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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4/02 02:38:16
Name 좋아요
Subject [일반] 인생이 덕질에 방해된다(2)

"자, 이름은."

"......"

"어디서 왔어."

"......"

"지구에 온 목적이 뭐야."

"....."

"아오 대답 좀 해! 아깐 잘만 말하고 걸어다녔잖아!"


소녀와 남자는 그 이후, 본래장소에서 인적이 조금 더 드문 인근의 벤치 위에서 뜻밖의 청문회를 갖게 되었다. 콜라로 만취가 된 소녀는 어디갔는지 현재는 매우 정신이 또렷한 상태로 곰인형을 상대로 엄중히 추궁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곰인형에게 이렇게 추궁하는 것이 이미 제정신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일이 더 커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모르쇠로 일관했다. 티비 속에서나 보던 묵비권 행사를 본인보다 한참 어린, 그리고 현재의 자신보다 한참 큰 소녀를 상대로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는 '그저 이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평범한 곰인형인 척했다. 물론, 이미 누가봐도 틀림없이 그는 곰인형이었지만.


"흠... 진짜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곰인형에게 있어 미란다의 원칙이 얼마나 소중한지야 알바 아닌 소녀는 그를 있는 힘껏 째려보았다. 그럼에도 곰인형인 그가 액션을 취할 태세를 보이지 않자 잠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결심히 선 소녀는,


"이래도 가만히 있나 보자!"

"아 하지마 진짜 하지마! 아하하하!! 아 하지마~~!!!"


곰인형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간지럽혔다.


"호오- 역시 연기였다 이거지?"

"아하하하 그래 됐냐 이제 그만 좀해! 아하하하!!"


남자는 도대체 그저 망자의 영혼이 탑재되어있을 뿐인 보통 곰인형에게 간지러움을 느낄 수 있는 기능을 탑재되어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찬찬히 그 경위를 따지기엔 그의 몸은 간지러움에 매우 민감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뒤, 정신을 못차리도록 최선을 다해 원하는 답을 이끌어낸 소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곰희롱을 잠정 중단했다.


"아 진짜 초면에 왜이러는거야 도대체. 그냥 조용히 사라져주겠다는 사람.. 아니 곰 붙잡고 참."


남자는 간지럽힘의 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양팔을 파닥이고, 몸통은 좌우로 흔들흔들거리면서 말했다.


"너 같으면 눈앞에서 곰인형이 진짜로 사람처럼 움직이고, 말하고, 내가 한 말을 이해하면서 대답하는데 그걸 가만히 놔두겠니?"

"거 참 아까전까지 콜라 한캔 땃다고 헤롱헤롱거리던 사람치곤 엄청 합리적으로 대답하시네."

"누.. 누가 헤롱헤롱거렸다는거야! 여튼, 걔다가 나를 놀라게 한 값까지 있으니까. 톡톡히 보상해줘야 된다구?"


소녀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두번 끄덕였다. 이에 남자는 본인이 왜 놀랄 상황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 따지고 싶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하- 보상이라. 하지만 보시다시피 난 가진거라곤 이 솜털덩어리 밖에 없는 곰탱이일 뿐인데 뭐로 보상받으시려구?"

"음......"


소녀는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왼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말을 내뱉긴 했어도 딱히 생각해둔 것은 없구나하며 짐작했다. 첫 만남부터 정신이 없었기에 다소 진정이 된 지금에서야 남자는 소녀의 이목구비와 몸태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트레이닝복차림에 맨얼굴이기는 하나 확실히 '얼굴과 몸매를 남에게 보이는 것으로 먹고 사는 직업'을 지향하고 단련해온 친구가 맞기는 하구나-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만, 과히 예쁜 얼굴이기는 하나 좀 찐빵형 얼굴이구나-라는 감상을 갖게 되던차, 소녀가 말문을 열었다.


"얘기 좀 같이 해."

"...잉?"


업무상의 대화를 제외하면 여자랑 이렇게까지 대화한 것이 족히 강산이 한번 변할 정도의 수준인 그였다. 소녀의 제안은 푼돈 하나 안들정도의 소박한 것이었지만, 남자로서는 적잖히 당황스러웠다. 만약 본인의 곰밍아웃 전에 본 소녀의 독백과 눈물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도의 흔한 다단계영업을 떠올렸을 것이다.


"뭘 그리 놀래. 감히 멋대로 그냥 인형인척, 모르는 척하면서 여자의 눈물 본거까지 생각하면 감사히 여겨야 되는거 아니야?"

