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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11/18 21:02:34
Name 번개맞은씨앗
Subject [일반] 니체의 초인사상과 정신건강 (수정됨)
제목 : 니체의 초인사상과 정신건강  

예전 글에 니체가 읽었을만한 책들을 추측으로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이번에는 니체에 대한 흔한 오해를 놓고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약 1만6천자로 글이 상당히 길지만, 저로서는 오래 생각해온 주제이고, 심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니체의 책을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셋이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극의 탄생은 처녀작으로 길게 분석하는 글입니다. 학자들의 일반적인 책 또는 논문과 같죠. 그런데 그 뒤로 짧은 글들을 모아서 올립니다. <선악의 저편> <우상의 황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런 책들입니다. 메모 같은 그 짧은 글 하나하나가, 책 한권의 가치가 있다는 식의 주장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특이한 책이 있으니, 니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문학적으로 쓰인 책으로, 마치 성경처럼 압축적으로 비유적으로 쓰여있는데, 이 책의 핵심은 초인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체 초인사상은 '낙타 → 사자 → 아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지식인은 낙타를 연민으로, 사자를 반항으로 소개하더군요. 그런데 그건 잘못된 거라 봅니다. 낙타를 설명하면서 '여러분 힘드시죠?' 이렇게 연민을 자극하는 것은 완전히 거꾸로 알려주는 것이고, 사자를 그저 반항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사자는 창조자라는 것입니다. '너는 ~해야 한다.' 용 내지 마스터의 명령을 거부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무엇을 창조하는가 하면, 의지를 창조하죠. '나는 ~하려고 한다.' 의지를 창조하는 건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는 미적 유희를 하며 그 의지를 발달시키는 존재입니다. 아이도 창조자이지만, 사자도 창조자입니다. 아무튼 사자에 대해서는 잠깐 언급하는 걸로 넘어가고, 자세히 설명할 것은 낙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니체를 오해하는 핵심에 이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해가 아니라, 고의로 악용하는 것 같지만요. 가져와보겠습니다. 딱 1장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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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각각 다른 색으로 표시했습니다. 하나는 저 주황색에 있습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기뻐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기뻐하는가 하면, 자기 힘이 세다는 걸 보았으니까요. 혹은 자기 힘이 세졌다는 걸 보았으니까요. 그래서 점점 더 무거운 걸 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역도 선수 같은 느낌이죠.

'내면에 의지성이 깃들어 있는, 강하고 참을성 있는 정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정신의 강함은 무거운 것과 가장 무거운 것을 갈망한다.

가장 무거운 것이란 무엇인가? 참을성 있는 정신은 이렇게 물으며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무거운 짐을 실기를 바란다.

그대 영웅들이여, 내가 짊어짐으로써 나의 강함을 기뻐할 수 있을 만큼 가장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참을성 있는 정신이 묻는다.'

어찌보면 이는 나르시시즘 같은 것입니다. 다만 자기 외모를 보고 반하는게 아니라, 자기 힘을 보고 반하는 것이지요. 마치 아기가 처음으로 걷게 되었을 때 기뻐하는 것처럼요. 낙타는 설령 노예 신세일지라도, 주인이 주는 무거운 짐을 들고서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주인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힘이 세져서 기쁜 겁니다. 혹은 자기 힘을 확인하게 되어서 기쁜 겁니다.

무거운 걸 들고 기쁘지 않다? — 그러면 낙타가 아닙니다. 무거운 걸 들었다고 낙타가 아닙니다. 그로인해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걸 갈망해야 합니다. 더욱 무거운 걸 갈망해야 합니다. 가장 무거운 걸 들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힘에 대한 갈망, 발전욕 이런게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원한다고? 이거 위험한 사람이구만. 힘을 구하는 사람이 세상에 많은데, 나쁜 놈들 얼굴이 막 떠오르는데? — 니체도 나쁜 놈이구만. 나쁜 놈들 부추기는 몹쓸 인간이구만!

그런데 일단 이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니체가 힘을 구하는 것은 둘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환자입니다. 환자가 건강해지기 위해서 재활훈련하는게 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병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힘없는 환자가 힘을 키워서 강해지겠다는게 잘못된 걸까요?

