하면서도 세부사항도 꼼꼼히 따지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캉바세레스는 나폴레옹에게 영향력 있는 조언자가 됩니다.
여기에 대한 파스퀴에의 회고록을 보면,
"(캉바세레스는) 철학적인 체계에 매달리지 않고, 누구보다 적극적인 성품을 타고 난 탓에 그는 혁명의 거센 물살을 보며 넋을 잃고 휩쓸리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자신을 순응시켜 나가는 쪽을 택했다. 바로 거기서 정치적 균형 감각을 배웠다. 그는 놀라운 근면함과 법률체계에 대한 탁월한 지식, 그리고 혁명의 무리들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아첨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이런저런 행정 처리 문제에서 활약을 하던 도중, 또다시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는데...
마렝고 전투
어느정도 내부 정리가 되었다고 여긴 나폴레옹은, 이윽고 2차 대프랑스 연합군을 와해시키기 위한 문제에 몰두합니다. 프랑스 시민들이 원하는 당장의 큰 요구가 바로 혁명 이후로 쭉 이어진 무질서를 바로잡는 '안정' 과 '평화' 였으니, 제도를 다잡아 안정을 가져다준 후 프랑스를 노리는 연합군을 붕괴시켜 평화를 가져다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본인의 권력이 확고해질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다행이 2차 대프랑스 연합군의 핵심 중에 하나였던 러시아는 무시무시한 수로보프 원수가 되돌아갔고, 파벨 1세는 영국에 질린 나머지 친 프랑스 정책으로 돌아섰습니다. 프로이센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제 남은 문제는 오스트리아였습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마세나 장군이 오스트리아 군대를 상대로 버티고 있는 이탈리아로 군사를 이끌고 떠났는데... 헌데 이떄의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병력을 함부로 분산했다가 '패배 직전' 까지 몰렸고, 드제가 적절한 순간에 지원을 와준 덕분에 패망에서 간신히 구사일생하고 오히려 승리를 거두어 의기소침한 오스트리아에게 평화 협상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마렝고 전투 입니다.
마렝고 전투에 대한 대체적인 평은, '이 전투의 패배가 나폴레옹에게 군사적으로는 엄청난 타격은 아닐지 모르지만(패한다고 해도 전쟁 전체로 보면 다시 수습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치명타였을 것이다.' 라는 평입니다. 이제 막 손에 넣은 독재권력이 패배로 명예가 실추 된다면 완전히 손에서 빠져나가게 되버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그런 평이 나올법도 하듯이, 나폴레옹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파리는 온갖 음모꾼들의 이합진산 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왕당파에 자코뱅 세력에 분을 삼키고 있는 시에예스에 심지어 나폴레옹의 형제들까지 엮이는 음모가 도처에서 진행 중이었고, 마렝고 전투 초반의 불리한 형세로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박살났다!" 는 헛소문이 먼저 전해졌을때가 최고조였습니다.
그리하여 '명성 높은 라자르 카르노를 일단 나폴레옹 대신 대표 자리에 올리자' 는 계획까지 정해진 바로 그 순간, 나폴레옹의 승리 소식이 들려왔고, 불안불안했던 나폴레옹의 권위는 바로 이 시점에서 확고해졌습니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자기가 없는 동안 벌어진 파리의 음모 소식을 듣고 분개했고, 아직 남은 시에예스 세력은 이때 거진 소탕 되었으며, 명성 높은 카르노는 백일천하 이전까지 나폴레옹 시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해버리다시피 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야단법석을 떨던 바로 이때, 유독 캉바세레스만은 침착을 유지하여 경거망동을 삼갔고, 나폴레옹에게 큰 점수를 따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나폴레옹은 황제가 된 이후 수년간 전쟁을 치르러 장기간 파리를 비울때는, 캉바세레스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특히 프로이센 - 러시아를 상대로 한 이후 틸지트 조약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는 1년을 통째로 외부에 있기도 했었으니, 그동안은 파리에서 캉바세레스가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가 된 셈입니다. 실질적으로 나폴레옹이 파리를 비운 시간은 1804년에서 1810년 동안 무려 36개월에 이릅니다. 그동안은 캉바세레스가 파리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연달아 격파한 후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러시아 국경 지대에서 만나 회담한 틸지트 조약. 이 정도 위업을 이루기 위해선 1806년부터 1807년까지 꼬박 1년을 외부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은 기본적으로 독재적 군주였고 그 말인즉슨 필요한 모든 의사결정, 즉 유럽의 국가들와 군주들을 상대로 흥정을 벌이는 일부터 프랑스에 있는 극단에서 상영할 극 프로그램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기가 결정하려고 했고, 심지어 이것은 나폴레옹이 외국으로 떠나 전쟁을 앞두는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캉바세레스는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캉바세레스가 '이러저러한 일이 있다' 고 보고하면, 저 멀리서 나폴레옹이 결정을 하고 편지를 쓰고, 캉바세레스가 이를 따르는 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역시 멀리서 '원격 조종' 을 완벽하게 하긴 한계가 있고, 설사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일단 프랑스의 수 많은 상황을 핵심적으로 잘 정리해서, 제대로 보고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꼼꼼하면서도 조심스런 캉바세레스는 여기에 적격이었습니다.