“아... 예- 알겠습니다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녀는 생각보다 필름이 끊기지 않는 타입이라고(물론 콜라한캔 땃다고 필름이 끊긴다면 그것 또한 진기명기 수준이지만), 또 의외의 부분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 추리를 하는 타입구나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백기를 들었다.


“그나저나 의외네.”

“뭐가?”


소녀는 안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떳다.


“이렇게 생겨먹은 말하고 움직이는 곰탱이한테 할 부탁이라면, 도뭐시기뭐시기몽한테처럼 만능아이템을 꺼내달라고 하거나, 너를 천연기념물로 만들어줄테니까 나를 인기아이돌로 만들어줘라고 하든가 뭐 그럴줄 알았거든.”

“뭐, 얘기하면 들어줄 수 있는거야?”

“그럴리가.”


소녀는 못해줄거면서 괜한 소리한다는 표정을 잠시 지은 뒤, 하천를 향해 자세를 돌렸다. 상당히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비추는 물길은 서울의 밤하늘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무수한 반짝임들을 그 모습 그대로 반사하며 아름다움을 뽐냈다. 같은 하늘의 같은 빛을 받는 소녀의 모습도 그와 같이 아름다웠다.


“속은 상하지, 힘은 빠지지, 근데 친구고 엄마, 아빠한테고 뭐라 말할 수도 없지. 엄청 답답했거든.”

“하긴, 그럴 수 있겠네.”

“나름 나 아이돌하겠다고 어려서부터 준비했거든. 잘한다고 칭찬도 좀 들었고. 근데, 칭찬받는거랑 선택받는건 다르더라구. 데뷔조에 들어가는 것도 시작에 불과할텐데 그 시작지점에조차 서지 못하네."

"원래 착하고 좋은 오빠랑 내가 사귈 남자친구랑은 다른 법이니까."

"크... 아이돌 지망생이니까 이런자리라도 함부로 말은 못하겠지만, 반박못하는 내가 슬프다"


소녀와 남자는 둘다 하천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굳이 서로의 표정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오밤 중의 공원을 무대삼아 춤으로 다이어트 하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여튼 근데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해도 되겠어?"

"해도 되는진 모르겠는데- 그냥 하고 싶네. 왜일까?"

"이거 맨날 상담역만 하다가 정작 본인은 아는 여자사람이랑 썸도 한번 성사 안되는 과 남자선배 역할하는 기분이구만."

"곰인형 주제에 너무 그런거 디테일하게 아는거 아니야?"

"인생을 아는데에는 사람이고 곰인형이고가 관계 없는거라고. 이분이 뭘 모르시네."

"하이고 그래요. 차암~ 잘나셨네~~."

"아악 하지마!  아파! 하지마!!"


소녀는 얄밉다는 표정으로 곰인형머리의 양 관자놀에 해당하는 부분을 양주먹의 검지부분으로 짓이겼다. 남자는 다시한번 곰인형한테 이리 생생하게 통각을 심어준 설계자를 원망하며 '이과망했으면'이라고 속으로 강하게 외쳤다.


“아휴~ 이런 성질로 아이돌 해먹겠어?”


응징의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곧바로 반항했다.


“무슨 소리야 나 평소엔 완전 얌전하거든? 이건 엄청 특별취급이야.”

“괴롭히는 미소녀한테 끌려다니는걸 좋다고 열광하던 시절도 벌써 10여년전이거든?”

“그러니깐 그런걸 어떻게 그렇게 잘아는거야?”

“뭐 그걸 말해 뭐해. 이미 나는 엔딩을 봐버렸는데.”


소녀가 이해를 못하겠단 표정을 짓는 사이, 남자는 한쪽 무릎을 올려 팔꿈치를 받치고 턱을 괴면서 말했다. 보통 남자라도 잘생기든 멋있든 해야 포스가 있는 자세일터인데 곰인형의 모습으로 그런 자세를 취하니 그것은 마치 헐리우드발 동삼파괴 코미디영화의 한장면과 같은 모습과도 같다고 말할만 하였다.


“이러나저러나 원래 하던 얘기로 돌아가자면, 결국 ‘너의 최선’이라고 해도 프로 데뷔한 친구들은 둘째치고 세상 천지에 있는 여자연습생들 다 씹어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닐꺼 아니야.”


귀여운 곰인형의 외형에 걸맞게 목소리가 세팅되어있기는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진지한 톤으로 소녀에게 말했다.


“......그야 그렇지.”

