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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2/05 04:42:41
Name Demicat
Subject [일반] 바둑, 연극, 파나소닉.. 아버지.
1.
오늘도 아버지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마치 업무를 두는 것처럼 바둑을 두고 있는 아버지.
사내 바둑 대회 3등, 바둑 동호회 대회 우승. 그러한 트로피들이 한 때는 그에게 삶의 활력소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늘상 술에 쩔어있고 피곤해 보였던 그가 주말이면 홀연히 나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들고 오던 것이 있었으니, 상패와 그에 따라 오는 고급 바둑판, 그리고 고급 바둑알이었다. 대회가 없을 때면 항상 집에서 두던 사이버 바둑. 가끔 낚시를 다니기도 했지만, 지금 그가 낚시를 다니기엔 여유가 있지 않으려니, 생각했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바둑, 아니 사이버 바둑이란 일생의 버팀목이자 마지막 탈출구로만 보였다.

아이러니했던 것은, 그는 형과 내가 컴퓨터 게임을 하면 엄청나게 싫어했던 것이었다. 이미 평준화는 진행되어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가끔 보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시험 몇개로 평가되던 그 시기에, 뚜렷한 성적이란 지표가 없는데도 그는 우리를 항상 못마땅해 했다. 초등학교 3학년, 6학년이 머리 싸매서 당장 몰두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학원을 다녀도, 학습지를 풀어도 그는 우리에게 불만이 가득했다. 술을 먹고 들어오시는 날엔 들려오는 폭언, 옷걸이를 회초리로 쓰던 그의 모습. 그리고 어김없이 이어지던 컴퓨터에 대한 발길질. CD들을 부숴버리고 발로 지근지근 밟아서 모든 삶의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려던 그의 모습.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한 없이 못난 사람이어서 그랬다고 이야기했다. 신혼 초기에 어머니가 계시건 말건 시어머니를 쥐어패던 시아버지의 모습. 툭하면 숟가락을 던지던 그의 모습이. 젊은 시절엔 더했다던 시누이의 증언이 어머니를 질리게 만들었다. 결혼 후 3년 정도 계시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슬퍼했던 친가 친척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당하고 살았던 시어머니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한이 쌓였으면 그랬으려나. 어쩄거나 그렇게 어머니는 분가를 진행했는데, 아버지가 딱 시아버지같은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잘났기에. 대학교 졸업장은 없지만 그 당시 잘나갔던 상고의 졸업생으로서, 잘나가던 투자신탁의 사원으로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서 법인 카드를 자유자재로 부리며 살았던 과장으로서, 헤드 헌터에게 이직 권유를 받고 높은 연봉을 재며 여기 저기 이직하고 다니던 유능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서울 안에 본인의 어머니 집 한채와 복층이었던 우리 집 저택. 그리고 세를 내던 수 많은 원룸들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폭언, 가끔 일어나는 폭력, 주폭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생겼던 것이다. 어머니는 술만 안 취하면 착한 사람이야,라고 했지만 나는 아버지의 수많은 악행은 그냥 본인이 나쁘기 때문에 이뤄지는 일이라고 여겼다.

얼마 후 아버지의 친한 친구가 어머니에게 밀회를 요청했고, 거기서 밝혀진 사실은 아버지의 동료 여사원과의 바람. 출장을 핑계로 둔 여사원과의 여행. 그리고 여사원들과 찍은 수많은 사진들이었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이혼을 결심했으나, 그 때 IMF가 터졌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아버지는 잦은 이직을 통해 라인을 타지 못했고, 법인 카드 횡령 사실이 몇 차례 밝혀져 구조조정 과정에서 당연히, 버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본인의 동생들에게 보증을 서줬던 것들의 연쇄 폭발. 살아보려고 발악했던 나이트 클럽 사업. 모두가 망해버렸고 집에는 돈 한 푼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는, 사회생활을 조금도 해보지 못하고 10년의 세월을 내조만 해오던 어머니께서는 화장품 방문 판매 사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집에만 눌러 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침 일찍 나가던 사람이, 주말이 되어도 얼굴 보기 힘들던 사람이 집에 누워만 있고, 앉아만 있었다. 아침이면 느지막히 일어나 밥을 먹고 의자에 앉아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점심이고 저녁이고 바둑을 두다가, 나가서 술을 먹고 들어와 어김없이 폭언을 몇 마디 내뱉고는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반복.