한편 니체는 고대 그리스를 연구한 학자입니다. 고대 그리스는 두 가지 열망이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는 탁월성을 향한 열망, 다른 하나는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이죠.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는 신과 영웅이 나옵니다. 초인은 바로 이 '영웅'에 해당하는 거라 봐야 할 것입니다. 즉 불건강에서 건강으로, 건강에서 고귀로 가고자 낭만을 품은 것입니다. 그 고귀란 신과 닮아가는 것이고요. 인간과 신의 중간항에 영웅이 있는 것이니까요.

니체가 힘을 추구한 것은 건강 또는 고귀를 향한 열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일단 '생리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낙타'라는 단계가 필요했던 거라 봅니다. 제가 볼 때에는 이미 낙타로서 귀족적입니다. 이미 생리적 태도는 귀족입니다. 비록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는 신세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유명한 지식인 중에서 니체를 종종 언급하는 인물 중 하나는 조던 피터슨 교수일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조던 피터슨 교수도 니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걸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조던 피터슨 교수는 '히브리즘'에 있다고 봅니다. 니체는 '헬레니즘'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은 서로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조던 피터슨 교수는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니체를 천재로서 높이 평가하면서, 결정적으로 창조적인 면에 있어서는 니체를 부정하는 식의 발언을 한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기독교에 기반한 보수적 태도 그리고 신화적 설명에 생물학적 설명을 가미한 '원형' 개념으로 채운 겁니다. 그런 걸로 갖다붙입니다. 똑똑한 사람이지만, 히브리즘적 한계가 있는 거라 봅니다. 그의 내면에 연민이 가득하다고 보고요.

니체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앞서 주황색으로 표시한 '낙타의 기쁨과 갈망'을 고대 그리스 내지 헬레니즘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또한 파란색으로 표시한 낙타의 예시를 잘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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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를 봅시다.

'가장 무거운 것이란 정신의 오만함에 고통을 주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낙타로서 훈련한다는건, 겸손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정신의 지혜를 비웃기 위해 정신의 우둔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흔히 이럴 때에 '수치심'을 느끼곤 합니다. 저는 낙타훈련이란걸 대표적으로 수치심 훈련이라 생각합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 그걸 무거운 짐을 지는 것에 매칭해서 생각하는 겁니다.

'또는 똑똑한 바보 아니면 승리를 축하하고 있을 때, 우리의 대의명분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닌가? 유혹하는 자를 시험하기 위해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예시들은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공자님이 인격수양하는 것, 그런 것에 해당하는 겁니다. 낙타란게 인격 훈련인 것이지요.

'게걸음의 도토리와 풀을 먹고 살며, 진리 때문에 영혼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가?'

이건 아마도 진리를 추구하던 니체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게 아닌가 싶습니다.

'병든 그대를 위로하려 온 자들을 물러보내고, 그대가 바라는 것을 조금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우정을 맺는 것이 아닌가?'

재밌는 예시입니다. 사람들은 저렇게 하지 않죠. 그 반대로 하죠.

'진리의 물이라면 더러운 물속이라도 들어가고, 차가운 개구리든 뜨거운 두꺼비든 좋아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공포를 자아내려는 유령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이는 '인격 수양'인 것입니다. 그중 일부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일인 것이고요.