“결국 누가 되었든 너한테 딱잘라 이야기하기 힘들 뿐이지, 지금까지의 고통, 불안함, 지루함 같은걸 끌어안고 다시 지금 이 길로 가느냐, 아니면 재능과 운이 없다는걸 인정하고 공부를 하든 다른 길을 찾느냐의 문제인거고.”

“응, 그렇지. 그렇긴 한데….”

“한데?”

“왜 이렇게 단호해?”


소녀는 약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꿀바른 소리로 남 희망차게 절벽으로 굴러떨어뜨리는 취미는 없으니까.”

“.......”


애초에 남자가 소녀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입에 발린 소리로 잘될거라며 토닥여주지도 못할 것이며, 그렇다고 인생의 지침이 될만한 명언을 전해줄수도 없을 것이며,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더더욱이나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저지해서 그가 입을 떼게 된 이상,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달콤하지 않은 이야기일 수 밖에.


“뭐, 근데 사족일지는 모르겠지만.”

“응?”

“선택받지 못한다고 해서 잘못을 했거나, 잘못되어 있거나 한건 아니야. 그냥 ‘선택받지 못한 채로 있어서는’ 답이 없으니깐 다들 발버둥치는거지.”

“잘못된게 아니다….”

“지금 한참 좋은 기업 다니면서 월급에 상여금 따박따박 받는 사람 중에도 자소서 100장 이상 써보고 그 수만큼 떨어져 본 사람들도 꽤 있으니까. 오히려 선택받지 못한다는 ‘현상’은 꽤 자연스러운거야.”

“흐음….”


남자는 소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비록 곰인형의 눈이기는 하나, 소녀는 그 눈을 보며 그 말에 그 어떤 더함이나 뺌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뒤, 입을 뗏다.


“다만.”

“다만?”

“너는 그 ‘자연스러움’에 되도록 자주 예외이길 바랄게. 달리 해줄 말이 그거 밖에 없다.”


그것이 달리 살아서 이룬 것도 없고, 성공한 사람들이 남에게 어떻게 힘을 불어넣는지 알지 못하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있지 곰아.”

“왜?”

“고마워.”


소녀는 이 짧음 만남 안에서 보여준 가장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 큰눈이 사라질 정도로 짓는 반달모양의 눈웃음에 남자는 이런 꼴로라도 이승에 내려온 보람이 없지는 않구나-라고 느끼게 되었다. 당장 자신의 진정한 소원이 뭔지, 그걸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남자는 오늘하루만은 내려놓기로 했다. 이미 시간은 새롭게 펼쳐질 내일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지만.


"저기 곰아."

"왜, 더 할말 있어?"

"저기서 같이 춤추자!"

"잉?"


소녀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은 한참 즐겁게 춤사위를 펼치고 있는 아줌마 그룹을 향했다. 남자는 소녀가 가리키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자마자 바로 질색했다.


"싫어! 내가 왜!"

"그렇게 나왔단 말이지~."

"그렇게 나왔다! 어쩔래?"

"에잇!"


극구 거부하는 남자를 소녀는 강제로 품에 안고 좌우로 흥겹게 휘적이는 아주머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야 이게 무슨 짓이야!"

"내 이름은 야!가 아니거든?"


소녀의 막무가내에 항의하는 한편, 남자는 왼쪽으로 돌며 흔들흔들, 오른쪽으로 돌며 흔들흔들, 몸이 가는데로 양팔을 휘적이는 이 댄스를 다이어트 댄스라고 봐야할지 의심했다. 분명 공원을 울리는 경쾌한 음악에 더할나위 없는 춤이기는 했지만 곰곰히 보아하니 이 춤은 그냥 어느 음악을 틀어놔도 얼추는 맞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 기묘한 광경에 함께 동화되고야 말았다.


이 춤은 마치...


콩댄스


같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이렇게 춤추고, 가끔 노래하면 특별한 사람이 된 것같았어."


춤을 추는 소녀는 완전히 주변의 춤과 음악에 심취해버린 품안의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덕에 남자는 정신이 들었다. 다행히 모두다 춤의 흥에 심취한 사이인지라 이를 이상하게 보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저 듣고만 있기로 했다.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한 곳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닮아간다고, 나도 그래서 곧 특별해질거라고 생각했어."


