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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1/13 23:25:55
Name nickyo
Subject [일반] 이적의 짧은 트위터 픽션
*출처는 http://jucklee.tumblr.com/ 입니다. 트위터에 공개되어 있으므로 펌에 별다른 제제는 없습니다.
*70개의 이야기중 맘에 드는것만 추려내 보았습니다.

[9] “그 무당이 뭐?” “지미 헨드릭스를 모신다니까.” “응?” “진짜, 록 음악이라곤 전혀 모르던 시골아낙이 갑자기 헨드릭스를 몸주로 모시더니 굿을 록으로 해.” “허, 그래 뭐라던?” “무대에서 언제 앰프를 불살라야 운이 트이는지 알려주더라.”


[11]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은 이미 뇌사 상태란 걸. 오래된 습관과 미련, 주저함과 비겁함에 기대 억지로 연명하고 있단 걸. 허나 우리 손으로 플러그를 뽑을 순 없었다. 그저 가녀린 숨이 스스로 끊어질 날을 기다릴 뿐. 무기력하게.


[12] 딱! 소리와 함께 중견수는 뛰기 시작했다. 숙련된 야수는 소리만 듣고도 낙구지점을 안다 했던가. 펜스까지 달려가 몸을 틀었을 때 그는 한참 앞 2루수 뒤로 맥없이 떨어지는 공을 보았다. 다음날 훈련을 빠진 그, 쓸쓸히 보청기를 맞추러 가는데.


[17] “반포대교 위에서 그 여잘 봤어. 중앙선을 따라 걸으며 춤을 추고 있던. 내 차 옆거울이 그 여자 팔을 친 것 같아 뒤를 봤더니 전혀 개의치 않고 춤추고 있는 거야. 헌데 말이지. 차들이 좌우로 지날 때마다 그 여자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어.”


[18] “사과벌레가 사과 하나를 관통하는데 평생이 걸린다면, 사과벌레에겐 지옥 같을까. 천국 같을까.” 비가 오고 있었다. “사과벌레에게 세계는 사과와 사과 아닌 것으로 나뉠까. 아님 사과 이외의 것은 인식조차 되지 않을까.” 그의 잔이 또 비었다.


[21]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그는 완벽한 꿈의 베개를 찾는 원정에 돌입했다. 부드럽되 단단하고 푹신하되 탄력 있는 베개를 찾아 온 세상을 누볐다. 여정은 날로 혹독해졌고, 녹초가 된 그는 어느 날부턴가 머리가 땅에 닿기만 하면 곯아떨어지고 있었다.


[23] 부엌의 과도와 식칼, 공구함의 망치와 스패너, 상자 묶는 노끈, 난초가 자라는 화분, 심지어 20권짜리 백과사전까지. 집안에 가득한 물건들이 하나같이 흉기로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 그녀는 이 결혼생활에 뭔가 문제가 있단 걸 깨달았다.


[24] “그러고 보니 요즘 A양 TV에 통 안 보이네?” “소식 못 들었어?” “무슨 소식? 한달에 2~3kg씩 살 빼고 있다며 신나했었잖아?” “그게 2년이 넘었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런데?” “지난달 완전히 소멸해버렸어.”


[25] “선생님, 약속시간에 맞춰 나가는 게 너무 두려워요. 혼자서 하염없이 기다릴 것 같고, 사람들이 수군댈 것 같고, 지는 거 같고, 할 일 없다 무시당할 것 같아서요. 어쩌죠?” “전화 끊고, 일단 와서 얘기하시죠. 40분이나 늦으셨어요.”



[30] “인생을 준비하는 자세란 말이야, 짝사랑하는 상대가 나오는 모임이 있는 날 아무 일 없을 줄 알면서도 가장 괜찮은 팬티를 챙겨 입는 것과 비슷해. 남의 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스스로의 자신감이 우선이라고.” 선배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32] 공항의 짐 찾는 곳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C의 가방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엔 그 가방과 닮은 가방 하나만 빙빙 돌고 있었다. C는 조용히 그걸 들고 걸음을 옮긴다. 항공사에 물었다간 이마저 못 갖게 될 테니. 무엇이 들었을까, 가슴이 뛴다.



[38] 상투적인 것에 의지하는 박 과장이 귀가하면 아내가 찌른다. “일이야, 나야?” 딸에게 일과를 물으면 성낸다. “아빠가 들음 알아?” 베란다에서 노랠 흥얼거리면 날아오는 “거 잠 좀 잡시다!” 그는 안도한다. 오늘도 무사히 상투적인 하루였구나.



[42] “난 네가 내 음악이 별로라고 해서 상처받은 게 아니야. 만드느라 이렇게 고생한 내게 내 음악이 별로라고 했을 때 상처받을 수 있단 걸 알면서도 잔인하게 얘기하는 너의 무신경함에 상처받았을 뿐이야!” 역시, 잠자코 있어야 했다.