'참을성 있는 정신은 이 모든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자 한다. 그리므로 무거운 짐을 지고 총총히 사막으로 들어가는 낙타처럼, 정신은 자신의 사막으로 총총히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무거운 짐을 짊어질 때, 기쁨을 느끼고, 그러한 무거운 짐을 갈망하는 존재가 낙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낙타를 나쁜 놈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니체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바로 이 발전욕에 따라 건강회복 또는 인격수양 중인 낙타를 없는 것 취급하거나, 혹은 연민으로 바꿔 이해하는데 있는 거라 봅니다. 초인이 되는 첫 단계인 낙타를 없는 셈치거나, 혹은 이미 아는 거라 생각하거나, 낙타를 불쌍하게 여긴다는 거죠. 이 낙타는 쉽게 말해, 귀족적 낙타입니다. 낙타의 기쁨. 그걸 빼면, 엉터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쁨은, 니체의 첫 작품인 <비극의 탄생>의 핵심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비극을 보고서 기쁨을 느낀다.' 물론 여기서 비극이란, 모든 비극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그리스 비극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를테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주고, 제우스에게 끌려가 산에 묶인 뒤에, 독수리가 간을 쪼아먹게 하고, 그러면 다음 날 간이 다시 생겨있고, 그러면 독수리가 또 쪼아먹게 하는, 이런 비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니체는 비극을 놓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렇습니다. 아폴론은 기존 질서입니다. 디오니소스는 혼돈입니다. 이 둘이 합쳐진게 의미하는 바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즉 창조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근본적인 발전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과학혁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제 주관적인 해석입니다만, 디오니소스가 의미하는 바는, '제우스'라 봅니다. 제가 볼 때,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카피본입니다. 그런데 제우스를 이 지점에 쓰기가 곤란한 사정이 있으니, 디오니소스를 별도로 만들어 쓴 거라 봅니다. 이를테면 제우스는 올림푸스의 왕인데, 기존 질서를 파괴한다니 앞뒤가 안 맞으니까요. 디오니소스의 아버지는 제우스입니다. 그런데 그뿐만 아닙니다. 제우스의 아들은 엄청 많습니다. 디오니소스가 제우스의 분신과도 같은 이유는, 디오니소스를 낳아준 어머니가 제우스이기 때문입니다. 즉 제우스는 디오니소스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입니다. 디오니소스의 인간 어머니는 디오니소스를 낳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우스를 보더니 타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그녀의 뱃속에서 태아를 꺼내, 제우스의 허벅지에 넣고 꼬매서 임신한 뒤에, 낳은게 디오니소스죠.

디오니소스가 제우스이면, 아폴론은 누구인가 하면, 그는 프로메테우스에 매칭된다고 봅니다. 디오니소스와 제우스가 유사하고, 아폴론과 프로메테우스가 유사하다는 거죠.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뜯어먹는 것은, 기존 질서인 아폴론을 수정해나가는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때 누가 뜯어먹는가 하면, 독수리가 뜯어먹죠. 독수리가 제우스입니다. 그러니 결국 디오니소스가 아폴론을 수정해가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뉴턴을 수정해가는 것처럼요.

제우스라 하면 떠오르는 하나는 난봉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우스와 신, 제우스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 많죠.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무언가가 창조되는 것, 무언가가 생성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임신과 출산에 매칭한 것입니다. 이것저것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게 많으니, 제우스가 바빴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창조적 성격이 디오니소스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카피본이니까요.

<비극의 탄생>에 의하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후에 아폴론이 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봅니다. 니체의 독자는 당연히 아폴론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아폴론은 이미 갖췄다고 본 것입니다. 그건 당연히 있는 거고, 그러니까 디오니소스만 열심히 강조하면 되는 것입니다. 니체는 모든 사람을 위해 책을 쓴게 아닙니다. 대중을 상대로 쓴 책이 아닌 거죠. 그러니 독자에 맞게 책이 편집된 것입니다.

한국에 번역된 책으로 <니체, 평준화 교육에 반대하다>가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니체의 아폴론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니체에 대한 오해 내지 오용에 대해서, 앞서 초인사상 낙타의 귀족적인 면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점을 감안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죠. 과연 그 낙타처럼 생리적 태도를 다듬고, 인격수양한 사람을, 그저 제멋대로인 사람으로 볼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다른 오해 내지 오용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폴론을 니체가 무시한게 아닙니다. 제가 저 책을 읽은 기억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강한 어조로, 니체는 천재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이 제멋대로 글을 써서는 안 되고, 일단 천재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낙타'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천재들로부터 복종훈련을 하는 셈입니다. 그 결과 점점 발전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천재들로부터 배운 그 다음은 뭘까요?