남자의 묵묵부답에도 소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근데 몇년사이, '특별함성분'이 팍팍 떨어져서 난 그런 사람이 아니구나. 나한텐 특별함이 없고,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해버렸거든."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기에,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이루어감에 따라 당연히
그 특별함은 증명될 것이고. 그곳에서 환하고 웃으며 빛날 것이라고 달리 근거없이 믿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단지 현실은 그런 꿈빛 아름다움에 혹독한 채찍을 가하기도 하고, 이야기속에서라면 '이쯤되면 뭔가가 되겠지'싶었던 순간에도 손쉽게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존재'에게 시련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 팍!하고 누가 봐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서. 이제 특별함성분 충전 완전히 만땅이야!"


그 말에 자신과의 만남이 뭔가 소녀에게 바람을 넣은게 아닐까 싶어 걱정한 그였지만, '언제가 되도 소녀의 마음에 뜨문없는 희망은 불 것이고, 의미없는 절망도 곧잘 닥쳐올 것이며 그것을 반복하며 할 수 있는한 높은 타협선을 찾는 것 또한 인생이다'라며 남자는 그렇게 자신을 정당화했다. 이미 만난 것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그저 소녀가 얻었다는 그 성분이 미래의 좋은 일을 위해 쓰이길, 그는 그렇게 바랄 따름이었다.


"햐~ 춤 한번 자알 췄다!"


이후에도 몇십분을 리듬에 맞춰 신나게 춤춘 소녀는 해당프로그램이 끝나고서야 인적이 없는 자전거도로를 따라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소녀는 춤출 때처럼 계속 곰인형을 안고 가고 싶었지만 남자 쪽에서 극구 반대하였으므로, 주변에 인적이 느껴지면 잠시 소녀의 도움을 받는 정도로 합의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아~ 나는 아직도 머리가 빙글빙글 거려."


소녀와 함께 같이 걷고 있는 남자는 이마를 오른손으로 집으며 빙글거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저승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첫날의 수다상대가 되어준 소녀를 위해 집인근까지는 보디가드 아닌 보디가드를 해줄 참인 그였지만,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소녀의 보호를 받게 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되었다.  


"참! 아까 내 이름이 야!가 아니라고 했었지?"

"그랬던가 어쨌던가."


소녀는 등뒤로 깍지를 끼며, 자신 옆에서 걷고 있는 그를 보고 말을 걸었다. 무슨 짓을 해도 사람의 보폭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를 위해 그녀는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내 이름은 하나비! 창창한 열여덟살이야. 뭐 데뷔하게 되면 본명을 쓰게 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억해둬?"


그나이면 아직 연습생으로도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닌데 그렇게 콜라캔 따서 취할정도로 좌절했나 싶었지만, 남자는 이내 '자신의 일이라면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하며 굳이 그걸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려그려 알겠사옵니다."


남자는 왼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뭐야 대답이 시원찮은데?"

"아니야, 완전 일백프로레알 붕성포효포도 날려버릴 정도로 진심이야."

"흐음~ 또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어."

"알아주셔서 망극하옵니다 전하."

"알았으면 됐다. 엣헴~."


소녀는 대단히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표정을 지으며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참, 네 이름은 뭐야?"

"..내 이름?"


남자는 생전의 이름을 이야기하자니 뭔가 너무 웃기다고 생각하면서, 어차피 집근처까지만 바래다주고 헤어질 소녀에게 적당히
이야기할 이름을 생각하게 되었다.


'곰.. 곰인형이라 곰.. 곰..... 곰.... 곰곰곰곰곰곰....곰곰곰곰곰곰..... 너 땜에 하루 종일 고민하지만 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어 난. 아 이게 아니지 참... 흠... 곰이라...'


"클러, 클러라고 불러."

"클러? 그렇게 귀엽진 않은 이름이네."

"주인없는 곰인형 이름이 귀여워 봐야 뭣하겠어."

"에이~ 그런게 어딨어."


소녀는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바로 몇시간전까지 제법 시무룩했던 모습은 어디갔는지 모를정도로 소녀의 얼굴은 자신을 비추는 달처럼 밝았다.


"어쨌든, 서로 절대 잊지 않기다? 약속!"

"참 별걸다... 알겠다 알았어. 약속."


곰인형의 하드웨어를 잠시 망각한 소녀는 약지를 끼우려다 남자에게 한대 통!하고 맞았다. 몇초간 고민의 시간을 가진 소녀는 서로의 주먹끼리 툭치는걸로 도장, 서로의 손바닥을 번갈아가며 손가락 부분으로 문지르는걸로 사인,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대는걸로 복사- 하는 것으로 이 별거 없는 약속식을 거행했다.