차압 딱지는 드라마처럼 그렇게 갑작스레 붙지는 않았다. 다만 천천히 붙고, 천천히 팔려나갔다. 그렇게 아끼던 가세들이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집은 경매에 붙여 졌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곧, 이사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곳이 지금 누리던 복층의 저택과는 아주 다르리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때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밤마다 들려오는 싸움은 모든 것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6학년 때의 호랑이 선생님은 매일 같은 잠바를 입고 오는 나를 지적해서 불러 세웠다. 왜 항상 같은 잠바를 입느냐? 왜 잠바 단추를 잠그고 다니지 않느냐? 선생님. 이 노란 잠바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산것이며, 그 이후로 새 잠바를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단추는 잠기지 않지요. 이렇게 조리있게 말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시간에 그 사이에서 부른 것에 대한 창피함. 모멸감 때문에 대꾸하지 못했다. 나는 이 때의 잠바를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벗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이 되서 사게 된 겨울 잠바는 고 3때까지 입어야만 했다.

집에만 있던 아버지는 혐오스러웠다. 원체 안 좋았던 관계가 갑작스레 좋아질리는 없고, 아버지 또한 그다지 가족들과의 관계 개선에 신경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욕을 하고 폭행을 가해도, 돈은 잘 벌어다 주던 세월이 있었는데. 그래도 당신의 얼굴은 저녁에만 잠깐 보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해야만 했다. 특히 주말은. 지옥 그 자체였다.


2.
5월이었다. 갑작스럽게 영어 스피킹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시 주최로 이뤄지는 대회. 각 학교마다 세 명의 선발인원으로 나가게 되는 대회인만큼 학교의 명예가 달린 일이기도 했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하게 내가 뽑히게 되었다.


나름 집에 돈이 있던 시절,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당시 유명하던 모 영어 학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영어 공부란, 재능과는 별개로 그저 돈이 얼마나 쏟아부어 지냐에 차이에 달린 일이었다. 얼마나 원어민 강사, 혹은 영어를 쓰는 환경에 놓이게 되느냐? 고리타분한 문법 공부가 아닌, 재밌는 파닉스 공부, 말하기 공부에 중점을 두었다. 장모음, 단모음을 익히고 그들과 스피킹하기. 집에서는 영어 테이프를 들으며 복습하기. 학원에서는 이따금씩 영어 연극 연습.

이 영어 연극 연습이 그 학원의 가장 연례 행사 중 하나였다. 연극 지역 대회, 그리고 전국 대회. 지역 대회에서 3위 안에 입상하면 전국 대회로 나갈 수 있었고, 전국 대회에서 입상하면.. 상금이 어마어마 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매일매일을 학원에서 공룡 탈을 뒤집어 쓰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연극을 했다. 입에 붙지도 않는 버터 발음. R 발음, F 발음, TH 발음.. 나는 주인공 공룡 역할이었기에 외워야 할 대사가 제법 있었다. 대사만 많은게 아니라, 연기를 요하는 것도 제법 있었다. 특히 마지막 클라이막스 씬은, 우는 연기. 힘들고 괴롭고 어려웠지만 명일지사 학원의 명예가 달려있던 일이었다. 어머니 또한 엄청난 기대를 하셨기에.. 난 집에 와서도 매일 대본을 외우고 연습했다.


