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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6/08 21:58:29
Name 유유히
Subject [일반] 아가씨 다르게 보기 - 죄, 그리고 죄값.
[주의. 아래의 내용은 2016년작 영화 "아가씨"에 대한,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들에 대한 결정적인, 매우 결정적인 내용 누설들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예전' 영화들의 팬입니다. 헐리웃 데뷔작이었던 '스토커'나, 그 이전에 송강호의 열연이 돋보였던 '박쥐' 등 최근의 작품들은 제게 깊이있게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제 영화적 심미안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박찬욱 감독이 변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전자의 이유겠지요.

이 영화는 박찬욱 영화답지 않습니다. 혹자들은 음란한 성교 장면이나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잔인한 장면 등을 보며 박찬욱답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박찬욱답지 않습니다. (사족 : 사실 '복수는 나의 것'에 비하면 고판돌이 손가락 잘리는 것 정도는 웃음 나오는 수준입니다.) 그 이유는, '죄'와 '죄값'의 문제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대표작이라 하면 흔히 복수 3부작을 꼽습니다. 그리고 이 복수 3부작을 관통하는 주된 주제는 "죄"와 "죄값"입니다. 그 주제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대사가 아래 이금자의 대사입니다.

[누구나 사람은 실수를 해.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하는 거야. 알아?] - 이금자. '친절한 금자씨' 중

돈을 위해 아이를 유괴한 '류'와 '영미'는, 비록 그것이 착한 유괴(?)였음에도 결국 죽습니다. 처참하게. (복수는 나의 것) 세치 혀로 이수아를 죽인 오대수는 그 혀를 제 손으로 자르게 되며, 근친간의 사랑을 소문내고 다녔던 그는 바로 자신의 딸을 사랑하게 됩니다. (올드보이) 수많은 아이들을 유괴 살인하였던 백선생은, 바로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쓰던 가위에 미간을 관통당합니다. (친절한 금자씨)

물론 위의 굵직한 '죄'와 '죄값'의 연결고리 외에도, 주인공을 위시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저지르는 죄와, 그 죄값의 톱니바퀴는 정말이지 치밀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 박찬욱 감독 영화를 볼 때면, 누군가가 영화상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듯 하면 "어이구, 쟤는 또 어떻게 당할까" 생각하면서 관람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비록 단순하긴 하지만 꽤나 재미있는 영화 관람 포인트였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죄에는 벌, A에는 B 함수식의 단순한 그림이 옳은 것도 아니고, 꼭 영화가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이들에게 주는 동화에나 어울립니다. 제가 굳이 '죄'의 키워드로 이 영화를 보려고 하는 것은, "죄-죄값"의 일차함수적 연결이 정답이라는 뜻이 아니라, 과거 박찬욱 감독이 만들어왔던 이야기이자 끊임없이 주장해왔던 내용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의 경우는 좀 이상합니다. 죄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공유하며, 뚜렷이 나타나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런데 그 죄값은 더욱 이상합니다.

1. 숙희의 경우



장물아비로 살았으며, 백작과 함께 아가씨를 등쳐먹고 패물을 가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어버고 백작을 히데꼬와 함께 등쳐먹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딱히 눈에 띄는 죄를 저지르는 것 같진 않습니다. 애초에 사악한 마음으로 대저택에 들어왔으나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다음에는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멋지게 성공해서 아가씨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일단 이 개연성을 좀 따져보면 이상한 구석이 꽤 있는데, 이는 히데꼬의 경우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2. 히데꼬의 경우



히데꼬, 아가씨는 처음에 숙희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을 작정이었다가 숙희의 골무의 손길(;)에 반해버렸는지 (쇠골무로 튀어나온 이를 갈아주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인 민간요법이었나 봅니다. 아직도 쓰이는진 모르겠지만..) 야설 낭독회(?)에서 배운 지식으로 한수 가르쳐 주려던 숙희를 리드해버린(;) 후 숙희에게 푹 빠져버립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 영화의 명대사. [타고나셨나 봐요 아가씨!] 그리고 숙희와 백작과 도주한 후, 숙희를 정신병원에, 아마도 합의 하에 위장 입원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아무리 장물아비 식구들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장물아비 식구들이 어떻게 일본에 넘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뭐 어떻게든 히데꼬의 도움이 있었다고 치고..) 의외로 병원의 경비가 삼엄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면 숙희가 탈출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 가정을 생각해 보면 약간 섬뜩해집니다. 히데꼬는 숙희가 탈출하건 말건 삶에 큰 지장이 없습니다. 이미 자유는 얻었고, 유일한 걱정거리인 이모부의 추적은 숙희가 정신병원에서 죽으면 히데꼬로서 죽은 것이니 염려할 바 없습니다. 백작은 자신이 받은 아편으로 잠재워버리면-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재산 역시 나눌 필요 없이 온전히 자신의 것입니다. 결국 숙희의 정신병원 감금은 아무리 좋게 봐야 백작을 완전히 속이기 위한 것인데, 온전히 숙희만 Risk Taking 하는 행동입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아가씨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는, 굳이 같이 평생을 보내는 것 외에도 정신병원에 대신 들어가도 됩니다.