이제 그 천재가 '마스터'에 해당합니다. 마스터는 스승 또는 주인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자 단계에서는 마스터의 명령에 더이상 복종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려고 한다.'라고 자기 의지를 창조합니다. 내가 피카소에게 배웠는데, 더이상 피카소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다는 거죠. '나는 이렇게 하겠어!'란게 생겼다는 거죠. 예술 분야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예술가뿐 아니라, 철학자도 마찬가지고, 과학자도 마찬가지고, 기업가도 마찬가지고, 기술자도 마찬가지죠. 아직 실력이 없으니 일단 배우지만, 혁신을 일으키려면, 그저 배운대로 해서는 곤란한 거죠.

'나는 ~하려고 한다.'라는 건 이걸 포함합니다. '나는 이걸 이렇게 보겠다.' 즉 무언가를 '간주'하는 걸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수학이나 물리학이라면, 나는 이걸 '공리'로 놓겠다. — 이게 바로 의지입니다. 의지를 생성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라면, '나는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라고 보겠다. — 라고 한 것입니다. 그의 이론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의 상상실험에서 직관을 통해서, 빛의 속도가 일정한 거 아닐까? — 그리고 이걸 공리로 설정하고, 나머지를 퍼즐 맞추듯 짜맞춰보았을 것입니다. 그 퍼즐 맞추기가 바로, 초인이 되는 세 번째 단계인 '아이'에 해당하는 거라 봅니다. 정치에 비유하자면, 헌법은 사자가 만들고, 법률과 규칙은 아이가 만드는 셈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보겠다. — 이렇게 하고, 구체적인 법률은 그 이상적 헌법과 현실적 조건을 맞추어서 구체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중간에서 이를 맞춰나가는 일을 '놀이'라고 볼 수도 있고, '예술'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죠.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와 관측사실들을 모두 만족시키게끔, 나머지 질서를 조화시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업가는 이렇게 말하죠. '화성 갈꺼야!' — 그러면 그 의지와 현실을 잘 엮어서, 이를 추구해나가는 것이지요. 재사용 로켓을 만들때처럼요.

예전에 니체가 읽었을 것 같은 책목록을 16개를 올렸는데요. 하나가 추가되었습니다. 그건 홉스의 <리바이어던>입니다. 니체가 이 책을 읽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런데 홉스의 텍스트에 이런 분류가 있습니다. 같은 걸 두고서, 내적인 것은 '힘'이라 하고, 외적인 것은 '자유'라 한다. — 뭐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이 언어를 그렇게 쓴다고 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쓴 걸로 기억합니다. 이걸 놓고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바꿔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내적 자유를 향한 의지'

이렇게 됩니다. 낙타 예시에서 보듯, 그 훈련들은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남을 시켜서 내 위력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뭐 이런게 아닌 것입니다. 이는 내향적인 힘인 것입니다.

내적 자유는 '당연히' 있는거 아냐? — 이런 의문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자유가 있는 사람은 생기가 돌 것입니다. 활력이 있을 것입니다.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져 있다는 것은 자유가 부실하다는 걸 의미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환자인 것이지요. 힘이 없고 자유가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소한 자극에 발작해서 버럭버럭 화를 내는 사람도, 그냥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지, 그가 무슨 자유가 있다고 보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그냥 버럭기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편견이 가득한 고지식한 사람도, 정신이 자유롭다고 보기가 곤란할 것이다. 자유가 없는 또다른 예는 — 자기 비하입니다. 도덕적 굴레를 씌우더니, 자기혐오에 빠져 사는 사람도 자유롭다고 보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초인사상은 그것에 대한 치유책이기도 한 것입니다. 현대인이 많이 겪고 있는 질병에 대한 니체의 솔루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솔루션은 근본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거라 봐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탁월성을 향한 발전욕, 그리고 비극에도 굴하지 않는 명랑성에 있는 거라 봅니다.