그리고 지역 대회는 3위를 차지했다. 턱걸이로 전국 대회 진출. 이게 어느 정도의 성과였냐면, 학원에서는 너무 기쁜 나머지 현수막을 제작해 전국대회까지 창문에 걸어놓기까지 했다. 요 몇 년간 실적이 없었는데 드디어 우리 세대가 해냈다며. 상금과 선물은 무려 수업시간에 학교로 배달되었다. 자연스레 그 시절 나는, 영어를 무척 잘하는 아이로 통하게 되버렸다. 나도 그 주목이 나쁘진 않아서, 마치 엄청나게 영어를 잘하는 척, 과시하고 다니곤 했다. 굳이 R발음이 뭔가, 장모음 단모음이 뭔가를 아이들에게 열심히 설명하곤 했다.


그리고 두 달 후 벌어진 전국대회에선, 당연하게도 입상 하나 못하고 떨어져버렸다. 지역 대회에서의 자신감을 발휘하기란 너무 힘들었다. 그저 인형탈 몇 개 쓰고 대사나 읊던 우리 지역과는 달리, 무대 구성부터 의상, 대사까지 너무나도 완벽했다. 심지어 그들이 직접 제작한 듯 보였던 그 음악들. 대체 얼마나 돈을 쓰고 얼마나 연습해야 저정도로 할 수 있을까? 실력 차이만 완연하게 느꼈던 그 날의 기억. 더 높은 성과를 기대했던 우리 지사 선생님들께서는, 내년을 기약하며 이쯤에서 물러나자고 했다. 내년에는, 그리고 내년에는 꼭 본선에서 입상하기로.


그 후 매년 참석해야 했던 그 말하기 대회는, 집안이 차츰 힘들어짐에 따라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혀를 굴려댔던 그 시절이. 원어민 선생님과 웃으며 얘기하던 나날들은 돈으로 씨름하던 부모님들의 싸움의 기억으로 뒤덮여졌다. 대체 R발음은 어떻게 내더라? TH는 어떻게 냈더라? 5학년 때, 다시금 그 시절 교재를 뒤져 읽어보려 했으나 그 때처럼 혀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그 시절 내가 주인공으로 발탁될 수 있었던 이유는 또래 애들보다 TH발음을 잘 내더라,라는 이유 하나 밖에 없었다. 문법이고 뭐고 발음이 세일즈 포인트였던 그 시절 영어학원에서 내 원어민 발음 흉내는 엄청난 실적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명일지사의 자랑이었던 혀가 굳어버렸다. 아이들은 아직도 내가 영어를 잘한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남은게 없는데.


친구들은 그 날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2학년 떄 잘했던 아이니, 6학년인 지금도 잘할 것이다! 어처구니 없이 추대되었고 나는 손사래를 치고 또 쳤으나 그렇게 선정이 되었다. 대회 전 엉터리 작문 테스트는 내가 엉터리로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통과하게 되었다. 주최는 누구며, 대회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 따위로 적어 내도 내가 나갈 수 있는 대회인가? 다시금,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회 주제는 자유 스피킹. 동화 구연도 상관 없고,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레 표현해도 상관 없었다. 나는.. 뭘 해야 할까. 남은 것은 그 시절 그 대본들 뿐이었다. 다시금 대본들을 살펴보니, 동화 구문도 있고.. 몇 가지 쓸만한 것들이 있었다. 이걸 그대로 읽자. 실감나게 읽으면 되겠지. 대회는 코앞으로 다가왔고 준비는 엉터리로 되가고 있었다.


3.
가족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말해줬다.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대회가 있는데.. 어떻게 하다가 뽑혀서.. 금요일날 가게 됐고.. 별 대회는 아니다.. 영어 대회니까 예전에 하던데로 그냥 대충 하려고.. 응.. 그럴거에요..