굳이 따지면 캉바세레스는 소심한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행정 업무 전반을 담당하면서도, 일단 자기가 그걸 바로 처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수백킬로미터는 떨어진 나폴레옹에게 보고 - 나폴레옹이 흚어보고 쓰윽쓰윽 이래라 저래라 하고 포괄적으로 명령 내리는 와중에 훈계 몇마디 덧붙임 - 다시 그걸 받아보고 나폴레옹의 말에 따라 현장에 적용 하는 불편하기짝이 없는 일을, 하루이틀도 아니고 수년동안 성실하게 해내면서 그럭저럭 문제없이 실무에 적용시키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나폴레옹과 캉바세레스간의 이런 '원격 조종 통신' 서신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것만 무려 1,397편에 이릅니다. 한때는 소실되었다고 여겨진게 기적적으로 한 개인 소장가에게서 발견되었고, 진품 여부가 확정된 후 프랑스 국립 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나폴레옹 제국의 통치에 대한 수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총괄하는 책임은 있는데....막상 어떤 결정권도 없고....그런데 이런 구속은 있는데 적작 현장에서 일은 잘해야 하고.....그러면서도 변덕 심한 나폴레옹의 신임은 계속 유지해야 하고....
이런 이상야릇하고 쉽지 않는 위치였지만 캉바세레스는 통령정부 시대의 시작부터 나폴레옹의 몰락 때까지 계속해서 그 자리, 행정부의 2인자 자리를 변함없이 유지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에게 그만큼 인정 받고, 신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코뱅과 왕당파, 탈레랑과 푸셰, 뮈라 등 온갖 음모에 시달리던 나폴레옹이었지만 캉바세레스는 마렝고 전투 때도 가만히 있는 등 기본적으로 음모에 엮이기를 좋아하지 않고, '공화파에 대한 아첨으로 이름 날렸다' 고 할만큼 성질 안나게 똥꼬를 살살 잘 긁어주는데도 능했으며, 본인 자체도 무슨 야심가라기보다 안정을 좋아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실 캉바세레스는 국민공회에서도 일했지만 본래 귀족 출신으로서 개인적으로는 혁명 이전 무렵의 안정적인 생활을 그리워 하는, 여기저기 온갖 부분에 발 하나씩은 걸친 입장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급진 자코뱅 세력과 연계한다던가, 이런건 꿈도 못 꿀 사람이었구요.
나폴레옹은 워낙에 성격이 급하고,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자기에게 대드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고, 굉장히 정력적이었던데 반해 캉바세레스는 소심하고, '여성적' 이고,(캉바세레세는 당대의 유명한 동성애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이걸 가지고 홍석천 스러운 개그를 몇번 치기도 했을 정도) 꼼꼼하면서 눈치를 잘 살폈습니다. 이렇게 달랐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제법 잘 맞는 콤비가 되었습니다.
내무장관이었던 샤프탈의 회고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오직 캉바세레스와 조제핀 정도만이 보나파르트의 불같은 성미를 완화시킬 수 있다. 캉바세레스는 황제의 성급한 성미에 결코 직접적으로 대항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틀림없이 성질만 돋구었을 것이다. 대신, 캉바세레스는 황제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악에 바쳐 명령을 내려대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그의 성미가 가라앉을 떄까지 차분히 기다린 뒤에, 화가 누그러지면 그제야 잘못된 점을 지적했다."
"물론 그랬다고 해서 항상 명령이 철회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누그러뜨린 일은 종종 있었다. 캉바세레스가 보여준 침착성과 수완에 나는 자주 경탄하곤 했으며, 그런 식으로 커다란 재앙을 막아내는 것을 자주 보았다."