니체가 여러 철학자들을 향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지만, 가장 강도높게 비판한 인물이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기점으로 그리스가 망해갔다고 생각한 걸로 압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식적으로 그리스 대표 철학자라 여겨지는데, 오히려 그걸로 망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을 높인 것입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비판을 넘어서 비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간단히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는 '미적 문명'이었다고 봅니다. 도덕적 문명이 아니라, 미적 문명입니다. 그들을 예술가라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철학자도 예술가이고, 심지어 군인도 예술가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미적 인간이 아니었던 거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도덕적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무슨 도덕인가 하면, '생각의 윤리'인 논리 도덕입니다. 니체는 인신공격까지 하는데, 소크라테스를 못 생겼다고 하고, 천민 출신이라 했습니다. — 니체가 이런 식으로 공격한 철학자는 소크라테스가 유일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인데, 그를 이렇게 공격해대는게 당황스러운 일이지요.

최대한 니체 입장에서, 소크라테스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이건 제 의견이니, 이게 딱 맞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추측이자 가설이라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공리 1 : '네 자신을 알라.'
공리 2 : '너는 모른다.'
공리 3 :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건 안다.'
공리 4 : '내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저 공리 4는 신령이 말해줬다고 한 걸로 기억합니다. 신령이 소크라테스에게 네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알려줬는데, 소크라테스가 그게 정말 맞는지 의심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테스트하고 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른다는걸 알게 된 것입니다. 물어보니까 설명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혹시 저 유명한 사람은 아나 싶어서 가보니, 그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열이 받겠죠. 소크라테스가 그러고 다니는 걸 보더니, 젊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따라하는 것입니다. '아저씨 이거 알아요? 알지. 설명해줘봐요. 그런데 이렇지 않아요? 에이 모르는구나! 하하!'

아무런 지식이 없어도, 이렇게 따져드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배운게 별로 없는 젊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이러고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 명이 이러고 다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을 하기 싫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가 없어진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자신을 알라.'

사람들이 자신을 막 연구하더니, 이렇다 저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따지고 드니 그것도 자기모순이거나 별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자네 모르는구만!' '그럼 뭔데요?' '나도 모르지.' '에이 그럼 저와 똑같네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네. 그러니 내가 우월하지.' — 이른바 대안없는 비판입니다.

사람들이 열받아서 소크라테스를 고소합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들 중 누가 한 말인지 혼동스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있고, 그들이 하나라 간주하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을 보면 플라톤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으로 땅을 가리킵니다. 플라톤이 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이데아 운운한 걸까요? — 그걸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현실의 관측을 놓고, 증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접점이 있게 되면, 증명해야 하고, '에이 너도 모르네!'에 걸려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곳으로, 소크라테스 클론들을 피해서요.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땅을 가리킬 수 있었던 걸까요?

그의 권위가 그걸 가능케 했던 거라 봐야 할 것입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입니다. 누가 감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토를 달겠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보면,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쓴다면, '이럴 가능성이 크다'라고 적었을만한 것을, 그는 '이렇다'라고 단정적으로 적습니다. 별 근거도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 온갖 것들에 대한 그의 결론을 단정지어둔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 방대한 양에 압도되고, 다른 한편으로 제왕의 스승으로서 권위에 힘입었던 것일 겁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중세시대가 온 것입니다. 조야하게 이렇게 단순히 이해할 수 있는 거라 봅니다.

소크라테스는 암살자이고, 플라톤은 저 하늘나라에서 공상을 하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와 함께 권위로 땅을 지배한다. 땅은 이미 소크라테스에 의해 초토화되어 있다. 반항할자는 없다. —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니체를 포스트모더니즘과 엮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니체는 고전주의입니다. 고전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 둘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파괴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생성 역량이 없습니다. 고전주의는 탁월성 또는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인간을 높이고, 생을 긍정합니다. 고전주의와 전통주의는 다릅니다. 전통주의는 옛것을 모방하고 지켜나가는데 중점을 둡니다.

전통주의는 아폴론에 매칭할 수 있습니다. 고전주의는 아폴론에 디오니소스를 가해야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디오니소스에 매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폴론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걸 창조하기 힘듭니다. 전통주의는 성실성에 매칭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파괴욕에 매칭할 수 있습니다. 고전주의는 천재성에 매칭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이는 제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관념적으로 저렇게 분별하는게 간단명료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고전주의라 하면 대표적으로, 아이스킬로스를 비롯한 소크라테스 이전 고대 그리스, 그리고 다빈치와 괴테가 고전주의라 봅니다. 다빈치는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 사람이고, 괴테는 천재의 시대라 할 수 있는 18세기 독일 사람이죠. 다빈치와 괴테는 모두 니체 관점에서 초인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그들이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완전성을 향한 사람은 맞을 것입니다. 고전주의는 완전성과 조화성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건 탁월성과 아름다움이니까요.