아버지가 반색했다. 실직 이후, 바둑하는 직업을 가지게 된 그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따뜻하게 말을 건낸 건 처음이었다. 어느 장소에서, 몇 시에 하는지를 시시콜콜 캐물었다. 아버지, 당신은 굳이 안 오셔도 됩니다. 제가 힘들지도 몰라요. 그리고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굳이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사가기 위해 빼놓은 짐 꾸러미 속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주섬 주섬 꺼냈다. 파나소닉 비디오 카메라. 저걸 쓴게 언제더라. 그래도 모두가 행복한 척 하던 시절, 한강에서 노는 걸 열심히 찍었던 것 같은데. 그 먼지 묻은 물건을 정성스레 닦아내고는, 이걸 써서 찍어줄게!라고 기분 좋게 외치셨다.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봤기에, 그리고 그만큼이나 나에게 기대를 모습이 썩 나쁘지는 않아서, 나도 몇 시 몇 분에 오셔야 하는지 꼭꼭 당부를 드렸다. 지금은 황량하기만 한 집 앞 주차장에 2대나 있던 고급 중형차들은 이제는 팔려 나가고 없지만, 그는 택시를 타고 바람 같이 올거라고 말했다. 집에 갈 때는 같이 택시를 타고 가자고. 저렇게 자상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속으로만 생각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잘할 수 있을까,라는 부담은 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대회 당일.
선생님의 승용차를 타고 모 학교의 강당으로 모이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큰 긴장은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온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손에 땀이 쥐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 대본들. 그리고 머리에 달달 외운 그 대사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겠다, 라는 계산된 제스처들. 나름 지역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던 그 기억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렇게 많은 관객들 앞에서도 잘했던 나를 기억하며, 이번에도 잘하기를 기원하며..

순번은 중간이었고, 참가자석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툭툭 나를 건드렸다. 아버지였다. 정말 오랜만에 면도를 한 모습. 술에 쩔지 않고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그 모습. 잘 나가던 예전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웃고 있었다. 지난 시절, 그렇게나 내가 바라던 아버지의 모습. 단정하고 젠틀하며 가정적이고, 무엇보다 우리들에게 잘해주던 아버지의 모습. 바깥에서만 착하지 말고 우리에게도 착하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모습. 그 모습이 그 자리에, 파나소닉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잘해야 했다. 잘하고 싶었다.


허나, 잘할 수 없었다.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다들 너무 잘했다. 특히 대회가 자유주제였기에, 각자의 생각을 조리있게 발표하는 참가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왕따를 근절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했던 똑소리 나던 여학생. 어쩌면 그렇게 예쁜 영국 아가씨의 발음으로, 문법 하나 틀리지 않고 대본도 쳐다보지 않은 채로 생글 생글 웃으며 10분 이상이나 스피치를 할 수 있는지. 그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동화 구연이야. 나랑은 장르가 다르다. 나는 나만의 걸 보여줘야지. 아버지가.. 왔으니 잘해야 한다.

그리고, 나보다 세 번째 정도 앞선 참가자의 순서가 왔을 때, 내 멘탈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와 동일한 대본의 내용으로 구연을 하기 시작했던 것.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내가 다니던 영어학원은, 그 시절 엄청나게 유명했던 학원이었다. 지금 구연하려고 한 대본 또한 학원에서 교육 내용으로, 그리고 연극용으로 쓰이고 쓰이고 닳고 닳았던 것. 당연히 다른 참가자가 들고 올거라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그 친구가 선수를 쳐버렸다. 심지어 살짝 각색을 하기까지. 거기에 그냥 구연이라면 밋밋할까봐, 손가락 인형을 들고 와서 맛깔나는 구연을 하기 시작했다. 캐릭터에 따른 적절한 목소리 변조. 얼굴에 만연한 웃음.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는 준비한게 동일한 대본 하나고, 인형도 없고 각색도 없고 웃음도 연습하지 못했다. 그저 기계처럼 읽어줄 수 있을 뿐,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을까.