3. 백작의 경우



고판돌.. 아니  백작은 처음부터 숙희를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히데꼬에게 자유를 주는 대가로 재산을 나누기로 했으며, 숙희를 히데꼬로써 정신병원에 집어넣는 목표 달성 후에도 죄책감 하나 없이 '이 세계에서 순진한 건 죄악'이라는 대놓고 복선스러운 대사를 남긴 후, 자지를 지키고 죽습니다. (;) 자신의 말마따나 굉장히 순진한 캐릭터인데, 애초에 자신이 당했던 아편을 아가씨에게 넘긴 게 바로 백작이었습니다. 그것도 이모부에게 끌려갈 때 편히 죽으라고 아가씨에게 주었던 아편을 마우스 투 마우스로 마시고 벌러덩 넘어간 후 자신이 이모부에게 끌려갑니다. 어찌 보면 박찬욱식 복수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아무리 봐도 선의가 배신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대체 왜 백작은 이렇게 죽어야만 했을까요? 뭐, 숙희를 죽음이나 다름없는 사지로 몰아넣으려 했으니 그 벌을 받은 것일까요. 하지만 그건 히데꼬도 마찬가지잖아요. 굳이 이모부와 동귀어진할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차 안에서 수은담배를 피우고 자살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초야도 못 치른 아내를 위해서 이모부를 제거해 주기 위함인지.. 굳이 손가락 다 잘리고 죽습니다. 만약에 백작이 아니었다면 숙희와 히데꼬의 도주는 언젠가 끝이 명확히 보이는 배드 엔딩이었을 것입니다.

뭐 가장 납득이 가는 설명은, 결국 백작은, 히데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처음부터 히데꼬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서.

[네 이놈! 히데꼬는 나의 아내인데 어찌 남에게 초야 이야기를 한단 말이냐!]

결국 백작은 아나키스트 이후 일제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라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그렇게 보면 이 영화 최대의 피해자라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세 인물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신했거나, 배신하려 했습니다. 숙희는 히데꼬를 배신하려다 백작을 배신했습니다. 히데꼬는 숙희를 배신하려다 백작을 배신했습니다. 백작은 숙희를 배신하려다 숙희와 히데꼬에 배신당했습니다. 이 환상적인 삼각관계의 결론은 백작이 이모부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뭔가 이상한 결론입니다.
[결국 백작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히데꼬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이는 아무리 보아도 일방적인 시혜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점은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로 볼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4. 이모부의 경우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악역'입니다. 자신의 변태적인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낭독회를 열면서 자신의 눈에 거슬리면 어린아이의 손등을 방울로 내려찍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자의 죄악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영화상에서 나타나기로는, 공식적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히데꼬의 이모(문소리 역, 작중 시점에서 고인. 이름은 안 나옵니다)가 사실은 자살이 아닌 것으로 강력하게 암시가 됩니다. 어린 히데꼬가 이모부에게 그 사실을 묻자, 이모부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는 대신 "지하실 구경 좀 할래?" 라고 대답합니다. 그 순간 이 인물은 히데꼬 이모의 살인범으로 거의 확정적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은, 뜬금없이 백작과 동귀어진하게 됩니다. 숙희에게 자신의 피땀어린 컬렉션을 다 찢기긴 했지만, 관객 입장에서 볼 때 그가 그렇게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 같진 않습니다. 결국 살인까지 한 진짜 나쁜 놈인 이모부는 그 죄에 비해 너무나도 평안하게 존엄까지 지키며 죽고, 그 한편에선 백작이 손가락을 다 잘린 채 처참히 죽어갑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이 장면이 공주를 구하고 나서 용과 함께 죽어가는 기사로 보였습니다.



사실,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죄와 죄값이, 어찌 보면 말이 된다고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작중에 1부 종료 시점에서 숙희의 나레이션이 있습니다.

[우리 아가씨 이즈미 히데꼬, 그년은 원래부터 나쁜 년이었다.]

이 나레이션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숙희가 정신병원에 갇히는 시점에서 숙희는 아가씨와 계획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 나레이션은 앞뒤가 안 맞습니다. 자신도 동의한 계획일 테니까요. 단 하나 앞뒤가 맞는 경우는, 그 대사가 유람선에서의 엔딩, 그 뒤 시점일 경우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그 둘은 어떤 식으로든, 죄값을 치르기는 하는 셈이 됩니다.

..혹은, 숙희만 치를지도요. 만약 그렇다면 아가씨는, 정말 '나쁜 년'입니다.