천재성은 남탓에 몰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 갈길 가는 사람이죠. 천재성에게 파괴는 창조의 수단일 뿐입니다. 파괴욕은 파괴 그 자체를 열망합니다. 창조는 없거나 망상적이고 기만적입니다. 창조에 진심이 없습니다. 창조에 책임감도 물론 없습니다.

니체 초인사상에서 '낙타'에 남탓은 없습니다. 귀족적이란 것의 특징은, 남탓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비하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자도 아이도 남탓하지 않습니다. 사자가 마스터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의지를 생성하는 것은, 이제 노예계약이 끝났고, 주권자로서 권리를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초인사상의 낙타는 1page 조금 넘는 분량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멱살입니다. 이 난해한 책의 핵심이란 거죠. 저는 그렇게 이해했고, 이걸 실천해봤습니다. 즉 저는 이론적으로만 떠드는게 아니라, 몇 년간 경험을 해보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경험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곤란하지만, 간단히 말해서 제안에 있는 여러 정신적 질병이 치유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활력이 높아졌다고 봅니다. 생명력이 높아진 거라 볼 수 있겠고요. 니체는 죽음을 '중력'에 비유해서 이야기합니다. 중력의 영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쓰죠. 그 반대는 '난다', '춤을 춘다', '피가 흐른다' 이런 것에 해당합니다. 그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는 저것만으로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니체 초인사상에 빠져있는게, '예측'이라 봅니다. 앞서 이야기했죠. 원래 니체는 아폴론 + 디오니소스로 생각했는데, 아폴론은 당연히 있겠거니 하고 생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측이 아폴론에 해당합니다. 아폴론과 프로메테우스가 유사한 거라 했으니까요.

즉 낙타훈련 즉 인격적인 훈련을 할 때에,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예측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낙타훈련이란 것 중 상당수는 실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통' 또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강해지는 겁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이런 건 낙타를 가리켜서 할 수 있는 말이지요.

그런데 정말로 죽이면 어떨까요? — 곤란하겠지요. 그러니 예측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감수할 수 있을만한 고통, 내가 감수할 수 있을만한 위험, 그런 걸 놓고 계속 강해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예측력이 부실하면, 겪어서는 안 되는 고통,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되게 됩니다. 고통이란 점점 강해지게 만드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쇠퇴하게 만드는 고통이 있습니다. 위험과 상처라는 것도 마찬가지죠. 웨이트에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지금 이게 운동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부상을 입고 있는 건지 알아야 하죠. 혹은 부상을 입게 될 위험이 큰지 알아야죠. 이는 예측력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거 든다고, 점점 강해지는게 아닙니다. 어깨부상 입는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리스크도 그렇습니다. 낙타 훈련에서 저는 특히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하면, 사회적인 위험이 있음을 알리는 무의식적인 신호라 할 수 있습니다. 적은 수의 신경세포들을 가지고 신속히 판단해서, 위험하면 얼굴로 가는 혈관을 팽창시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많은 경우, 잘못된 판단입니다. 신속한 무의식적 판단이란, 적은 수의 신경세포를 가지고 성급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잘못 판단할 수 있습니다. 과잉 판단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끄러움을 짊어질지 판단을 하려면, 이게 정말 위험한지 아닌지 예측을 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래야 얼굴에 부끄러움이 일어나는데도 불구하고 할지말지, 이런 걸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측을 잘못하면, 그 경험이 쌓여서 더 소극적으로 변하기 쉬울 것입니다. 예측을 잘하면, 어라? 실제 겪어보니 별일 없네? 그러면서 신경조직의 신속한 판단도 점점 합리성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낙타가 귀족적 성격을 가졌지만, 노예상태라 했습니다. 그런데 낙타로서 역량을 키우면, 독립후에는 '자기 자신에게 복종'을 하게 됩니다. 인간 정신은 둘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명령자와 복종자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 라고 명령하는 정신이 있는가 하면, 그걸 받들어서 실제로 이렇게 하는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계획만 하고 실천은 안 하는 사람이 있죠. 낙타가 부실해서 그런 거라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낙타가 명령자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되도 않는 걸 명령해선 곤란합니다. 명령을 남용해선 곤란합니다.