내 차례가 다가왔고, 아버지는 심지어 나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나는.. 나는..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 순간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기권하는게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갑작스레 실신하는 연기를 선보이는 건 어땠을까. 동일한 대본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퀄리티로 구연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비참할까. 그래. 차라리 안했어야 했는데.



나는, 외운 대본을 다 잊어버렸다. 그저 대본을 쳐다보고 읽기만 했을 뿐. 카메라를 들며 녹화 버튼을 누른 아버지를 그저 곁눈질하며 읽고, 읽고, 읽기만을 반복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수가. 다른 참가자들이 평균 10분씩 소요했던 시간을. 앞서 같은 대본을 들고 구연했던 참가자는 10분이나 소요했던 그 구연 시간을. 나는 3분도 안되어 70%나 읽어버렸다. 그만큼... 그저 연기도 없고 아무런 끊음도 없이 그저 읽기만 했을 뿐. 아버지는.. 미소를 띠며 녹화를 하시던 아버지는.. 점차 웃음을 잃고 비디오 카메라를 내려버렸다.

그리고 내가 차례를 다 마치고 그저 예의상 박수를 받던 찰나에 아버지가 계신 곳을 살폈을 때, 아버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자리를 떠나기 전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난다. 매우 실망스럽고, 음.. 뭐랄까. 구세주의 기적을 기대했으나 구세주가 기적을 행하지 못했을 때 표정을 바라본 신자의 표정이었을까. 그런 종류였던 것 같다.


대회가 끝났음에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서 30분 가량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아야 했던 것 같은데, 그 누구도 나에게 위로 한마디 건내주지 않았다. 덩그러니 놓인 회장에서 그야말로 참담함을 느꼈다. 아침에 어머니가 꼬깃 꼬깃 넣어주신 오천원을 쪼개 공중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마침 동네 고깃집에서 회식을 한다고 한다. 그래도 방문 판매 업계에서 나름 잘나가기 시작하신 어머니. 마찬가지로 기대를 많이 하신 어머니..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고깃집으로 향했다. 택시비는 만원 정도 나와서 어머니가 대신 내주고, 어머니가 어떻게 된 일이냐 묻는다. 나는, 아버지는 바쁜 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먼저 갔다.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아버지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나를 버리고 어딘가로 가버리셨다.라고 말하기엔 집에서 또 한 번 불어닥칠 싸움이 싫었고, 내가 그만큼 못했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너무 싫었다. 그저, 나는 그럭저럭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울지 않은 척, 배고프지 않은 척. 어머니는 나를 이끌고 다른 사원들 앞에서 나를 자랑스레 말씀하셨다. 오늘 영어 스피킹 대회를 치르고 왔다고. 엄마, 나는 모두를 실망시킨 한심스러운 놈이에요. 아, 그래도 나를 제발 위로해주세요. 울고 싶어요. 물론 내가 못했지만, 비록 내가 준비도 철저하지 못해서 한심스럽지만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고 나 혼자서 해쳐온 대회에요. 거기에 대회가 끝나고 그 어떠한 격려도 듣지 못했잖아요. 제발 나를 위로해줘요 엄마..
하지만 울 수 없었다. 그 회식 자리에서 내가 울면, 어머니가 어떻게 될까.

구석에 나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으니, 어머니께서 고기를 시켜주셨다. 도저히 먹을 힘이 나지 않아 그저 티비만 바라보았다. 고깃집 아주머니가 돌려주시는 채널을 한참 바라보고 있을 무렵, 모 프로에 고정되었다. 이 날, 조성모는 얼굴 없는 가수 타이틀을 벗어 던지고 최초로 얼굴을 공개했다. 못생겼기에 얼굴을 못 공개할거야!라는 세간의 루머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말쑥했던 모습. 나도 할말을 잃고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내가 빛을 잃었던 그 날. 아무도 날 위로해주지 않던 그 날. 나는 빛을 잃었고 그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4.
어쩌면, 절룩거리던 아버지에게 나는 하나의 빛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잘 나가던 사람이 한 순간에 빛을 잃자 어두운 집에서 한참을 보냈기에, 나를 계기로 희망을 되찾아 다시금 밖으로 나가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의욕적으로 카메라까지 들고 나섰던 것이었을까.