P.S.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아선 안 되는 정정훈 촬영감독과 류영희 미술감독. 이 두분을 모르셨던 분들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이 두 분을 눈여겨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세계 최고로 꼽는 두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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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rschach
16/06/08 22:14
수정 아이콘
숙희와 히데코의 경우 서로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손을 잡았으니 흔히(?) 도달하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지은 것 같진 않습니다. 물론 나쁜 마음이야 먹었었죠.
숙희를 결국 정신병원에 넣는 과정 까지 실행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백작과 함께 계획했던 것이 그 과정 까지이기도 하고 히데코가 정신병원에 갔다는 사실 자체가 백작한테 필요하기도 했을테니 계획변경을 시도하면 일이 꼬일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으니까요. 최종적으로 여권을 위조하고 중국으로 가는 것 까지 다 계획해서 장물아비 식구들도 부르고 했던 것 같아요. 물론 숙희의 리스크가 너무 크긴 했다고 봅니다.

반면 백작의 경우 결국 돈을 얻기 위해 (백작의 시점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숙희를 정신병원에 보내고, 어쩌면 이 부분이 백작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를 히데코의 '숙희가 불쌍하지 않냐'는 질문에도 불쌍하지 않다고 대답을 했죠.
그리고 저도 백작은 히데코를 진짜 사랑했었던 것으로 봤습니다. 본인이 그 사실을 깨달은 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죽는 그 순간에는 낭독회 때 부터 마음이 넘어갔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했던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정신병원 앞에서의 숙희의 대사는, 그냥 이후 전개의 흥미유발을 위해 그냥 넣은 대사라고 봅니다. 일종의 약한 낚시라고 볼 수도 있고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물론 숙희 본인도 히데코를 속이러 들어갔지만 히데코도 숙희를 자기 대신에 정신병원에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숙희를 하녀로 들인거니까 최초의 그 시점엔 '원래 나쁜 년'이 맞기도 하고요.
마스터충달
16/06/08 22:59
수정 아이콘
숙희가 위험을 감수하는 개연성은 한 단어로 정리됩니다. '사랑'. 숙희의 정신병원행도, 그 이전에 히데코의 탈출도 굉장히 위험한 일이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합니다. 복수 3부작이 죄-죄값에 관한 이야기라면 <아가씨>는 두 여인의 로맨스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사랑은 논리적으로 오류라는 말도 있죠. '왜 저렇게 이해안되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 숙희ㅠ.ㅠ)

백작에 대한 평은 많이 공감합니다. 그의 활약은 작지 않고, 무엇보다 마지막에 나름 정의로운 모습까지 보이죠. 무엇보다 히데코의 복수를 '대신'해주면서 히데코의 주체성에도 흠이 생깁니다. 박찬욱은 이 영화의 마지막에 두 여인에 의해 남성성이 전복되기를 바란다 했지만, 마무리 때문에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유유히
16/06/09 00:06
수정 아이콘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굳이 숙희가 정신병원까지 안 들어가도, 백작을 제압하는 방법-즉 아편을 먹이는 방법은 무궁무진해 보입니다. 위장결혼 후에 머물렀던 여관에서도 가능했습니다. 오히려 숙희의 협조가 가능하면 더 좋겠죠. 실제 썼던 방법인 유혹하기 외에도, 식사에 몰래 타기, 잘 때 먹이기, 기타 등등.. 굳이 가치를 찾자면 백작의 방심 유도인데, 그 방심에 거는 것은 숙희의 목숨입니다. 이건 밸런스가 맞지 않아요. 제가 히데꼬였다면, 설사 숙희가 죽어도 하겠다고 해도 절대 수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차라리 백작을 설득하든(백작이 숙희를 살린다 해서 본인이 손해보거나 달라지는 사실은 없습니다.), 아니면 여관에서 백작이 나돌아다니는 틈을 타 도망치든 하는 게 낫습니다. 최소한 숙희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보다는..

그래서 다르게 보기 입니다. 두 사람의 로맨스에 딴지 걸어 보았습니다. 흐흐
마스터충달
16/06/09 00:16
수정 아이콘
거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숙희를 정신병원에 보낸 이유는 히데코의 위장 죽음이었는데 마지막에 편지까지 같이 보냈어서 말이죠... 확실히 의미없는 짓거리가 되었네요;;
보드라운살결
16/06/09 00:01
수정 아이콘
박찬욱 감독덕에 미장센이라는 단어를 처음알았고 '박쥐'에서는 심지어 감동했지만 이번 영화는 참 실망이었네요. 아가씨는 마치 야설로부터 도망쳐서 야동 찍힌 느낌이랄까... 마치 인셉션처럼 주인공은 아직 저택에 갇혀있는듯한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어요.
16/06/09 15:17
수정 아이콘
낭독회의 야설로 인해 남자를 사랑할수 없게된 여자가 자유와 사랑을 동시에 얻게 된 이야기.. 행복한 엔딩을 맞은 델마와 루이스.. 가질수 없는것을 갈망했지만 결국 모든것을 잃어버린 순정마초의 낭만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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