무기력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 움직여지는 것이지요.

아마 <우상의 황혼>이었을 것입니다. 니체는 의지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명령자와 복종자가 함께 기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제 생각에 아마도 홉스의 글에 영향을 받아 홉스의 국가관을 개인 정신에 비유해서 떠올린 듯합니다.

내가 나에게 명령할 때, 엉터리로 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함부로 대하니, 내가 내 명령을 듣지 않는 거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뇌속에서 신경조직 A가 신경조직 B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는 것일 테고요.

그런데 엉터리가 되는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예측인 것입니다. 예측력을 키우도록, 관찰력과 사고력에 긴장감을 갖고 있는게 좋은 거라 봅니다. 수치심이 일어나도, 실제로는 별일 없다고 생각되거나, 사소한 손해라 감수할만 하다 싶으면, 그냥 하는 겁니다. 그러면 대부분 실제로도 별일 없으니, 자기신뢰를 하고 인격적인 수정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바로 정직성이라 봅니다. 중요한 건 내적 정직성입니다. 남은 속여도, 자신은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내면에 거짓이 쌓일수록, 약해집니다. 그 약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예측력 저하입니다. 내적 정직성이 손상되면, 그만큼 예측력이 떨어지는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 결과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나를 속이면 벌을 받게 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측력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정직성이 결여되면, 생리로부터 올라오는 취향이란게 왜곡되기 쉬운 거라 봅니다. 취향이란 근본적으로 생리로부터 비롯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몸에서 비롯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신경세포들을 통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생리가 신경세포들을 통해서 취향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 만약에 신경세포들이 '잘못 연결'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 그렇다면 진정한 나를 반영하지 않은, 거짓된 취향이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즉 엉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과 결정이란게 상당부분 취향에 의한 것인데, 그게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속인 벌을 받는 것이지요. 진정한 나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거짓된 취향 중 일부는 그저 오류라 할 수 있지만, 다른 일부는 '남의 취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남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소중한 인생을 남의 욕망이 카피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혹은 집단의 욕망에 따라 살게 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취향이 곧 신이다' — 라고 생각하고, 취향대로 살면서, 심지어 그것이 도덕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봅니다. 이른바 '취향의 신'이지요. 그런데 그 취향이 진정한 나의 취향이 아니라면, 이거 어떻게 된 걸까요?

그건 심하게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그것은 '뱀'인 것입니다. 뱀의 명령인 것입니다. 뱀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뱀 중의 뱀, 뱀들의 왕은 '용'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마스터와 함께 명령하는 존재로 등장하는게 바로 용입니다. 용과 마스터의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 의지를 창조하는 존재가 사자죠.

정리하면, 니체의 초인사상에 있어 특별히 보충해야 할 것은 '예측력'과 '정직성'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아직 부족하다면, 점점 발전시키고자 해야 합니다. 발전욕이 있어야 사람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병든 사람을 치유하기 곤란합니다.

그리고 내적 정직성을 높이는데 필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용감함'과 '평정심'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용기와 고요함입니다. 내 안에 있는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데에는, 용기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그리고 평정심이 부실하면, 뇌성능이 저하되거나, 뇌속에 소음이 많아진다고 봅니다. 그 결과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능력이 부실해지는 것입니다.

끝으로 니체의 초인사상의 실천적 효용이 무엇이냐 물을 때, 정신 건강이라 생각합니다. 니체는 자신을 생리학자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니체 본인이 환자로서 건강에 관심이 많았던 거라 생각합니다. 건강을 열망하는 사람으로서, 건강 너머 고귀에 대한 낭만을 가진 사람으로서, 고대 그리스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생을 긍정하는 그의 철학이 만들어진 거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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