그 날 이후로 파나소닉 비디오 카메라는 집에서 볼 수 없었고, 아버지는 대회가 있던 다음날 저녁에나 들어오셨다. 그리고 몇주일 후, 경매는 진행되고 우리는 월세 방으로 들어섰다. 빛도 들지 않던 반지하 방. 아버지는 그렇게 월세 방에서도 한참을 바둑만 두시다가, 1년 간 집을 나가셨다. 나는 이 날 이후로 극심한 대인기피증, 대인공포증이 생겼고 무대공포증 또한 생겨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모든게 회복된 건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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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05 05:17
수정 아이콘
숨이 턱 막히네요
16/02/05 09:21
수정 아이콘
아 필력이 엄청나시네요...학부시절에 어떻게 자신감을 회복하셨는지 꼭 공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탕웨이
16/02/05 09:27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필력이 대단하십니다..
16/02/05 09:51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대인기피증 같은 불안, 공포가 회복된 계기도 있을텐데 그 내용도 궁금하네요.
놓치고나니사랑
16/02/05 10:11
수정 아이콘
꺼내기 힘드셨을 얘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력에 감탄하고 많은 생각 끝에 적으신 얘기에 다양한 생각이 듭니다.
heatherangel
16/02/05 11:09
수정 아이콘
5.
이어질 다음 글을 기대합니다. 글 고맙습니다.
16/02/05 12:53
수정 아이콘
추천드립니다.
은때까치
16/02/05 14:03
수정 아이콘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리니시아
16/02/05 16:26
수정 아이콘
덧글보다 추천이... 다음 글이 더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악군
16/02/05 16:27
수정 아이콘
아 정말 심장이 답답해져오네요..잘 읽었습니다.
다크나이트
16/02/05 17:25
수정 아이콘
무대공포증이 쉽사리 치유되는게 아니던데,
그래도 빨리 극복하셨네요.
프로아갤러
16/02/05 17:42
수정 아이콘
와... 잘읽었습니다.
16/02/05 19:23
수정 아이콘
인생은 언제나 지금부터 입니닷!
The Special One
16/02/06 03:53
수정 아이콘
다음글도 있겠죠? 필력에 감탄했습니다.
16/02/06 11:03
수정 아이콘
글이 쑥쑥 읽히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16/02/08 17:09
수정 아이콘
뒤늦게나마 이렇게 감사의 댓글을 달아봅니다. 이렇게 많은 추천은 받아본 적이 없어서 좀 쑥스럽네요. 삶의 굴곡이 제법 있었고 그 중에서도 언젠가는 써봐야지 싶었던 이야기라 조금은 담백하게, 어떻게 보면 자극적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댓글들에 즉각적으로 답변하기가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허심탄회하게 늘어놓은 이야기에 좋은 반응들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든 잘 이겨내고, 잘 버텨내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정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을 인간 같아서. 제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체중 감량에 돌입했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음악 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서 동아리 초기엔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래도 졸업할 때까지 꾸준히 활동해서 좋은 사람들과 연도 맺고, 다양한 경험도 쌓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편입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되니 더욱 더 잘 극복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 역시,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과거의 저를 떨쳐버리기 위해 과거와 직면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당시의 저를 느끼고, 이해하고 용서해보려 합니다. 어두운 글이라 읽으시는 분들이 다소 힘드셨을지 모르겠네요.

다시 한 번, 미숙한 글에 추천 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 오탈자가 제법 있어서 고치려고 하다가.. 글을 쓸때의 그 느낌을 해치기가 싫어서 날 것 그대로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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