[50] 운동이라곤 아침저녁으로 하는 칫솔질이 전부인 그가 완벽한 몸매를 갖고 있단 사실은 도리어 주위 남자들을 안도케 했다. 타고난 것, 노력으로 얻어지지 않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은 거슬리지 않는다. 애써서 되는 게 아니라면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51]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하다니, 이 식당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흥분해 소리 지르는 손님을 향해 주인아주머니는 태연히 대꾸했다. “집에선 변기 옆에 칫솔을 두고 날마다 그걸로 입안을 쑤시면서 뭘 그러슈?”


[52] 숨이 차서, 멈춰서고 싶었다. 숨이 차서,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리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가 없던 것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것 때문에. 조금만 더 가면 붙잡을 수 있을 것처럼 평생을 약 올려온 그것 때문에.


[53] “노래를 부른다는 건, 친구를 부르거나 혼을 부르듯이 노래를 불러오는 거야. 찾아온 노래가 네 몸을 지나가게만 하면 돼.” “불러도 오지 않음 어떡해요?” “버럭 고함치면서 부르지 말고 편안하게 달래듯 불러 봐. 그럼 금세 온단다, 노래가.”


[56] 문자그대로氏는 유모차(乳母車)를 끌기 위해선 유모부터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자전거(自轉車)는 스스로 굴러야 하거늘, 왜 사람이 페달을 밟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자그대로氏에게 세계는 균열 투성이였다. 문자 그대로.


[57] 궂은 날씨에 짓궂은 친구가 얄궂은 표정으로 심술궂게 소리 지른다. 소리 지르는 것은 마음에 불 지르는 것과 같아 사이를 가로질러 가슴을 찌르고, 저질러진 싸움에 나도 마구 내지르니 그 말이 친구 염장을 제대로 지른다. 아뿔싸, 말에 취했다.


[62]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을 확률이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죽을 확률보다도 낮다는 얘기를 들은 R씨는 비행공포증을 떨치기는커녕 화장실공포증을 새로 얻게 되었다. 변보는 일이 하늘을 나는 일 만큼이나 무시무시해졌다.


[63] 쇼팽 콩쿠르 우승자의 소감. “소음을 감내해 주신 아파트 위, 아래, 옆집 주민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랫집 할머니의 눈물. “그 놈이 바이엘 칠 때부터 들어왔지. 발전하는 게 들리면 짜증이 좀 누그러지곤 했어. 말도 마. 그 긴 세월을.”


[64] 흡연자들의 집집마다 잠자고 있는 엄청난 수의 라이터를 모아 비상시 군사용 연료로 사용하려던 군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거국적인 ‘라이터 모으기’ 행사 당일,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탄식했다. “아차, 또 두고 나왔네. 김 대리 불 있나?”


[68] 불면증 환자 J의 말. “언제나 같은 꿈이야. 지루한 학회발표장. 졸음이 쏟아지지. 그때 단상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조롱해. 저기 자는 분이 있다고. 그때부터 난 졸지 않으려고 기를 쓰지. 그러니 말이야, 숙면을 취할 수가 있겠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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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적을 참 좋아합니다.
그의 음악도, 그가 쓴 글도 좋아하지만
그 어떤것보다 표현까지 다다르는 그의 사고의 진행이 흥미로와서 좋습니다.
짧은 글을 읽으며 문득 어쩜 이렇게 일상적인 위트를, 일상속의 소름을, 공포보다 날이 선 날카로움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려 구술할 수 있을까 하면 부럽기도하고요. 이런게 천재인가-싶기도합니다. 더불어 약간 답답한듯한, 이 이야기는 나도 몰라 그저 떠들뿐이지 하는 모양새가 참 재미납니다. '그 어릿광대의 이야기' 라는 2개로 이어진 곡이 떠오르고는 하지요. 장난기 가득하지만 장난기 사이에 천사와 악마가 앞뒤로 드러나 있는 듯한 그의 표현과 상상력이 참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덧붙임으로, 이적의 매력에 대해 한 마디로 구술한다면 '푸핫 하고 웃은뒤의 찝찝함과 텁텁함'으로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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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ackDDang
12/01/13 23:28
수정 아이콘
지미 핸드릭스를 신으로 모신다는 이야기부터 보청기 맞추러간 중견수까지만 읽고 바로 댓글 다네요 크크크

속된말로 "쩌네요"크크크크
12/01/13 23:48
수정 아이콘
지문사냥꾼 2 안 나오나요?
꽤 즐겁게 읽었는데...
바람모리
12/01/14 00:05
수정 아이콘
트위터에 가입하고 싶어지네요.
애정남
12/01/14 00:59
수정 아이콘
아... 11번 와닿네요
12/01/14 01:22
수정 아이콘
저도 이적을 좋아합니다.
왼손잡이
12/01/14 09:41
수정 아이콘
제닉네임은 이적형님 노래 제목입니다.

뭔가 긴글을 쓰고 싶지만. 그냥.. 닥치고 찬양할뿐입니다. ㅠㅠ
12/01/14 16:52
수정 아이콘
근데 중견수가 타격음을 듣는 순간 펜스를 향해 뛰었다는 건 소리가 크게 들렸다는 얘기인데
그런 타구가 이루수 키를 간신히 넘겼다는 건
작은 소리를 엄청 크게 들었다는 건데..

귀가 나빠진 건 아닐듯요 크크크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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