"자 됐지? 너 집에 늦겠다. 얼른 가자."

"응 그래! 어- 잠깐만?"


트레이닝복 바지에 있던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소녀는 대화를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아, 응 엄마? 나 지금 집에 들어가고 있어. 금방 갈거야."


누가봐도 어머니의 전화를 반갑게 맞이하는게 느껴지는 소녀의 모습에 남자는 훈훈함을 느꼈다. 비록, 본인이 말하는 '특별함'하고는 거리가 멀지언정, 누구나 누릴 수는 없는 '평범함'을 갖고는 있구나 싶어 이 친구는 그래도 언제든지 도전할 수 있다고 남자는 그렇게 여겼다. 한편으로 집에 평소에 전화나 좀 자주할걸 후회도 들었지만 눈 앞의 아이에게 안좋은 생각이 옮길까 싶어 휘휘 팔을 휘저으며 생각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뭐.. 지노엔터테인먼트에서 나를? 진짜? 아 응.. 알겠어. 일단 얼른 들어갈게."


소녀는 통화를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안그래도 큰눈을 가진 소녀는 오늘 보여준 눈 중 가장 큰 동공을 선보이며 운을 뗏다.


"지노엔터에서 나 오디션보러 오라고 연락 왔데.... 그것도 이번주....."

"뭐? 그거 사기 아니야?"

"아니야! 우리 실용음악학원 선생님이 엄마한테 연락했데. 사기일리는 없어."

"뭐 그렇다면 안심인데.. 굳이 왜 너한테 직접 얘기안하고 어머니한테?"

"그러게? 음? 잠깐... 아......"


소녀는 폰을 보며 작은 탄성을 냈다. 이유는 대단히 간단했다. 선생님은 소녀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 시간은 그녀가 한참 춤을 추고 있을 시간이었다. 몇번을 전화해도 춤과 분위기에 취한 소녀(물론 선생 쪽이 이를 알턱은 없었다)가 진동을 못듣자 부모님께라도 연락드리자 한 것이었고, 그내용을 이제사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된거구만. 네가 나빳네."

"응 내가 나빳네."


소녀는 스스로 자기 머리를 한대 쥐어박았다. 그렇게 데뷔가 하고 싶다면서 그런 중요한 전화도 못받았으니, 스스로 한대 때리고 싶은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나 근데....."

"응?"

"아까 먹은 콜라... 그거 제로칼로리 아니었는데....."

"근데?"

"아아아아아앙!! 안되겠어! 집에 갈 때까지 뛰어야겠다!!!"


소녀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공원에서 그렇게 춤을 췄건만 일상이 다이어트인 소녀에게 코 앞에 오디션이 있는 상태에서 먹은 보통 콜라 한캔은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았다. 그리 집까지 먼거리는 아니었으나 소녀는 그 사이에라도 칼로리를 소비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세웠다.


"아 그래? 바래다줄 생각이었는데 네가 뛰어버리면 내가 뭐 따라잡을 수가 없지.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잘가라."

"음......."


소녀는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남자는 이제 나름 '오늘이라는 이야기의 결론'이 난 마당에 얼른 집에 뛰어가든 걸어가든 할 것이지 왜 저러나 생각하며 소녀의 시선과 마주했다. 물론 남자의 생각은 지극히 타당했지만, 한가지 다른게 있었다.


"곰아! 너 나랑 같이가!"


바로 오늘이라는 이야기의 결론은 내일로도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남일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을 포함해서.


"엥...? 무슨소리야? 내가 왜!!"

"어차피 주인 없는 곰인형이라며! 자 이리와!!"


소녀는 남자를 낚아채듯이 품에 안고 집을 향해 있는 힘껏 뛰기 시작했다.


"야 이거 뭐야? 이거 납치라고 납치!!"

"어차피 지낼 곳도 없을거 아니야. 하려면 감사를 하라구? 클.러!"

"아악!! 그 이름으로 부르지마!!!"

"본인이 자기 이름이라고 해놓고선? 내가 아주 그냥 잔뜩 불러줄테니까!"

"안돼!! 그만둬!!!"


남자의 외침은 통하지 않았고, 소녀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을 비추는 달빛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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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곰님처럼 1일 1연재 하고 싶는데, 지금의 스탯으로는 주에 한두개 쓰는거도 간신히네요. 올라라 글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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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바트론
16/04/02 17:07
수정 아이콘
잘 보고 있습니다 :)
좋아요
16/04/02 17:26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꾸벅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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