특히 나폴레옹이 캉바세레스에게 의지한 부분 중에 하나는, 일단 대책없이 일을 저질러 본 뒤, 이를 뭔가 합법적으로 포장하려고 했을 떄였습니다. 법률 지식에 워낙 능통하고 기회주의적 성향이 있는 캉바세레스는 나폴레옹이 한 일을 아주 요령있게 '아주 적적법하고 그럴듯하게' 포장을 잘 해냈습니다. 여기에 대해 당대 인물인 몰레가 이르기를,
"법적 형식을 갖추고 권력의 행위를 합리화하는데는 캉바세레스보다 더 지식과 수완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보나파르트의 난폭하고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위에 합법성의 옷을 입혀 줄 수 있는 사람도 그 사람 말고는 또 없었다."
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둘 간의 일처리 방식에 대해 잘 보여주는 부분으로, 하루는 캉바세레스가 파리의 극장에서 오페라단 감독이 나폴레옹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윗선에 의해 잘려버린 일에 대해 '이런 일을 해야 한 사람을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아주 정중하고도 굽신거리는 어투로 나폴레옹에게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여러모로 자신을 한껏 낮추고 있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한마디로 말해서 "니가 뭔데 함부로 그걸 결정하려 하느냐" 고 짐짓 꾸짖자, 캉바세레스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며 몸을 낮췄습니다.
"폐하께서는 7일자 편지에서 제게 특별지시를 받을 때까지 그 어떤 결정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결정 대신에 사태 분석만을 할 것이며, 장관들의 건의가 있을 때에 제 서명을 공식화하지 않으면서 화급한 안건들에 대해서만 조심스런 판단을 내린다는 전제 하에, 폐하께서 제게 주신 권한의 한도를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통해 폐하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으며, 그 뜻을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제게 주신 명을 어기고 제 권한을 임의로 확대하려 했다고 믿으신다면 제겐 너무나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제 의무나 과거나 현재의 제 행동 모두와 상반되는 일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책임은 있는데 권한은 없는 일을 계속 하면서도 캉바세레스는 꾸준히 신임 받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권한도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나폴레옹에게 여러가지 문제에 관해 조언을 할 수 있는 핵심 측근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크고 작은 일들에 관해 늘 캉바세레스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물론 캉바세레스가 반대한다고 해도 대부분 그냥 자기 하고싶은 대로 마음대로 했지만(-_-) 그래도 의견은 계속 물어보고, 동의를 구하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어느정도나 캉바세레스를 측근으로 여겼는지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완전히 몰락하고 파리까지 연합군에 넘어가고, 퇴위 조서를 발표하고 사람이 와서 엘바섬으로 데려가기 전 퐁텐블로에서 멍하니 앉아 슬슬 "폐하. 제가 그러고보면 파리에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도망치는 측근들을 의욕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가도, 1층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면 "혹시 캉바세레스가 온건가? 나가서 확인해봐라." 고 몇번을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뭐 말할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이때 캉바세레스는 진작에 빤스런 한지 오래였습니다.
훗날 엘바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다시 정권을 잡고 캉바세레스를 '거의 억지로' 데려오자, 캉바세레스는 의욕이 없다는 티를 푹푹 풍기면서 건성건성 법무부와 상원을 다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이후는 모두가 알다시피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은 완벽하게 몰락했습니다.
루이 18세
다시 왕정이 복구된 이후, 왕당파 세력은 당연하게도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소위 '원수 사냥' 이 벌어져 나폴레옹 제국 시절의 원수들이 총살되거나 추방되는가 하면, 푸셰처럼 질기게 버티던 인물로 숙청 되어 두 번 다시 프랑스 땅을 밞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한편 캉바세레스는 나폴레옹에 이은 제국의 2인자, 그것도 처음과 끝을 모두 함께한 2인자인 동시에 (나폴레옹이 처음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돌아올때는 옛 제국인사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기 떄문에 문제가 덜하지만, 이후 돌아온 나폴레옹에게 협력한건 확실하게 반역을 저지른게 되는) 백일 천하 기간에도 주요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본래대로라면 꽤 심한 꼴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거 루이 16세의 처형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인 점이 인정 되어 '추방' 으로 끝났고, 그나마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푸셰, 카르노 등과는 달리 불과 3년 만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정치계에 더 이상 엮이지 않고, 모아놓은 재산을 까먹으면서 수도 파리에서 조용히 살다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딱히 정적도 없었고, 당시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 제국의 행정 부분 2인자로서 신임도 받고 권세도 누릴만큼 누려보고, 최후에도 고향 땅 떠나 먼 나라에서 헤메거나 숙청된 사람들에 비해 파리에서 무탈하게 살다 죽었고...
어떤 면에서 보면 상당한 처세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능수능란한 처세가로 살았는데 딱히 별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 없이 조용한 것도, 말 많아 봐야 시끄러운 일만 많이 생긴다는 처세술로 보면 어쩌면 더욱 그렇기도 하고...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11-26 10:18)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